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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만리 한반도 둘레길 압록강 600리 길 ,,,
대륙을 말 달리던 고구려 호연지기가 꿈틀대는 국내성 중심에서 새벽을 맞이한다.
인천을 출발해 뱃길과 육로 2.000리를 이동했지만 지금 것 누구도 체력에 지장이 없다. 대단한 열정들이다.
새벽에 반짝 열리는 국내성 새벽 장터를 함께 찾는다. 숙소를 나서 약 5분 거리에 아파트 담장처럼 변해 버린 국내성터를 따라
철망과 인도 하나 사이 두고 도로변을 따라 길게 장터가 열려 있다
새벽장터
장터 범위가 꽤나 크다.
갖가지 채소와 한약재, 골동품 등 , 만물 장터다. 중국의 성장에 따른 사람들 표정도 많이 밝다.
장터 한 곳에 즉석 수타면을 뽑아내는 주방장의 손놀림이 묘기 대행진 하듯 2~3분이면 10인분 정도의 면발이 뚝딱 뽑아지고
즉석에서 아침 해장 우동을 말아낸다. 위생 상태가 생각 이상 양호하다. 십여 년 사이 천지개벽한 중국이다.
숙소로 돌아와 조식 시간이다.
한중수교 초기 당시 중국 고유의 향과 위생 상태 등으로 거의 식사를 하지 못하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중국의 경제 성장에 따른
음식 문화도 많이 변했고 향이 거의 없다. 위생 상태가 많이 개선되었고 식당 내부도 깔끔하다
조식을 마치고 호텔을 나서. 압록강변으로 간다. 강변 둑길에 올라서자 간밤에 내린 많은 눈이 강변 나뭇가지를 온통 하얗게
수놓으며 짙은 스모그에 가려. 강 건너 만포시는
시야에 들어오지 않는다.
둑길을 내려와 시가지에 접어들자 강변과 가까운 한 곳에 시골 장터가 열려 있다. 영하 20도가 넘는 추위 속 많은
사람들이
중국 특유의 요란한 소리를 지르며 활기가 넘친다.
노점에 살아 숨 쉬는 놈도 있다. 겨울잠을 자다 잡혀온 개구리들로. 한 근에 18원인데 20여 마리 될 것 같다
마리당 1원 정도의 가격으로. 시골 재래시장은 아직 때 묻지 않은 촌로들의 착한 가격으로 중국의 실물 소비 가격 그대로다.
한국인을 상대로 상황에 따라 가격이 달라지고 바가지 상혼이 판을 치는 백두산 지역 상인들이나 연길시 일부
몰지각한 상인들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장터 노점에 조선족 동포들도 많이 보인다.
장터 한가운데서 만주 개장수와 국내성 닭장수가 반갑게 조우를 한다. 만주 개장수는 국밥 한 그릇 산다며
닭장수를 데리고 국밥 골목으로 들어간다. 만주 개장수는 한일 합방 이후 압록강 철교를 건너가 만주 봉천 등을 다니며
개를 사고파는 조선 상인들로
개장수는 당시 한 시대를 풍자했다.. 5~60년대 남쪽에서는 시골 장터 소전을 다니며 소를 사고파는 소장수가
또 한 시대를 풍자했다..
영화 소장수는 당시 사람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얻었다,
오늘 국내성에는 닭 장수가 있었다,
.
국내성 일정을 모두 마치고 이제 험준한 국내령을 넘고 퉁화에 도착한다.
퉁화시 우회길을 벗어나 고속도로 나들목에 접어들자 백산 55km의 이정표가 나오고. 40여 분 소요되고
백산시 초입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우회전길에 접어들자 좌측에 백산시 화력발전소 용광로에서 거대한 연기를 뿜어낸다. 이곳에서
백두정간의 두 번째 고개 중강령을 넘으면 압록강변길이 시작되는 임강시가 나온다.
대륙에서 임강 가는 유일한 길이다
3차 8월
국내성 집안에서 압록강을 따라 임강시로 이어지는 강변도로가 곧 완공된다고 한다.
공사가 끝나면 퉁하 백산시로 이어지는 기본 우회길에 비해 두 시간 넘게 시간을 단축할 수 있고
여행객들은 압록강 전 구역(803km) 대부분 접할 수 있다.
3차 당시 임강시로 이어지는 강변도로가 완공됐다는 정보를 집안서 얻어 듣고
기존 우회 길을 대신해 국내성 집안에서 바로 압록강변길에 접어들었다.
