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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1202
#성경묵상 #창세기 #Genesis 5장.
6 셋은 백오 세에 에노스를 낳았고
7 에노스를 낳은 후 팔백칠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8 그는 구백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9 에노스는 구십 세에 게난을 낳았고
10 게난을 낳은 후 팔백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1 그는 구백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2 게난은 칠십 세에 마할랄렐을 낳았고
13 마할랄렐을 낳은 후 팔백사십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14 그는 구백십 세를 살고 죽었더라
15 마할랄렐은 육십오 세에 야렛을 낳았고
16 야렛을 낳은 후 팔백삼십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17 그는 팔백구십오 세를 살고 죽었더라
18 야렛은 백육십이 세에 에녹을 낳았고
19 에녹을 낳은 후 팔백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0 그는 구백육십이 세를 살고 죽었더라
아담과 하와는 이미 한 번 에덴 동산에서의 복된 삶을 경험한 바 있으므로 에덴에서 쫓겨난 이후의 삶에서는 언제나 에덴을 동경하여 이 땅의 것에 집착하지 않고 초연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 이후의 자손들은 그런 복을 경험해보지 못했기 때문에 지금 자기들이 살아가는 이 땅에서의 삶이 전부였을 것이다. 오늘날에도 자연이 많이 훼손되지 않고 원형이 남아 있는 지역에서는 소위 자연의 아름다움과 신비로움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하물며 고대 지구환경은 비록 죄로 인해 저주를 받았다 하여도 지금에 비해서 얼마나 더 황홀했을 것인가. 비록 땅이 저주를 받아 저절로 선한 채소와 열매를 내지 않게 되었더라도 자기의 노력에 따라 얼마든지 얻을 수 있었을 것이므로 아담의 자손들은 이 땅의 것을 마음껏 누리며 살아갔을 것이다. 게다가 당시 지구의 기후환경은 지금으로서는 도저히 예측할 수 없을 정도로 온화하고 안정적이어서 아담의 자손들은 지금 인류보다 열 배나 더 오래 살 수 있었다. 그래서 고대 아담의 후예들은 아담과 하와처럼 낙원을 맛보아 알지 못한데다가 이 땅의 소산은 노력 여하에 따라서 풍성히 거둘 수 있었으므로 어지간한 믿음이 아니고서는 이 땅의 것보다 더 나은 하늘의 복을 바라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어쩌면 아담과 하와는 자기 자손들 중에서 믿음이 없이 이 땅의 풍족함에 만족하는 자녀들을 볼 때마다 하염없이 안타까워 했을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죽은 후에는 이제 더이상 에덴을 경험한 자가 없기 때문에 자손들의 신앙은 점점 희미해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나마 믿음을 가지고 있는 자들은 부모가 이야기 해 준 동산에서의 삶을 허구가 아니라 진실이라는 확신을 가져야 했고 이 다음에 가게 될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 대한 막연한 소망만을 가져야 했다. 죄로 물든 이 땅에서는 언제나 선보다는 악이 우세하기 마련이므로 고대 당시에도 믿음의 자손보다는 믿지 않는 자손들이 매우 우세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 가운데서 믿음을 가져 지킨다는 것은 많은 비난과 조롱을 견뎌야 하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아담과 하와의 수많은 자손들 중에서 성경의 족보에 이름을 남기게 된 조상들은 어렵게 믿음을 고수한 성도들인지도 모른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별과 같이 수많은 교회들은 과연 성경의 족보에 영광스럽게 이름을 남긴 믿음의 조상들과 같이 그리스도의 생명책에 자랑스럽게 이름을 남길 수 있을지 의문이다. 유명한 범죄자들은 대부분 어느 대형교회 소속인 경우가 허다하고 교회들은 그리스도의 복음보다는 그 세력을 과시하며 목사라고 하는 어떤 자들은 국가지도자를 없애야 한다는 등의 국가전복 망언을 서슴지 않는다. 평범하게 보이는 교회조차도 하나님의 공의와 긍휼을 실천하기보다는 단지 교회 자체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심각한 죄악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미명하에 셀프 면죄를 부여하기도 한다. 교인들에게는 절절매면서 유독 부교역자들에게는 일반 사회의 기업만큼도 대우하지 않고 나그네 취급을 하는 곳이 바로 오늘날 한국 교회이다. 