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님과 *** 님... 동시에 답합니다!
** 님의 십자가... *** 님의 파르지팔... 이 두 가지가 섞여서 나오겠습니다. 이 두 가지 주제의 교차점은... 고난주간과 성 금요일(이 날이 어떤 날인지는 아시죠?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힌 날... 그러니까 사순절의 정점입니다!)입니다. 파르지팔... 그 동안 들으려고 마음먹고 있었지만... 이런 계기를 통해 시도하게 되는군요. 두 분... 원망할 겁니다! 그것도 두고두고...
** 님의 답변부터 드리겠습니다. 잠시... 십자가형, 혹은 책형이라고 불리는 형벌에 대한 것이 조금은 필요할 듯 합니다. 보통 죄인을 기둥에 묶고 창으로 찔러 죽이던 형벌이며 페니키아가 최초고요, 유대(구약의 에스더 서에도 보면 페르시아의 시중 하만이 "나무에 매단다" 는 표현을 했는데 이것이 곧 책형이었습니다), 그리스, 로마 등에서 옛날부터 행해져 왔는데 특히 기독교 박해에 쓰여졌지요.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그리스도는 유명하잖아요? 전승에 의하면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모후 헬레나는 주교 마카리우스와 함께 골고다에서 성 십자가를 발견하고 그 대부분을 콘스탄티노플로 가져갔는데 십자군이 그 조각을 서유럽으로 가져갔다고 합니다. 그 총량이 수 톤에 이르는데 그 진위 여부가 가려지지는 않았지요.
물론 서양만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는 않습니다. 일본의 책형은 기둥에 두 개의 횡목을 달고 죄인을 뉘여 팔과 다리를 큰 대(大)자로 벌린 후 묶어서 기둥을 세워 구덩이에 밑 부분을 묻습니다. 그리고 두 명의 창든 사람이 양 겨드랑이를 중심으로 20 ~ 30번을 찌르고 나중에 목을 찌릅니다. 우리나라에도 있는 거 아십니까? 고구려에 보이는 기시(저자에 버린다는 뜻이라는데...)가 책형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죄인을 기둥에 묶어 많은 사람들이 횃불로 지진 후 그 목을 쳐서 며칠씩 저자에 두어 많은 사람에게 보였다고 합니다. 동서 막론하고 위정자가 노린 책형의 효과는 커서 그 죽은 시신을 며칠씩 그대로 방치하여 만인에 경각심을 불러 일으켰다고 하네요. 서양에서는 313년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이를 폐지하여 십자가는 교수용으로 쓰이게 되었는데 일본에서는 19세기까지 시행했다고 합니다.
십자가형... 지독한 벌이었어요. 로마에서도 함부로 사람을 십자가에 매다는 것이 아니라 반역자의 경우에만 해당했고 로마시민의 경우에는 참수를 명했지요. 사도 바울이 이런 연유로 참수를 당했고 베드로는 유대인이었기에 십자가에 거꾸로 못박혀 죽었다 합니다. 사람을 그렇게 매달아 놓으면 나중에 심장마비에 질식사합니다. 발에도 못을 박기 때문에 지탱을 하지 못해 제대로 숨을 들이마실 수가 없다고 하니 오죽하면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은 천 번 죽는다고 했겠습니까... 상처는 찢기고 부풀어오르며 자세가 부자연스럽기 때문에 오는 불쾌감이나 목마름, 두통이 극심하다고 합니다. 영화에서처럼 십자를 다 지고 가는 건 아니고 수평대는 고정되어 있고 수직대만 매고 가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못을 박기도 하고 끈으로 묶기도 하는데 성 안드레의 경우 이틀을 매달렸다 순교했다고 하지요. 사람을 매달아 세운 뒤에 죄목을 적은 명패를 달았습니다. 예수의 죄목은 [유대인의 왕]이었지요. 전형적인 반역죄였습니다. 물론 예수께서는 유대인의 왕이라고 스스로 말한 적이 한 번도 없었지요. 늘 천국을 말했으니까요.
