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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포 더 레인
우승미
1.
시내버스에서 내려 산을 끼고 한참을 걸어 들어왔는데도, 그 애의 집은 보이지 않았다. 주위에는 지표가 될 만한 건물조차 없어서 내가 서 있는 곳이 어디쯤인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뒤에서 바이크 소리가 났다. 개조한 머플러 때문에 소리가 요란했다. 손을 들어 바이크를 세우고 길을 물었다. 또래로 보이는 남자애가 나를 말끄러미 들여다봤다. 침팬지처럼 크고 동그란 눈이 귀여웠다.
“뒤에 타. 나도 거기 가는 길이니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 어, 어떻게 거, 걸어가려고. 아, 아직 하, 하, 하, 한, 참 머, 멀었는데.”
남자애는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돌부리에 걸렸는지 바이크가 휘청 흔들렸다. 가까스로 균형을 잡은 남자애는 쑥스러운 듯 속도를 높여 멀어져갔다. 배기관에서 나온 흰 연기가 청량한 늦가을의 공기 속으로 흩어졌다.
길을 따라 쭉 걸으면 된다고 했다. 그 애의 집은 길이 끝나는 곳에 있기에.
여덟 살에 교통사고로 부모님을 잃고 고모 밑에서 자랐다. 고모는 아버지 회사의 경영권을 승계하려 했으나 결국 아버지 몫의 주식을 팔고 물러났다. 내 몫의 유산은 고모가 관리했다. 고모부는 월급 닥터를 셋이나 둔 제법 큰 치과병원의 원장이었다. 집에서 살림만 했더라면 고모는 평생을 남부럽지 않게 살았을 것이다. 고모는 늘 집 밖으로 돌았다. 이곳저곳의 땅을 사들였고, 이런저런 사업을 벌였다. 고모의 사업들은 작게 성공했고, 크게 실패했다.
고모부의 병원마저 압류를 당하자 고모는 살고 있던 아파트를 경매로 넘기고 캐나다로 이민을 가기로 결정했다. 캐나다에는 나와 친자매처럼 지냈던 사촌언니가 유학을 가 먼저 자리 잡고 있었다. 고모는 나에게 어떻게 할 거냐고 물었다. 나는 당연히 함께 가게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대입 준비를 건성으로 하며 인터넷으로 캐나다의 칼리지를 알아보고 있던 나는 남겠다고 대답했다. 고모의 물음에는 이미 내가 함께 떠나지 않는다는 전제가 깔려있다고 마음대로 짐작해버렸고, 아마 그 짐작은 틀리지 않았을 것이다.
떠나기 전 고모는 나에게 몇 가지 이야기를 했다. 고모의 이야기는 간단하고 명료했다. 내게 줄 수 있는 유산이 거의 남지 않았다는 것과 캐나다에서 자리가 잡히는 대로 돈을 좀 보내겠지만 많지는 않으리라는 것, 나에게 이복동생이 있다는 것.
아버지는 엄마와 결혼을 하면서 오래전부터 교제하고 있었던 여자를 위해 근교에 별장을 지었다고 했다. 아버지가 교통사고로 죽자 동생의 어머니는 동생을 보육원에 맡기고 어딘가로 떠났다. 뒤늦게 사실을 안 고모는 한때 조부의 부인이었으나 조부가 돌아가신 후 소원해진 두 번째 새어머니에게 동생의 양육을 부탁했다.
얼마 전 새어머니가 죽었다고 하니 그 애도 혼자 남겨졌을 거야.
고모는 심상하게 말했다. 고모는 몰랐을 것이다. 혼자라는 말이 얼마나 쓸쓸한 것인지.
집은 제멋대로 뻗은 나뭇가지에 가려 잘 보이지 않았다. 저택이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 제법 큰 규모의 집이었다. 무성한 채 말라버린 잡초가 바닥을 온통 뒤덮어서 대문이 없었더라면 어디가 숲이고 어디가 집인지 구별하지 못했을 것이다. 집 앞에는 자그마한 인공 연못이 있었다. 연못의 물은 건류해놓은 콜타르처럼 끈끈해 보였다. 연못 옆에는 페인트칠이 벗겨진 벤치가 놓여있었고, 그 뒤에 커다란 사과나무가 지붕처럼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었는데, 제때에 수확하지 않은 사과가 바닥에 떨어지거나 가지에 매달린 채로 썩어갔다.
남자애는 마당에 세워둔 바이크에 한쪽 팔꿈치를 걸고서 비스듬히 기대 서 있었다. 눈이 마주치자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난 민재 친구 서동선이야.”
“난 민재 누나 강민지야.”
“미, 미, 미, 미, 미, 미, 미, 민재에게 가, 가, 가, 가족이 있다는 얘기는 드, 드, 듣, 듣, 듣지 모, 모, 못했는데.”
“나도 그동안은 내게 동생이 있다는 걸 모르고 있었어.”
꼭 필요한 가구 몇 개만 놓인 거실은 넓어서 더 허전해 보였다. 벽에는 액자 하나 걸려있지 않았다. 오랫동안 거실을 사용하지 않았는지 소파와 탁자, 텅 빈 장식장과 전화기에 먼지가 분진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민재의 방은 2층의 구석에 있었다. 계단 양옆으로 여섯 개의 방문이 있었지만 그 애의 방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바닥의 먼지를 쓸며 지나간 슬리퍼 자국을 따라가면 되었으니까.
방문을 열자 무릎 위에 얼굴을 묻고 방 모서리에 앉아있는 그 애가 보였다. 그 애의 방은 물속처럼 어둡고 고요했다.
“난 강민지고, 네 누나야. 여기서 같이 지내려고 왔어.”
그 애가 고개를 들었다. 휑한 눈으로 잠시 나를 보더니 다시 무릎 위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소리 나지 않게 방문을 닫았다.
나는 민재의 옆방에서 지내기로 했다. 스탠드의 줄을 잡아당기자 전등갓에 쌓여있는 먼지만 떨어질 뿐 불이 켜지지 않았다. 방에는 최소한의 가구만 놓여 있었다. 방을 사용했던 사람의 특색이나 흔적이 전혀 남아있지 않아서 오래된 호텔의 객실 같은 느낌이 들었다.
