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293
10월29일 [연중 제30주간 토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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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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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E8Sfr557gt0 (김두중 베드로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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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우리 주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바오로 사도의 생애 안에서 주님의 성령께서 하신 일은 정말이지 깜짝 놀랄 정도였습니다. 그는 젊은 시절 예수 그리스도를 박해하는데, 최일선에 서서 달려가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강풍이 불어오자 박해자 사울은 애제자 중의 애제자 바오로 사도로 환골탈태했습니다. 남은 생애 내내 바오로 사도는 한때 자신이 그리스도를 박해하던 존재였음을 크게 가슴 치며, 이제는 그리스도를 위해 당장이라도 목숨까지 바칠 각오를 하고 살았습니다.
바오로 사도에게 있어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는 삶의 유일한 의미요 희망이었습니다. 그가 살아가는 존재의 이유가 되었습니다. 이런 바오로 사도의 완벽한 변화의 흔적이 오늘 우리가 첫 번째 독서로 봉독한 필리피서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입니다.”
“사실 나에게는 삶이 곧 그리스도이며, 죽은 것이 이득입니다.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 더 필요합니다.”
보십시오. 참으로 놀랍습니다. 회심한 바오로 사도는 조금이라도 빨리 그리스도를 만나뵙고자 하는 마음에 최대한 빨리 이 세상을 떠나고 싶어했습니다. 그가 얼마나 그리스도를 갈구했고, 그리스도를 사랑했는지를 잘 확인할 수 있는 대목입니다.
바오로 사도의 회심 여정을 묵상하면서 얻게 되는 깨달음은 참으로 큰 것입니다. 우리 주님께는 불가능이 없습니다. 원판불변의 법칙을 굳게 믿으며 ‘이 나이에 무슨 변화?’하지만, 주님께서 하시고자 하시면 안 되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향해 좀 더 마음을 활짝 연다면, 우리가 이웃들을 향해 좀 더 관대하고 너그러운 마음을 지닌다면, 우리가 절망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끝까지 희망한다면, 주님께서 반드시 활동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다가오시고 불가능을 가능케 하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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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교만은 돼지비계처럼>
새를 파는 가게에 잘 생긴 카나리아가 한 마리 있었습니다. 이 카나리아는 아름다운 노랫소리로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이곳을 지나가던 마을의 부자가 그 카나리아를 샀습니다. 카나리아는 고운 소리로 노래를 불러 집안사람과 손님들, 이웃 사람들을 즐겁게 해주었습니다.
새 주인이 된 부자도 그 카나리아를 자랑하고 칭찬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러자 카나리아는 우쭐해졌습니다. 그래서 밤이 되어도 노래를 그칠 줄 몰랐습니다. 카나리아의 노랫소리를 칭찬하던 사람들도 이제는 시끄럽다고 항의를 할 정도였습니다.
아무도 카나리아의 노랫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결국 그 부자는 카나리아를 헐값으로 시장에 내다 팔았습니다. 그 카나리아를 사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인생을 망칠 수 있는 가장 큰 적은 자신 안에 있습니다. 자아라고 하고 교만이라고도 합니다.잘 나가다 교만해져 망해버리는 수많은 사람을 우리는 뉴스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성공할수록 조심해야하는 것이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사제가 되기 전부터 알고 지내던 출신 본당 자매님이 계셨습니다. 서품받을 때도 앞장서 저를 도와주신 분입니다. 사제가 된 지 몇 년 후, 그 자매님과 통화를 하게 되었는데 저에게 따끔한 말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신부님의 겸손하고 온유한 모습이 좋았었는데, 지금은 안 그래요.” 그러고 보니 전화를 받는 투가 퉁명스럽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투로 신자들을 대하고 있었습니다. 신자들이 치켜세워주니 자신도 모르게 그렇게 되었던 것입니다.
교만은 교만하고 싶어서 교만해지는 것이 아니라 저절로 교만해지는 것을 방치했기 때문에 교만해지는 것입니다. 교만은 마치 잡초처럼 원하지 않아도 저절로 자라나 나를 망쳐버립니다.
나이 많은 한 수도자가 정원에서 흙을 고르고 있었습니다. 그때 그 수도원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는 조금은 교만한 젊은 수도자가 그에게 다가옵니다. 경험 많은 수도자는 후배 수도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이 단단한 흙 위에다 물을 좀 부어주겠나?”
젊은 수도자가 물을 부었습니다. 그러자 물은 옆으로 다 흘러가고 맙니다. 그러자 이 나이 많은 수도사는 옆에 있는 망치를 들어 흙덩어리를 깨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부서진 흙을 모아놓고 젊은 수도자에게 다시 한번 물을 부어보라고 말합니다. 물은 잘 스며들었고 부서진 흙을 뭉쳐 가기 시작했습니다. 나이든 수도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야 흙 속에 물이 잘 스며드는구먼. 여기에 씨가 뿌려진다면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을 것이야.
우리 역시 깨어져야 하느님께서 거기에 물을 주시고, 그럴 때 씨가 떨어지고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힐 수 있는 거지. 우리 수도자들은 이것을 ‘깨어짐의 영성’이라고 얘기한다네.”