많은 교인들은 복음의 가르침을 따라 자기 일상에서 순종하다가 고난을 당하는 것이 아니라, 교회에서는 경건의 모습만 보이고 자기 일상에서는 세속의 법칙에 순종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어려운 일이라도 만나게 되면 자기의 불순종을 회개하기보다는 지금의 이 어려움을 해결해 달라고 울고불고 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가운데서 과연 복음을 바르게 접하고 하나님과 이웃을 사랑하며 자기 삶에서 복음대로 살다가 고난을 기꺼이 당하려는 성도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암담한 교회현실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께서는 사도 요한에게 주신 계시를 통해서 사데 교회를 말씀하시며, 아무런 칭찬할 것 없는 그런 교회조차도 마지막 날에 흰 옷을 입고 그리스도와 함께 걷는 성도들이 있을 것이라 말씀하셨다. 바로 내가, 우리 교회가 그런 성도와 교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아담과 하와를 비롯한 고대인들이 거의 1천년 가까이 살았다라는 것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성경의 역사성을 믿지 못한다. 신자라 하는 자들 중에서도 특히 진화론에 기반한 과학적 사상에 젖어있는 자들은 자기들의 과학적 상식으로는 수 백 년의 인간 수명이 도저히 납득되지 않기 때문에 이 부분을 그저 무의식 안에 가두어버리거나 수 백 년의 인간 수명을 어떻게든 오늘날 인류의 100세 내외의 보편적 수명에 끼워맞추려는 어리석은 시도를 하기도 한다. 아니면 하나님의 창조를 굳게 믿는 자들 중에는 이를 현대 과학으로 어떻게든 입증하려다가 도리어 미로에 빠져버리기도 한다. 우리는 과학적으로 임증할 수 없다하여 성경의 진리와 진실을 외면해서도 안되고 성경의 진리를 입증한다는 미명하에 인류의 학문으로 무모하게 밝히려고 해서도 안된다. 다니엘과 세 친구들이 자기들의 신앙을 거스르는 바벨론의 학문들을 3년이나 배웠어도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던 것처럼, 설령 내 신앙에 거슬리는 학문들을 배우게 되더라도 그것을 지식적으로 힘껏 배우되 그것이 자기의 신앙을 잠식하지 못하도록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21 에녹은 육십오 세에 므두셀라를 낳았고
22 므두셀라를 낳은 후 삼백 년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23 그는 삼백육십오 세를 살았더라
24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더니 하나님이 그를 데려가시므로 세상에 있지 아니하였더라
에녹에 대해서는 창세기 이외에 사도 바울이 히브리서에서 참된 믿음을 가르치면서 '믿음으로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않고 옮겨졌으니 하나님이 그를 옮기심으로 다시 보이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는 옮겨지기 전에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 하는 증거를 받았느니라(11:5)'이라 하였고, 사도 유다가 거짓 교사들을 경계하면서 '아담의 칠대 손 에녹이 이 사람들에 대하여도 예언하여 이르되 보라 주께서 그 수만의 거룩한 자와 함께 임하셨나니 이는 뭇 사람을 심판하사 모든 경건하지 않은 자가 경건하지 않게 행한 모든 경건하지 않은 일과 또 경건하지 않은 죄인들이 주를 거슬러 한 모든 완악한 말로 말미암아 그들을 정죄하려 하심이라 하였느니라(1:14-15)'라고 한 것이 전부다. 창세기와 히브리서와 유다서의 기록을 종합해볼 때 에녹의 삶의 특징은 남들보다 현저히 짧은 인생인 365세 밖에 살지 못하였으나 죽음을 맛보지 아니하였고, 믿음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였으며, 살아생전에 죄인들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예언하며 선포하였다는 점이다.
에녹의 이러한 삶은 마치 위대한 선지자 엘리야의 삶을 떠올리게 한다. 엘리야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이 유난히 특별하여서 이스라엘에 하나님을 믿는 자가 오로지 자기 혼자만 남았다고 생각했을 때에도 절망하지 않고 힘겹게 선지자 직을 수행하였다. 우리는 엘리야의 여러 드라마틱한 기적들만을 보고서 그가 천성적으로 매우 담대한 심령을 가진 자라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에는 깨지기 쉬운 유리멘탈러인 것 같다.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들을 혼자서 무찔렀음에도 이세벨이라는 한 여자의 위협에 절망하여 도망쳤으며, 3년 6개월 간의 가뭄의 때에 얹혀 살던 사렙다의 이방인 과부의 아들이 죽었을 때에도 왜 또 자기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냐고 탄식하였고, 자기를 잡으려고 오십인대가 세 번이나 찾아왔을 때는 높은 언덕에 올라 숨어서 바라보고 있을 정도였다. 그렇게 우리 중 소심한 자들과 별반 다르지 않았더라도 엘리야는 이스라엘 전체가 하나님께 범죄하자 3년 반의 가뭄을 내려달라고 기도하였고 자기를 죽이려는 아합 앞에서도 쫄지 않았으며 850명의 우상 제사장들 앞에서 그들의 신을 조롱할 정도로 신앙에 있어서는 담대하였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엘리야의 심령이 무너지지 않게 하시려고 하늘에서 불병거를 보내셔서 그에게 죽음을 맛보게 하지 않으시고 데려가시는 은혜를 베푸신다.