그렇다면 십자가의 문양은 어떻게 사용되고 있을까요? 고대 민족 사이에서 종교적 상징으로 역시 쓰이고 있었답니다. 예를 들자면 고대 바빌로니아나 갈데아(아브라함의 고향이지요? 그는 이 지방의 우르라는 도시에서 살았습니다) 인들은 하늘 신 아누(경외한다는 뜻의 수메르 식 표현인 '님'을 붙이면 아누님이 되지요~)의 상징으로 등변십자가(그리스 식 십자가)를 사용하고 고대 이집트 인들은 영생의 상징으로 이시스에게 앵크 십자가(아시죠? 둥근 고리바퀴 달린 십자가)를 들려주었지요. 그리스 신화에서는 아폴론이 십자형의 홀을 가지고 있고 게르만 신화에서는 토르신이 십자 모양의 해머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 뿐인가요? 인도에서는 옛날부터 만자(갈고리형 십자가. 나찌의 표시와는 반대 쪽이지요?)를 사용했고 힌두교에서는 오른쪽 어깨가 올라간 갈고리형 십자가가 남성원리를, 반대쪽의 십자가는 여성원리를 상징했습니다. 그 외에 고대 페르시아와 페니키아, 에트루리아, 로마, 갈리아, 브리타니아, 켈트... 하다못해 멕시코 및 중앙아메리카, 페루 등지의 주민에게까지 종교적 의의를 가지고 있습니다.
십자가가 언제부터 교회의 상징이 되어 나타났는지는 명확치 않습니다. 초기 종교에서는 신의 모습을 직접적으로 드러내지 않았거든요? 불교만 해도 그렇답니다. 보리수나 연화 등으로 부처와 그 설법을 은유했지요? 그러다가 7세기경부터 만들어졌으며 중세에는 예술품이기 앞서 예배의 대상이었지요. 그 후로 머리에 후광을 두르고 손발에 못이 박힌 상징이 계속됩니다. 그 모습으로도 충분한 신성을 띄게 되는 십자는 카톨릭에서는 머리, 가슴, 왼쪽, 오른쪽, 그리스 정교에서는 좌우가 바뀐 채 축복이나 성별을 위해 신체, 사물 위에 긋는 모양이 되었지요.
여기서 ** 님... 제 느낌을 담아 이야기 해달라고 부탁했었지요? 별 내용은 아니겠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미학적(이건 주거도 못합니다!)이기보다는 제 마음의 느낌을 담아서...
지금까지 썼던 글을 읽어보시면 상반된 이미지를 발견하실 수 있을 겁니다. 죽음과 함께 불멸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가로선과 세로선... 이 이미지는 무엇이 있을까요? 통로? 다리? 겹쳐지지 않을 평행선이 또 하나의 선으로 맞닿아 있습니다. 자연물에서 이런 이미지를 찾는다면 가지만 앙상한 나무... 가 되지 않을까요? 또한 식물의 이미지, 그리고 서 있는 사람의 이미지입니다. 자연에서의 가로축과 세로축의 느낌은 어떠한지요? 언제부터 우리 사람들에게는 수평선에 관한 인식이 있었습니까? 고대 동물벽화를 남긴 구석기 시대에는 돌의 흐름에 따라 때로는 뒤집어 그리기도 했으니 그 시기는 아닙니다. 처음 인간의 힘으로 세로를 만든 것은 돌이나 나무를 이용한 솟대가 아닐까 합니다. 서양에서는 스톤헨지 등의 거석문화를 들겠지요. 제가 왜 수직과 수평 이야기를 하는지 짐작 하시겠나요? 수직은 수평 없이 있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들에서 자라는 풀이나 나무를 보셔요. 뿌리는 대지에 기반을 두고 하늘로 솟습니다. 우리가 구축하는 도시가 '인공의 숲'으로 불리는 것은 어쩌면 우리의 수많은 창조행위들이 자연과 숲에 기반을 두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만. 인간의 수평과 수직 개념이 시작된 때에 종교행위도 함께 시작했습니다. 이거... 무언가 중요한 의미 아닐까요?