소련의 반체제 인사 알렉산더 솔제니친은 “교만은 돼지의 비계와 같이 인간의 마음에서 자란다.”라고 했습니다. 비계는 운동을 하지 않으면 저절로 생기게 돼 있습니다.
끊임없이 낮아지는 연습이 없으면 나도 모르게 나 자신이 교만 때문에 망가집니다. 깨어짐의 영성은 수도자들만의 것이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부서지고 낮추인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작업은 자신만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높은 자리에 앉지 말라고 하십니다. 끊임없이 가장 낮은 자리를 찾아야 합니다. 의식적으로 그렇게 해야 합니다.
저절로 교만해지기는 하지만 저절로 살이 빠지지 않듯 저절로 겸손해지지 않습니다. 겸손은 마치 흐르는 물의 방향을 거슬러 올라가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도 겸손하기 위해 맨 마지막 자리를 의식적으로 찾는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내일은 더 교만해져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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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오랜 만에 신부님들 4명이 함께 캠핑을 가기로 했습니다. 아름다운 가을의 단풍을 보기로 했습니다. 캠핑에서 먹을 음식도 준비하고, 캠핑 장소도 예약하고, 준비물을 다 챙겼습니다. 떠나기 며칠 전에 신부님 한 분이 감기 몸살이 심하다고 함께 하지 못해서 아쉽다고 했습니다. 건강을 잘 챙기라고 인사하였습니다. 출발 당일에도 신부님 한 분이 몸 상태가 안 좋다고 다음 날 오겠다고 하였습니다. 미리 이야기를 해 주면 좋았을 텐데 약간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캠핑장에 도착해서 해야 할 일은 많았지만 모처럼 후배 신부님과 둘이서 즐거운 시간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2차선 도로에 4대의 차가 들어오면 병목 현상이 있어서 교통의 흐름이 원활하지 못할 수 있습니다. 반면에 4차선의 도로에 2대의 차가 지나가면 막힘없이 원하는 곳으로 갈 수 있습니다. 4명이 함께 하기로 했지만 2명이 캠핑을 하니 그것도 좋았습니다. 우리 옆에는 혼자 캠핑 온 젊은 친구도 있었습니다. 함께하는 인원도 중요하지만 자연 속에서 가을의 정취를 느끼는 것도 중요합니다.
문득 미국에 와서 제가 하는 일들을 생각해 봅니다. 저의 주된 업무는 ‘가톨릭평화신문미주지사’의 일입니다. 신문을 만들고, 홍보를 통해 구독자 수를 늘리고, 직원들이 일을 기쁘게 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것입니다. 2년 전부터 ‘부르클린한인성당’의 일도 하고 있습니다. 매 주일 미사를 봉헌하고, 장례가 나면 연도를 함께하고, 본당의 행사에도 참여합니다. ‘퀸즈성정하상바오로성당’의 미사도 도와주고 있습니다. 주로 목요일 아침미사를 하고 있습니다. ‘동북부엠이대표’의 일도 하고 있습니다. 매달 줌 미팅이 있고, 엠이 주말도 있고, 미주지역 엠이 총회도 있습니다. 바쁘기는 한데 어찌하다보니 그렇게 되었습니다. 4가지의 일이 서로 다른 것 같지만 하나의 공통점이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신문은 지면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부르클린한인성당은 미사와 강론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퀸즈성정하상바오로성당은 사제들과의 친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함께 느끼고 있습니다. 동북부엠이대표를 하면서 부부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고 있습니다. 제가 맡은 일도 중요하지만 그 일을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확고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가식으로 하든 진실로 하던 그리스도를 전하는 것이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기쁘다고 합니다. 바오로 사도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사는 것도 아니고 죽은 것도 아니라고 합니다. 사실 사느냐 죽느냐는 우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바오로 사도는 살든지 죽든지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합니다. 우리 삶의 목적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하는 일의 양을 이야기 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이루는 업적을 이야기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든지 ‘겸손’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하느님께서 다른 것들은 모두 채워 주실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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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루카 14,1.7-11: 스스로 높이는 자는 낮아진다.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 사람의 집에 초대를 받아 가셨다가, 사람들이 모두 상석에 먼저 앉으려고 하는 것을 보시고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11절) 하신다. 하느님 앞에 겸손한 자세를 가지라는 말씀이다.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드리게’ 할지도 모른다.”(8절) 이런 일을 당하면 얼마나 창피할까! 이것은 도둑질하다 붙잡혀서 훔친 물건을 도로 내놓는 것과 같을 것이다. 그는 그것을 가질 자격이 없으므로 가지고 있던 것을 내어놓아야 한다. 그 자리에 앉을 자격이 있는 온유하고 겸손한 사람은 그 자리를 남에게 양보한다. 그런 사람은 아무도 그를 헛된 자만에 차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받아 마땅한 명예를 누리게 된다.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 앉게’ 할 것이다.”(10절) 윗자리에 앉으려고 하면 마땅히 빛나는 덕행으로 다른 사람을 앞서야 한다. 덕행의 법칙은 뽐내지 않고 자기를 낮추는 마음이다.