어쩌면 에녹의 삶도 엘리야와 같이 처절했을지도 모른다. 자기를 제외하고는, 아니면 아주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극소수를 제외하고는, 참된 신앙인을 볼 수 없어서 절망했을 것이고, 엘리야가 조국에 극심한 가뭄을 내려달라고 기도한 것처럼 하나님을 버리게 하는 거짓 교사들을 향해서 하나님의 영원한 심판을 예언하였을 것이다. 하나님께 대한 특별한 마음 때문에 주위로부터 따돌림을 당하고 여러 고난을 기꺼이 당하는 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고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었을 것이다. 남들 8,9백 세까지 살 때 하나님께서 오직 그만 절반도 되지 않는 365세에 죽음을 맛보게 하지 않으시고 하늘로 데려가신 것은, 그만큼 남들보다 짧은 그의 인생이 죽음의 고통보다 더 컸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에녹의 심령이 더이상 무너지지 않도록 데려가시는 은혜를 베푸신 것 같다. 아마도 그는 마치 주님께서 도둑과 같이 어느 순간 갑자기 심판주로 오셔서 의인들을 데려가시는 것과 같이 아무도 모르게 하나님께 들림을 받았을 것이다. 가족들을 비롯한 에녹의 지인들은 그가 쥐도 새도 모르게 갑자기 사라져 버려서 그가 어디서 죽었거나 실종되었거나 다른 지역으로 몰래 떠나갔을 것이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모세와 사도들에게 그가 믿음으로 하늘에 들렸음을 알려주셔서 우리는 에녹의 인생의 아주 작은 비밀을 알 수가 있게 된 것이다.
그에 비하면 우리가 쉽게 얘기하는 '하나님과의 동행'이란 용어는 교회적이지도 않고 복음 사역적이지도 않으며 지극히 개인적인 일상에 치중되어 있다. 그저 남들보다 조금 더 경건의 모습을 갖춘 것만으로 자기는 하나님과 동행하며 그분을 기쁘시게 하는 자라고 여기는 경우가 많다. 복음으로 인해 당하는 고난이 아니라 그저 자기 삶에 충실하다가 누구나 겪게 되는 어려움들을 신앙의 환난이라 여기면서 하나님께 부르짖는 것으로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여긴다. 자기가 속한 국가적 사회적 이슈에는 세상 일이라 외면하면서 오로지 자기가 속한 교회의 안위를 위해 온 맘과 정성을 쏟으면서 하나님과 동행한다고 여긴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리스도와 동행하며 그리스도를 기쁘시게 하고 마지막 날에 그리스도께서 당신께로 데려가실 성도들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제대로 알고 교회에서나 어디에서나 비성경적, 비복음적인 상황에서 온갖 핍박을 무릅쓰고 담대히 복음을 외치며 삶에서 실천하는 신자들이다.
에녹처럼 성경에서 언급 된 비중은 작더라도 그 의미는 결코 작지 않은 인물로는 멜기세덱이 있다. 멜기세덱은 창세기에서 아브라함에게 축복할 때, 시편 110편에서, 그리고 사도 바울이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인 히브리서에만 언급 된다. 멜기세덱은 성경에서 아주 적게 나오는데다가 유대인들 조차도 별로 관심이 없는 인물이지만, 사도 바울은 멜기세덱의 비밀을 풀어 설명하면서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가르친다. 또한 이스라엘의 사사들 중에는 소 모는 막대기로 블레셋 사람 6백 명을 죽여 이스라엘을 구원한 삼갈과, 어떻게인지는 모르지만 여하간에 이스라엘을 구원한 돌라도 다른 혁혁한 사사들에 비해서 분량은 적지만 자기 민족을 구원하는 위대한 임무를 수행하였다. 사도들 중에는 가룟 유다의 결원을 보충하기 위해 선정된 맛디야가 있는데, 그는 사도로 뽑힌 이후에는 아무런 기록도 없으나 그렇다고 해서 그의 사도행적이 보잘 것 없었을 것이라고 경솔하게 함부로 단정해서는 안된다. 오늘날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보내신 보혜사 성령께서는 각자의 분량에 맞게 교회의 유익을 위해 은사들을 주시는데, 내가 받은 은사가 겉으로는 보잘 것 없어 보여도 실망하지 말 것은 에녹과 멜기세덱 등의 예를 보아서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저 각자가 받은만큼 열매를 거두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25 므두셀라는 백팔십칠 세에 라멕을 낳았고
26 라멕을 낳은 후 칠백팔십이 년을 지내며 자녀를 낳았으며
27 그는 구백육십구 세를 살고 죽었더라
므두셀라는 969세로 인류 중 최장수 인물이어서 아마도 성경학교의 퀴즈대회에서는 단골로 나오는 인물 중 한 명일 것이다. 풍요롭게 무병장수 하는 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의 기본적인 소원이기 때문에 므두셀라가 그렇게 오래 산 것을 보면 일단 부러워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다. 그러나 마냥 그렇게 오래 사는 것이 사람에게 과연 좋은 것인지에 대한 회의는 비단 성경뿐만 아니라 많은 문학과 예술, 예능 등에서 다뤄져 왔다. 영화 '그린마일'에서는 사형수의 몸을 입은 천사로부터 은택을 입은 교도관이 남들에 비해 아주 오랫동안 살아가는 바람에 겪게 되는 비애를 끝부분에 표현한다. 우리가 아주 잘 아는 '은하철도 999'라는 만화에서는 기계인간들만이 모여 사는 행성 에피소드에서 그 사람들은 남들이 부러워하는 기계인간이 되어 영생을 얻었으나 결국 그 받은 영생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삶의 의미를 상실해버려 죽지도 못하고 무기력하게 하루하루를 부질없이 겨우 연명하는 행성 주민들을 다룬다. '젠틀맨 리그'라는 영화에 나오는 어떤 악당 교수는 신비한 능력으로 수백년을 살아오는 동안 수많은 지식과 부와 명성을 쌓았으나 그의 얼굴 표정에서는 더이상 어떤 호기심과 즐거움을 찾아볼 수 없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중국에서도 대히트를 치른 '별에서 온 그대'라는 드라마에서는 별에서 온 남자 주인공이 조선왕조 시대부터 현대까지 살아오면서 일반인처럼 살아가기 위해 신분세탁과 군입대를 반복해야 하는 고충들을 코믹하게나마 그리고 있다.