조금 더 수직과 수평의 예를 들도록 하겠습니다. 한글의 창제 원리... 하늘과 땅, 인간을 섞어 만든 모음... 하늘을 점으로 표현했습니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모났다는 표현은 서양 중세에도 있습니다. 땅이 네모진 것은 4원소의 이치, 곧 물질의 이치이며 하늘이 둥근 것은 정신을 상징하기 때문이었지요. 인간이 하늘을 향해 성장하기에 때로 인간은 동물이면서 식물에 가까운 생물이라 여겨집니다. 그 뿐 아닙니다. 우주목의 이미지(세계수 이그드라실)을 좀 빌려보겠습니다.
-------------------------------------------------------------------------- ...아스가르드에 솟아오른 이그드라실은 너무나도 거대하기 때문에 요툰헤임과 니블헤임까지 그 뿌리가 뻗어 있다. 요툰헤임에 뻗친 원래의 뿌리에도 역시 미미르(Mimir - 물을 가져오는 거인)의 샘이 있고 무한 지혜를 가진 거인 미미르가 경계를 서고 있다. 그 물은 꿀로 만든 술이어서 마신 자는 뛰어난 지혜를 얻을 수 있다. 니블헤임의 뿌리에 있는 샘은 흐베르겔미르(Hvergelmir - 끓어오르는 냄비)라고 불리는데 이 곳의 물은' 에이크시르니르(Eiksinir - 떡갈나무 가시)' 라는 수사슴의 뿔에서부터 떨어지는 물방울에서 나온 것이다. 이 에이크시르니르는 주신 오딘의 궁전 발할의 지붕에 살고 있으며 이그드라실의 줄기를 먹고 살았다. 그리고 이 샘물에서 흘러나온 물은 세상의 모든 강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 샘에는 무수한 뱀들이 살고 있어 이그드라실의 뿌리를 파헤쳤는데 그 뱀들의 우두머리는 검고 빛나는 날개를 가진 비룡 '니르호그(NidHoggr - 조소하는 학살자)' 라고 알려져 있다. 니드호그는 큰 나무 뿌리만 먹을 뿐 아니라 가룸(저승문을 지키는 개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케로베로스 비슷한 분위기지요?)과 마찬가리조 죽은 자의 살을 먹고 그 피를 빨았다. 이그드라실의 뿌리는 모두 세 개인데 어떤 자료에서는 9개라 한다. 그것은 세계를 구성하는 9나라에 그 뿌리라 뻗쳐 있는 의미로 해석한다. 그리고 생명력을 상징하는 이그드라실의 열매는 해산의 고통을 가볍게하는 효과가 있다... --------------------------------------------------------------------------
우주목의 이미지는 대표적인 수직선입니다. 하늘과 대지, 그리고 지하세계를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합니다. 그러나 함부로 넘나들 수는 없습니다. 여기 보면 세계수의 뿌리가 세 줄기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에이크시르니르라는 수사슴의 뿔에서 나온 샘물이 근원이 되는 흐베르겔미르... 그리고 이 수사슴은 다시 이그드라실의 줄기를 먹습니다. 분명 그 물질이 모습만 변하여 순환하고 있습니다. 세 개의 뿌리로부터 시작되는 기둥이라면 유대 신비주의인 카발라(전승 - Kabbalah)에서도 그 흔적이 있습니다. 세 개의 기둥... 세피롯이지요. 에고 - 육 - 혼 - 영을 거쳐 하나님의 영광(케텔 - 왕관을 상징합니다)에 이르러 신을 찬양하는 통로이지요. 창조와 함께 악도 세계에 들어왔는데 사람은 신의 협력자로 창조되어 질서의 회복과 악으로부터의 구제를 받는다고 합니다. 천상과 지상을 잇는 세 개의 기둥은 때로 십계명으로 나타내어지기도 하고요, 그 하나하나의 단계마다 지켜야 할 본분을 부여합니다. 그 10단계를 거쳐 신의 영광 7층천이라 불리는 곳에 이르는 마지막 통로가 케텔입니다. 영원을 향한 계단이자 하늘과 땅을 잇는다는 점에서 수직의 의미로서 상통한다고 여겨집니다.