겸손한 신앙인이 있고 교만한 신앙인이 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 나라를 자신해서는 안 된다. 우리가 만일 참된 겸손으로 오를 수 있는 높은 곳에 닿고자 한다면, 선행으로 올라가야 한다. 이것이 야곱이 보았던 사다리이다. 사다리의 양쪽 장대는 우리의 영과 육이며, 가로대는 겸손과 수양으로 만들어져 있어 그것들을 밟고 하느님께로 올라간다. 겸손의 덕을 어떻게 갖출까? 그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받아들여 인정하는 데 있다. 자신의 처지를 올바로 인정할 때, 우리는 겸손하게 하느님께 자비를 청했던 세리의 기도 자세를 이해할 수 있다. 그러한 겸손하고 가난한 자의 기도를 하느님께서는 기꺼이 들어주신다고 하셨다. 그리고 참으로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받았던 세리였기 때문이다.
이제 모든 삶의 균형을 이루신 예수님의 마음과 삶 앞에, 복음의 말씀 앞에 자신의 모습을 비교해서 살펴본다면 자신도 모르게 고개 들고나오는 교만을 이길 수 있을 것이다. 주님 앞에서 중요한 것은 한 가지, 언제나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살아가는 것이다. 언제나 하느님의 뜻에 순종하며, 진정 겸손한 자세로 주님 앞에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 보이는 삶을 살도록 하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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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오늘 복음 말씀의 핵심이자 루카의 신학을 압축적으로 반영하는 표현입니다. 루카 복음사가는 ‘부자와 가난한 이’, ‘권력자와 힘없는 이’, ‘교만한 자와 겸손한 이’ 등의 대조를 자주 활용하는데, 그 이유는 하느님 나라의 도래로 기존에 형성된 가치가 완전히 역전되고 있음을 보여 주려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위로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할 만큼 사회에서 이미 충분한 보상과 위로를 누리는 부자나 권력자들보다, 변두리에서 보잘것없는 존재로 여겨지는 이들이 오히려 하느님께 받아들여지고 그분 백성이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낮아지는 것이 곧 높아지는 길’이라는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작동 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원리는, 우리가 사는 세상에서는 전혀 작동하지 않는 듯합니다. 현실에서는 높은 곳에 오르려는 사람이 좀 더 높은 곳에 다다르는 것 같습니다. 일부러 낮은 곳으로 내려가려는 사람을 좀처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어쩌다 있다고 한들, 치열한 경쟁 시대에 미련한 짓을 한다고 손가락질이나 받지 않을까요?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는 현실에서 벌어질 법한 비슷한 상황을 하나 소개하십니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윗자리는 모두가 우러러보는 곳에 놓인 자리이고 그 잔치에서 가장 귀하고 존경받는 사람이 앉는 자리입니다. 따라서 잔치를 연 사람이 누구를 초대하였는지 잘 알지 못하면서 덥석 그 자리에 앉았다가는 망신당하기 쉽습니다. 차라리 끝자리에 앉는 것이 낫습니다. 초대한 사람이 직접 찾아와 맨 윗자리로 안내하게 될 때 다른 이들이 우러러보는 영광을 만끽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이 상황이 하느님 나라의 작동 원리와 꼭 들어맞는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조금이나마 이해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이 원리를 가장 명확하게 실현하시고 삶으로 증명하신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한없이 자신을 낮추셨던 그분을 하느님께서는 만물 위에 들어 높이셨습니다(필리 2,6-11 참조). 예수님의 제자들인 우리도 하느님 나라의 이 원리가 유효함을 세상에 드러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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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교구 박상대 마르코 신부님]
<겸손은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는 삶의 기쁨이다.>
유교의 가르침이 몸에 밴 우리에게 예전까지만 해도 중용사상은 미덕 중의 하나였다. 중용이란 매사를 처리할 적에 치우치지도 기울지도 않는 불편불의 하거나 지나침도 모자람도 없는 무과불급의 방법이나 태도를 가리킨다.
중용을 희구하는 정신은 유가(儒家)에서 전인간적인 인격의 가장 중요한 바탕을 이루는 기본요소가 되기도 하고, 도덕적 수양의 최고 수준을 상징하기도 했다.
중용의 덕은 끊임없는 자기감정의 절제와 섣부른 행위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중용은 곧 극단 또는 충돌하는 모든 결정에서 중간의 방법이나 태도를 보이는 신중한 실행 및 실천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중(中)은 공간적으로 양끝 어느 쪽에도 편향하지 않는 것이고, 용(庸)은 시간적으로 언제나 일정불변함을 뜻한다.
이러한 중용의 덕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는 언제부턴가 사라지고 없다. 편을 만들어 갈라서고, 한번 갈라서면 지나치게 기울고 치우쳐 상대방을 근거 없이 반대하며, 한편만 보고 다른 한 편을 보지 못하는 우리이다.
