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덕희의 사람 향기가 있는 고택](8) 생기가 흐르는 공간, 조견당
영월의 여름은 싱그럽다. 푸르른 신록이 뿜어내는 맑고 차가운 공기는 몸속 세포에까지 파고드는 느낌이다. 조견당을 향해 굽이굽이 길을 따라가다 보면 가족 단위 캠핑족들의 웃음소리가 들리고, 주천강에서는 다들 다슬기를 잡느라 여념이 없다. 바캉스의 계절을 실감한다. 고택에 들어서니 여자아이가 마당을 뛰어다니다 어느새 사라진다. 그러곤 퐁당퐁당 피아노 소리가 들린다. 이전 고택에서는 찾을 수 없는 생기가 이곳에 흐른다.
[정덕희의 사람 향기가 있는 고택](8) 생기가 흐르는 공간, 조견당
집이 나를 꽉 잡았다
조견당에서 경쾌하게 흘러나오던 피아노 소리는 이 집에 살고 있는 김주태·안양순 부부의 딸, 열 살 김휘영양의 솜씨였다. 고택 시리즈를 반년 넘게 진행하면서 얻은 깨달음 중 하나는, 집은 살고 있는 이들의 모습을 그대로 닮아간다는 것이다. 조견당이 여느 고택과 달리 생기와 에너지가 넘치는 이유는 젊은 주인 내외의 면면 때문이었다. 바깥주인인 김주태씨(53)는 MBC 기자로 현재는 MBC 수원총국 총국장이다. 안주인인 안양순씨(51)와는 방송국에서 만났다. 그녀는 보도국을 담당하는 메이크업 전문가였고, 김주태씨가 시사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자연스레 인연이 된 것이다.
“노총각, 노처녀가 만나 결혼을 한 셈이죠. 저는 44세, 아내는 42세 에 결혼을 했으니까요. 그전까지는 각자 일에 매진하고 있던 터라 결혼이 절실하지 않았거든요. 고택을 물려받아야 할 제 상황을 알고 있는 주변 선배들이 지금의 아내를 ‘생각보다 시골스럽고 털털한 여자’라고 평하며 ‘잘해보라’ 하고 밀어주셨죠.”
그는 ‘집을 모시고 살아야 하는’ 지금의 종부 자리를 아내에게 강요하진 않았다. 한 번도 먼저 조견당 이야기를 꺼낸 적이 없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이야기는 아내의 입에서 먼저 나왔다.
“아내가 자진해서 ‘고택에 내려가보겠다’라고 하더라고요. 와본 후 한 달 만에 서울 살림을 모두 정리했어요. 그런데 시골 생활을 해본 적 없었던 아내는 여름에는 각종 피부 트러블로, 겨울에는 동상으로 병원 신세를 지기 일쑤였죠.”
“그해 겨울은 영하 25℃로 기온이 내려갈 만큼 강추위가 이어지기도 했고, 또 여기는 강원도라 눈이 내리면 허리까지 와요. 겨울에 맨손으로 개밥을 주다가 동상에 걸리기도 했어요. 이곳 동네 사람들은 처음에는 ‘몇 달 버티다가 가버리겠지…’라고 생각했대요.”
어린 시절부터 안씨는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소박한 된장찌개라도 끓여서 대접할 수 있는 사람이 됐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해왔다. 주변에 베푸는 삶.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종부의 자리를 꿈꿨던 것은 아닐까?
[정덕희의 사람 향기가 있는 고택](8) 생기가 흐르는 공간, 조견당
“남편은 아는 사람도 많을뿐더러 고택에서 각종 행사를 자주 열어요. 한 번에 2백에서 3백 인분의 식사를 준비해야 하는데 그럴 땐 저도 모르게 신이 나요. 장 보는 것, 떡 맞추는 것이 그렇게 재미있을 수가 없어요. 점점 제게 의심을 품었던 주위 사람들은 그 모습을 보고 ‘딱 제자리에 잘 왔다’라고 인정해주기 시작하더라고요.”
