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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5. 묵상글 ( 사순 제3주간 수요일. - 최종목적지는 사랑입니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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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5. 사순 제3주간 수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최종목적지는 사랑입니다
율법은 삶의 규범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의 공동체 생활을 위해서 하느님께서 주신 성스러운 법령입니다. 그런데 유다인들의 율법은 613개 조항에 이릅니다. 그 가운데 248개 조항은 명령, 365개 조항은 금령이었습니다. 이것은 거슬러 올라가면 십계명이 되고, 더 줄이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됩니다. 한 마디로 줄이면 ‘사랑’입니다. 그러기에 무시하거나 소용이 없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 의미를 알고 지켜야 합니다. 정신을 알고 지키면 삶이 풍요로워집니다. 그러나 율법이라는 도구를 절대시하면 하느님과의 관계도 멀어지고 사람과의 관계도 형식화됩니다. 따라서 껍데기만을 지킬 것이 아니라 내용을 지켜야 합니다. 율법의 완성은 사랑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사랑자체이십니다. 우리가 가야 할 최종목적지도 사랑입니다. 사랑이신 하느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근본정신을 사랑으로 요약하셨습니다. 율법의 완성은 계명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계명 준수만으로는 율법이 완성될 수 없습니다. 예를 들면, 교통법규를 지키는 것도 법이니까 지킨다는 것보다 다른 사람의 안전과 공공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나의 생명을 지키는 차원에서 지킨다면 그것은 큰 사랑의 행위입니다. 겉으로 드러난 것에 더 신경을 쓰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지만 사소한 것이라고 소홀히 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뜻은 예수님을 통하여 완성되지만 동시에 우리 안에서 완성되어가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5,19).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인간의 말은 덧없이 지나가고 사라지지만 예수님을 통하여 하신 하느님의 말씀은 영원히 남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말씀이며 최종적인 하느님 뜻의 계시자이기에 우리의 길이요 진리이십니다.” 나는 과연 예수님 안에서 언행일치의 삶을 살고 있는가? 지금 마음을 어디에 두고 사는가를 점검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앞에서 결정한 것은 미루지 말고 그분의 뜻대로 실천하시고 가장 사소한 것이 가장 중요할 수 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큰사람은 행동으로 말합니다.
성경 말씀을 기억해 봅니다.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기 좋아하는 자들처럼 눈가림으로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하느님의 뜻을 진심으로 실행하십시오”(에페6,6). 여러분은 “말씀을 실행하는 사람이 되십시오.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야고1,22).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다(마르12,32-33). 는 것을 잊지 말고, 사랑을 실천하여 율법을 완성하시기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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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5. 사순 제3주간 수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큰 사랑, 작은 사랑
오늘 신명기에서 모세는 이스라엘만큼 주님께서 가까이 계신 민족이 있냐고
자기들이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시는 민족이 있냐고 백성에게 말합니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신을 모신 위대한 민족이 또 어디에 있느냐?”
그런데 이것이 주님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만 가까이 계신다는 뜻이겠습니까?
우리에게는 가까이 계시는 분이 아니라는 뜻이겠습니까?
그럴 리 없고 그러실 분이 아니라면
하느님께서 가까이 계신다고 느끼는 족속이 있고,
전혀 그렇게 느끼지 못하는 족속이 있을 뿐이고 뿐이겠습니다.
이것이 말하자면 하느님 현존 체험을 말하는 것이고,
신앙인이란 하느님 현존 체험 가운데 사는 사람들이지요.
저도 나이 먹어갈수록 더 하느님 현존 체험 가운데 살아갑니다.
아니 체험이라기보다는 늘 하느님을 느끼며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느낌도 하느님께서 내 옆에 계신다는 느낌보다는
내가 늘 하느님과 함께 살아간다는 또는 하느님 안에서 살아간다는 느낌입니다.
그게 그거 같지만 제게는 느낌이 좀 다릅니다.
하느님께서 손님처럼 와 옆에 계신다는 그런 느낌이 아니라
전에는 내가 다른 데 머물곤 했는데 이제는 어디 가지 않고
하느님 안에서 사는 느낌 그것도 늘 머무는 느낌입니다.
바다의 물고기가 물을 떠나서 살 수 없고 늘 물속에서 살듯이
저도 하느님이라는 바다 또는 하느님 사랑과 은총의 바다에서
뭔 짓을 하든 하면서 살아가는데
다만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하기도 딴짓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전엔 딴짓할 때는 하느님께서 감시하신다는 느낌
또는 하느님께 들켰다는 느낌 같은 것이 있었고
당연히 이때의 하느님은 두려움의 하느님이었는데
지금은 그런 느낌이 거의 없고 오히려 그래서 탈입니다.