넉넉히 가지고 있으면서도 더 가지려 애를 쓰고, 조금이라도 모자란다 싶으면 남의 것을 넘보며 상대적 박탈감에 우울해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남의 것을 빼앗으려 드는 우리들이다.
자기보다는 남을 먼저 돌보고 굶어 죽어도 남을 것을 탐하지 않는 ‘동방예의지국’이 타인은 안중에도 없고 오직 자기만 생각하는 ‘자기우선지국’이 되어 더불어 살기가 참으로 어려운 나라가 돼가고 있다.
일등(금메달)이 아니면 안 되고, 최고와 일류가 돼야 한다. 남보다 앞서가야 하며, 졸면 죽는다고 한다. 남을 딛고 이용해서라도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하는 우리들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만 요람에서 무덤에 이르기까지 끊임없이 경쟁하고 높은 곳에 오르려는 우리들이 되어버렸다.
이러한 우리에게 오늘 복음말씀은 경종을 울린다. 잔치에 초대받았을 때의 처신에 관한 가르침이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예수께서는 바리사이파의 한 지도자 집에 초대를 받아 가 계셨다. 때는 안식일이었다.
예수님과 더불어 많은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초대되었던 모양이다. 그들이 ‘ㄷ’자 모양의 식탁에서 서로 윗자리를 잡으려고 무언의 행각을 벌이는 동안, 예수님의 첫 시야에 들어온 것은 수종병자였다.
그 날이 안식일이었음에도 예수께서는 그를 고쳐 돌려보내셨고 바리사이들의 말문을 막아버리셨다.(2-6절) 사람들의 눈에는 상좌가 우선이었지만 예수님의 눈에는 병으로 고통받는 인간이 우선이었던 것이다.
예수님의 그다음 시야에 초대받은 자들의 위선이 들어왔다.(7절) 예수께서는 유교가 가르치는 중용의 미덕보다 우리의 관행을 뒤엎는 역설의 가르침을 주신다.
예수께서는 당시의 관념상 가장 엄격한 예법이 요구되는 결혼식장의 비유를 들어 그 잔치에 초대를 받았을 때 상좌보다는 말석에 가 앉으라고 하신다. 이는 곧 겸손과 겸양을 말한다.
예수께서 얼마나 자주 겸손을 강조하셨는가? 회당에서 윗자리를 다투고 장터에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은 물론 윗자리를 다투는 제자들까지도 싸잡아 나무라시면서 자신을 낮추는 자가 높여질 것이라고 하셨다.(루카 9,46-48; 11,42)
구약성서에도 야훼께서는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며, 교만에는 재난이 따르고 겸손에는 영광이 따른다고 했다.(잠언 3,34; 18,12)
겸손은 자신을 낮추어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사람을 지혜롭게 만드는 약이다. 라틴어의 겸손(humilitas)이라는 단어가 흙(humus)에서 나온 이유가 그것이다.
노자도 겸손을 물에 비유하여, 물은 한 번도 높이 가려 하지 않으며 그릇에 담으면 그릇 모양대로 자신을 베푼다고 했다. 겸손과 겸양은 참으로 좋은 덕이다. 누구든 이 덕을 한번이라도 행한 사람은 그 놀라움을 알고 있을 것이다.
겸손과 겸양은 사람을 결코 노예로 만들지 않는다. 특히 하느님 앞에서의 겸손은 오히려 자유를 선물로 받는다. 하느님의 섭리에 자신의 모든 것을 맡기기 때문이다.
여기서 자유란 과거에 집착하지 않고 미래를 향하여 하느님께 자신을 여는 것이다. 겸손은 의기소침도 아니고 자의식에 대한 결핍도 아니다. 겸손은 하느님의 손길을 느끼는 삶의 기쁨이다.
이는 곧 내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의식에 대한 기쁨이다. 겸손할 줄 아는 사람은 나보다 너를 먼저 찾고, 너보다 하느님을 먼저 찾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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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예전에 어느 선배 신부님이 다음과 같은 묵상 내용을 나누어 준 적이 있습니다.
비행기가 땅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모든 것이 너무나 작게 보이고 하찮게 보입니다. 신부님은 이를 보면서 ‘세상에서 목에 힘을 주고 살아가는 이들이 세상을 이처럼 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답니다.
반면 비행기가 하늘에서 내려오면 내려올수록, 땅과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산, 강, 건물, 자동차 등 모든 것이 분명하고 크게 보이며, 각각의 형태를 더욱 선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하늘에만 머무시지 않으시고, 이 땅에 내려오셨을까요?
그것은 아마도 우리를 작게만 보시기를 원하지 않으셨기 때문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더 잘 아시고자, 더 잘 이해하시고자 내려오셨습니다. 그만큼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고, 그래서 인간이 되시는 겸손을 갖추셨던 것입니다.
낮은 자리에 있어야만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다시 말하여 낮은 자리는 진정한 사랑을 위하여 필수적이며, 예수님께서는 바로 그런 자리를 택하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그렇습니다. 그분께서는 정녕 권세 있는 자를 내치시고 비천한 이를 들어 올리시는 분이십니다.