그렇다면 수평과 수직이 만났을 때 어떻게 될까요? 제게 있어 가장 가까운 십자가의 분위기는 점성학에서 쓰이는 지구의 이미지입니다. 대지의 여신 가이아를 상징하는데 O안에 +가 들어 있는 모습입니다. (한글 문자표에 마침 들어 있군요!)모양은 ♂화성 이미지와 ♀금성 이미지의 결합을 말하기도 하지만 그와 함께 고난과 고통을 말하기도 합니다. 점성학에서 조금 더 들어가 보면 별과 별 사이의 각도의 해석에 있어서 180도와 90도는 대립과 갈등을 야기하고 있거든요. 부조화 좌상이라고 하는데 조금 더 설명을 달아보도록 하겠습니다.
-------------------------------------------------------------------------- ⇔ 충(衝)은 전통적인 흉각의 하나로서 대립과 갈등을 의미한다. 출생천궁도에 충을 이루는 두 행성이 있으면 그들이 상징하는 심신의 내면적 기능 사이에서, 그리고 그들의 별자리가 상징하는 두 가지 기질 사이에서, 그리고 또 그들의 집이 다스리는 현실적 분야 사이에서 충돌과 긴장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것은 현실 세계의 상대성을 인식하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좌상이기도 하다. 많은 사람들이 대체로 하나씩의 충 좌상을 갖고 있으며, 어떤 사람은 둘이나 셋을 지니고, 또 어떤 사람은 전혀 갖지 않는다.
□ 사각(四角)은 충보다 더 곤란한 좌상으로 장해와 압력을 의미하며, 제 3의 행성에 의한 화해나 해결의 가능성을 갖지 않는다. --------------------------------------------------------------------------
십자가는 대립과 고통의 중간에서 그 세상을 이어주는 다리입니다. 결코 피할 수 없지요. 또한 짊어지는 자에게 이것은 업입니다. 가볍지도 않습니다. 그러니 지구에서의 시간은 상반된 힘과 힘이 만나 탄생하고 죽고 반복되면서 얻게 되는 힘겨움이 고스란히 함께 들어 있습니다. 이런 이분법적인 물질과 정신들의 만남으로 이루어진 삶이란 어떨까요? 인간 속에는 하늘과 지옥이 맞닿아 있는데 말입니다. 인간은 상처받고 고통 당합니다. 구세주는 그 위에 희생합니다. 우리가 심은 나무가 그 위에 열매를 맺고 다시 그 열매가 우리의 식사가 되듯이 구세주 역시 영원불멸의 것에 매달려 끝없이 삶과 죽음을 반복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매년 부활절을 맞이하지 않나요? 성찬식 때마다 신의 살과 피를 마신다고 배웁니다(때로 이 의식을 하다보면 내가 식인종(!)이 된 기분까지 드는 것은 착각만은 아니지요). 하나님은 사랑이라... 우리는 그 사랑의 맺어짐에 의해 세상에 태어납니다. 모든 열매들이 그렇고 생명들이 그렇게 태어납니다. 또한 죽어서 땅에 묻히지 않으면 안됩니다. 우리가 죽어서 묻힌다면 그 땅에 또 다른 생명들이 뿌리를 내리고 태어나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수직과 수평은 반복되면서 생명의 파장을 이어냅니다. 그것은 대단히 힘겨운 일이자 삶을 투쟁의 장으로 몰아넣는 일입니다. 한 입이라도 더 먹기 위해서 우리는 타인을 죽이기도 합니다. 신화 속에도 보면 신을 죽여 세상을 창조했다는 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나 그 아비규환 속에서 문득 영원을 인식하면 끝없이 태어나고 반복되는 영원 위에 끝없이 고통당하는, 혹은 반복되는 생명으로 희열하는 구세주가 열매가 되어 매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그 열매를 먹고 하나님의 나라로 가며 영생합니다. 그 열매는 무엇일까요? 하나님은 사랑이라... 사랑을 먹는 겁니다. 희생으로 인한 사랑.