밤새 뒤척이다가 늦잠을 자 버렸다. 동선이는 부엌에서 콘플레이크를 먹고 있었다. 냉장고에는 샌드위치와 슬라이스 치즈, 플렉스 팩에 들어있는 스파게티와 먹다 남은 냉동피자 따위로 가득했다. 선뜻 손이 가는 게 없어서 냉장고 문을 열어둔 채 한참을 서 있다가 유통기한이 임박한 샌드위치와 작은 팩에 들어있는 우유를 꺼냈다.
“여기서 잤니?”
“난 거의 여기서 지내.”
“집이 없어?”
“집이야 있지. 하지만 여기가 편한걸. 여긴 숨어있기 좋은 곳이니까.”
“민재는?”
“아마 학교에 갔을 거야.”
“넌 학교에 안 가?”
“원래 학교는 다니다 말다 그래. 수능도 끝났고. 뭐, 학교는 재미없으니까.”
“그러고 보니 너 오, 오, 오 오늘은 마, 마, 마, 말을 아, 아, 안 더듬는구나.”
“나, 나, 나, 난, 아, 아주 가, 가, 가끔만 더듬어.”
동선이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자꾸 놀리면 말하지 않을 거야.”
“놀리려는 건 아니었어. 화났니?”
“아니. 난 화 같은 건 안 내는 사람이니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빨개진 얼굴을 콘플레이크 그릇 앞에 바짝 숙이고, 도톰한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귀여운 구석이 있는 녀석이었다.
아침을 먹고 청소부터 시작했다. 곳곳에 먼지가 쌓여있어 쉴 새 없이 재채기를 해야 했다. 집이 꽤 큰데다 청소하지 않은지 오래되어서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 막막했다. 하루에 다 끝내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일 것 같았다. 우선 거실과 부엌, 화장실과 사용하고 있는 방을 중심으로 청소하기로 했지만, 한 시간도 지나지 않아 이 집을 깨끗이 치우는 건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소심해서 말이 없는 아이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오산이었다. 동선이는 종일 내 꽁무니를 쫓아다니며 쉴 새 없이 말을 쏟아놓았다. 2대에 걸쳐 시내버스 회사를 운영하는 집안의 외아들이라는 것과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다정하지만 아버지는 엄격해서 아버지 앞에서는 오금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아버지에게 꾸중을 들을 때면 요즘도 가끔 오줌을 지린다는 것, 어릴 때부터 그림에 재능이 남달랐는데 사생대회에서 받은 상장으로 방 하나쯤은 너끈히 도배를 할 수 있으리라는 것, 규격화되어있는 소묘 실습 시간의 지루함에서부터 영어 과외선생님의 스타킹 위로 튀어나온 미처 깎지 못한 길고 검은 한 오라기의 털까지. 내가 청소를 하는 동안 동선이는 하는 일 없이 내 뒤를 쫓아다니며 저 혼자 얘기하고,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저 혼자 키득거렸다.
“민재에게 친구가 있었다니, 뜻밖이야.”
“친구라기보다는, 뭐랄까,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사이라고 해야 할까. 우린 예고 미술과거든. 3년이나 같은 과에 다녔지만 서로 잘 몰랐어. 내가 워낙에 학교를 다니다 말다 했는데, 민재도 그랬거든. 학교에서 본 게 손에 꼽힐 정도였으니까. 학교 건물 뒤에 안 쓰는 미술도구 넣어두는 창고가 있는데, 거기가 내 아지트야. 땡땡이도 치고, 점심시간에 가서 담배도 피우고.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상한 느낌이 들더라고. 캐비닛 위에 숨겨둔 담배도 하나씩 비는 것 같고. 왜 그런 느낌 있잖아. 아무도 없는 공간에 들어갔는데 조금 전까지 누군가 있었던 것 같은 느낌. 어떤 냄새나 온기 같은 거. 조형 실기 시간에 하도 지루해서 슬쩍 빠져나와 창고에 갔는데, 거기 민재가 있더라. 내가 늘 앉아있던 자리에 비스듬히 앉아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어. 그 후로 거기에서 종종 민재를 만났어. 만났다기보다는 마주쳤다고 해야겠지.”
“꼭 무슨 하이틴 드라마 같구나.”
“그러니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그렇게 상투적이거나 유치한 얘기가 아니야. 만나는 순간 느껴지는 분위기, 그런 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거지. 민재에게는 다른 애들과는 다른 데가 있었어. 민재는 있어도 없는 것 같은 아이야. 옆에 누군가가 있는데, 이어폰을 꼽고 있거나 만화책을 읽을 순 없잖아. 아무리 친한 친구라도 말이야. 그런데 민재와 나는 그랬거든. 같이 있으면서 각자 하고 싶은 일을 하는데도 불편한 느낌이 없었어. 오랫동안 함께 살아온 식구처럼 말이야. 어떤 때는 옆에 없는데도 같이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고. 많은 얘기를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어. 상처를 지닌 사람들은 말없이도 서로를 알아보잖아.”
“네 손목의 상처가 어떤 상처인지 내가 알아보는 것처럼?”
동선이의 손목에는 여러 개의 선이 그어져 있었다. 언뜻 보면 그것은 소매 끝에 덧댄 스트라이프 문양 같았다. 살짝 부푼 살색의 선과 막 아물기 시작한 선홍빛 선들이 더러 겹치고 엇갈리면서 그어져 있었고, 그 아래로 몇 번이나 다시 이어 붙였을 푸른 정맥이 어렴풋이 비쳤다. 그 상처를 보며 엉뚱하게도 나는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동선이는 비로소 입을 다물고 멍하니 창 밖을 봤다. 역광을 받아 검게 보이는 나뭇가지가 팔을 벌리고 서서 풍화된 거인의 뼈처럼 보였다. 그 사이로 노을 진 하늘이 붉게 빛났다.