아무리 딴짓해도 하느님 사랑을 벗어나지 않겠다는 의지가 있기 때문인지
하느님 사랑 안에 있다는 느낌이 언제나 있고 하느님이 편한데 그것이 문젭니다.
아직도 사랑 미성숙입니다.
아이가 부모의 사랑 안에 머물며 온갖 혜택을 누리지만
부모가 원하는 것은 하지 않고 제멋대로 하며
받기만 하고 드릴 줄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성숙하면 할수록 그리고 사랑하면 할수록
사랑받는 것도 잘하지만, 드릴 줄도 알게 되고,
사랑하는 분이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실천하려고 하지요.
그렇습니다. 무엇이든 다 실천하려고 하는데
큰 것은 물론 작은 것도 다 실천하려고 합니다.
사실 큰 사랑은 상대가 원하는 작은 것까지 빠트리지 않고 실천하고,
작은 사랑은 다 실천할 수 없기에 생각나는 큰 것 한두 가지만 실천합니다.
그렇잖습니까?
사랑이 작은 자식은 부모가 좋아하는 것 한두 가지만 알고,
알더라도 그 좋아하는 것을 벼르고 별러서 해드리지만
사랑이 크신 부모는 자식의 모든 것을 다 알고
그것을 별러서 하지 않고 당연한 듯 일상으로 해주시지 않습니까?
오늘 주님께서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는데 저는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했습니다.
하늘나라에서 작은 자란 사랑이 작은 자를 말함이고,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은 사랑이 큰 사람이라는 것을 배운 오늘 우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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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5.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5,19)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것으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17)
이는 복음을 예표하고 있던 구약의 율법이, 이제 복음 안에서 완성(실행, 성취, 채워짐)되었음을 말해줍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에 쓰인 당신에 관한 말씀들이 일어나도록 하심으로써,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셨습니다. 곧 온몸으로 율법과 예언을 실행하셨습니다. 진정,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요한 19,30)고 말씀하심으로써, 이 모든 것이 이루어졌음을 분명하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계명을 실행하는 이의 복됨을 말씀하십니다.
“이 계명들 가운데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으로 불릴 것이다.”(마태 5,19)
이는 ‘먼저’ 계명을 ‘지키는 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알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또 안 것을 말로만 선포하는 것이 아니라, 먼저 스스로 지킴으로써 계명을 ‘실행’하는 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또한 그렇게 실행으로 가르치는 이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성 그레고리우스는 “설교자에게는 법이 하나 있는데, 설교하는 바를 실천해야 한다는 법이다” 말한 바 있습니다.
유명한 설교가였던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도 말합니다.
“가르치는 바를 행동으로 파괴시킨다면,
사람이 법을 안다고 자랑하는 것이 쓸모없는 일이다”
그렇습니다. 율법은 지켜질 때라야, 비로소 그 행위 안에서 실현됩니다. 곧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 안에서 실현됩니다. 그러니 주님의 계명을 안 이는 먼저 계명을 실행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실행하는 이라야 진정 가르치는 이가 됩니다. 그러나 “스스로” 자신의 의지로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스스로” 한다는 것은 진정한 사랑으로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계명을 주신 분을 사랑하는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사랑이 율법을 완성합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편지에서 말합니다.
“누구든지 그분의 말씀을 지키면,
그 사람 안에서는 참으로 하느님의 사랑이 완성됩니다.”(1요한 2,5)
그래서 그는 <복음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 계명을 받아들이고 지키는 사람이 바로 나를 사랑하는 사람이다.”(요한 14,21)
하오니, 주님!
제가 말씀의 계명을 스스로 지킴으로 당신을 사랑하는 이가 되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행실로 사랑하게 하소서!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비록 작은 것 하나에라도 깊은 사랑을 담고 행하게 하소서!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마태 5,19)
주님!
제 안에 새겨진 사랑의 법이 제 행동의 뿌리가 되게 하소서!
제가 행동으로 가르치게 하시고,
가르친 바를 행동으로 파괴하지 않게 하소서!
말이 아니라, 행실로 사랑하게 하시고
작은 일에도 사랑을 담아 행하게 하소서.