이제 결론이 나는군요. 수평과 수직은 삶이 의미입니다. 십자가는 삶과 죽음, 하늘과 땅, 인간과 신, 남자와 여자... 모든 이원론적인 것이 결합된 이미지입니다. 인간의 삶이 그토록 고통스럽게 서서히 죽어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또한 역설적으로 다시 살아나는 재생의 상징이기도 합니다. 사람에게 종교성이 생기기부터 십자가는 존재해 왔습니다. 나무에 죽음을 매단다는 것이 저주였던 동시에 죽음이 아닌 부활의 소망을 품고 매달린 그리스도께서 첫 열매, 즉 축복이 되어 기독교의 상징이 되었던 것은 그 때문입니다. ** 님... 제 설명이 다소 허접하더라도 이해해주십시오. 헥헥~
십자가... 나무... 우주목... 삶과 죽음의 열매... 영원불멸의 것... 고통과 힘든 화해 정점... 그리고 사랑.
일단... 파르지팔에 대해 알아야겠지요? 제가 중점적으로 다루고자 하는 것은 바그너 Richrad Wagner(1813∼1883)의 무대 신성 종교극 "파르지팔(Palsifal)" 이지만 원작에 대한 이해가 필요할 듯 하여 좀 적습니다.
-------------------------------------------------------------------------- 파르치발 Parzival 독일 중세 궁정 서사시인 볼프람 폰 에센바흐가 쓴 대서사시. 16권 2만 5천 여구. 제작 연대는 1200년부터 20년 경으로 추정된다. 소박하고 순진한 자연아 파르치발은 편모 슬하에 인가와 떨어진 숲 속에서 생활하였다. 어느 날 숲에서 기사를 만나자 자기도 기사가 되고 싶어 세상으로 나간다. 그는 아르투스(카멜롯의 아더왕, 유명하지요?)왕의 궁정에 가서 예법과 무술을 배워 공훈을 세우며 아름다운 여왕과 결혼한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만족하지 않고 더욱 수련의 길을 떠나 성배왕 암포르타스와 만나게 된다. 그러나 성배왕이 중병에 걸려 고통받고 있는 것을 보고도 함부로 입을 놀리지 말라는 스승의 가르침에 따라 아무 말도 않고 그 병에 대한 동정도 표시하지 않아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죄를 짓는 결과를 초래하여 추방당하는 신세가 된다. 한 번은 신을 저버리지만 많은 고통을 체험한 후 신의 큰 사랑을 깨닫고 마침내 성배왕이 된다. 이 작품은 프랑스의 크레티앙 드 트로와의 <파르스발(성배이야기)>를 바탕으로 하여 아더왕 전설과 성배 전설, 자연아의 세 가지 주제를 융합하여 웅대한 서사시를 펼친 것이다. 특히 이 작품의 진가는 주인공의 인간적인 발전을 주제로 하여 이상적인 인간상을 제시한 점과 독일 교양 소설의 선구적 역할을 한 데에 있다. [이 뒤로도 동아 세계 대 백과 사전 참조.]
아더왕 전설 아더왕과 그 신하인 기사들의 영웅적인 이야기. 아더왕은 6세기 경이 전설적 인물이며 켈트 민족에 속하는 영웅이다. 역사상 인물로서는 실제성이 희박하다. 내용은 아더왕의 무용, 건국담으로 되어 있다. 그가 보검 엑스칼리버를 높이 휘두르며 무공을 세워 여러 나라를 공략했지만 결국 반란을 토벌할 때 치명상을 입고 사자의 섬 에벌론을 옮겨지게 될 때까지를 주된 줄거리로 하고 있는데 여기에 왕에게 봉사하는 원탁(이것이 카멜롯의 상징이었지요. 왕과 신하가 같은 높이의 의자에 앉아 국사를 논한다... 그 당시로서는 센세이션이었을 겁니다)의 기사들의 활약이 얽혀 있다. 따라서 기사 랜슬롯의 사랑 등 기사들의 무훈과 사랑이 점철되고 나아가 성배를 찾는 모험담이 끼어 있다. 이 전설에서는 아더왕을 비롯하여 왕비 기니비어, 마법사 멀린, 기사 랜슬롯, 트리스탄, 퍼시벌, 가웨인, 개러해드 등의 기사들이 일련의 이야기의 중심이 되어 기사도의 미덕을 표현하고 있는데 로맨틱한 전설이 강한 인간적 측면에 모험과 기독교의 의식을 곁들이고 있다. 마음이 깨끗한 사람에게만 나타나는 성배, 호신의 마력을 갖춘 명검 엑스칼리버에 의한 신비적 기적이 곳곳에 나타난다. 