그리고 이와는 좀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똑같은 시간을 살아가더라도 남들보다 유난히 긴 체감시간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예를 들어 몸이 아파 아무 일도 하지 못하고 꼼짝없이 누워있어야만 할 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 며칠만 그렇게 있다보면 좀이 쑤셔 견딜 수 없어 하게 될 것이고 그 기간이 길어질수록 우울감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그렇게 누워있는 동안에는 하루가 그렇게 느리게 갈 수가 없다. 하물며 다른 이의 돌봄이 없이는 혼자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노인이나 지체 장애인이나 중증 질환자들이 느끼는 시간은 어떠하겠는가. 그런 사람들에게는 하루의 시작이 두려울 수밖에 없다. 그 기나긴 하루를 또 어떻게 버틸지가 너무나 무서운 것이다. 이렇게 하루하루를 아무런 의미없이 살아가느니 차라리 빨리 죽음을 맞이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의학의 발달로 육체의 생명은 더 연장할 수 있게 되었을지는 몰라도 그것이 과연 혼자서 거동할 수 없는 사람들에게도 축복이 될런지는 잘 모르겠다.
더군다나 우리는 사회복지 등이 잘 갖춰져 있어서 특별히 부족한 것이 없으면 행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전세계에서 사회복지가 가장 잘 마련되어 있다는 스웨덴의 국민 자살률이 상위권을 차지한다는 것은 무엇을 시사하는 것일까. 물론 인간으로서 국민으로서 기본적인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좋은 복지제도를 마련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으로서 삶의 의미를 대신 찾아주지는 않는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은 사람답게 살아갈 수 있는 정도를 넘어서서 지나치게 이 땅의 것을 쌓기 위해 노력하다가 그것의 정점을 이루게 되면 어느 순간 삶의 의미를 상실해버리고 방황하다가 심지어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단순히 므두셀라의 숫자적인 수명만 부러워할 것이 아니라, 므두셀라가 과연 어떻게 969세를 살아갔을지를 생각해 보는 것이 필요하다. 므두셀라의 삶에 대해서는 더이상 언급 되지 않기 때문에 함부로 단정할 수는 없지만, 우리는 므두셀라가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가정하에서 그의 삶을 추정해 보는 정도는 괜찮을 것이다. 만약에 그가 의인이었다면 그 또한 자기 부친 에녹과 같이 신앙으로 말미암아 힘들고 고된 삶을 살아갔을 것이다. 그는 3백년 동안 아버지 에녹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을 보고 자라며 함께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다가 어느날 갑자기 아버지 에녹이 하늘로 들려 사라지게 되고 그 때부터 므두셀라는 에녹 대신 본격적으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갔을지도 모른다. 므두셀라가 최장수 인물이 된 것은 어쩌면 에녹이 살지 못한 나머지 인생을 대신하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혼자 생각해 보기도 한다.
아담의 후예 중 가장 짧은 삶을 산 아버지 에녹과 정반대로 가장 긴 삶을 산 아들 므두셀라의 대비는 하나님께서 각 성도에게 주시고 바라시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하게 한다. 예수님의 사도들과 제자들 중에도 야고보 사도와 스데반 집사 같은 인물은 본격적인 복음 사역을 시작하자마자 순교를 당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그들의 인생이 헛되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반면에 요한 사도는 거의 백 세 가까이 살다가 밧모 섬에 유배 되어 계시록을 남기고 삶을 마감했으며 스데반이 죽을 때 자기 옷을 던져 합당하다 증인이 된 사울은 이후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사도 바울이 되어 오랜 기간 동안 복음 사역을 하다가 순교한다. 요한 사도가 백 세 가까이 장수했다고 해서 부러운 삶이었을까. 도리어 그는 자기 동료 사도들이 한 명 씩 순교하는 것을 지켜보며 떠나보내야 했다. 어느 순간 그는 예수님을 따라다니던 제자들 중에는 자기 혼자만 남게 됨으로써 비록 많은 후진들을 양성하고 교회의 리더로서 존경을 받았더라도 속마음을 터놓을 동료가 없다는 외로움에 사무쳤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당시 유일한 사도로서 교회를 바르게 인도할 막중한 책임도 모세와 같이 홀로 담당해야 했다. 사도 바울의 삶은 어떠했는가. 스데반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오래 살았어도 그의 삶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이쯤 되면 차라리 이 핍박을 받다가 죽는 것이 낫겠다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스데반이 나은건지 바울 사도의 삶이 나은건지 비교가 불가하다. 그러므로 세상에 속하지 않은 그리스도의 성도들은 세상의 기준으로 서로가 처한 상황을 비교하거나 평가해서는 안된다. 물론 웃는 자들과 함께 웃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우는 것은 필요하지만 이를 넘어서서 재물이나 수명이나 건강 등을 가지고 누가 복을 받았다거나 누가 저주를 받았다거아 해서는 안된다. 성도 각자가 그리스도께서 맡기신 사명을 인지하고 이를 위해 힘써서 살아갔다면 그가 단명하건 장수하건, 가난하건 부유하건간에 그는 이 땅에서 자기 소임을 다 마친 것이므로 우리 각자도 그렇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해야한다. 이를 위해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주기도문을 통해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주신 것에 자족하며 죄에 빠지지 말고 이웃을 사랑할 것을 가르쳐주신 것이다. 이렇게 하루를 살아가는데 후회없이 힘썼다면, 하나님께서 에녹처럼 바로 하늘로 데려가시건 아니면 므두셀라처럼 남들보다 수많은 나날을 주시건 아무 때나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20201202