“자살은 유전 같은 것일까. 엄마도 누나도 자살을 했는데, 아무도 그 이유를 알지 못했어. 엄마에 대한 기억은 거의 없어. 내가 아주 어릴 때 죽었거든. 나에겐 누나가 엄마였어. 누나가 죽던 날, 평소와 다른 점은 아무것도 없었어. 저녁식사를 하고, 나를 씻겨주고, 얼굴에 묻은 물기를 손바닥으로 털어내며 아, 이뻐, 라고 말했어. 늘 그랬던 것처럼. 내 잠자리를 봐준 후에 그 자리, 엄마가 죽은 그 자리로 가서 목을 맨 거야. 유서 같은 건 없었어. 누나의 일기장이며 교과서 갈피까지 샅샅이 뒤졌지만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었어. 이유 같은 건 정말 없었는지도 몰라. 나는 손목에 칼날을 그으면서도 죽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 숨을 쉬는 것처럼, 생각 없이, 그냥 손목을 그었어. 노을빛은 참 아름답지. 노을을 보면 나는 살고 싶어져. 노을은 손가락으로 문지른 파스텔처럼 스미고 번지는 빛이야. 내 눈으로 들어와 마음으로 퍼지는 색이야.”
물끄러미 동선이의 옆얼굴을 보았다. 사춘기를 지나지 않은 아이처럼 얼굴 선이 가늘었다. 노을빛이 그 애의 얼굴에 스미고 번졌다. 그 뺨에 가만히 손바닥을 대면 삼십 촉 백열전구처럼 따뜻할 것 같았다.
있어도 없는 것 같은 아이라고, 민재를 왜 그렇게 얘기했는지 알 것 같았다. 민재는 방에서 거의 나오지 않았다. 민재의 방에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 동안 귀를 기울이고 있어도 빈방처럼 고요했다. 하품소리도, 재채기소리도, 방귀를 뀌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문을 열어보면 그 애는 처음 봤을 때처럼 방의 모서리에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더러 우리는 함께 밥을 먹었다. 동선이가 시답잖은 얘기를 떠벌려도 민재는 건성으로라도 맞장구를 치거나 눈을 마주치지 않았다. 그 애의 시선은 허공의 어디쯤에 있었다. 그 애의 걸음은 발소리가 나지 않았다. 무심코 뒤로 돌아섰다가 바로 뒤에 그 애가 있어서 깜짝 놀라는 일도 있었다.
민재와 동선이가 학교에 가는 날이면 다른 방들을 둘러보았다. 이곳에서는 시간이 흐르지 않았다. 시간은 연못의 물처럼 고여있었다. 먼지만큼이나 두텁게 쌓인 적막이 방마다 가득했다.
민재의 어머니가 사용하던 방에서는 은은한 향수 냄새 같은 것이 떠돌았다. 화장대 위에는 떠나기 직전까지 사용했을 화장품들이 고스란히 놓여있었다. 유화제가 분리되어 노랗게 떠 있는, 반 넘어 사용한 로션과 뽀얗게 가루가 묻어있는 파우더 붓, 브랜드별로 아기자기하게 모아놓은 립스틱. 모서리에 금장 도금이 된 파란색 립스틱 뚜껑을 열었다. 붓을 사용하지 않고 그대로 발랐는지 동그스름한 립스틱 끝에 입술의 거스러미 자국이 나 있었다.
화장품 옆에 액자가 놓여있었다. 세 사람이 연못의 벤치에 앉아있었다. 틀어 올린 머리 아래로 목선이 고운 여자와 그 여자의 어깨 위에 팔을 두르고 있는 아버지. 여자의 품에 안겨서 등을 돌린 채 카메라를 흘깃 보는, 막 걷기 시작할 무렵의 어린 민재. 사진 속에서 아버지는 환하게 웃었다. 아버지의 웃는 얼굴이 낯설었다. 내게 남긴 사진 속에서 아버지는 언제나 눈이 부시다는 듯 살짝 찌푸린 표정이었다. 사진 속의 연못은 에메랄드 빛깔이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물풀의 흔들림조차 선명하게 보일 것처럼 물빛이 투명했다. 세 사람의 머리 위로 탐스럽게 익은 사과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아버지가 살고 싶었던 삶은 바로 이 자리에 있었을 것이다. 어쩌면 아버지는 저 나무를 손수 심었을 것이다. 나무가 자라서 열매를 맺고, 그 열매가 떨어진 자리에서 싹이 나고 나무가 자라고 다시 열매가 맺힐 때까지 여기에서 살기를 꿈꾸었을 것이다.
아버지의 두 번째 새어머니의 방에는 고급스런 현악기 케이스가 있었다. 뚜껑을 열어보니 송진 가루를 깨끗하게 닦아놓은 비올라가 얌전하게 놓여있었다. 전공자가 아니라면 갖기 힘든 연갈색의 올레 불 비올라였다. 나머지 현은 모두 끊어지고 C현과 G현만 남은 채였다.
중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사촌언니와 함께 바이올린을 배웠다. 고모는 무엇이든 나를 사촌언니와 함께 가르쳤고, 주위 사람들은 조카를 친딸처럼 키운다는 말을 자주 했다. 집을 나올 때 보니 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바이올린도, 옷가지들도, 인형이나 장난감 같은 것들도 사촌언니의 것을 같이 쓰고 있었을 뿐, 내 것은 아니었다.
활에 딱딱하게 굳어버린 송진을 바르고 현 위에 활을 그었다. 공명통 안에서 잠자고 있었던 것 같은 깊은 울림을 가진 소리가 방안을 가득 메웠다. 남아있는 G현으로 ‘G선상의 아리아’를 연주했다. 바흐가 감옥에 있을 때, 바이올린의 다른 줄이 모두 끊어지고 남아있는 G현만으로 이 곡을 만들었다는 사촌언니의 말을 나는 한동안 사실로 믿었다. 고통스러운 삶만이 이토록 아름다운 곡을 만들 수 있다고 생각했다. 후에 바흐가 가장 행복했던 시절에 작곡했다는 걸 알게 됐지만 이 곡은 여전히 나에게 가장 슬픈 곡으로 남았다.
“계속 연주해줘.”