임강까지 400리 넘는 강변도로인데. 초입에 차량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압록강 최오진 강변길로
자연풍경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압록강 최고의 비경으로 강 건너 북녘의 풍경도 새롭게 다가온다, 상류와 달리 별장 형태의
고급 주택과
연수원 같은 건물이 많이 보인다.
강변길을 따라 두 시간이 지날 무렵 압록강은 거대한 호수처럼 넓어지고 낭떠러지가 나온다.
우측은 압록강 아래로 100m가 넘는 수직 절벽이며 좌측은 하늘로 치솟은 수직 직벽이다. 직감적으로 위험이
느껴진다. 좌측 직벽에서 떨어진 낙석들이 도로 곳곳에 뒹굴며 차량통행을 방해하며 대형사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나 관리된 흔적은 찾아볼 수 없다 낙석 등은 기사들이 치우며 운행하라는 식이다.
이곳에서 전후 두 시간여 거리 내 민가나 관공서등이 없다..
간담이 다 서늘해짐을 느낀다.
다행히 기사의 테크닉과 안전 운행으로. 겨우 낙석 구간을 빠져나오는데 이번에는 또 미완공 상태의 다리가
우리 팀 발목을 잡는다. 다리는 현재 공사 중으로 차량 진입 자체가 불가하다... 민가도 사람도 보이지 않는다.
차를 돌리기에 너무 깊숙이 들어와 버렸고 유턴할 공간도 없다. 강 건너편은 북녘 땅이다. 곧 해가 저문다.
우리 팀 스스로 다리 좌측으로 길을 만들어가는 길 외는 달리 방법이 없다.
설상가상 비까지 쏟아지고 있다.
20명 넘는 팀 전체가 물에 빠진 생쥐 꼴이 따로 없다.
백두산 길목에서 너무 소중한 체험을 하고. 비 오는 압록강. 참 멋진 낭만도 함께 있었다.
그러나 누구에게도 권하고 싶지 않다 다리가 완공된다고 한들 도로 곳곳에는 낙석 등 중국 특유의 대형사고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1차 1월
백산에서 중강령을 넘고 있다. 중강령과 국내령은 고도가 비슷한데 중강령에는 크고 작은 터널이 많이 뚫려있어
국내령에 비해 시간이 많이 단축된다.
마지막 작은 터널을 하나 빠져나오자 바로 임강시가 펼쳐진다.
임강시는 집안에 비해 도시 규모가 작고 강 건너편은 북녘의 중강진이다. 중강진은 남북을 통틀어 한반도에서 가장 춥다는
지역으로 영하 43도까지 내려간 기록을 갖고 있다. 여름 시즌에는 이곳에서 모타보트를 띄워 집안 국내성까지
400리 압록강 뱃길투어 영업을 하고 있다고 한다.. 개인적으로 꼭 한 번 타고 싶다.
임강시 우회 도로를 벗어나자 우측에 안내 표지판이 하나 서 있다. 600리 압록강 강변길 시작을 알리는 표지판으로
장백현 210km다.
압록강 좌측으로 백두정간의 산줄기는 중국 내륙을 가로막고 있고 강 건너 또 하나의 산줄기 압록강정간은
북한 내륙을 가로막고 있다 압록강은 양 산줄기 사이에서 내륙과 철저히 고립돼 2개의 산줄기를 따라
서해 비단섬까지 2.000리(803km)를 흘러내린다.
백두산에서 압록강을 따라 발원된 이 2개의 산줄기는 대동여지도나 산경표 등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고 표기가 없다.
산경표에는 백두대간을 제외한 2 정간 12 정맥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하나의 정간은
함경도 두류산에서 가지를 쳐 북쪽으로 뻗어내려 아오지 탄광을 거쳐 두만강에서 맥이 끝나는
하나의 작은 산줄기를 장백정간으로 표기하고 있다.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또 하나 남은 정간은 표기 자체가 없다. 산경표를 비하할 생각 조금도 없다.
당시 조선 최고의 지도며 대간이라는 발상 자체가 당시 위대한 발상이다. 그러나 장백정간이라는 용어는 사대주의가
득세하던 시절 나온 발상으로 잘못된 표기다.
또 2 정간 12 정맥의 기준이 명확하지 않다.
위성이 내려다보는 지금 정확히 재정립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산경표의 가치를 후세들이 더 높이 만들어 가는 것이다.