고택에서 이곳저곳 쓸고 닦는 것만으로도 하루해가 금방 저문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일에 열중하다 보면 어느 순간 기분이 묘해진다.
“일을 하다 보면 해가 저물거든요. 그럼 주변 공기가 달라져 있어요. 어딘가에서 나무를 태우는 냄새도 나고요. 서쪽 하늘의 노을빛도 참 환상적이죠. 그럴 때면 마치 이 자리에 있는 것은 운명인 것만 같아요. ‘이 집이 나를 끌어당겼나?’ 하는 생각도 들고요.”
남들보다 조금 늦은 나이에 각별한 인연으로 만나 사랑에 빠져 평생을 함께하기로 한 부부처럼, 그녀는 그렇게 고택을 마음에 담은 것 같았다. 고택을 기꺼이 사랑하는 것, 종부로서 무엇보다 중요한 덕목일 것이다.
현명한 여성, 어머니
조견당은 7대째 내려오는 고택으로 강원도 문화재로 지정된 건축물이다. 종손인 김씨는 조견당의 선조 중에는 높은 벼슬을 하거나 대단한 치적을 남긴 인물은 없었다고 말한다. 당파 싸움이 심했던 조선 숙종 때 노론의 대부인 송시열과 각을 세우다 반대파의 세력에 밀려 한양에서 숨어 내려온 그의 조상이 터를 잡은 곳이 이곳 주천강 인근이었다고 한다. 쇠락의 길을 걷던 집안이 어떻게 지방에서 1백20칸이나 되는 규모의 집을 지을 수 있었을까?
“당시에 이곳의 유일한 교통로는 수로였어요. 이곳 주천강 주변은 상류와 하류의 물산들이 오가는 물류의 중심지였습니다. 서해안에서는 소금이나 새우젓, 경기도 광주에서는 옹기나 도자기가 올라왔고, 대신 이곳에서 나는 목재와 약재들이 배에 실려 다른 지방으로 내려갔죠. 저희 할아버지는 집 앞에 선착장을 만들어 모든 물류가 통과할 수 있게 만들었고 그렇게 상업으로 커다란 부를 축적할 수 있었습니다.”
[정덕희의 사람 향기가 있는 고택](8) 생기가 흐르는 공간, 조견당
조상의 재기로 큰 부를 얻었지만 현재 남아 있는 것은 안채뿐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주천강가에 있던 소나무 숲을 벌목해 안정된 농토를 만들어준다는 미명 아래 강에 제방을 만들면서 조견당의 행랑과 별채, 정자도 사라지고 말았다. 또 강원도에 위치한 지리적 특성으로 한국전쟁 때는 국군과 인민군이 교대로 진주하며 조견당을 숙소로 쓰는 바람에 많은 소실이 있었다. 조견당은 종손의 재건과 복원 노력으로 풍요롭던 시절의 모습을 되찾고 있다. 그의 어머니인 고 김휘선 여사의 고택에 대한 사랑과 자식 교육 덕분이었다.
“어머니는 매년 농사가 시작되는 3월 삼짇날 고사를 지내셨어요. 흙을 건드리기 전에 땅의 신에게 농사를 보고하며 집안의 안녕과 평화를 기원하는 거죠. 고사 때는 늘 소나무 가지에 명주실, 한지로 장식한 성주대를 손수 만드셨는데 이것 하나하나에 깊은 뜻이 담겨 있죠. 명주실은 무병장수를 뜻하고, 한지는 그 쓰임새가 끝도 없는 생활용품의 으뜸 소재죠. 가장 주목할 점은 소나무 가지인데, 어머니는 늘 상순을 꺾어 사용했어요. 후손들에게 남의 곁가지 노릇을 하지 말라는 뜻이 담겨 있죠.”