그렇게 높은 위치에 있는 이들을 낮추시어 그들이 볼 수 없던 것들을 볼 수 있도록 이끄시고, 낮은 위치에 있는 이들을 높이시어 세상 가장 낮은 곳에서 죽음을 겪으신 당신과 함께 부활의 삶을 누리도록 인도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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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용민 사도 요한 신부님]
두려움은 상실의 공포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내가 소유하고 누리고 있는 것들을 잃게 될까 두렵고, 내가 맺고 있는 관계와 평화가 상처받고, 깨어질까 두렵습니다. 그리고 언젠가 맞이하게 될 내 인생의 죽음 앞에서 후회할 일들을 만들까 두렵기도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이후 자신의 생을 송두리째 그리스도께 맡겼습니다. 그래서 그는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일이라면 세상을 당장이라도 떠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받은 소명은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이기에, “어떠한 경우에도 부끄러운 일을 당하지 않고, 언제나 그러하였듯이 지금도, 살든지 죽든지 나의 이 몸으로 아주 담대히 그리스도를 찬양하는 것”을 삶의 기대와 희망으로 삼습니다. 후회 없이 담대히 자신의 소명을 끝까지 실천하는 바오로 사도의 당당함이 때로는 부럽게 느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혼인 잔치에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십니다. 예나 지금이나 잔칫상에서 주인의 눈에 잘 띄고, 사회적 지위를 인정받으려는 사람들의 모습은 별로 다르지 않은가 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라고 가르치십니다.
자기 분수에 맞지 않는 삶을 살다가 나락에 떨어지고, 제 잘난 맛에 살다가 정작 남들에게 손가락질 당하게 되는 우리 삶을 되돌아보면, 차라리 겸손하게 자기를 낮추는 삶이 지혜로운 삶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의 겸손은 예수님께서 걸으신 십자가의 길에 있습니다. 묵묵히 내 십자가를 짊어지고, 남에 대한 뒷담화만 하지 않아도 하느님의 사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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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나에게 달렸다>
루카 14,1.7-11 (끝자리에 앉아라)
예수님께서 어느 안식일에 바리사이들의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의 집에 가시어 음식을 잡수실 때 일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지켜보고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비유를 말씀하셨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너보다 귀한 이가 초대를 받았을 경우, 너와 그 사람을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이분에게 자리를 내 드리게.’ 할지도 모른다. 그러면 너는 부끄러워하며 끝자리로 물러앉게 될 것이다.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 그러면 너를 초대한 이가 너에게 와서, ‘여보게, 더 앞자리로 올라앉게.’ 할 것이다. 그때에 너는 함께 앉아 있는 모든 사람 앞에서 영광스럽게 될 것이다.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나에게 달렸다>
자리가 나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내가 자리를
만드는 것이니
언제나 어디서나
그 자리가 무엇이든
내가 앉을
자리가 아니라
자리에 앉을
나를 살필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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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두 가지 부러움>
“나의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편이 훨씬 낫습니다. 그러나 내가 이 육신 속에 머물러 있는 것이 여러분에게는 더 필요합니다.”
<두 가지 부러움>
오늘 바오로 사도는 사는 것도, 죽는 것도, 다 그리스도를 위한 것이라고 하며 자기의 진정한 바람은 이 세상을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라고 얘기합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며 이런 바오로 사도가 참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부럽다는 것은 나는 그러지 못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저는 다시 저 자신을 성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나의 바람이 아닌가?
그럴 리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저의 바람 맞습니다.
그렇다면 왜 부럽고 무엇이 부러운 것입니까?
부러워할 필요가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바오로 사도가 부럽다면 그것은 이 세상을 떠나는 그 차원일 것이고, 제가 미련 없이 또 기꺼이 이 세상을 떠날 수 있는지 지금이라도 당장 떠날 수 있는지 그 차원일 것입니다.
결국은 믿음과 사랑의 차이이고, 바오로 사도의 믿음과 사랑이 부러운 것입니다.
저도 지금 생각에는 주님께서 부르시면 미련 없이 이 세상을 떠날 것 같지만 그 상황이 되면 실제로 그럴 수 있을지 자신이랄까 확신이 부족한 반면 오늘 바오로 사도는 확신이 있다고 얘기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차이는 사랑의 차이입니다. 정말로 주님을 사랑하면 그리고 사랑하면 할수록 주님께 가는 것이 가장 큰 기쁨일 것이고 그래서 그 길에 두려움이나 미련은 없을 겁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 면에서 주님을 정말로 사랑하는 데 비해 저는 이 세상에 대한 미련만큼 주님을 덜 사랑하는 겁니다.
이것이 바오로 사도의 주님 사랑에 대한 부러움이라면
또 하나의 부러움은 이웃 사랑에 대한 부러움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다른 데서도 이웃 사랑의 높은 경지를 토로한 적이 있지요. 동족의 구원을 위해서라면 자신이 그리스도와 떨어지는 불행, 곧 지옥에 가는 것도 감수하겠다고 말입니다.