압록강 빨래터
안내 표지판을 지나자 하얗게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이 펼쳐지고 한 폭의 그림같은 풍경으로 다가온다
강 건너 한켠에 얼음을 깨고 아주마이 혼자 빨래하고 있다.
놀랍다. 온도계는 지금 영하 20도를 가리킨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소리쳐도 답이 없다.
아이들 방학 했습까??
아이 했습다라고 답이 온다.
참 반갑다.
지금 영하 20도 아래로 떨어졌고. 물에 젖은 손이 아리고 대답할 여력이 없을 것인데 소리 내준다
다시 마을이 나오고 빨래터는 어김없이 나온다, 이곳에는 4~5명이 함께 같은 형태로 얼음을 깨고 빨래하고 있다.
임강에서 40여 분 지나 김형직 군 읍내 빨래터다. 이곳에는 물도 길어 가고 있다. 여자들은 물동이를 이거나
썰매를 끌고 남자들은 물지게를 지고 간다. 식수로 사용하는 듯 많은 사람들이 물을 길어 가고 있다.
지금 우리는 조선시대 삶을 한 편의 그림으로 보고 있다.
강 건너 북녘에는 자주 마을이 나오지만 중국에는 마을이나 집들이 없다. 그만큼 삶이 열악한 곳이다.
텅 빈 강변도로를 따라 두 시간이 지날 무렵 좌측 산기슭 한 곳에 허름한 주택이 하나 나온다. 600리 강변길에 유일하게 휴게소
역할을 하는 곳이다. 강 건너 압록강 빨래터에 취해 시간이 많이 지체돼 어느새 3시를 가리키고 있다 늦은 중식이다. 요리 몇 가지를
시켜 컵라면 등으로 배를 채우고 출발한다. 아주마이 강 건너 우리 북녘 동포들과 잘 지내시라우
다음 차 5월에 는 압록강에 오작교를 놓고 쌀밥에 토닭을 잡고 강 건너 빨래터 아주마이들과 함께 잔을 나누며
통일잔치로 하룻밤을 묵을 것이다. 단디 챙겨 달라
주모도 알았다며 다음에 꼭 오라고 고개를 끄떡인다.
아주마이 잘 있어라우 다시 출발한다..
통행 차량은 거의 없다. 주택 한켠에 황구도 외로움에 떨었는지
얌전히 꼬리를 흔들며 인사를 나눈다
.
강 건너 강촌 마을이 그림처럼 다가오고 어디를 둘려봐도 외부와 연결된 도로망은
보이지 않는다 겨우내 마을은 내륙과 철저히 고립될 것으로 보인다.
건널 수 없는 땅 참 아름답다. 마을이 있는 곳은 어김없이 빨래터가 나온다.
김정숙 군 읍내 빨래터다 이곳에서는 더 많은 사람들이 빨래도 하고 강물을 길어가고 있다.
김정숙 군은 본래 지명은 함경도 신파군이다. 김정숙은 항일운동 당시 이곳 신파군에 지하조직을 두고 부녀회 활동을 했고
일본 경찰에 잡혀 옥 살이도 한 곳이다. 항일운동 당시 김일성과 결혼해. 1942년 김정일을 낳고 1949년
32세의 나이에 사망한다. 1954년 북한의 행정구역 개편당시 함경남도 일부를 양강도로 신설해
김일성은 신파군을 첫 부인의 이름을 따 양강도 김정숙 군으로 개명해 지금에 이른다.
사망한 본 처를 몾 잊어하는 독재자 김일성의 인간적 내면이 돋보인다. 당시 남쪽의 독재자 박정희는 조강지처를 버리고
후처를 얻어 국정 얼굴 마담으로 내세우고 본처는 비구니가 된다.
조금 전 지나온 김형직 군은 본래 지명은 후창군이다. 김형직은 김일성의 부친으로 당시 의사다. 이곳에서 의원
간판을 내걸고 지하조직 광복회를 조직해 북간도 무송과 길림을 넘나들며 한반도 독립사에 많은 공헌을 남긴다.
광복 후 행정구역 개편 당시 김일성은 후창군을 아버지의 이름을 따 김형직 군으로 개명했다.
김정숙 군에서 동북쪽 내륙으로 더 들어가면 김형권 군도 있다. 김형권은 김형직의 동생으로 김일성의 삼촌이다.