#민수기 #Numbers 12:4-5
4 여호와께서 갑자기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에게 이르시되 너희 세 사람은 회막으로 나아오라 하시니 그 세 사람이 나아가매
5 여호와께서 구름 기둥 가운데로부터 강림하사 장막 문에 서시고 아론과 미리암을 부르시는지라 그 두 사람이 나아가매
여호와께서는 당신의 종 모세가 혈육인 아론과 미리암에게 부당한 비방을 받는 것을 어느 정도 두고 보시다가 갑작스럽게 개입하신다. 만약에 아론과 미리암이 모세의 재혼이 마음에 들지 않아도 한두번 자기 의견을 내놓고 그쳤다거나 설령 욱하는 마음에 비방을 하긴 했어도 바로 그치고 서로의 오해를 풀고 화해했다면 여호와께서 굳이 개입하실 필요는 없으셨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사람이라도 종종 이유를 알수없는 혈기에 충동적으로 휘말리듯이 당시의 아론과 미리암도 어쩌면 무엇에 홀린듯이 평소와는 다르게 모세를 비방하고자 하는 충동에 강하게 사로잡혔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들이 모세보다 혈육으로도 우위에 있고 백성들 사이에서의 직분이나 지위에 있어서도 뒤지지 않는다는 교만함 때문에 계속해서 눈덩이 불어나듯이 모세에 대한 거센 비방을 그치지 않았던 것 같다. 여호와께서는 그런 그들이 신앙의 선을 넘지 않도록 하시려고, 그리고 당신의 종 모세가 절망스러운 낙담에 빠져 자기 사역을 포기하는 일이 없도록 하시려고 가장 적합한 때에 개입하신 것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 보시기에 합당한 사역을 하면서 누군가가 부당하게 비방할 때는 그에 따라 맞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잠잠히 무대응으로 일관하는 것이 모세가 보인 모범이다. 그러면 비방자는 자기가 옳은 줄 알고 의기양양하여 더 격렬하게 비방을 하고 사정을 알지 못하는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그런 비방자의 편에 서기 마련이다. 이로 인해 겉으로는 육체적인 억울함과 어려움을 당하게 된다 하더라도 그 모든 상황을 눈여겨보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비방받는 당신의 종이 쓰러지도록 내버려두지 않으시고 반드시 개입하신다.
다윗은 나발의 업신여김을 받고 그를 멸하려 했으나 여호와께서 나발의 아내 아비가일을 보내셔서 그의 손을 피로 더럽히지 않게 하시고 직접 나발의 목숨을 거두셨다. 사울의 미움을 받고 부당하게 위협을 받아 도망가는 중에 두 번이나 사울을 죽일 기회를 얻었어도 그것을 여호와께서 주신 것이 아니라 사울이 여호와의 기름부음 받은 자라는 더 상위의 가치를 보고서는 손대지 않았다. 결국 사울은 전장에서 비참하게 죽고 다윗은 이스라엘의 왕이 된다. 그가 압살롬에게 반역을 당해 피난 갈 때 사울을 추종하던 시므이에게서 심한 비방과 저주를 받았으나 그마저도 여호와께서 시므이의 입을 빌려 자기를 책망하시는 것으로 잠잠히 받아들였다. 결국 다윗은 다시 왕위에 복귀했고 시므이는 솔로몬 때에 자기 약속을 지키지 않아 처형당했다. 선지자 엘리야는 여호와께 대한 특심함 때문에 범죄하는 북이스라엘에 비가 오지 않도록 기도함으로써 온 백성들로부터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는 비방을 받았으나 850명의 바알과 아세라 제사장들과 대결하여 압승을 거두었다. 이를 들은 이세벨은 도리어 엘리야를 죽이고자 하였고 엘리아는 더이상 저항할 힘이 없어 여호와께로 도피하였다. 여호와께서는 엘리야를 불병거에 태워 하늘로 들어 올리시고 엘리야보다 갑절의 성령을 받은 엘리사를 북이스라엘에 보내셨다. 엘리야를 겁박한 이세벨은 부하장수 예후에 의해 비참하게 죽임을 당한다. 선지자 미가야는 거짓 선지자 수백명이 아합과 여호사밧에게 진군하라는 거짓 예언을 하는 중에도 저들이 모두 미혹의 영에 사로잡혔고 아합은 죽을 것이라는 참된 예언을 했다가 옥에 갇히는 수난을 당했다. 선지자 예레미야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 멸망을 당할 것이고 모든 백성들은 바벨론을 섬기라는 예언을 했다가 온갖 수난을 당하게 된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께서 사도로 지명하셨는데도 이를 인정하지 않는 거짓 교사들과 미숙한 교인들 때문에 많이 근심하였어도 매섭게 반박한 것이 아니라 자녀를 대하듯이 부드럽게 권고하였다. 성경의 위인들이 부당한 비방을 받더라도 들이받는 식으로 대응하지 않고 잠잠히 들은 것은 자신들이 호구라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보고 계시고 신원해주실 것을 믿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한국 교회, 특히 그 중에서도 보수를 외치는 교회들에게서 볼 수 없는 것이 바로 이러한 모세의 덕목이다. 설령 저들의 주장대로 정부가 부당하게 교회를 탄압한다고 하더라도 그에 대항하는 저들의 행태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개입하심이 필요하지 않고 자기들끼리 해결하겠다는 불신앙과 다름이 없다. 소위 한국의 보수 교회들은 정부가 행하는 모든 것에 발목을 잡고 정부와 국가 지도자를 비방하는데 여념이 없다. 그런 저들의 행태는 모세가 아니라 도리어 아론과 미리암에 가깝다.