흠칫 놀라 뒤를 돌아봤다. 언제 왔는지 민재가 앉아 있었다. 나는 내려놓았던 비올라를 다시 들었다. 비올라는 바이올린보다 덩치가 크지만 세 개의 현이 같았다. 바이올린을 손에서 놓은 지 오래되었으나 머리가 잊은 음계를 손가락이 기억하고 따라갔다.
“비올라에서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가 나는 줄 몰랐어. 할머니는 이따금 비올라를 연주했는데, 그 소리를 들으면 내 머릿속에서 혈관을 뽑아 올려 활을 긋는 것처럼 머리가 몹시 아팠어. 할머니가 죽은 후에도 그 소리는 사라지지 않았어. 그 소리가 계속 울려서, 잠을 잘 수가 없었어. 나를 위해서 가끔 비올라를 연주해주지 않을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언제든 연주해주겠다고 몇 번이고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2.
야미노 카스미라고 했다. 이름이 왜 그따위야! 동선이가 큰소리로 투덜거렸다. 카스미는 아랑곳하지 않고 민재의 등에 업혀서 방글거렸다. 귤색으로 염색한 샤기컷의 머리칼이 이마와 귀를 살짝 덮고 있었다. 작은 얼굴에 코와 입이 오밀조밀한데, 눈만 도자기인형처럼 컸다. 하나하나 뜯어보면 눈코입이 다 예뻤지만, 전체를 보면 예쁘다고 말하기에는 좀 기형적인 구석이 있었다.
모처럼 셋이서 저녁을 먹고 응접실 소파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 자동차 소리가 나자 동선이가 재빨리 방으로 숨었다. 나는 민재를 따라 현관으로 나갔다. 택시에서 내린 사람은 동선이의 아버지가 아니라 키가 작고 깡마른 여자애였다. 여자애는 빨간색 여행용 가방을 바닥에 놓아둔 채 민재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왔다. 한쪽 다리를 살짝 절고 있었다. 민재를 껴안을 것처럼 양팔을 벌리고 달려온 카스미는 냉큼 민재의 등에 업혔다.
“얼마나 그리웠는지 아니? 강민재, 남자가 다 됐구나. 어깨가 넓어졌어. 그래도 예전처럼 편안해, 민재 등은.”
여덟 살 때의 일이라고 했다. 여덟 살짜리 남자애가 여덟 살짜리 여자애를 업어주었다고 했다. 그 모습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누군가를 업기에는 여덟 살이라는 나이가 너무 어리게만 느껴졌다. 민재가 보육원에 있었던 기간은 고작 세 달이었는데, 그때의 일을 잊지 않고, 다시 업히고 싶어서, 11년이나 지난 후에, 그것도 일본에서, 여기에 없을지도 모르는 아이를, 연락도 없이, 무작정, 찾아왔다는 것이다. 단지 다시 업히기 위해서.
“거짓말이지? 두 사람, 우리한테 말할 수 없는 좀 더 진한 로맨스가 있었던 것 아냐?”
동선이가 눈을 갸름하게 뜨고 집요하게 묻고는 자기 혼자 킥킥 웃었다. 카스미의 느닷없는 출현에 나도 어느 정도는 흥분하고 있었다. 업어주었다는 얘기는 확실히 매력적인 이야기는 아니었다. 우리는 조금 더 특별한 사건을 기대하고 있었다.
“기억 속에서 자꾸 되새겨보게 되는 일은 특별하거나 대단한 게 아니야. 민재의 등에 밴 땀 냄새, 머리칼 냄새, 등에서 울리는 심장이 뛰는 소리, 혈관을 타고 피가 온몸을 흐르는 소리, 괜찮아, 괜찮아, 민재의 몸속에서 울리는 소리. 그런 소리와 냄새가 아로새겨지는 거야.”
“밥 먹자!”
부엌에서 카스미가 소리쳤다. 응접실에 앉아 카스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나는 그제야 부엌으로 갔다. 옆에서 책을 보던 민재는 읽던 페이지를 마저 읽은 후에 왔고, 모처럼 교복을 입은 동선이가 허둥지둥 달려왔다.
부엌은 카스미의 전용 공간이 되어 버렸다. 카스미는 집안으로 들어오자마자 다른 곳은 둘러보지도 않고 곧장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곤 이틀을 꼬박 부엌에서 보냈다.
카스미의 손길이 닿은 곳곳마다, 싱크대와 식탁, 의자와 바닥이 석고틀을 벗은 조형물처럼 제각기 고유의 빛깔을 내며 반짝였다. 천장의 봉에 연결된 고리에는 유럽풍의 냄비와 프라이팬이 걸려있었는데, 오래 닦지 않아 변색해버린 스테인리스인 줄 알았던 그것들이 실은 붉은빛으로 반짝이는 황동 재질이었다는 걸 그제야 알았다. 독일제 칼 세트는 나무집에 꽂혀 싱크대 위로 올라갔고, 아기자기한 조리 도구가 벽의 수납 고리에 걸렸다. 싱크대 안에서 잠자고 있던 것들이 각기 제 위치를 잡아가자 비로소 집안에 생기가 돌았다.
별 도움이 안 될 줄 알면서도 돕겠다며 부엌에서 서성대면 카스미는 우리를 부엌 밖으로 내몰았다. 카스미는 설거지마저도 다른 사람에게 맡기지 않았다. 차려주는 밥을 먹기만 하는 것이 머쓱해서 부엌 언저리를 맴돌던 우리는 곧 카스미의 방식에 익숙해져 갔고 부엌을 카스미에게 온전히 내주었다.
냉장고에서 인스턴트식품이 모두 사라져 버렸다. 아무 때에나 배가 고프면 부엌으로 가 각자 끼니를 때우던 우리는 하루에 세 번 정해진 시간에 함께 식사했다.
카스미의 상차림은 정갈했다. 음식은 부족하지도 넘치지도 않았고, 식사를 마치고 나면 식탁 위의 접시가 모두 깨끗이 비워져 있었다.
오늘 아침의 메뉴는 토란국과 완두소스를 곁들인 두부튀김, 돌돌 만 달래 위에 새우를 얹은 전과 넉넉하게 육수를 부은 가지찜이었다. 토란국을 한술 떠 입안을 축였다.
