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는 올봄에도 안녕하시다 / 임철순
그 고양이는 죽었다. 아니 죽었을 것이다. 어둑신한 퇴근길에 본 고양이는 소나무 둥치와 색깔이 같아 얼른 눈에 띄지 않았지만, 동공이 풀린 채 침을 흘리고 있었다. 나무 울타리 때문에 접근할 수 없어 사진만 찍고, 집에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보니 고양이는 이미 없었다. 어딘지 다른 데 가서 죽은 게 아닌가 싶다.
이사 온 지 1년 남짓, 그동안 고양이의 죽음을 여러 번 보았다. 도처에 들고양이가 살고 있었다. 집 앞마당은 그들의 놀이터였고, 마당으로 통하는 계단 밑의 공간은 그들의 살림집이었다. 이사에 앞서 집을 수리할 때 악취가 나 살펴보던 인부들이 고양이의 시체를 들어냈다는 말을 듣고 창살로 막게 했다.
하지만 고양이는 원주민답게 그곳을 지키려 했다. 아내가 ‘도냥이(도농동 고양이)’라고 이름 붙인 녀석은 어디선가 낳은 아이들을 마당으로 데려와 놀곤 했다. 쫓아도 그때뿐이었다. 몸집이 작은 새끼들에게는 창살이 무용지물이어서 잘도 들어가 숨었다.
도냥이는 1년에 여러 번 새끼를 낳는 것 같았다. 아내는 저건 도냥이 새끼들, 저건 도냥이 조카들이라고 잘도 알아보면서 내 자식 돌보듯 밥을 챙겨 주고 다른 불청객들을 쫓았다. 하지만 나는 본능적으로 고양이를 싫어한다. 우는 소리나 하는 짓이 괜히 얄밉다. 강아지는 기르다가 ‘사별’한 뒤 더러 다시 길러볼까 했지만, 고양이는 그런 생각을 요즘 말로 1도 해본 적이 없다.
주민들 중에는 ‘캣 맘’이 몇 명 있다. 그중 한 여인은 내가 출근하는 새벽에 고양이 사료와 물을 화단에 깔아 놓곤 했는데,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기에 “밥 주는 건 좋지만(진짜 좋아?) 쓰레기 좀 치우라”고 했다. ‘생긴 것도 꼭 고양이 같은 게...’ 그런 생각을 하면서.
그런데, 갈 봄 여름 없이 잘 놀고 헤집고 다니고 밭고랑에 똥을 싸놓던 고양이들은 겨울이 되자 나무처럼 시들어갔다. 아내가 종이상자로 울타리 밖에 집을 만들어 주기도 했지만, 겨울나기는 상상 이상으로 어렵고 힘든 것 같았다. 폐렴으로 다 죽어가는 놈을 병원에 안고 가 치료해주거나 동물자유연대에 신고해 데려가게 한 적도 있다(물론 내가 아닌 아내가). 태어난 지 두 달 남짓, 한 줌도 안 되는 녀석이 눈도 못 뜨고 할딱거려 집에 들였는데(물론 내가 아닌 아내가), 다음 날 아침에 보니 죽어 있었다.
앞서 말한 소나무 밑 고양이의 죽음이 지난겨울에 본 마지막 죽음이었다. 그들은 춥고 긴 겨울을 어디에서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혹독한 겨울과 노숙생활을 견뎌야 하기에 종족을 더 열심히 퍼뜨리는 게 아닌가 싶다. 봄가을은 고양이가 새끼를 낳는 철이다. 엄마를 찾는 울음소리가 자주 들려 고양이 관련 단체 활동가들은 ‘아깽이(아기 고양이의 애칭) 대란’이라고 부른다. 서울시가 길고양이 중성화 사업을 벌이면서 2013년부터 2년마다 ‘길고양이 서식 현황’을 조사한 결과, 4년 만에 길고양이 개체 수가 절반 가까이 줄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건 남의 동네 이야기다. 이제 다시 봄이니 우리 동네 고양이는 또 열심히 짝 지어 애 낳고 천지사방 헤집고 다니며 사람(특히 나!)을 약 올릴 것이다. 이것은 우주가 생긴 이래 작동해온 천지자연의 이치요 동물나라의 법칙이다. 그러니 별수 있나. 나도 이제 고양이와 더불어 사는, 아니 더불어 살려고 노력하는 훌륭한 인간이 되도록 하는 수밖에.
중국 당나라 때의 고관 이의부(李義府)는 부드럽고 공손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늘 남을 해치려 해 사람들이 고양이 같다고 ‘이묘(李猫)’라고 했다. 이처럼 이미지가 나쁜데 사람들은 왜 고양이를 사랑할까. 개처럼 충성스럽지도 않고 인간을 위해 해주는 일도 별로 없는데 왜 스스로 ‘집사’가 되어 떠받들고 애육(愛育)하는 걸까.