아더왕 전설의 자세한 기록은 12세기의 수도사, 조프리 오브 몬버스가 라틴어로 쓴 [브리튼 왕 열전] 으로부터 시작하여 13세기 성직자 라야몬이 영어로 쓴 장시에서도 다루어지고 있으나 모든 전승과 기록을 집대성한 것은 토머스 맬로리 경이다. 사라져가는 중세적 질서에 대한 애석함을 훌륭한 산문으로 기록한 맬로리의 저서가 영국 최초의 인쇄업자 윌리엄 칵스턴에 의해 출판된 '아더왕의 죽음(21권)' 인데 이것은 영국 최초의 산문소설이라는 점에서도 중세 문화의 아름다운 영상을 후대의 문인들 가슴에 소생시켰다는 점에 있어서도 영문학 사상 불후의 명성을 남기고 있다. --------------------------------------------------------------------------
여기서 중요한 단어들이 나옵니다. 성배란 무엇일까요? 성배왕이 왜 중병에 걸렸는지 짐작이 가십니까? 제가 앞에서 힌트를 드렸습니다. 지금이 고난주간이라고요. 후후... 이것 아니더라도 성배 이야기는 후대에서... 아니죠, 현대에서까지 스필버그 감독이 "인디애나 존스, 최후의 성배" 라는 영화를 찍을 정도이니까 두고두고 써먹는다는 말이 맞겠습니다. 일단 성배가 무엇인지 알아야 이 무대 신성 종교극을 이해할 수 있겠지요?
-------------------------------------------------------------------------- 성창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사후 그 옆구리를 찔렀다는 전설의 창(요한복음 19장 31절부터 37절 참조). 그리스도 교 전승 중 성궤 - 십계명과 대제사장 아론의 싹 난 지팡이, 그리고 만나를 넣었다는 구약시대 하나님 임재의 상징 - 와 성배이야기가 있는데 성창 역시 그러하다(파르지팔에서 성배왕이 상처를 입고 괴로워하는데 그 이유는 쿤드리의 유혹에 넘어가 성창으로 인해 상처받은 까닭이라 한다).
성배 그리스도 예수가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했으며 아리마대 요셉이 십자가 위의 그리스도가 흘린 피를 받았다는 잔. 요셉은 이 잔을 가지고 영국으로 이주했는데 그가 죽은 뒤 이 잔의 행방은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러나 또한 본시 켈트의 이교의식에 쓰인 신성한 용기였다고 생각되어지기도 하며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성배 이야기 중세 유럽 문학의 중요한 주제였던 아더왕 전설에 포함된 이야기의 하나. 잃어버린 신성한 것, 행방불명된 성배의 탐구라는 주제를 중세 문학이 즐겨 다루게 되었다. 성배 전설을 둘러 싼 여러 기사들(개러헤드, 퍼시벌, 보오스, 가웨인, 랜슬롯, 등)의 탐구와 모험의 이야기가 수없이 많이 창작되기에 이르렀다. 이중에서 유명한 것은 크레티앙 드 트로와가 1190년에 쓴 [페르시발 르 갈로와, 성배의 이야기], 13세기에 쓰여진 볼프람 폰 에센바흐의 '파르지팔' 및 웨일즈 지방의 작자 불명 14, 15세기 담시 '마비노기온(Mabinogion)' 의 이야기 등이다. 근대 문학 가운데에서 성배 탐구를 주제로 한 것은 영국 19세기 시인 테니슨의 성배가 유명하다. --------------------------------------------------------------------------
그렇다면 바그너의 파르치팔에 대한 소개도 있어야겠군요. 해설집을 보고 개설을 참조합니다. 나중에 대본은 따로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
(바로 이 부분입니다. "로엔그린" 의 제 3막 대본에서 참고합니다.) 로엔그린 (모두 충격받은 표정을 짓는다) 그녀의 의심에서 나온 무서운 질문에 답하겠습니다. 더 이상 감출 이유가 없으니까요. 남자들 왕 로엔그린 [중략] 엘자 로엔그린 (엘자가 비명을 지르며 뒤로 쓰러진다) 왕, 남자들 로엔그린 (모두 흥분한다. 로엔그린이 처음 나타났을 때처럼 강물 위에는 물결을 타고 백조가 빈 배를 이끌고 다가온다) (이 부분까지...)