행실로 사랑하되,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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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5.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이번 LA 신문홍보를 하면서 마음이 따뜻한 교우 분들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제가 사제이기 때문에 기꺼이 머물 곳을 마련해 주셨고, 음식을 주셨고, 차량 봉사를 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이런 어린이 하나를 내 이름으로 받아들이면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교우 분들은 불편했음에도 기쁜 마음으로 저를 받아 주셨습니다. 주님께서 그분들의 따뜻한 마음을 보시고, 진실한 신앙을 보시고 축복을 주시리라 믿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나라는 밭에 숨겨져 있는 보물과 같다.’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교우 분들의 가정에서 하느님께서 숨겨 놓으신 ‘보물’을 찾았습니다. 그 보물은 책 속에 있었습니다. 첫 번째 보물은 정의채 몬시뇰과 차동엽 신부님의 대담을 엮은 ‘모든 것은 은혜였습니다.’입니다. 저는 그 책속에서 정의채 몬시뇰의 깊은 지성과 미래에 대한 통찰을 보았습니다. 두 번째 보물은 류시화가 옮긴 ‘마음을 열어주는 101가지 이야기’입니다. 저는 그 책속에서 ‘세계는 원자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이야기들로 이루어져있다.’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사순시기는 은혜로운 회개의 때입니다.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교구장님들은 ‘담화’를 발표하였습니다. 서울대교구 정순택 베드로 주교님은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여러분은 한때 어둠이었지만 지금은 주님 안에 있는 빛입니다. 빛의 자녀답게 살아가십시오.(에페 5,8)”라는 성서말씀으로 담화를 시작하였습니다. 주교님은 특별히 사순시기에 미사참례를 열심히 하기를 당부하였습니다. 미사는 말씀과 성체라는 보물이 묻혀있는 밭이기 때문입니다. 춘천교구 김주영 시몬 주교님은 사순시기를 시작하면서 “성령으로 굳건해진 신앙 감각은 교회의 구성원들이 개인과 공동체로서 주님께 충실하면서 살고 행동하고 말하는 방법을 지속적으로 식별할 수 있도록 해 준다. 신앙 감각은 모든 신자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와 함께 생각하며’ 하나의 신앙과 하나의 목표를 나누도록 해 주는 본능이다.( 「교회 생활에서의 신앙 감각」, 128항).”라는 신앙 감각을 강조하였습니다. 주교님은 특별히 사순시기에 말씀을 통하여 신앙 감각을 키워가기를 당부하였습니다. 인천교구 정신철 요한 세례자 주교님은 “숨겨진 잘못에서 저를 깨끗이 해 주소서.(시편 19,13)”라는 성서 말씀으로 담화를 시작하였습니다. 사순 시기를 보내면서 ‘숨겨진 잘못에서’ 우리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께 다가서도록 당부하였습니다.
오늘 성서 말씀에 묻혀있는 보물은 ‘하느님의 계명과 율법’입니다. 오늘 독서는 율법과 계명을 충실하게 지키면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축복의 땅으로 갈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통하여 우리가 지켜야 할 계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을 섬기고, 우상을 섬기지 않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는 사람은 축복의 땅으로 갈 수 있습니다. 부모에게 효도하고, 살인하지 않고, 거짓말 하지 않고, 남의 재물을 탐하지 않고, 남의 아내를 탐하지 않는 사람은 축복의 땅으로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엉뚱한 곳에서 보물을 찾으려고 합니다. ‘성공, 명예, 권력’입니다. 앞서가는 사람은 끌어내리고, 뒤에 오는 사람은 밀쳐내면서 성공이라는 바벨탑에 오르려 합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권력이라는 바벨탑에 오르려 합니다. 위선과 가식으로 치장된 명예라는 바벨탑에 오르려 합니다. 그런 보물은 우리를 축복의 땅으로 인도할 수 없습니다. 그런 보물은 우리를 무한경쟁의 싸움터로 내몰기 마련입니다. 그런 보물 때문에 아름다운 자연은 훼손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후손들이 살아가야 할 푸른 지구는 병들고 있습니다.
사순시기를 지내면서 오늘 주님께서 하시는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 좋겠습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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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5.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역사 안에서 우리는 대단해 보이는 사람을 만나게 됩니다. 예술, 과학, 정치, 문화 등, 역사 안에서 한 획을 그은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그렇다면 그들은 뛰어난 능력을 지닌 천재일까요? 타고난 능력이 그들을 거장으로 만든 것일까요?