김형권은 당시 풍산군 피발리 주재소를 습격해 일본순사들을 처단하고 쫓기면서 읍내 아버지 친구 집에 숨어들었다. 이때
아버지 친구의 고발로 김형권이 잡혀 처형된 곳으로 김일성은 풍산군을 삼촌의 이름을 따 김형권 군으로 개명한다.
당시 김일성 가족은 자신과 아버지 삼촌 부인까지 온 가족이 모두 항일 무장 독립투쟁가로 한반도 독립운동사에 가장 앞선 성골 가족이다.
이후 북쪽의 정권을 잡은 김일성은 독립 운동가 출신자들에게는 많은 특혜를 준 반면 친일 부역자들은 끝까지 찾아내 숙청했다고
전해진다.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으로 반민족 행위자 박정희와 많은 것이 대비된다. 당시 박정희는 정권을 잡고 김일성 머리에
도깨비 뿔난 가짜 김일성이다라며 대국민 사기극을 치고 독립군 출신자들을 철저히 외면하고 친일 반민족 행위자들에게는
독재정권 내내 중요 요직을 다 내주고 가슴에 훈장까지 주렁주렁 달아주었다. 역사도 어김없이 가재는 게 편이다
김정숙 군을 지나고 오늘의 종착지 장백현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압록강 600리 길 내내 북녘의 마을을 스치며 강 건너 북녘의
아름다운 풍경들.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었다 빨래터에 헐벗은 북녘 동포들의 모습을 보며
마음이 짠하다.
3차 8월
전날 공사 중인 다리를 건너자 못해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1박 예정이던 장백현을 갈 수 없었다.
결국 일정에 없던 임강에서 1박 한 후 아침 7시경 임강을 출발해 바로 강변길에 접어들었다.
진기한 풍경이 펼쳐진다. 강 건너 북녘의 강촌 마을 집집이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고 있다. 쌀보리나 옥수수 등으로 조식을
준비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남쪽의 60년대 산골마을 판박이로 참 정겨운 풍경이다.. 다음에 나오는 마을도 같은 풍경이다
압록강 600리 길 강 건너 북녘에는 55개 강촌 마을이 있다. 김형직 군과 김정숙 군. 혜산시 등 3개 시군을 제외하면
52개 강촌 마을로, 50년대부터 경미한 범죄를 저지른 인민들을 상대로 귀양살이 형태로 보내 적게는 5~6호
많게는 30여 호 가구로 형성된 마을들이다.
5월 2차 당시 우리 팀이 차에서 네 시간 넘게 하나. 둘 꼬박 헤아린 숫자로 정확할 것이다. 강 건너 북녘에는
많은 강촌 마을이 있으나 평야는 찾아볼 수 없다. 산기슭 공간을 찾아 집을 짓고 하천과 산을 일궈 옥수수, 감자, 콩 등을 심어 자
급자족으로 공동체 생활을 이어간다 여름철 홍수가 나면 하천의 작물들은 대부분 피해를 입는다.
홍수를 피해 지대가 더 높은 산 위로 올라가 일궈놓은 밭들을 이곳 사람들은 뙈기밭이라고 한다,
마을 앞으로 압록강이 가로막고 마을 뒤편 압록강정간의 긴 산줄기는 북한 내륙과 소통을 막고 있다.
각 마을이 내륙과 연결된 도로망은 거의 없다. 귀양지로 천혜의 요새다. 현대판 한반도의 빠삐용으로 한 번 들어오면 기관에서
발부하는 통행증을 지참하지 않고는 외부로 나갈 수 없다고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고난의 행군 당시 이곳 마을들이 북녘에서 가장 부를 누린 마을이라고 한다.
산을 자유롭게 개간하는 등 뙈기밭과 지천에 늘린 압록강 어류 등 또 뗏목공 벌이로 밥은 굶지 않는다는 소문이 나면서
외부 사람들이 먹을 것을 찾아 이곳 강촌 마을로 찾아들지만 이것마저 자유가 없다고 한다
탈북 때문이다.
강촌 마을에서 꽁꽁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는데 1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중국 측 강변은 경비병도 철조망도 없다.
그러나 강촌 마을 주민들은 탈북이 없다고 한다.
배가 부르기 때문이다. 21세기 북녘의 현실이다.
마을 앞 압록강에 붕어 등 물고기들이 넘치고 하천과 산을 일군 뙈기밭에는 옥수수 알이 익어간다.
60년대 대중가요 강촌에 살리라 라는 가사 같은 풍경이다.