저도 이웃 사랑을 하기는 합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의 사랑과 결이 다르고 차원이 다릅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고
자기의 불행을 감수할 정도로 이웃을 사랑합니다.
저는 하느님 사랑으로 이웃을 사랑하려고 애쓰는 차원,
다시 말해서 인간적인 사랑에 많이 머물면서
하느님 사랑에로 올라가려고 하는 애를 쓰는 차원이고,
그래서 이웃을 위해 고통을 좀 감수할지는 몰라도
불행을 감수할 정도로 사랑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아무튼, 주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해 바오로 사도로부터 자극도 받고 도전도 받는 오늘 저이고 아마 여러분도 같은 자극과 도전을 받는 오늘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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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겸손한 사람>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가14,11) 주님께서는 몸소 자신을 낮추셔서 인간으로 이 세상에 오셨고 마구간에서 그 낮아진 모습을 보여주셨습니다.(필리2,7-8)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10,45) 하신 대로 벌거벗은 채 죽음을 맞이하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은 자신의 위엄에 대해 대단히 까다롭게 굴었습니다. 그들은 회당에서 윗자리에 앉기를 좋아하였고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는 특별한 예우를 받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우위를 주장하였고 윗자리에 앉을 권리가 있다고 확신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하느님의 나라에서도 역시 그런 위치를 당연히 차지하리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분명하게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높이는 사람은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사람은 높아질 것이다.” 그렇다고 혹 누가 만일 윗자리에 앉을 욕심으로 끝자리에 앉는 척한다면 그는 끝자리에 앉은 것이 아니고 따라서 결코 윗자리에 오르지 못할 것입니다.
“잘나가는 파리들만 모여 사는 높은 동네에 어느 날 밑바닥에서 놀던 파리 한 마리가 냉큼 날아들었습니다. 잘나가는 파리들이 물었습니다. ‘아니, 당신은 저 밑바닥 파린데 어떻게 여기까지 날아왔소?’ 그러자 밑바닥 파리가 말했습니다. ‘예, 줄을 잡았지요. 소꼬리를 꽉 잡고 있다가 소가 휙 꼬리치는 덕에 이곳까지 올라오게 됐죠.’” 우리도 줄을 잡아야 하나요? 줄을 잡고 올라온 것이 그리 배가 아프던가요? 자신을 낮추는 것이 하느님 나라에 받아들여지는 첫 번째 조건입니다. 자신을 낮추는 “겸손은 천국의 문을 열고, 교만은 지옥의 문을 엽니다.”
성 아우구스띠노는 “교만은 천사를 악마로 만들었으나 겸손은 인간을 천사로 만들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의 성녀 데레사는 “힘써 조심할 일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생각, 특히 남보다 ‘내가 낫다’는 생각입니다. ‘내가 더 고참이다.’, ‘내가 더 연장이다’, ‘일은 내가 더 했는데 나보다 더 저 사람을 알아주는군.’하는 따위의 말은 낫습 그런 생각조차 마음에 두는 일이 절대로 없도록 하십시오.” 하고 겸손을 가르치셨습니다.
오늘 하루라도 겸손함으로 주님을 찬미하시기 바랍니다. “주님 앞에서 자신을 낮추십시오. 그러면 그분께서 여러분을 높여 주실 것입니다.”(야고 4,10)
시편에는 “주님께서는 높으셔도 비천한 이를 굽어보시고 교만한 자를 멀리서도 알아보신다.”(시편 138,비교라고 적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샘’은 겸손한 자의 '마음의 골짜기’로 흘러듭니다.”(성 프란치스코 살레시오)
겸손하지 않고서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깊은 믿음으로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주님께 온전히 맡겨드렸으면 좋겠습니다. 마음을 다햐여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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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남과의 비교를 통해 지금 삶이 힘들다고 말합니다. 비교하며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 가지고 있지 않은 것을 보기 때문입니다. 사실 비교가 무조건 나쁜 것은 아닙니다.
처음 수영 배울 때가 생각납니다. 저보다 수영 잘하는 사람이 정말로 많았습니다. 제 수영 실력이 떨어지기에 수영 잘하는 사람의 모습을 계속 관찰하면서 저의 수영과 비교했습니다. 이 비교를 통해 저의 부족한 부분을 보강할 수 있었고, 제 실력도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비교 자체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는 자기를 괴롭게 만드는 비교입니다. 지금 해야 하는 일에 집중하지 못하게 하는 비교, 자신감을 잃게 만드는 비교, 스스로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이라고 느껴지면서 자기 자신을 싫어하는 마음을 갖게 하는 비교 등입니다. 따라서 자기를 괴롭게 만드는 비교가 아닌, 자기를 성장시키는 비교를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나’를 더 주의 깊게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나’를 보지 않고 부러워하는 대상만을 바라보면 ‘나’를 괴롭게 만들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바라보고 자기의 성장을 위해 다른 사람을 바라보는 시선이 필요합니다. 이런 시선 안에서만 부러움을 갖지 않고 겸손하게 자기 자신의 행복을 찾아 나갈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높은 자리를 탐내지 말라고 하면서, 당시의 식탁 예절을 비유로 말씀해주십니다. 당시의 식탁 예절은 아주 엄격했습니다. 특히 식탁 앉는 순서가 분명했지요. 손님들의 지위나 신분에 따라 상하가 결정되었습니다.