로엔그린에서는 Percival이라고 표기되었지만 파르지팔에서는 옛날 식, 또한 게르만 식으로 그것을 Parsifal이라고 고쳐 표기했다. 바그너는 이 악극을 쓰는데 주로 세 가지의 옛 이야기에서 큰 암시를 받았다. 그것은 크레티앙 드 트로와가 1190년에 쓴 [페르시발 르 갈로와, 성배의 이야기], 13세기에 쓰여진 볼프람 폰 에센바흐 - 이 사람도 바그너의 악극 "탄호이저" 에서 당당한 조연급으로 나옵니다! - 의 '파르지팔' 및 작자 불명의 14세기 담시 '마비노기온(Mabinogion)' 으로 바그너는 이들 문헌을 로엔그린을 작사할 때 조사했었다. 그러나 바그너는 파르지팔을 작사할 때에는 이들 문헌에 구애되지 않고 이들을 전부 종합해서 자신의 뛰어난 독창성과 종교적 사상을 표현하였다.
따라서 이 악극은 '트리스탄과 이졸데' 나 '니벨룽의 반지' 이후의 바그너 만년의 철학관과 종교관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옛날 전설을 중심으로 해서 그의 기독교 사상(때로는 사이비?! 라고 생각되어지지만...)을 표현한 것이다. 거기에는 카톨릭의 성배수호의 성찬과 프로테스탄트의 성 금요일의 기적 등의 사상이 기초를 이루고 있을 뿐 아니라 더러움을 모르고 또 세속적 욕망이나 인간적인 정욕도 모르고 오직 사랑과 연민만을 느끼고 있는 파르지팔이 인간의 구제를 고양한다는 기독교적이면서도 일면 불교의 열반정신, 그리고 동양적 염세의 유혹도 쿤드리(어딘가 모르게 막달라 마리아 이미지 팍팍 풍기는!)라는 이중인격을 가진 우화적인 여성을 등장시켜 표현한다.
바그너는 이 악극을 스케치 하기 전에 나사렛 예수라는 대본을 스케치 한 일이 있었는데 그것은 완성하지 않았다. 그러나 거기에 담으려 했던 바그너의 기독교적인 세계관은 이 파르지팔의 밑바탕이 되고 있는 것으로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파르지팔에서 열매를 맺을 수 있었던 것은 리스트의 딸이며 1869년 유명한 지휘자이며 피아니스트였던 한스 폰 뷜로와 이혼하고 그 이듬해 바그너와 결혼한 코지마가 있었기 때문이라 생각할 수 있다. 코지마는 아버지의 피를 이어받은 만큼 카톨릭의 교리에 대해 열심히 연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바그너와 결혼한 후 코지마의 영향이 여러 가지로 컸었던 것을 생각할 때 파르지팔에서도 코지마의 감화가 있었다고 생각할 수 있다. 또 불교 사상이나 동양의 염세 철학에 대해서는 트리스탄과 이졸데를 작곡하기 전에 불교사상을 품을 주인공과 여주인공을 가진 불교극 '승리자' 의 초안을 쓴 일이 있어 이것이 파르지팔에 옮겨졌다고 볼 수도 있다.
이렇게 해서 바그너가 의도하는 신비적이며 종교적 종합 예술인 일대 종교극이 완성되었고 그 때문에 바그너는 이 악극에 극장에서 상영하기 위한 신성한 축제극이라는 뜻으로 무대성축극이라는 부제를 붙였던 것이다. 그리고 이 악극의 일반극장 상연을 금지했다. 그 결과 흥행권이 소멸되는 1913년까지 연주회 형식을 제외하고는 오직 바이로이트의 축전 극장에서만 독점 상연되어 왔었다. 그러나 그 사이 예외적으로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가극장에서 1903년 12월 24일에 또 암스테르담에서 1905년에 상연된 일이 있다.