소들이 강변 곳곳에 방목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강촌 마을은 다 부촌 마을인 같다.
북한은 소가 아주 귀하다고 한다.
김정숙 군 가까이 접어들자 뗏목이 내려오고 있다.
이곳에서 장백현까지는 약 40 km 남짓 거리다, 어제 오전경 장백현 부근의 한 곳을 출발해. 꼬박 하루가 지나 100리 정도
지나온 것을
추측할 수 있다. 뗏목 위에 불을 피워 아침밥을 짓는 진 풍경이다.
이들은 앞으로 3 ~4일 넘게 뗏목에서 식사 등 배설까지 모든 것을 해결해야 한다.
접안이 가능한 중강진이나 만포시 아니면 수풍댐까지 노를 저어야 한다.
지구에서 압록강이 아니면
볼 수 없는 진 풍경이다.
저들이 배만 부르면 뗏목 래프팅.. 낭만 그 자체다.
압록강 물줄기는 2.000리(803km)다.
노를 저어라 에야디야~
이천 리 길 압록강 에야디야
노를 저어라 에야디야
가는 이 수심 지니 한숨의 배요
오는 이 서럽나니 눈물의 배라
압록강 이천 리는 서러운 눈물
오늘도 슬픔 속에 배를 띄어라
에야디야 에야디야~
하나의 배를 띄어라
강촌 마을의 슬픈 애환을 싣고 압록강 뗏목은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에야디야...
강변길 600리 길 내내 마을 앞 강 가에는 어김없이 빨래터 아주마이들이 나온다.
겨울에 얼음을 깨고 빨래하던 모습과는 달리 많은 여유가 보인다.
강변가 강냉이 밭 주변을 따라 순찰을 도는 국경수비대 초병들이 많이 왜소해 보인다.
강냉이 죽으로는 저들의 성장을 돕지 못한다. 총의 무게가 부담인 듯 꽁총을 메고 있다.
압록강 두만강은 넘지 못하는 강.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이 라며 애국가도 우리를 반도의 틀에
가둬놓고 압록강 두만강은 건너지 못하는 강이라며 우리를 반도에만 머물게 한다. 남도 땅끝 마을과 두만강까지
직선거리가 삼천리다. 두만강 아래까지 한반도 영토라고 즉 삼천리 화려 강산이 라며 위정자들은 여름날 고목나무 시롱 매미처럼
울어댄다 사대주의에 절은 학자들이나 관료들이 알아서 기고 위정자들로부터 전해 온 고대사 교육. 등에서
이를 걸러내지 못한 학교 선생들의 역할도 한몫 거들었고 고조선 역사를 단군 신화로만 치부하던 공 교육이
한 세기 가까이 행해지면서 우리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 발해. 조선으로 이어진 거대한 대륙의 역사를 묻어버린 것이다.
압록강, 이제 우리도 건너자 우리는 다음 역사를 준비해야 한다
백두산정계비에 기록된 조. 청 국경은 토문강을 중심으로 동서로 나뉘었다,. 토문강 물줄기는 송화강(1960KM)으로
흘러들어 러시아 아무르강(2824km)에 합류해 연해주를 남북으로 가르며 동해(오호즈크해)로 흘러간다.
토문강의 물줄기는 백두산정계비에 기록된 정확한 한반도의 국경 라인이다.
1차 1월
압록강 빨래터에 취해 많은 시간을 보내고 어둠이 내리고 오늘의 종착지 장백현에 도착한다.
개천 정도의 압록강 건너편 양강도 혜산 시가지에는 암흑 속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숙소에 도착해 객실을 배정받는데 단동이나 집안의 숙소에 비해 격이 많이 떨어지고 직영 식당마저 없다 서둘러 짐을 풀고
주변 식당으로 이동한다.
갖가지 요리가 나오고 푸짐한 석식 자리다. 인천에서 4일 차 모두가 식욕도 왕성하다.
내일은 남백두 4호 경계비 일정과
전설의 백두령을 넘는다..
내일 남백두에 입성한다.
백두산 용어에 관해 몇 가지 정리한다.
백두산은 우리 여행객들에게 크게 북파, 서파, 남파. 동파로 나뉘어 불린다 파는 중국식 언어로 비탈이나 언덕이라는 비어다.
북파는 북쪽의 비탈 서파는 '서쪽의 비탈이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된다.