모세는 여호와께서 구름기둥 가운데서 강림하셔서 장막 문에 서 계셨다고 기록하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사람의 모습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셨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여호와께서는 먼저 음성으로 모세와 아론과 미리암 세 명을 전부 부르신 후에, 사람의 모양으로 강림하셔서 장막 문에 서신 다음에는 아론과 미리암만 당신 앞으로 나아오게 하신 것이다. 사람의 모습으로 강림하신 여호와는 당연히 하나님의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이실 수밖에 없으시다. 그리고 그들 앞에 서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날에 다시 오실 심판주의 모습을 예표한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자리는 모세를 비방한 아론과 미리암을 심판하는 자리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에게 나타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은 이 땅에 계셨을 때처럼 비천한 모습이 아니라 누구든지 그 앞에 서면 두려울 수 밖에 없는 그런 장엄한 모습이셨을 것이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마리아에게 잉태되셨을 때에 비로소 인성을 가지신 것이 아니라 구약시대에도, 더 거슬러 올라가서 창세 전 영원 전부터도 인성을 가지고 계셨다는 근거가 된다. 그분의 동정녀 탄생은 인성의 시작이 아니라 영광의 인성에서 비천한 인성으로 낮아지신 것이며 그분의 부활과 승천은 창세 전에 아버지 하나님과 가지시고 누리셨던 인성의 영광을 회복하신 것이었다.
우리는 종종 주님의 얼굴을 보기 원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분의 얼굴은 모세도 살아남지 못할 정도의 영광이었고 아론과 미리암처럼 범죄한 자들에게는 크고 두려울 수밖에 없는 위엄을 가지고 계신다. 따라서 주님의 얼굴을 보여달라거나 하는 경솔한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
#20181202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의 때(마 24:23-28)]
23 그 때에 사람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그 때’란, 15절에서 선지자 다니엘이 예언한 ‘멸망의 가증한 것이 거룩한 곳에 선 것을 볼 때’인 것으로 생각된다. 다니엘의 이 예언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여러 해석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멸망의 가증한 것’은 사탄의 세력, 적그리스도들, 거짓 선지자들 등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부인하고 대적하는 모든 것을 의미하는 것 같다. ‘거룩한 곳’은 천국을 의미하지는 않는 것 같다. 왜냐하면 천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궁극적으로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나라이므로, 마귀의 세력에 정복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거룩한 곳’은 이 땅에 존재하는 교회로 보는 것이 가장 타당할 것 같다. 그렇다면 다니엘이 예언한 내용은, 사탄과 적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서 교회가 장악된(궁극적이고 최종적인 의미가 아니라 세상적이고 일시적인 의미로) 상황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2천여 년 전에 이미 부활하시고 승천하셔서 하나님 보좌 우편에 계시므로, 더이상 육체로 이 땅에 존재하시지 않는다.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시는 때에는 최후 심판의 날이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자칭 재림 예수라고 참칭하는 자들은 모두 거짓이라고 보면 된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여전히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것은, 그분의 성령을 보혜사로서 우리에게 보내셔서 우리로 성령의 조명과 인도하심을 받도록 하신다는 의미이다. 성령께서는 예수 그리스도의 영이시므로, 성령과 함께 한다는 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한다는 것과 같다.