“맛있다!”
카스미가 만든 요리는 깜짝 놀랄 만큼 맛이 있었다.
“이름난 요리사의 요리에 슬쩍 끼워 넣어도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거야.”
“당연하지. 이래봬도 난 정식 교육 코스를 밟은 요리사니까.”
“에? 요리고등학교 뭐 그런 델 다닌 거야?”
동선이가 물었다.
“열두 살 때부터 쌍둥이칼을 인형처럼 품고 다녔으니까. 학교는 다니다가 그만뒀어. 적응에 문제가 좀 있었거든. 처음엔 일본말을 몰라서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했지. 카짱이 일본어 선생님을 붙여줘서 식구들이랑은 무리 없이 대화를 했는데, 아이들이 하는 말은 도저히 못 알아듣겠는 거야. 그 애들이 뭐라고 하든 난 그냥 웃기만 했어.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해도 그냥 웃었어. 아이들이 나보고 우츄노 카이부츠라고 해서 카짱에게 물어봤지. 그게 뭐냐고. 카짱도 참 깜찍하지. 별나라 아이래. 우츄노 카이부츠가. 이상하지. 그때는 사실 별문제가 없었는데, 일본어도 능숙해지고 친구도 한둘 생기니까 학교에 가기가 싫은 거야. 무작정.”
“그래서 무작정 학교에 안 갔다는 거야? 부모님은 그냥 두디?”
“응. 억지로 보내지 않았어. 대신 요리학원에 보냈지. 너무 어리다는 이유로 어디에서도 받아주려 하지 않았어. 요리라는 게 불과 칼을 다루어야 하는 일이니까. 사정사정해서 집에서 꽤 먼 거리의 요리학원에 다니게 됐는데, 칼을 쥐자마자 단번에 깨달았던 거야. 내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 뭐 좀 쑥스러운 얘기지만, 요리 신동이라고 지역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나간 적도 있었어. 한 시간 내내 칼질하는 것만 찍더라.”
“우츄노 카이부츠, 그거 뭐였어?”
“우주 괴물.”
동선이가 입속의 밥풀을 스프레이 식으로 분사하며 푸하하, 웃었다.
“아무리 예쁘게 봐줘도 지구인이라기엔 무리데쓰요.”
다른 사람의 말에 좀체 반응을 보이지 않는 민재가 입을 다문 채 웃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밥을 먹고 만화책을 뒤적거리며 실없이 시시덕거리던 동선이가 늦었다고 요란을 떨며 현관을 나섰다. 학교에 가는 날보다 안 가는 날이 더 많으면서 이럴 때면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개근상을 받아온 아이처럼 굴었다.
“이번엔 빠트리는 거 없이 다 사와야 해.”
카스미가 동선이의 교복 주머니에 메모지를 넣었다.
일주일에 한두 번쯤 동선이나 민재가 학교에 가는 날 카스미는 메모지에 필요한 물품을 적어 보냈다. 야채와 가공식품, 생필품 등을 대형마켓의 분류대로 꼼꼼하게 정리해서 메모를 해주는데도, 결정적인 재료가 한두 개쯤 꼭 빠져 있었다.
“고구마랑 한천, 잊어버리지 말고 꼭 사와야 해! 꼭!”
건성으로 응응 하며 바이크에 시동을 거는 동선이의 등에 대고 소리쳤다.
“양갱 만들려고?”
“사오면. 뭐 꼭 필요한 건 아니고.”
카스미는 메모에 일부러 급하지 않은 재료를 한두 개 적어 넣었다. 어쩌다 빠진 재료가 급하지 않은 거면 팔짝 뛰며 좋아했다. 어이없이 바라보는 내 시선에 카스미가 대답했다.
“이런 게 바로 랜덤의 묘미거든.”
돌아왔을 때, 동선이의 가방에는 카스미가 준 메모에 적힌 것들이 하나도 빠짐없이 들어있지 않았다. 가방에서 플라스틱 컵, 금속 링, 장갑, 스카프, 카드 한 벌, 얇고 긴 지팡이 같은 것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나, 내 인생에 점 하나를 찍기로 했어!”
일제히 동선이 쪽을 바라보던 우리는 일제히 다시 고개를 돌려 각자 하던 일을 했다. 별것 아닌 것도 결연하게 말해서 시선을 끄는 것은 이를테면 동선이의 상습적인 말버릇이었다.
“더 이상 미술 같은 건 하지 않을 거야. 난, 마술을 할 거야.”
가방 속의 잡동사니를 연구하느라 동선이는 방에 틀어박혀 거의 나오지 않았다. 늘 떠벌리고 다니는 시답잖은 농담이겠거니 생각했는데, 꽤 열심인 모양이었다. 예전처럼 썰렁한 농담도, 혼자 말하고 혼자 웃는 것도 하지 않았다. 고도의 집중력을 뽐내며 도구를 만지작거리다가 이따금 고요한 시선으로 창밖을 보곤 했다. 동선이가 보이지 않으니 어쩐지 응접실의 기온이 0.5도쯤 내려간 것 같았다.
그나마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식탁에서도 온통 마술 얘기뿐이었다.
“마술은 말이야, 기술이 아니야. 너희는 마술이 눈속임이라고 생각하지? 기술만 익히면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하지? 마술의 바탕은 상상력이야. 마술에는 한계가 없어. 모두가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일을 마술이 하는 거야. 사람들이 꿈꿀 수 있게 하는 거야.”
“너희 그거 아니? 과학 이전에 마술이 있었어. 마술은 모든 지식과 지혜의 근원이었던 거야. 그러니까 이건 단순한 구경거리가 아니라고. 손끝에서 이루어지는 기적을 믿는 자만이 마술을 볼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거야.”
동선이의 마술은 혀끝에서 시작됐다.
저녁을 먹고 동선이의 공연을 보기 위해 한자리에 모였다. 동선이의 첫 번째 마술은 저글링이었다. 저글링이 왜 마술이냐며 카스미가 투덜거렸지만 다들 어느 정도는 기대하고 있는 눈치였다.
