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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12월 21일 대통령 령 '국민 총 동원령'에 따라 대구소재 육군보충대에 집결한 청년과 학생 6000여명 중에서 선발된 817명을 육군제7훈련소에서 입소하였다. 선발된 병사들은 훈련을 마치고 임시장교와 사병으로 계급과 군번을 부여받았다. 육군 11연대 363명, 12연대 330(낙오 170)명, 13연대 124명의 3개의 연대로 편성되었으며 적진후방으로 침투하였다. 백골병단은 이들 3개 연대의 장병을 통합하여 설립된 유격부대이며 1951년 2월 20일 육군중령 채명신이 백골병단의 창설을 선포하면서 총 지휘를 맡았다.
백골병단은 북한군으로 위장하여 후방까지 침투하여 많은 전공을 올렸다. 당시 남침한 북한군의 후방이었던 강원도 홍천군 광원리, 구룡령, 평창, 인제, 양양, 설악산, 오색, 단목령 등의 전투에서 인민군 69여단을 궤멸하였고 대남 빨치산 사령관과 지대장, 인민군 길원팔 중장, 인민군 대좌 강칠성 등 지휘부 전원을 섬멸하였다.
1951년 3월 설악산 지구 전투에서 북한군 1개 사단의 협공을 받아 고전하였는데 보급로가 차단되어 백골병단 병사들이 추위와 굶주림에 120여명이 동사하기도 하였으며 백골병단 장병 중 364명이 전사하였고 283명이 생환하였다. 백골병단의 호국정신을 기리는 비석이 강원특별자치도 인제군 용대리 산250-1번지에 세워져 있다.
백골병단은 적후방을 교란하는 유격부대이기 때문에 인민군복을입고
활약하였으며 게릴라부대는 정규군의 권리인 포로대우를 받지못합니다.
따라서 훈련소에서 급조된 사병들은 임시군번을 부여받았으며
군공식기록에 등록을 하지않습니다.
생존해서 귀한한장병들이 입영통지서를
받고 재입대한 사례도 있다고합니다.
조국이 위급할때 충정심으로 봉사한 젊은이들을 나몰라라한 정부에게
항의시위를한 HID사례도 있죠.
이런 불합리한사례들은 사후에도 바로잡아서 보상을 해야합니다.
채명신단장.
유신에 반대하여 중장전역합니다.
매바위 인공폭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