저는 이들이 대단한 천재라고 생각했습니다. 저같이 평범한 사람은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존재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미켈란젤로의 이야기를 듣고는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로마의 시스티나(Sistina Chapel) 성당 천장에 그린 ‘천지창조’에 대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그림에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 안다면 나를 천재라고 부를 수 없을 것이다.”
뛰어난 능력이 있다 하더라도 노력하지 않으면 어떤 결과물도 만들 수 없습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본인이 원하는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면 충분하지 않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계속 노력했고, 비로소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역사 속의 위인은 자기가 원하는 결과에 도달할 때까지 이렇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본인의 능력 없음을 생각하기보다 조금 더 노력하지 않았음을 반성해야 합니다. 주님께 나아가는 것도 우리의 노력 없이는 도달할 수 없습니다. 아무렇게나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는 사람이 과연 주님의 현존을 지금 삶에서 체험할 수 있을까요? 지금 어렵고 힘들어도 최선을 다해 주님의 뜻을 마음에 새기고, 또 그 뜻을 실천해나가는 사람만이 주님의 현존을 느끼며 지금을 잘 살 수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고 있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안식일에 사람을 고쳐주시고, 죄인들과 어울려 먹고 마시는 모습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완성하러 오셨다고 합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인 사랑을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철저하게 사랑을 주십니다. 심지어 당신의 목숨까지도 내어놓으시는 사랑을 주시면서, 사랑을 완성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 역시 가장 작은 사랑이라도 철저하게 실천할 때, 하늘나라에서 가장 큰사람이라고 불리게 된다고 하십니다. 이 정도면 충분하다는 안일한 마음이 아니라, 어떻게든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만이 큰사람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모습은 어떠합니까? 하늘나라에서 큰사람 대접을 받을 사랑 실천에 계속해서 노력하고 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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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만이 사랑할 수 있고, 이전에 그 누구도 우리만큼 사랑할 수 없었으며, 이후에 그 누구도 우리만큼 사랑할 수 없음을 믿을 때 진정한 사랑의 계절이 찾아온다(요한 볼프강 폰 괴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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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5.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은 율법의 완성
-하늘 나라에서 가장 큰 사람-
기상하여 카톡 메시지를 확인해 보니 방금 12:30분 따끈따끈한 소식이 도착해 있었습니다. 어제 하루 100% 순수한 사랑을 실천한 형제의 소식이었습니다. 참으로 언제나 한결같이 하루하루 구도자처럼 충실히 살아가는 언젠가 소개했던 치과의사 형제입니다.
“오늘은 야간진료(매주 화요일) 날이라 좀 늦게까지 진료했네요. 멀리서 퇴근하고 와주시는 환자분들이 감사했고, 열심히 일해주는 직원들이 또 고마웠습니다. 오늘도 ‘자비의 학교’에서 열심히 공부한 하루였네요.ㅎ”
참 아름다운 삶입니다. 사랑의 아름다움입니다. 마음의 순수, 사랑의 마음입니다. 지금도 잊지 못하는 좋은 글귀입니다.
“비밀스런 능력에 관심을 갖는 인간은 신의 임재속에 살 수 없게 된다. 그런 현상들이 생겨나더라도 조금도 주의를 기울이지 마라. 비밀스런 능력을 획득하기는 쉽지만, 마음의 순수에 이르기는 몹시 힘들다. 순수함을 소유하는 자는 종교의 진정한 모습을 안다.”
어제는 코이노니아 자매회 모임이 있었습니다. 10명 참석으로 출석률 100%였습니다. 대부분 할머니 연세쯤 나이지만 고운 외모에 배우려는 열정이 참 대단한 분들입니다. ‘자비의 학교’ 수도원에 매달 1회 하루 피정겸 공부하러 오는 이분들에게 드린 말씀이 생각납니다.
“이제 저는 그리움도, 외로움도, 기다림도 없습니다. 이런 주제의 시詩도 짓지 않습니다. 하루하루 날마다 주님과 함께, 주님 안에서 오늘 지금 여기서 천국의 충만한 삶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도 그렇고 일단 이렇게 고백하고 나면 그대로 된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잊지 못할 세 예화도 잠시 나누고 싶습니다. 매달 모임시 나눠드리는 강론집이 거의 18년만에 중단되었습니다. 매월 강론집을 편집 제본해 주셨던 분이 계속 병상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시 해 준다는 고마운 분도 있었지만 당분간은 쉬고 싶습니다. 그동안 무려 25년 오랜동안 수고해준 분에 대한 예의가 아닌 듯 싶었기 때문입니다.