동선이는 자신의 손바닥 위에 있는 귤이 네 개라는 것을 마임으로 각인시킨 후 저글링을 했다. 우리가 지겨워 죽기 직전까지. 저글링을 멈추었을 때, 손바닥 위에 남아있는 귤은 세 개였다.
제법인데, 민재가 낮고 조용한 목소리로 감탄했다. 귤은 세 개에서 두 개, 두 개에서 한 개가 되었고 마침내는 완전히 사라졌다. 동선이가 비어있는 자신의 손을 펼쳐보이며 짜잔! 효과음을 넣을 때, 옆구리가 터진 귤 하나가 데굴데굴 굴러와 우리의 발치에서 멎었다.
“오로까모노―”
카스미가 감탄사처럼 입에 붙어버린 말을 중얼거렸다.
“무슨 뜻이야? 응? 너 그거 빠가야로, 뭐 그런 뜻 아냐?”
실패한 공연 때문에 머쓱해진 동선이가 일부러 발끈했다.
“멋있는 놈, 그런 뜻이야.”
“그래? 오로까모노, 나한테 딱 어울리는 말인데.”
동선이는 금세 화를 풀고 씨익 웃었다. 카스미가 고개를 저으며 아호, 하고 탄성을 질렀다.
그 애의 마술은 늘 무언가를 사라지게 했다. 주먹 쥔 손 안으로 손수건을 쑤셔 넣고 손을 펼치면 엄지손가락에 낀 고무 골무 밑으로 손수건의 빨간 귀퉁이가 메롱, 하는 혓바닥처럼 쏙 빠져나와 있었다. 종이컵 안에 물을 붓고 우리 쪽으로 물을 뿌리는 척하려다가 물을 먹어 젤리가 된 슬러쉬 파우더 덩어리가 카스미의 얼굴에 철퍼덕 달라붙기도 했다. 동선이의 마술은 그런 식이었지만 저녁 식사 후 동선이의 마술 공연은 계속되었고, 우리의 관심은 무엇이 어떻게 사라지느냐가 아니라 오늘은 또 어떤 실수를 할까 쪽으로 기울었다.
햇볕이 따뜻한 날이면 벽난로에 넣을 땔감을 주우러 산에 갔다. 마른 가지를 모아 불을 지피고, 보온병에 넣어온 된장국에 매실장아찌를 넣은 김밥을 먹으면 소풍을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쪽 다리를 저는 카스미는 걸음이 느렸다. 나뭇가지를 어깨에 메면 남자애들은 걸음이 빨라져서 카스미와 나는 뒤로 처졌다.
“지금 무슨 말 한 거야?”
“응?”
“카스미, 너 가끔 일본말로 혼자 중얼거려.”
“그래? 이상하네. 일본에 있을 때는 아이들이 내가 한국어로 혼잣말을 한다고 했거든.”
“일본 생활은 어땠어?”
“뭐, 그럭저럭.”
카스미는 평범한 가정에 입양됐다고 했다. 아버지는 외국계 전자회사의 회사원이었다. 엄마는 다회에 나가 다도를 가르치기도 했지만 대부분 집에서 살림을 했다. 부모님 얘기를 하다가 카스미가 빙긋 웃었다.
“카짱 말이야, 머릿속에 체크박스를 넣고 다녀. 쭕 매우 좋음 쭕 좋음 쭕 보통 쭕 나쁨 쭕 매우 나쁨. 집안은 늘 말끔하고, 삶아 빤 속옷은 뽀송뽀송하고, 일주일 단위로 영양소를 골고루 갖추어 식단을 짠다고. 그러곤 체크박스에 V표를 하는 거야. V표는 대개 보통과 나쁨, 매우 나쁨 사이를 오가. 자기 자신에게 너그럽지 않은 거지, 카짱은. 그런데 내가 학교에 가지 않아도, 속옷을 아무 데나 처박아놔도, 며칠씩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아도 내 체크박스는 온통 매우 좋음, 매우 좋음, 매우 좋음이야.”
“좋은 분들을 만났구나.”
“응. 하지만 아직도 어린애처럼 카스미짱이라고 부르는 건 끔찍해.”
“카스미, 그런데 왜 가출한 거야?”
“가출한 거 어떻게 알았어?”
카스미는 걸음을 멈추고 내 얼굴을 물끄러미 보았다.
“민지, 너 배니싱 트윈이라고 들어봤어?”
카스미는 태내에서 소실된 쌍둥이에 대해 이야기했다. 쌍둥이를 임신할 가능성은 10퍼센트 정도지만, 실제로 쌍둥이들은 그렇게 많이 태어나지 않는다. 쌍둥이 중 한쪽이 자궁에 흡수되기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는 태아가 완전히 소실되지 않고 다른 태아의 몸에서 발견되기도 한다. 베트남의 한 여성의 간에서 적출된 11주 된 태아나, 8개월 된 중국 남자아이의 뱃속에서 발견된 쌍둥이 등은 온전히 사라지지 않은 배니싱 트윈이라고 했다.
“이고르 나미야코프라는 러시아 남자는 열다섯 살에 등이 아파서 병원에 갔어. 의사는 등에 있는 혹이 인체에 무해한 지방덩어리에 불과하다면서 이고르를 돌려보냈대. 20년 후에 이고르는 극심한 통증 때문에 다시 병원에 갔고, 종양을 제거하는 수술을 하게 됐지. 이고르의 등을 가른 의사들은 깜짝 놀랐어. 이고르의 등에 있었던 건 종양이 아니었어. 그건 팔과 다리가 완전하게 갖추어진 그 남자의 쌍둥이였어.”
카스미는 비밀이라도 얘기하듯 소곤거렸다. 사실은 그 남자가 외계인의 숙주였다고 말하는 UFO 광신도처럼. 카스미는 바짓가랑이를 끌어올려 자신의 허벅지를 보여주었다. 왼쪽 무릎 바로 위쪽에 두 개의 호두알을 나란히 놓은 것 같은 혹이 불거져 있었다.