그리고 지위가 높은 사람은 대체로 맨 나중에 도착했습니다. 그러면 지위에 맞게 높은 자리에 앉은 사람이 자기 자리를 양보해야만 했습니다.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자기과시에 신경 썼기에 윗자리를 탐냈습니다. 그래야 많은 사람이 찾아와서 인사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이렇게 높은 자리에 있는 자기는 하늘 나라에 들어갈 권리와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높은 자리에 앉아야 하는 사람 앞에서 “내려가라”라는 말을 듣는 것보다, “이리 올라오십시오.”라는 말을 듣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 이런 마음가짐을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때도 가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낮은 자의 겸손을 간직해야 가장 높으신 하느님께서 높여주신다는 것이지요.
인간의 품위는 하느님이 높여주시는 것이지, 자기 자신이 발버둥 치며 탐욕을 부린다고 높아지는 것이 아닙니다. 따라서 자기 자신을 온전하게 바라보면서 겸손한 삶을 살 수 있도록 노력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남과의 비교를 통해 더 높은 자리에 오르려고 하지 말고, 남과의 비교로 성장하는 겸손한 우리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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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겸손의 여정>
-겸손은 은총이자 선택이요 훈련이다-
모든 덕의 어머니가 겸손입니다. 무지한 자가 교만한 사람이요, 지혜로운 자가 겸손한 사람입니다. 진정 자기를 아는 겸손한 자가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겸손한 자들은 저절로 호감이 가고 마음을 편안하게 합니다. 참 아름다움과 매력도 겸손에 있습니다. 참 사랑도 겸손한 사랑입니다. 겸손이야 말로 영성의 잣대입니다.
만추의 아름다움이 흡사 겸손한 노년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초연한 아름다움, 겸손한 아름다움입니다. 어제 70대 사촌 형제들을 만나면서 지닌 느낌입니다. 예전과는 다른 만추의 겸손을 느끼게 하는 편안하고 넉넉한 분위기였습니다. 인생은 날로 겸손해지는 ‘겸손의 여정이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세월 흘러 나이 들어 갈수록 주님을 닮아 날로 겸손해지고 온유해지고, 넉넉해지고 자유로워질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싶었습니다. 이런 이들이 진정 어른일 것입니다. 좋은 산은 ‘높은 산’이 아니라 ‘깊은 산’이라 합니다. 진정 좋은 삶은 날로 깊어지는 겸손한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겸손입니다. ‘낮은 자리에 앉으라’, ‘끝자리에 앉으라’, 결국은 ‘겸손하라’는 주님의 권고입니다. 우선 겸손을 좋아해야 합니다. 겸손을 사랑해야 합니다. 이때 겸손의 은총을 입습니다. 겸손 역시 은총이요 선택이요 훈련임을 깨닫습니다. 의식적으로 겸손을 선택하고 부단히 훈련하는 것입니다. 이런 이들이 진정 지혜로운 이들입니다.
겸손의 훈련과 더불어 무지로부터의 해방되어 지혜로운 삶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겸손이 바로 지혜와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이렇게 부단히 겸손의 선택과 훈련에 충실하다보면 겸손도 습관화되고 제2천성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에 앉지 마라.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앉아라.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
진정 자기를 아는 겸손하고 지혜로운 이들은, 겸손을 사랑하는 이들은 애당초 윗자리를 피하고 끝자리를 선택할 것입니다. 이런 겸손한 자들은 저절로 높아질 것이니 이는 하느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사막교부들의 언행록에서 겸손에 대한 일화가 유익하다 싶어 몇 편을 나눕니다.
1.안토니오 압바는 말했다. “나는 적이 세상 곳곳에 설치한 덫들을 보았고, 속으로 탄식했다. ‘무엇으로 이들을 통과할 수 있겠는가? 그때 한소리가 들려왔다, 겸손!”
2.테오도라 암마는 말했다. “금욕도, 밤샘기도도, 어떤 종류의 고행도 아닌 오직 겸손만이 나를 구원한다.” 악령들을 물리친 은수자가 악령들에게 물었다. “무엇이 너희를 달아나게 했느냐? 단식?” “아니다, 우리도 먹거나 마시지 않는다.” “밤샘기도?”, “아니다, 우리도 잠을 자지 않는다.” “세상으로부터 떠남?”, “아니다, 우리도 사막에서 산다.” 악령들은 말했다. “오직 겸손을 제외한 어떤 것도 우리를 이길 수 없다. 너는 겸손이 어떻게 악령을 퇴치할 수 있는지 보지 않았는가?”