문득 이런 경우가 생각났습니다. 오랜동안 충실히 내조해주던 부인이 세상을 떠났는데 즉시 재혼하는 분들이 있다면 이는 결코 죽은 이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아마도 제 경우라면 끝까지 혼자 살것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비약적인 비교인지는 몰라도 저에겐 진실입니다. 당분간, 아니 더 이상 제본은 없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동안 오랜동안 수고해준 분에 대한 고마움을 담아두고 기억하고 싶기 때문입니다. 이 또한 순수한 사랑의 발로입니다. 이런면에서 저는 철저한 정통 보수주의자요 진국(거짓이 없이 참된 사람)이란 말을 듣기도 합니다.
지난밤에도 불암사 선재善哉라는 군자같은 개가 수도원에서 노숙했고 사진을 찍어 수도형제들과 나눴습니다. 불교 사찰의 개가 천주교 수도원이 좋아 자주 찾다가 어제는 절에 가는 것도 잊고 주님의 집 수도원 뜨락에서 밤새 노숙했습니다. 저와 같은 열정으로 주님의 집을 사랑하는 수도자라면 정말 순수한 사랑의 절정이란 생각도 들었습니다. 선재로부터 배우는 주님의 집에 대한 한결같은 사랑입니다.
로마 유학중인 수도형제로부터 애로사항이 가득담긴 편지가 공동체에 도착했고 수도형제와 나눈 유머스런 대화가 생각납니다.
“학위 하든 못하든 겸손공부 하나 잘 하면됩니다. 박사중의 박사가 겸손 박사입니다.”
“그래요. 겸손을 배우러 로마에 간 것 같습니다.”
겸손한 사랑, 순수한 마음, 순수한 사랑, 다 통합니다. 참으로 사랑이 순수하고 깊어질수록 사랑의 표현인 어느 율법이나 계명도 소홀히 하지 않습니다. 악마는 디테일안에 숨어있다는 말도 있고, 훌륭한 지도자는 디테일이 강하다는 말도 있습니다. 좋은 지도자는 어느 작은 것 하나 소홀히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서두 말씀이 참 강렬한 느낌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율법에 대한 사랑은 그대로 주님께 대한 사랑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듯 하느님 사랑의 표현인 율법을, 계명을 사랑한 주님의 각오와 결의가 깊이 마음에 와닿습니다. 이어지는 말씀도 결코 소홀히 취급할 율법이나 계명이 없음을 깨닫습니다. 작고 큰 것으로 나눌수 있는 율법이, 계명이 아니라 한결같이 소중히 여겨할 모든 율법이요 계명이라는 것입니다. 그렇다하여 예수님이 결코 율법지상주의자는 아닙니다. 극진하고 순수한 사랑일 때는 저절로 어느 계명 하나 다치거나 소홀히 하지 않겠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 불릴 것이다.”
이런 작은 계명에 충실한 사람이 천국의 큰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불가의 삼학(三學), 계정혜(戒定慧)의 순서도 적절하고 유익합니다. 철저한 계율준수의 수련이, 훈련이 우선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작은 계율을 사랑을 다해 훈련하고 준수할 때 큰사랑, 순수한 사랑에 도달하게 됩니다. 계율(戒律)준수의 바탕이 없으면 깊은 마음의 안정(安定)과 관상의 지혜(智慧)도 불가합니다. 우리의 수행생활에도 그대로 통하는 원리입니다.
결론하여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참으로 순수하고 깊은 사랑일 때 모든 율법을 만족시킬 수 있습니다. 애당초 모든 율법이나 계명이 우리 위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율법을, 계명을 사랑합니다. 이때 살아계신 사랑의 주님도 만납니다.
신명기의 모세처럼 참으로 주님을 사랑한다면 실로 모든 규정과 법규, 율법과 계명을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며 마음을 다해 지킬 것입니다. 모세의 충고가 마음 깊이 와닿습니다.
“나는 주 나의 하느님께서 나에게 명령하신 대로 규정과 법규들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었다. 너희는 그것들을 잘 지키고 실천하여라. 그리하면 민족들이 너희의 지혜와 슬기를 보게 될 것이다. 우리가 부를 때마다 가까이 계셔 주시는, 주 우리 하느님 같은 위대한 민족이 어디 있겠느냐? 너희는 오로지 조심하고 단단히 정신을 차려, 너희가 두 눈으로 본 것들을 잊지 않도록 하여라. 그것들이 평생 너희 마음에서 떠나지 않게 하여라.”