“내 쌍둥이야. 19년 동안 내 몸속에서 조금씩 자라고 있었어. 입양되자마자 병원에서 진찰을 받았는데 그때는 그냥 두어도 될 것 같다고 했어. 이고르처럼 말이야. 다리를 점점 심하게 절게 되자 병원에서 제거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어. 그래서 집을 나온 거야. 수술을 하지 않겠다고 하니까 카짱이 매일 울었거든. 하지만, 나는 수술을 할 수 없어. 수술하면 이 아이가 죽게 되니까. 지금도 이 아이는 조금씩 자라고 있다고.”
카스미는 정말로 그렇게 믿고 있는 것 같았다. 카스미의 말을 믿을 수는 없었지만 이해할 수는 있었다.
부모님의 장례를 치른 후 앞니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누구도 흔들리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내게 입을 벌려보라고 하지 않았다. 흔들리는 이를 자꾸 손으로 만지다가 이가 빠졌다. 작고 네모난 이의 뿌리에 피가 묻어 있었다. 이가 빠진 구멍을 혀끝으로 더듬으며 빠진 이를 멀리 던져버렸다. 그때 문득 이 세상에 나와 똑 닮은 쌍둥이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 애도 어디선가 스스로 뽑은 이를 멀리 던지고 있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조금은 따뜻해졌다.
“업어줄까, 카스미?”
“그래도 될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카스미는 미안한 기색도 없이 내 목에 팔을 둘렀다. 카스미는 다리를 흔들거리며 내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입김이 간지러워 나는 목을 움츠렸다.
“민지 목에서는 달콤한 냄새가 나. 오븐에서 막 꺼낸 빵처럼. 씨앗이었다가 새싹이었다가 물을 먹고 쑥쑥 자라 잎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밀이 되고 가루가 되고 반죽이 되고, 그렇게 오븐에 구워진, 오래오래 기다려서 부드러워진 냄새야. 배가 고파지면 나, 민지 생각이 날 것 같아.”
2월 14일. 세상 가득 눈이 내렸다. 민재는 졸업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카스미는 밸런타인데이 초콜릿을 만든다며 종일 가스레인지 앞에서 냄비와 씨름을 했다. 연금술사처럼 냄비에 이것저것을 넣고 끓이고 저었다가 마음에 안 든다며 끓이던 것을 개수대에 탈싹 쏟아버렸다.
동선이는 민재의 졸업장과 함께 무언가를 잔뜩 집어넣은 가방을 갖고 돌아왔다.
“이게 뭔지 아니? 오늘 밤에 불꽃놀이를 할 거야. 지긋지긋한 학교도 이제 끝이라고!”
동선이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열심히 학교에 다닌 아이처럼 말했다. 동네 청년회의 총무를 맡고 있는 삼촌이 겨울 수련회에서 사용하려고 사둔 폭죽을 몰래 가져왔다고 했다. 삼촌이 알면 날 죽이려고 할 거야. 동선이가 중얼거리며 혼자 킥킥거렸다.
카스미는 내내 부엌에 있었고, 동선이는 사용설명서를 몇 번이나 꼼꼼히 읽으며 폭죽의 상태를 확인했다. 민재는 방에서 나오지 않았다. 나는 모처럼 텅 빈 응접실에서 건성으로 책을 뒤적였다.
저녁을 먹고 후식으로 카스미가 만든 초콜릿을 먹었다. 호일로 틀을 만들었다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앙증맞고 예뻤다. 초콜릿은 딱딱했고, 단맛보다 쓴맛이 강했다. 쓴맛이 사라지고 난 후에는 달큼하면서도 떫은맛이 오래도록 남았다.
“초콜릿이 뭐 이따위야. 달지도 않고 쓰기만 하네.”
맛이 없다고 투덜거리면서도 동선이는 절반 이상을 혼자 다 먹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우리는 밖으로 나갔다. 밖은 온통 눈밭이었다. 나무도 땅도 검은 물이 고여있던 연못의 표면도 모두 눈에 덮여 반짝거렸다. 연못 건너편에서 동선이가 폭죽을 설치하는 동안 우리는 벤치에 앉아 서로 어깨에 팔을 두르고 초조하게 기다렸다.
“어쩐지 멋진 밤이 될 것 같아.”
민재가 중얼거렸다. 심지에 불을 붙인 동선이가 벤치 쪽으로 달려와 앉았다. 자, 모두 저쪽 하늘을 봐! 우리는 기대와 흥분에 휩싸여 동선이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쪽을 보았다. 한참이 지나도록 폭죽은 터지지 않았다.
“뭐야? 제대로 설치한 거야?”
카스미가 핀잔을 주었다.
“안 터져도 위험하니까 폭죽 쪽으로 가지 말고 기다리라고 설명서에 쓰여 있었는데.”
동선이가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폭죽을 설치한 곳으로 갔다. 동선이가 도착하기 직전에 갑자기 폭발음을 내며 폭죽이 터졌다. 그 바람에 놀란 동선이가 중심을 잃고 휘청거리다가 아예 바닥에 누워버렸다.
“오로까모노―”
잊지 않고 카스미가 중얼거렸다.
우리는 환호성을 지르며 하늘 가득 터지는 불꽃을 보았다. 불꽃이 사라지자 전보다 몇 배 더 짙은 어둠과 적막이 우리를 감쌌다. 우리는 불꽃이 점점이 사라진 검은 하늘을 응시했다. 우리가 본 것은 환하게 터지는 불꽃이 아니라 피어났다 금세 사라지는 불꽃의 스러짐이었다. 검은 하늘을 보며 생각했다. 불꽃이 아름다운 것은 그것이 이내 사라지기 때문이라고.
민재와 카스미가 집으로 들어간 후에도 동선이는 팔을 활짝 벌린 채 쌓인 눈 위에 엎드려 있었다. 다가가 동선이의 어깨 위에 손을 얹었다. 동선이는 울고 있었다.