북한으로부터 임대받은 남백두 역시 중국 측의 의도대로 남파로 불리고
북녘의 동백두 또한 우리 여행객들은 중국식 언어를 그대로 따르며 동파라고 부르고 있다.
필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듣기에 따라서는 백두산을 비하하고 불순한 의도를 가진 언어 침략으로 보이고 백두공정의 일환으로 들린다.
심각한 문제는 우리 여행객들의 의식과 국내 여행사 가이드들의 수준이다.
조선족 가이드들 또한 많은 한계점을 안고 있다.
우리 역사를 올바르게 접할 기회조차 없던 이들은 중국의 공산당 체제에 학습된
역사관을 가졌고 이들의 정신세계는 중국이다. 이들에게 우리 역사와 문화를 안내받는다는 것은
자존심을 떠나 우리 문화를 말살시키는 행동들이다.
현재 남백두를 다녀온 대부분 우리 여행객들은 압록강 대협곡을 압록강 발원지로 잘못 알고 돌아온다
조선족 가이드들이 아니면 말고식의 무책임한 안내에 따른 결과인데 어느새 우리 사회서는 압록강 대협곡이 압록강
발원지로
정착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중국 공산당의 동북 공정이 무서운 이유가 여기 있고 고구려 박작성 또한 이들은 중국
공산당이
억지 논리를 펼치고 있는 만리장성 동쪽 끝이라는 호산장성으로 안내하고 있다.
압록강 발원지는 장군봉 아래 서쪽 능선의 물줄기라고 1712년 조 , 청 두나라가 백두산정계비에 정확히
기록해 두였고,. 호산장성 또한 고구려 박작성이라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기록돼 지금 것 전하고 있다.
우리 여행객들은 단수가 한 수 더 높다.
한국을 떠나기 전 온갖 수식어를 동원해 우리 민족의 영산 백두산을 나도 간다고 온 동네 자랑을 늘어놓는다.
그리고 이곳에 와 백두산을 불과 며칠 둘러보고는 귀국해 장백산 북파 장백폭포에 다녀왔다며 또 온 동네 자랑을
늘어놓는다.
이들은 단 며칠 사이 언어를 점령당한 체 압록강 발원지는 압록강 대협곡이고 만리장성 끝은 호산장성이다며
각종 포털 사이트에 도배질하며 자랑을 늘어놓는다.. 자칭 백두산을 연구한다는 학자들 역시 별반 다르지 없다.
자존심 따위는 찾아볼 수 없다.
부끄러운 줄 알아야 한다.
백두산은 백두산이다..
장백산(長白山) 탄생에는 연변 조선족 사회가 있다.
1962년 김일성과 모택동은 북, 중 국경 회담에서 김일성은 백두산정계비에 기록된 토문(土門) 강을 두만강으로
양보한다.
정계비 서쪽의 천지까지 약 5km의 산과 또 천지 절반 이상과 압록강과 두만강에 산재한 하중도 대부분 북한의
영토로 한다는 데 합의하고
산의 명칭은 백두산(白頭山)으로 양국이 함께 사용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이후 중국에서 발행되는 대부분 지도에
백두산(白頭山)으로 표기돼 발행되지만. 중국 문화혁명 이후 모택동이 죽고
슬그머니 長白山( 창바이)으로 표기된 중국 지도가 새롭게 등장한다. 당시 백두산 관리 주체이던 연변 조선족
자치주 연변 사회에서
창바이(長白山)를우리말 그대로 장백산으로 읽으면서 변종된 외계어가 탄생했고
불과 반세기 채 안돼 백두산은 어느새 장백산과 장백폭포로 정착되고 있다.
. 중국공산당은 국가 대 국가 간의 조약도 파기하고 백두공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사실
우리 여행객들은 반드시 알아야 하고 최소한 저들의 백두공정에 놀아나서는 안될 것이다
우선 올바른 우리 언어라도 바로 지켜가며 중국공산당의 백두공정에 우리도 하나식 대응 해야 할 것이다.
우리가 아껴야 할 북녘의 동백 두를 찾는 그날이.
곧 다가올 것이다
역사는 준비된 자를 또 기다리고 있다.
팔공산 자락에서......................
이 정 우
백두산과 1만 리 한반도 둘레길 어느 구간이던 정보가 필요하신 단체 개인등 연락 주세요
현지정보 및 교통 숙박 숙식등 상세한 정보 드리겠습니다
많은 분들이 함께 하시길 기대합니다.
E_mail : kdjj80@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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