이 극은 쿤트리, 파르지팔 같은 우화적 인물을 취급했고 등장 인물이 모두 비현실적이며 줄거리도 전설적인 것으로 우화적 요소가 아주 많다. 그 때문에 희극의 전개에서는 명료성이 부족하고 회상적인 취급이 많으며 퇴영적인 느낌도 적지 않다. 그리고 이 악극의 사상이나 도덕도 현대인들에게는 이해하기 어려운 점들이 있다. 이러한 이유로 현재는 이 극에 대한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이 악극에서와 같이 엄숙하고 장엄한 음악을 바그너는 다른 악극에서 작곡한 일이 없었다. 또 이 악극에는 70세 노인의 지친 음악이 나타나고 있다며 평하는 사람이 있지만 트리스탄과 이졸데 이후의 원숙한 반음계법과 온음계법의 교묘한 혼용, 관현악이 비교적 크게 편성되어 있으면서도 자유롭고 유려한 진행, 저음부의 자연적인 작법, 합창과 관현악이 자아내는 선율적이며 대위법적인 아름다움 등은 도저히 다른 작품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것이다.
1845년 7월 드레스덴에 살고 있던 시절 바그너는 탄호이전의 상연 준비와 로엔그린의 작사를 위해 독일의 옛 전설을 연구하다가 파르지팔이나 티투렐의 이야기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그리하야 1852년 파르지팔 이야기를 대본으로 만들기로 결심하고 그 초안을 1874년에 탈고하였다. 그 사이 쇼펜하우어의 염세적인 철학에 흥미를 가져 그 사상도 여기에 담게 되었다. 그는 다른 작품도 손을 대고 있었으므로 대본은 빨리 진척되지 않았는데 바이에른 왕 루드비히 2세의 권고도 있고 해서 그것을 완성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1877년 완성하였다. 작곡은 1877년 가을부터 착수하여 1880년에 개최되는 음악제에 상연할 예저응로 진행되었다. 그러나 병에 걸려 예정대로 진행되지 못하고 1882년 1월 13일에 요양지인 팔레르모에서 전체를 완성시켰다.
초연 1882년 7월 26일. 바이로이트의 축전극장에서 헤르만 레비의 지휘로 상연.
연주 시간 제 1막 약 45분, 제 2막 약 70분, 제 3막 약 75분. 합 약3시간 10분.
악기 편성 플루트 3, 오보 3, 잉글리쉬 호른, 클라리넷 3, 베이스 클라리넷, 바순 3, 콘트라바순, 혼 4, 트럼펫 3, 트럼본 3, 튜바, 하프 2, 팀파니 2, 현악 5부. 그 밖에 무대 밖에서 트럼펫 6, 트럼본 6, 중북(아주 낮은 소리 나는 것), 글로켄(종), 천둥치는 도구.
대본 독일어. 바그너 자신의 작성.
등장 인물 Amfortas: Bariton 더 이상 길게 쓰지 못하고 대신 훌륭한 홈페이지 하나를 링크시킵니다. Parsifal Boy로 자청하시는 오 모 하우스 회원이신 곽태웅 님의 홈페이지인데 보시고 참조하시기 바라며 또한 제가 쓴 내용은 믿거나 말거나... 수준이오니 이 홈페이지 글을 보시고 내용이 제 것과 다르다 싶다면 그 쪽 내용을 참조해 주십시오. 꾸벅~! http://user.chollian.net/~kw903ch/index.htm
그리고 이 곳은 무와산방이라는 곳인데 이 곳 역시 파르지팔에 대한 소개가 잘 되어 있습니다. 보시고 도움 많이 되셨으면 좋겠습니다.
이 곳은 박 원철님의 홈페이지인데 니벨룽의 반지가 훌륭하게 정리되어 있습니다. 요즘 반지가 뜨는 세상인데... 한 번 들러보시기 바랍니다. 꾸벅!
제게는 파르지팔의 이미지도 앞서 말한 십자가의 이미지와 비슷하게 다가옵니다. 젊어서 타락 방탕했던 바그너의 말년 위선(?) 쯤으로 그는 주인공에게 신의 이미지를 입혀 사이비적 종교성을 더했다고도 느껴지지만. 몇 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지만 힘이 안되어 여기까지 줄입니다. 허접하고 지루한 글 끝까지 읽느라 고생하셨습니다. **님, ***님... 약속 지켰습니다! *** 드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