24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
거룩한 교회를 장악하려는 멸망의 가증한 세력인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은, 처음부터 누구나 식별하기 쉽게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들은 사탄의 세력이기 때문에 매우 교활하고 끈질기게 오랜 기간 동안 교회를 잠식해 나간다. 처음에는 마치 ‘광명의 천사’와 같이 접근하고 스며들기 때문에 그들의 거짓됨을 파악할 수 없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조금씩 서서히 자기들의 거짓된 것을 교회에 퍼뜨리게 되는데, 너무 미미해 보이기 때문에 교회는 그 거짓됨을 알고도 하나씩 묵인해버리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렇게 충분한 시간이 되면, 더이상 치료가 불가능한 말기 암환자와 같이 교회는 그들의 거짓됨에 잠식되어 버리고 만다. 그리고 그 교회는 이제 더이상 그리스도의 교회로서의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게 되고 결국 멸망의 가증한 것에 그 거룩함을 내어버리고 만다. 그렇게 되면 이제 그 교회는 그리스도께서 촛대를 치우시고 밖에 버려져 밟히게 되는 처참한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그들이 큰 표적과 기사를 보인다는 것은, 어떤 기적적인 일만 뜻하는 것은 아니다. 소위 교회 사역이라 칭하는 것이 짧은 시간 동안 외형적으로 급격한 성장을 이루거나, 교세가 확장되는 것도 포함된다. 어떤 교회에 갑자기 교인들이나 재정이 증가하게 될 때, 교회의 영향력이 점점 확대되어 막강한 세력을 이루게 될 때에도 표적과 기사라고 생각할 수 있다. 통상적으로 교회가 그렇게 급격한 성장을 이루게 되면 교회 사역이 본질을 잃어버리게 되고 그 교세를 유지하려는 쪽으로 바뀌게 마련이다. 그리고 오랜 기간 동안 그 안에서 길들여진 교인들은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게 되고 문제 의식을 상실하게 되며 성경에 근거한 판단력을 잃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미혹을 당하는 것이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은, 자기들 스스로도 처음부터 거짓되었음을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 즉, 그런 자들은 비록 처음에는 그리스도 앞에서 투철한 사명감에 불타서 교회 사역을 시작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교회 사역을 하는 동안에 스스로를 그리스도의 뜻으로 점검하는데 소홀하고 교회에서 이룬 자기들의 뛰어난 업적과 성과들에 취하게 되어,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는 거짓된 멸망의 가증한 자들로 전락해 버리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
25 보라 내가 너희에게 미리 말하였노라
우리가 그리스도의 뜻을 알고 참과 거짓을 분별할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바로 우리에게 자신의 기록된 말씀인 성경 66권을 주셨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든 교회는 매사에 성경을 기준으로 그리스도의 뜻을 알고 행하며 판단해야 한다. 그래야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에게 미혹을 당하지 않을 수 있다.
26 그러면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그리스도가 광야에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보라 골방에 있다 하여도 믿지 말라
27 번개가 동편에서 나서 서편까지 번쩍임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28 주검이 있는 곳에는 독수리들이 모일 것이니라
‘주검’이란, 이미 멸망의 가증한 세력인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에게 장악 된, 거룩한 빛과 맛을 잃은 교회를 의미한다. 이 교회가 주검이라는 것은 그 외형이 죽었다는 뜻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거룩함을 잃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거기에 모이는 ‘독수리’들은, 멸망의 가증한 세력을 추종하고 그들을 따라 자신의 불의한 유익을 위해 모여드는 교인들을 의미한다. 이미 주검이 되어버린 교회는 여전히 외형적으로는 세력이 있기 때문에, 그 권세의 유익을 누리고자 모여드는 사람들이 있게 마련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참된 복음을 따라 오는 것이 아니고 교회에서 불의를 행하는 우두머리들이 부어주는 망령된 유익을 따라 모여들기 때문에, 주검에 모여드는 독수리와 같다.
#20211202
#여호수아 #Joshua 9:1-13
기브온 주민들이 여호수아를 속이다
1 이 일 후에 요단 서쪽 산지와 평지와 레바논 앞 대해 연안에 있는 헷 사람과 아모리 사람과 가나안 사람과 브리스 사람과 히위 사람과 여부스 사람의 모든 왕들이 이 일을 듣고
2 모여서 일심으로 여호수아와 이스라엘에 맞서서 싸우려 하더라
