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신발 / 손택수
트랑고에 갈 거야 파키스탄 카라코람 산군
짐을 나르던 말들이 빙벽에 묻혀 잠을 자는 곳
바람이 구름을 밀고 지나가면 호수가 가만히 눈을 뜨는,
아직 가본 적은 없지만 오래전 호숫가에
눈부처가 되어 앉아 있었을 나를 알것도 같은,
내 등산화는 언젠가 벗어놓았던 구름과
암벽에 앉아 있던 독수리의 날개 깃털을 기억하지
새로 장만한 등산화를 신고 사무실 계단을 오르고,
대학을 갓 졸업한 여직원 앞에서 썩은 생선 냄새를 풍기다 문득
생각하는 구름 너머 트랑고
사람들은 말하지 왜 허구헌 날 등산화를 신고 다니냐고
내딛는 모든 곳이 산이라면 그 어디에도 산은 없을 거라고
그래도 나는 로프 대신 월급줄에 매달려 새벽 술집에서 비박을 하고
24시 싸우나에 베이스캠프를 세우지
가지 못한 나의 얼마쯤은 벌써 트랑고에 가 있으니까
카라코람 침봉 끝 구름 너머 하늘을 품고 있으니까
내뱉는 숨결이 암벽에 응결되는 순간을 기다려 해가 뜨면 쩡,
반사된 햇빛이 몇만 킬로미터를 한달음에 넘어가는 곳
흘러내린 빙하 호수 따라 구겨진 내 얼굴 잔잔히 일렁이는 곳
서걱이는 얼음 발자국은 흘러 흘러 어디로 가는지
목마른 어느 몸을 빌려 가지 못한 길을 다시 떠나고 있는지
진창길을 지나온 트랑고 넝마구름처럼 너덜너덜 해어진 트랑고
사무실 열을 뿜는 모니터 배경 화면 속에서
눈폭풍 몰아치는 빙벽 위로 우뚝 솟아오르는 트랑고
- 손택수 시집 <나무의 수사학> 20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