“이럴 때…… 나, 나, 난 눈물이 나. 세, 세, 세상이 미치도록 아름다울 때. 나를 둘러싸고 있는…… 처, 청량한 대기와 눈에 덮여 하, 하, 하, 하얗게 빛나는 나무, 어깨에 팔을 두르고 서, 서로 기대있는 너희들…… 지, 지금 나는 이 땅을 안고 있어. 이, 이렇게 지구를 오, 오, 온, 온몸으로 끌어안는 거야.”
3.
동선이의 마지막 마술은 완벽하게 성공했다. 그 애의 마지막 마술은 그 애 자신이 사라지는 것이었다.
동선이의 아버지는 다짜고짜 그 애의 뺨을 때렸다. 아무 말도 못 하고 나란히 서 있는 우리를 위에서 아래로 쓱 훑어보는 동선이 아버지의 눈빛이 싸늘했다. 아버지에게 귀를 잡혀 자루처럼 끌려간 동선이는 그 후로 이곳에 오지 않았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말과 혼자 키득거리는 동선이의 웃음이 사라지자 온 집안이 고요했다. 우리는 가끔 동선이가 던졌던 썰렁한 농담을 떠올리며 조용히 웃곤 했다.
구운 가재 빛의 바이크만이 사과나무 아래를 지켰다. 동선이는 오프로드 바이크를 타고 이따금 산길을 달린다고 했다. 덜컹거리는 안장에서 엉덩이를 떼고 눈을 감으면 허공에 붕 떠오른 것 같은 느낌이 든다고 했다.
모처럼 시내에 다녀온 민재는 우리와 시선을 마주치지 않았다. 저녁을 먹고 차를 마시며 응접실에 앉아있는 동안 민재는 한마디의 말도 하지 않았다. 자려고 각자의 방으로 올라갔을 때 자기 방문 앞에 서서, 우리에게 등을 보인 채 말했다. 동선이가 죽었다고. 그 애의 엄마와 누나가 매달린 그 자리에서 목을 맸다고.
그 밤에 카스미가 몹시 아팠다. 해열제를 먹이고 온몸을 물수건으로 닦아도 열은 떨어졌다가 금세 다시 올랐다. 해열제로 떨어질 열이 아니었다. 허벅지의 종양을 제거하지 않는 한 카스미의 열은 계속될 것이다. 카스미의 다이어리를 뒤져 카스미의 집에 전화를 걸었다.
야미노 씨 부부는 아침 일찍 도착했다. 카스미의 엄마는 양엄마라는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카스미와 똑 닮은 모습이었다.
“카스미짱. 카스미짱. 카스미짱…….”
겨우 기운을 차리고 일어난 카스미를 안고 등을 쓸어내리며 카스미의 엄마는 몇 번이고 그 애의 이름을 불렀다. 정말 못 말린다니까, 하는 눈빛으로 나를 보는 카스미의 눈에도 눈물이 고여있었다.
택시에 오르며 카스미는 민재와 나를 향해 손가락을 활짝 벌리고 손을 흔들었다. 카스미의 엄마는 잊은 것이 있는 듯 종종걸음으로 다가와 나에게 상자 하나를 건넸다.
“고맙습니다. 신세 많이 졌습니다.”
카스미의 엄마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나 역시 고개 숙여 인사를 했다. 상자 안에는 비단 주머니로 곱게 싼 녹차가 들어있었다.
동선이의 방은 치우지 않은 마술 도구와 반납하지 않은 만화책들이 사방에 흩어져 어지러웠다. 방을 대충 정리하다가 8절 크기의 스케치북을 발견했다.
스케치북을 들고 침대로 갔다. 침대의 이불은 누군가 누웠다가 금방 빠져나간 것처럼 둥그렇게 솟아 있었다. 이불 아래 우멍한 구멍을 물끄러미 보다가 그 옆에 엎드렸다. 침대에서 동선이의 냄새가 났다. 그 애는 이미 사라졌는데, 뼈도 살도 모두 불태워져 흩어졌는데, 그 애의 체취는 쓰던 이불과 베개에 여전히 남아있었다.
동선이의 스케치북은 지구로 가득했다. 푸르게 빛을 발하는 지구의 모습이 페이지를 메우고 있었다. 나는 오래도록 그림을 보았다. 이 그림을 그릴 때 동선이는 어디에 있었을까. 지구를 볼 수 있는 곳이라면 지구의 밖의 어디쯤, 공기도 빛도 없이 까마득히 펼쳐진 우주의 암흑 속이 아니었을까.
아침에 일어나보니 민재가 없었다. 동선이의 바이크도 보이지 않았다. 민재가 아주 먼 곳으로 떠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어쩌면 민재는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4.
나는 이곳에 혼자 남았다. 외롭지도 사무치게 그립지도 않았다. 시간이 천천히 흘러갔다. 어딘가에서 잠 못 자고 벽 모서리에 웅크리고 있을지 모르는 민재를 위해 이따금 비올라를 연주했다.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산책을 했다. 산책에서 돌아오면 집안의 공기가 유난히 따뜻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었다. 내가 없는 사이 누군가 머물고 간 것 같은 온기가 집안을 훈훈하게 덥히고 있었다.
민재가 떠난 후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린 다음날에 사과꽃이 피었다. 카스미의 엄마가 선물한 녹차를 끓여 밖으로 나왔다. 차가 우러나면서 손톱끝만한 작은 이파리가 펼쳐졌다. 입안으로 딸려 들어온 녹차 잎을 앞니로 씹었다. 은은하면서도 깊은 향 속에 배릿한 풋내가 났다. 비가 내리기 전에 따낸 어린 녹차 잎은 카스미의 초콜릿처럼 달고 깨끗하면서도 떫은맛이 났다.
하늘의 가장자리에 타고 남은 노을빛이 붉게 번져있었다. 주위가 어두워졌다. 땅 위의 모든 것이 어둠에 묻히고, 머리 위의 사과꽃이 등을 밝힌 것처럼 환하게 빛났다.
노을빛은 참 아름답지. 노을빛이 아름다운 건 그것이 이내 사라지기 때문이야.
그 애들이 옆에 있는 것처럼 나는 소리 내어 중얼거렸다.
—계간 『시에』 2012년 겨울호
우승미
강원도 양구 출생. 200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장편소설 『날아라, 잡상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