마귀와 귀신들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고 심지어 하늘의 보좌 앞에서 뵙기도 하지만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거슬러 반역을 행하는 것 밖에 없다. 마찬가지로 가나안 족속들은 여호와께서 유일하신 상천하지의 하나님이시며 이스라엘은 그 여호와께서 선택하신 민족인 것을 알고 간담이 녹았어도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여호와 하나님을 거슬러 그분의 이스라엘을 대적하는 것 밖에는 없었다. 삼손은 자기 힘과 지혜의 원천이 여호와께로부터 온 것인 것을 알았어도 그 힘과 지혜로 하는 것이라고는 여색에 빠져 음욕을 채우는 것 밖에 없었다. 엘리 제사장의 두 아들 홉니와 비느하스는 제사장의 직무를 수행할 수 있을 정도로 여호와를 알았으면서도 그들이 하는 짓이라고는 여호와께 드릴 예물을 도적질하는 것과 성소에서 봉사하는 여인들과 간음을 저지르는 것 뿐이었다. 사울 왕은 자기의 망령된 불순종으로 인해 여호와께 버림을 받았고 자기 뒤를 이어 다윗이 여호와께로부터 왕위를 받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어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다윗을 잡아죽이려고 하는 것 뿐이었다. 솔로몬은 여호와께로부터 전무후무한 지혜를 받았어도 그 지혜로 미친 짓과 어리석은 짓과 여색과 우상숭배를 하는데 악용하였다. 여로보암은 이스라엘의 열 지파의 왕이 된 것이 여호와의 뜻인줄을 알고서도 힘써서 우상숭배에 전념하였다. 요아스는 대제사장 여호야다의 도움으로 목숨을 건지고 왕위를 되찾고 선정을 베풀 수 있었다는 것을 알고서도 여호야다가 죽자 그의 아들 사가랴가 선지자로서 자기의 죄악을 규탄한다는 이유로 죽이고 말았다. 시드기야는 바벨론에 항복하라는 선지자 예레미야의 예언이 여호와께로부터 나온 것인줄 알았어도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정반대로 철저하게 멸망당하기까지 저항하는 것 뿐이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과 대제사장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야이신 것을 알았어도 그들이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신성모독죄를 뒤집어씌워 죽이는 것 뿐이었다. 거짓 목사들은 한 번 성령의 빛을 받고 은사를 맛보고 온갖 좋은 것을 경험했어도 그들이 교회에서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아들에게 교회를 세습시키고 재정을 횡령하고 간음을 저지르고 하나님을 죽인다 하고 무력투쟁과 시위를 일삼고 책임을 전가하고 불법과 죄악을 은폐하고 더 나은 육적인 이득을 따라 섬기던 교회를 팽개치는 것 뿐이다.
3 기브온 주민들이 여호수아가 여리고와 아이에 행한 일을 듣고
4 꾀를 내어 사신의 모양을 꾸미되 해어진 전대와 해어지고 찢어져서 기운 가죽 포도주 부대를 나귀에 싣고
5 그 발에는 낡아서 기운 신을 신고 낡은 옷을 입고 다 마르고 곰팡이가 난 떡을 준비하고
6 그들이 길갈 진영으로 가서 여호수아에게 이르러 그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이르되 우리는 먼 나라에서 왔나이다 이제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하니
7 이스라엘 사람들이 히위 사람에게 이르되 너희가 우리 가운데에 거주하는 듯하니 우리가 어떻게 너희와 조약을 맺을 수 있으랴 하나
8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우리는 당신의 종들이니이다 하매 여호수아가 그들에게 묻되 너희는 누구며 어디서 왔느냐 하니
9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되 종들은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심히 먼 나라에서 왔사오니 이는 우리가 그의 소문과 그가 애굽에서 행하신 모든 일을 들으며
10 또 그가 요단 동쪽에 있는 아모리 사람의 두 왕들 곧 헤스본 왕 시혼과 아스다롯에 있는 바산 왕 옥에게 행하신 모든 일을 들었음이니이다
11 그러므로 우리 장로들과 우리 나라의 모든 주민이 우리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여행할 양식을 손에 가지고 가서 그들을 만나서 그들에게 이르기를 우리는 당신들의 종들이니 이제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하라 하였나이다
12 우리의 이 떡은 우리가 당신들에게로 오려고 떠나던 날에 우리들의 집에서 아직도 뜨거운 것을 양식으로 가지고 왔으나 보소서 이제 말랐고 곰팡이가 났으며
13 또 우리가 포도주를 담은 이 가죽 부대도 새 것이었으나 찢어지게 되었으며 우리의 이 옷과 신도 여행이 매우 길었으므로 낡아졌나이다 한지라
기브온 주민들은 여느 가나안 족속들과는 달리 자기들끼리 힘을 합쳐 이스라엘과 싸우려 하지 않고 비록 비겁해 보이더라도 일말의 가능성에 기대를 걸고 잔꾀를 내어 이스라엘의 종이 되는 조건으로 화친을 맺고자 하였고 결과적으로 성공하여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다. 여리고 주민들 중에서는 오로지 창녀 라합과 그녀의 가족들만이 구원을 받았고 가나안 족속들 중에서는 오로지 기브온 주민들만이 멸망 당하지 않을 수 있었다. 기브온 주민들은 예수님께서 비유로 드신 바 자기들이 가지고 있는 1만의 군사들로 이스라엘의 2만의 군사를 대적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서 서둘러 이스라엘과 어떻게든 화친을 맺고자 지혜를 발하였고 천국을 침노하듯이 생명의 길을 침노하여 얻었으며 천국의 문을 두드리듯이 생명의 문을 두드려 열었다. 그들의 잔꾀는 비록 육적인 것이었어도 결국 신령한 결과를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기브온 주민들처럼 속임수를 써서라도 교회로 들어와 영원한 생명을 얻으려는 이방인들은 없고 단지 자기들의 육적인 이득을 위해서 거짓 신자로 위장하는 자들만 있을 뿐이어서 기브온 주민들의 이러한 방식은 통용되지도 허락되지도 않는 것이다. 도리어 교회나 신자들이나 어떤 피치못할 어려움을 잠시 피해보고자 기브온 주민들처럼 속임수를 쓴다면 주님의 책망과 징계를 초래하게 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