‘용재총화(慵齋叢話)’의 저자로 잘 알려진 허백당(虛白堂) 성현(成俔)은 개에 물려 죽은 고양이를 묻어주며 지은 시에서, 토끼도 아니고 살쾡이도 아닌 게 교활하고 비굴하다고 탓한다. 그러더니 이내 “새벽엔 눈이 둥글고 한낮엔 가늘어 시간을 알려 주는 것 같고, 바른 색을 타고나 용모에 흠이 없고, 눈 같은 털 고결하고 고와 사랑스럽다”고 찬탄한다. 시는 “너를 생각하는 이때/더욱 슬프고 더욱 보고 싶구나”라고 끝난다. 자고로 완물상지(玩物喪志)를 경계한 선비들은 동물 사랑을 내색하지 않았는데 성현은 예외인 것 같다.
하기야 숙종도 고양이를 사랑해 직접 먹이를 주며 10여 년 기른 일이 있다. 숙종이 승하하자 금손(金孫)이라 불리던 고양이는 어육(魚肉)을 주어도 먹지 않고 울더니 수십 일 지나 결국 죽어 숙종의 묘인 명릉(明陵) 곁에 묻어 주었다고 한다. 이렇게 은혜를 아는 고양이가 대체 얼마나 될까. 인간은 일방적인 사랑과 애호로 손해만 보고 있는 게 아닌가.
사람들이 고양이를 좋아하고 사랑하는 것은 거부할 수 없는 귀여움 때문이라고 한다. 고양이는 오스트리아 동물학자 콘라트 로렌츠가 말한 ‘아기 해발인(解發因·baby releaser)’이라는 걸 다 갖추고 있다. 아기 해발인은 어른들의 기분이 좋아지는 옥시토신을 분비하게 하는 동그란 얼굴, 통통한 볼, 큰 눈, 작은 코 등 외모적 특징을 말한다. 인간의 고양이 사랑은 ‘양육 본능의 오발’인 셈이다. 최근 번역 출간된 ‘거실의 사자’(애비게일 터커 지음)에 그렇게 나와 있다.
인간이 가축으로 만든 개나 소와 달리 스스로 인간의 영역에 들어온 고양이는 지금 ‘거실의 사자’처럼 군림하며 인간을 비웃고 있는지 모른다. 일본 작가 나쓰메 소세키(夏目漱石)의 출세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에 나오는 무명의 고양이처럼.
그 작품 속의 ‘나’는 사람 못지않은 식견과 호기심을 갖추고 독심술까지 터득한 철학적 고양이이다. ‘나’는 맥주를 핥아 마시고 취해 물 항아리에 빠져 죽지만, 인간이란 고양이족의 언어를 이해할 수 있을 만큼 하늘의 은총을 받은 동물이 아니며 인간이라고 언제까지나 번창할 리는 없으니 고양이의 시절이 오기를 기다리겠다고 했던 녀석이다. 인간의 무지와 천박함, 어리석음에 대한 풍자와 비판을 담은 소설을 읽으면서 고양이를 다시 생각하게 됐다. 아니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
당장 고양이를 사랑할 자신은 없지만, 소설에 나온 대로 ‘인간이든 동물이든 자신을 아는 것은 생애의 큰 과업’이므로 자신을 알고, 고양이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는 방법 중 하나로 고양이를 이해하고 싶어졌다. 그러고 보니 고양이들은 이 1년 여 동안 나를 잘 길들인 셈이다.
고월 이장희의 시 ‘봄은 고양이로다’를 다시 읽어 본다. "꽃가루와 같이 부드러운 고양이의 털에/고운 봄의 향기가 어리우도다//금방울과 같이 호동그란 고양이의 눈에/미친 봄의 불길이 흐르도다//고요히 다물은 고양이의 입술에/포근한 봄 졸음이 떠돌아라//날카롭게 쭉 뻗은 고양이의 수염에/푸른 봄의 생기가 뛰놀아라.”
올 봄에도 고양이는 안녕하시기를. 따스한 햇볕을 즐기는 가느다란 눈의 행복을 나도 허백당 성현처럼 이해하고 싶다. *
첫댓글 좋은 글입니다.
완물상지라, 절에서 동물을 키우지 말라는 어느 스님의 말씀은 애완물에게 정을 주면 그놈이 죽었울 때 애통하게 되어 득도에 지장이 있다는 것.
나는 오클랜드에서 살면서 두 고양이 때문에 천불 정도의 금전적 손실이 있었으니 이를 누구에게 배상시킬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