2000년 봄, 돌아가시던 해에도 어머니는 산에 올라가 직접 소나무를 골라 성주대를 만들었다. 현재 조견당에 걸려 있는 것이 그의 마지막 솜씨다. ‘이리 정성을 쏟았는데 너희가 잘못될 것이냐.’ 그것은 어머니의 무언의 교육이었다. 김씨는 늦게 낳은 귀한 딸에게 할머니의 이름자를 붙여 ‘휘영’이라고 지었다. 김씨 집안의 버팀목이 된 여성, 어머니를 본받았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정덕희의 사람 향기가 있는 고택](8) 생기가 흐르는 공간, 조견당
문화공간으로 재탄생한 고택
조견당은 늘 사람이 북적인다. 주변에 사람 많은 주인 내외 덕분에 계절별로 다양한 행사가 이뤄진다. 성년의 날에는 인근 여고생을 불러 전통 성인의례식을 치러준다. 요즘엔 장미꽃이나 향수를 선물하는 출처를 알 수 없는 성인식이 난무하지만 원래 우리 민족은 통과의례를 중요시 여겼다. 성인식의 준비와 진행은 모두 종부가 맡는다.
“고택이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냥 집일뿐이잖아요. 그렇게 남고 싶진 않아요. 시커멓고 낡은 집이 젊은 혈기들로 화사함이 채워지는 거니 저도 기쁘게 행사를 준비해요. 학생들이 부모님께 키워주신 은혜에 보답하는 4배를 올리거나 머리에 비녀를 찌르는 것만 봐도 가슴이 뭉클해져요. ‘아! 내가 이 집 마당에서 보고 싶었던 장면이 바로 이런 것이구나’ 하고 새삼 느끼죠.”
종부도 ‘귀빈’이라는 큰 어른으로 성인식에 참여한다. 그저 옛날 방식의 이벤트라 가볍게 여기고 한복을 입고 재잘대며 ‘셀카’를 찍던 아이들도 전통 예법으로 경건하게 진행되는 성인식을 하고 나서는 표정이 달라진다.
매년 하지 직전인 6월 셋째 주 토요일에는 보리를 벨 때까지 먹을 것이 없어 힘들었던 과거를 추억하며 그 시절 음식을 먹는 ‘보릿고개’ 행사를 연다. 어머니의 뜻을 받들어 10년째 하는 것으로 ‘보릿고개’는 묵은지 국물 묵밥이나 찬 조밥을 먹거나 옥수수, 쑥버무리나 개떡을 먹는다. 이제는 모두 웰빙 음식으로 재평가를 받는 것들이다.
[정덕희의 사람 향기가 있는 고택](8) 생기가 흐르는 공간, 조견당
“단순히 음식을 먹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매년 다양한 주제로 꾸밉니다. 음악회도 하고 때로는 ‘놀부전’ 같은 공연을 보기도 하죠. 매년 3백여 명이 모이는데, 작년에는 조견당이 전국 70가구를 선정하는 ‘명품 고택’으로 선정된 걸 기념했습니다.”
그들은 숙박시설로도 이용이 가능한 사랑채를 복원하면서 기둥에 주련을 달고 자축 행사를 열었다. 주련 제작은 김씨가 기자로 지냈던 시간들이 만든 인맥이 총동원됐다. 시는 이명권 시인에게 받았고 글씨는 여류 서예가 소엽 신정균씨가, 글씨 조각은 이창석 각자장이 맡았다. 학문과 예술, 기능의 결합이었다.
“이창석 각자장은 제가 처음 세상에 알리고 유명해져 무형문화재가 됐죠. 그 사람 자체가 보석이기 때문에 제가 오히려 행운이라고 생각해요. 어머니의 교육 덕에 기자가 돼 세상을 돌아다니며 얻은 것들이 이 주련에 응집돼 있죠. 밥을 안 먹어도 배가 부르더군요.”
부부는 남편의 직장 탓에 주말 부부로 지낸다. 오롯이 고택을 지키는 이는 종부와 어린 딸이다. 인터뷰 중에도 열려 있는 대문으로 뜨내기 관광객들이 드나든다. 늘 개방을 해놓아야 하는 고택의 특성상 “혹여 무섭지 않나”라는 질문에 종부는 “옛것을 좋아하는 사람치고 나쁜 사람은 없다”라고 간단명료하게 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