흡사 예수님 말씀처럼, 구구절절 심금을 울립니다. 모든 계명들을 충실히 준수하는 훈련과 실천에 진인사대천명의 노력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지칠줄 모르는 수련과 수행의 원천이 바로 한결같은 열렬한 주님 사랑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의 하늘 나라에서 참으로 큰사람으로 살게 됩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이렇게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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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5. 사순 제3주간 수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예수님께서는 구약의 모든 것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특히 ‘아담이 지은 죄를 갚으신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널리 사용되는 그리스도교적 명제입니다.
아담은 어떤 죄를 저질렀을까요? 이미 우리가 알고 있듯이 첫 인간인 아담은 ‘원죄’를 저질렀습니다. 그리고 원죄는 하느님께서 먹지 말라던 선악과를 따먹은 것을 말한다는 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원죄가 단순히 먹지 말라는 과실을 먹은 죄일까요? 그렇게 단순한 죄가 오늘날의 우리에게도 이어져 오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원죄는 그렇게 단순하고 간단한 죄가 아닙니다. 원죄는 인간의 불순종을 의미합니다. 또한 원죄는 인간의 교만을 의미합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아담의 불순종을 순종으로 갚으시고 인간의 교만을 겸손을 갚으신 것입니다.
보십시오. 삶의 처절한 아픔과 외로움 속에서도 예수님은 단지 하느님 아버지께 순종하시고 겸손하십니다. 십자가의 신비는 바로 순종과 겸손에 있을 것입니다.
우리 안에 많은 것들이 우리를 유혹할 수 있습니다. 가끔은 하느님의 뜻이 아닌 세상의 뜻을 따르라고 유혹하기도 하고, 나 자신의 이기심이나 욕심을 따르라고도 유혹합니다. 또한 자신의 과업과 업적을 하느님 앞에 드러내고 싶어서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비판하기도 할 것입니다. 이것을 비워내는 것이 바로 순종과 겸손을 실천하는 길입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완성’입니다.
‘디자인이란 더하는 것이 아니라 빼는 것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신앙인의 길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처음에는 내 좋지 못한 모습을 빼내고, 나중에는 내 좋은 모습도 겸손히 빼내고, 마지막에는 나 자신까지 순종을 빼내면 그때가 바로 신앙의 길의 완성이 아닐까요.
다듬고 다듬어서 완성으로 나아가기를 희망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순종과 겸손으로 우리의 신앙의 길을 걸어가기를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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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가 되면’의 때는...
‘때가 되면’의 때는 절대 오지 않는다. 다들 자기가 너무 나이 들었거나 젊거나 가난하거나 바쁘다고 생각한다.
완벽한 시간이나 나이, 상황은 오지 않는다. 당신 스스로 주는 기회, 오늘 당장 시작하는 것이 답이다.
-마리안 캔트웰-
맞습니다.
우리가 바라는 기가막힌, 그리고 안성맞춤인 때는 오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말도 있습니다.
‘때는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만드는 것이다.’
다시 말해 ‘기회’라는 것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여기서의 ‘기회’는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 그 ‘때’를 시작해 보세요. 오늘 ‘기회’를 만들어 보세요. 기다리지 마시고 오늘이라는 하루를 누려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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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5. 사순 제3주간 수요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예수님은 자유이십니다>
예수님은 자유이십니다.
아픈 이를 보듬기 위해
안식일을 깨신 자유이십니다.
의인과 죄인 갈라 세운
아무도 감히 넘지 않은
인습의 벽을 넘으신 자유이십니다.
하느님을 구실 삼아
가난한 순례자 먹이 삼는
사제, 율법학자, 환전상들을
채찍으로 내려치신
굴복하지 않는 자유이십니다.
성전 안에 감금당한
가진 자의 하느님을
하느님 닮은 사람 안에 다시 모시려
기꺼이 십자가 지신 자유이십니다.
살림과 섬김이라는
사랑의 정신은 희미해지고
생기 없는 죽은 문자만 남아
하느님과 사람을 갈라놓고
힘없는 선한 사람 죄인으로 낙인찍는
스스로 거룩한 이들에게 빼앗긴 법을
빼앗은 이들에게서 되찾아
하느님과 사람을 잇는 일치의 법으로
사람 살리는 생명의 법으로
서로를 섬기는 상생의 법으로 세우시려
스스로 삶과 죽음의 경계를 넘으신
예수님은 자유이십니다.
<하느님 법은
벗을 살리기 위해 자신을 봉헌하는
십자가에서 완성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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