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가 한반도에 행한 패악질이 한두개가 아니지만 그가운데 그야말로 한반도 정기를 말살하려 획책한 대표적인 것이 바로 조선의 궁궐을 유린한 것입니다. 조선의 궁궐은 그야말로 조선의 상징입니다. 궁궐은 조선을 일목요연하게 표현하는 문화재입니다. 그런 대표적인 문화재를 희롱하고 파괴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창경궁입니다.
116년전인 1908년 오늘 (3월 25일) 일제는 창경궁 자리에 유원지를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면서 이름도 창경궁이 아니라 창경원이라고 불렀습니다. 나라의 궁궐을 놀이터로 만들어버린 것입니다. 세계 역사상 유래가 없는 횡포이자 패악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창경원 그러니까 유원지를 만들어 공식적인 행사를 한 것은 1909년 11월이지만 유원지를 만들기 시작한 날이 바로 오늘이라는 것입니다. 일제가 창경궁을 유원지로 만들면서 내건 이유가 참으로 빈약합니다. 우울함과 걱정 근심에 빠진 순종의 마음을 달랜다는 이유에서 입니다. 아니 자기들이 갖은 협박과 술수로 조선을 강탈하려 획책한 것이 바로 일제인데 무슨 우울함과 걱정 근심에 빠진 순종의 마음을 달래준다는 것입니까. 정말 말도 안되는 이유로 나라의 임금을 데리고 논다는 표현이 딱 맞을 듯합니다.
임금과 신하들이 국정을 논하고 생활했던 궁궐 창경궁에 코끼리와 호랑이 사자 등이 들어옵니다. 그러니까 동물원을 만든 것이죠. 일제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궁궐 안 전각 일부를 철거하고 서양식 정원과 건물을 세워버립니다. 일제가 구상한 것을 순종에게 협박성 건의를 했고 순종은 그야말로 얼떨결에 허가하고 맙니다. 이때 이름도 창경원으로 바꿔버립니다. 일제는 창경원이 한반도 최초의 시민공원이라고 자화자찬했지만 그런 의도라면 당시 한양 그러니까 경성에 그런 용도의 부지는 얼마든지 있었습니다. 굳이 궁궐인 창경궁을 훼손하지 않고도 다른 곳에 충분히 만들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개원식에 순종은 참석했지만 동물원 개원을 주도했던 이토 히로부미 일본 통감은 안중근 의사에게 암살당해 당연히 그자리에 있지 못했습니다.
창경원은 그 이후 일본인들과 친일파 조선인 그리고 아무 생각없는 조선인들의 나들이 장소가 되어버렸습니다. 나라 잃은 슬픔과 분노를 생각할 틈이 없던 친일 조선인들과 그 아류들의 놀이터 역할을 창경원은 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일제는 창경원에 일제의 상징인 벚나무를 잔뜩 심었습니다. 그렇게 심어진 벚나무들은 해방후에도 꽃을 피워 한동안 밤 벚꽃놀이 명소로 사용되고 말았습니다. 당시 창경원 밤 벚꽃놀이에 참여한 한국인들 가운데 창경원이 일제에 의해 강압적으로 만들어진 장소라는 것을 제대로 알았던 사람이 별로 없었다고 전해집니다. 창경원의 유래에 대해 언론도, 각 학교의 선생들도,각 가정의 부모들도 제대로 자녀들에게 가르쳐주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창경원에 영문도 모른채 잡혀온 동물들은 일제 강점기 말기에 상당수가 몰살을 당합니다. 낙타는 사료를 주기 않아 굶어 죽였고, 하마는 겨울 난방이 안돼 얼어 죽었습니다. 초식동물들은 맹수들의 우리에 풀어놓아 맹수들의 밥이 되어버렸습니다. 일제가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고 패색이 짙어지면서 물자부족때문에 자행한 짓입니다. 동물들에게 먹이도 줄 형편이 못되었던 것입니다. 일제는 동물원 우리의 창살도 무기를 만들기 위해 뜯어갔습니다.
이렇게 처참한 역사를 지닌 창경원은 1983년이 되어서야 복원계획이 세워지게 됩니다. 일제 잔재를 철거하고 궁궐로 복원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졌기 때문입니다. 동물들은 새로 만들어진 서울대공원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이런 일련의 과정에 대해 당시 친일파들은 반대의 의견을 제시했고 일본인들도 창경원 철거를 나중에 조선총독부 청사 철거와 더불어 한국 내 옛 식민지 흔적이 사라진다면서 매우 아쉬워했다고 합니다.
서울의 이마라고 일컬어 지는 인왕산도 일제에 의해 유린을 당했습니다. 인왕산 정상의 동편으로 자리잡은 암벽이 있습니다. 병풍바위라고 부르는 암벽입니다. 바위의 아래쪽으로 무슨 글씨의 흔적이 여러개 눈에 띕니다. 인왕산을 방문하는 사람들이 요상하게 느끼는 그런 형체입니다. 글씨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런 모양입니다. 그건 바로 일제의 조선 총독인 미나미 지로가 쓴 '동아청년단결'이라는 구호를 새겨놓은 글씨였습니다.
1939년 가을에 한양 그러니까 경성에서 이른바 대일본 청년단 대회가 개최됐습니다. 대일본 연합 청년단은 수만명에 이르며 가을에 1주일 동안 실제로 캠프 생활을 하면서 청년 훈련을 하기 위한 대회입니다. 그당시는 중일전쟁 발발이후 전시동원 체제가 가속화되던 시기였습니다. 조선연합 청년단의 결성도 이런 흐름속에 이뤄진 것입니다. 일제는 서울의 이마라고 부르는 인왕산을 타겟으로 삼았습니다. 경성을 내려다볼 수 있는 인왕산 병풍바위아래에 대회의 역사적 사명을 새겨넣어 대회에 참가한 청년들에게 영구히 뇌리에 남기고 또한 기념하겠다면서 이같은 짓을 저지른 것입니다.
당시의 자료를 보면 그 글귀는 '동아청년단결'이라고 되어있고 그 옆에 황기 이천오백구십구년 십육일 그리고 그 옆에 조선 총독 미나미 지로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해방이 된 뒤인 1950년에 당시 82만원을 들여 글씨 지우는 공사를 추진했고 그런 흔적이 남아 지금은 글씨도 아닌 것이 그림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그 글씨를 지우지말고 영원히 남겨두어서 후손들에게 일제의 만행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줬어야 하는데 상당한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한국을 찾는 일본인들에게 그들의 선조들이 자행한 그런 만행의 현장으로 남겨뒀어야 했던 것 아닌가 하는 심정입니다.
일본은 아직도 예전 그 버릇을 전혀 고치지 않고 있습니다. 며칠전 일본 중학교 교과서에 독도는 일본땅인데 한국이 불법으로 점거하고 있다는 말도 안되는 억지주장을 싣고 있습니다. 독도를 일본의 영토라고 주장하는 것에서 한층 더 나아가 아예 일본의 교과서에 새겨넣고 있는 것입니다. 한국의 궁궐을 놀이터로 만들지 않나, 서울의 이마라는 인왕산 그 넓은 바위에 일제 만행의 글을 새겨넣지 않나, 일제의 만행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 이 시간에도 일본으로 달려가는 국적만 한국이지 일본인처럼 행동하는 인간들이 너무 많다는데 정말 절망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2024년 3월 25일 화야산방에서 정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