3.테오바이드의 요한 압바는 말했다. “무엇보다 수도승은 겸손을 획득해야 한다. 주님께서 말씀하신 첫째 계명이다. 행복하여라, 영으로 가난한 이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마태5,3)
4,카리온 압바가 말했다. “나는 내 아들 자카리아스보다 더 많이 노고를 다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의 겸손과 침묵의 정도에 이르지 못했다.”
5.언젠가 악마가 칼을 들고 마카리우스 압바 발을 베려했다. 그러나 그의 겸손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자 말했다. “네가 가진 모든 것을 나도 가졌다. 네가 우리로부터 구별되는 것은 다만 겸손뿐이다. 겸손으로 너는 우리보다 더 좋은 것을 얻은 것이다.”
6. 한 형제가 티테오스 압바에게 말했다. “어느 길이 겸손으로 이끄는가?” 장로는 대답했다. “겸손의 길은 이것이다. 자기 절제, 기도, 자신을 모든 피조물보다 못하게 생각하는 것”
7.오르 압바는 말했다. “수도승의 금관은 겸손이다.”
사막수도승들이 궁극으로 목표한 바도 겸손이요 참된 수도승은 물론 모든 성인들이 겸손했습니다. 참으로 겸손과 함께 가는 진실, 지혜, 사랑임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제1독서 필립비서에서 겸손의 절정에 있는 바오로 사도를 만납니다. 공동번역을 인용합니다.
“나의 간절한 기대와 희망은 내가 무슨 일에나 부끄러움을 당하지 않고 늘 그러했듯이 지금도 큰 용기를 가지고 살든지 죽든지 나의 생활을 통틀어 그리스도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나에게는 그리스도가 생의 전부입니다. 그리고 죽는 것도 나에게는 이득이 됩니다.”(필립1,20-21)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영광을 위한, 주님 중심의 삶에 날로 깊어질수록 저절로 주님을 닮아 겸손한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니 우리 삶은 겸손의 여정입니다. 날로 주님과 가까워질수록, 주님을 닮아갈수록 겸손과 지혜, 사랑의 삶임을 깨닫게 됩니다.
만추의 아름다움이 바로 만추의 겸손한 노년을 맞이하라는 가르침을 줍니다. 바로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주님을 닮아 겸손한 삶을 살게 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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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누구든지 자신을 높이는 이는 낮아지고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14,11)
<구원의 초대장!>
오늘 복음(루카14,1.7-11)은 '끝자리에 앉아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식사에 초대받은 이들이 윗자리를 고르는 모습을 바라보시며, 그들에게 '혼인 잔치의 초대 비유'를 통해, "누가 너를 혼인 잔치에 초대하거든 윗자리 앉지 마라. 초대를 받거든 끝자리에 가서 앉아라."(14,8.10) 하고 말씀하십니다.
돈과 재물과 권력이 우상처럼 되어버린 세상 안에서 '자신을 낮추라는 겸손의 외침'이 우리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마태11,29)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2,6-8)
때문에 우리도 예수님처럼 겸손이 되어야 하고, 모든 덕의 으뜸인 겸손의 덕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우상숭배의 유혹이 큰 치열한 삶의 자리에서 내가 먼저 낮아져야 하고, 내가 먼저 져야 하고, 내가 먼저 죽어야 하는 지극한 겸손의 모습을 간직해야 합니다.
겸손은 하느님을 첫째 자리에 놓고 살아가는 이들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은총'이요, 하느님 나라 안으로 초대되어지는 '구원의 초대장'입니다. 우리가 아무리 잘 믿고 잘 희망하고 잘 사랑했다 하더라도 그것에 '겸손의 덕'을 더하지 않으면 결코 구원의 잔치에로 초대되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탐욕과 인색과 교만'은 '구원의 결정적 장애물'입니다.
'겸손'은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오늘이라는 선물(present)'을 우리에게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리면서, '오늘도 겸손이신 예수님이 되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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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자신을 낮추는 이는 높아질 것이다.”(루카 14, 11)
지금 우리는
어디에 있습니까?
붉게 타오르는
단풍도 아래로
아래로
내려옵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길은 내려오는
길입니다.
하늘이 내려와
땅과 하나가 되며
사람을 비춥니다.
사람의
일상 안에서
마음의 평화는
자신을 낮추는
겸손입니다.
말씀과 생활과
실천은 아래로
내려올 때
가능합니다.
더 낮은 곳으로
내려오시는
주님이십니다.
더 낮은 곳에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삶의 중심
삶의 뿌리는
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아래에
있음을 배웁니다.
회개도 정화도
그 뿌리는
겸손입니다.
부실하고 허약한
우리의 겸손입니다.
겸손은 끝이
없습니다.
낮추는 마음은
언제나 길을
만납니다.
우리 발 밑의
흙이 우리가
누워야 할
자리입니다.
기쁨과 기쁨을
이어주는
겸손입니다.
가장 낮은 곳에
살고 계시는
주님이십니다.
내려놓고
버리고
돌아갈 곳은
낮추는 마음
사랑입니다.
사랑으로
붉게 타오르고
사랑으로 내려오는
사랑의 여정입니다.
그 사랑의
한가운데에
주님과
우리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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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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