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한국천주교회의 수장이시며 절대적 권위를 가지신 김추기경님의 정치적 발언 하나 하나가 센세이션을 일으키고 있는 것에 대해 착잡함과 더불어 카톨릭 성직자들의 정치적 판단의 가치중립성을 상실되어 가고 있는 것에 우려하지 않을수가 없다. 김수환추기경께서는 정치권 전체에 대한 근심이 아니라 참여정부와 노대통령에게만 촛점을 맞춘 현실 정치에 대한 인식은 과연 편향적이지 않다라고 할수 있을까 하는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수가 없다.참여정부가 탄생되기 이전부터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개혁과 변혁의 희망을 꿈꾸는 국민들의 뜻을 실현하기 위해 민주당 경선과정과 대선과정에서 보여준 김추기경의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 대해서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것 부터 잘못되었다는 식의 우리 사회구조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을수가 없다. 정교일치사회가 아님에도 정교일치 사회보다 더 엄격하게 종교와 종교인에 대한 비판을 금기시하는 우리사회의 종교계 자체가 폐쇄성과 배타성에 매몰되어 있고 종교인에 대한 비판을 불경시하는 자체가 "종교의 자유", "믿음의 자유"와는 관계없이 있을수 없는 것이다. 흔히들 "낮은데로 임하소서"라는 경구처럼 과연 종교계의 성직자들과 종교인들은 낮은데로 임하고 있는지 되새겨 보지 않을수 없다.
오마이뉴스에 실린 손석춘씨의 김추기경에 관한 칼럼중 "실제 민주화운동에서 김 추기경의 모습이 과대 평가된 대목이 많다는 사실을 알 사람은 다 알면서도 침묵해왔다"는 지적은 "낮은 데"로 임하는 종교인들이 적어서였다라는 사실이 더욱 가슴에 와닿는 것이다. 지난 70년대, 80년대의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김추기경의 역할은 상식이 있는 성직자라면 당연히 독재의 총칼에 식음하는 국민들속에서 부대껴야 하는 것이 성직자들과 종교인들에게 주어진 의무임에도 그렇게 하지 않은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김추기경의 역할이 돋보인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서슬이 퍼런 시대에 성직자로서의 자기 희생적 모습으로 시대와 이 땅의 고통받는 수많은 어린 양들을 위한 목자의 길을 걸어간 종교계 지도자들이 많지 않았다는 점에서 한국천주교회의 "정의구현 사제단"의 눈물겨운 자기희생적 노력은 가히 존경할만한 것이었다. 그러나 "정의구현 사제단"의 활동을 탐탐치 여기지 않는 천주교회의 주교단에 의해서 수많은 제재와 간섭을 받을수 밖에 없었다. 정의구현 사제단에서 활동한 많은 일반 사제들이 천주교회의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는 주교단에 의해서 보복성의 인사조치나 불이익을 당할때 김추기경께서는 외면하고 주교단의 보수적 판단에 손을 들어준 것은 결코 잊을수 없는 일이었다.
김추기경께서 자신의 정치적 관점이나 인식을 드러내는 것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막을수 없으며 이를 비난할순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정치적 판단이나 인식이 우리 사회의 본질적인 모순을 정확히 집어내고 이를 비판하는 비판의 가치중립성이 지켜지고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해선 비판하지 않을수가 없다.조선을 비롯한 수구언론들이 김추기경의 말씀을 얼씨구나 좋구나 하면서 대서특필하면서 위기에 처한 보수를 가장한 수구세력들에게 기사회생할 기회로서 삼는 아이러니한 상황들이 연출되고 있는 것에 대해서 김추기경은 과연 낮은데로 임함에 있어서 누굴 위해 낮은데로 임하고 있는지를 생각해보지 않을수가 없다. 한국천주교회내의 권위주의가 우리 사회에 만연된 권위주의적 시스템보다 더 강고하게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생각해보컨데, 추기경의 본말이 전도된 참여정부에 대한 비판과 편향적이고 왜곡된 인식은 이율배반적이라 하지 않을수 없다. 한국천주교회가 그 어느 나라의 카톨릭 교회보다 수구보수적이라는 것은 우리 국민들은 모르고 있다. 독재정권시절 정의구현사제단과 일단의 양심적이고 진보적 성향의 사제들의 적극적인 활동으로 인해서 한국천주교회가 국민들로부터 과도한 찬사와 존경을 받거나, 민주화의 크나큰 공헌을 한 것으로 오해를 하고 있는 것이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서, 우리 사회의 약자들을 위해서, 민족의 통일을 위해서 한국천주교회 차원에서 한 일은 없다. 한국천주교회와 정의구현 사제단은 분리를 해서 봐야 한다. 정의구현 사제단은 한국천주교회내에선 눈에 가시와 같은 존재였다. 한국천주교회의 실질적인 의사결정기관인 한국천주교회 주교단이 군사정권의 압력에 순수히 동조하여 정의구현 사제단을 해체시키기 위한 공작을 수없이 자행되었다는 것을 일반인들은 알턱이 없을 것이다.
한국천주교회는 서울, 광주, 대구 3개 대교구와 돌아가신 지학순 주교가 교구장으로 있던 원주교구를 비롯한 12개 교구로 이루어져 있다. 한국 천주교회는 1980년대에 연평균 7.54%의 높은 신자 증가율을 지속해 오고 있다. 그리하여 1981년 140여 만 명이던 신자수가 1986년 초에 200만 명, 1992년에 300만 명을 넘어섰고 현재 약 400만명을 넘어서고 있다. 1980년대의 우리 사회는 고착화된 남북 분단 체제 아래서 급격한 도시화와 산업화로 말미암아 인간 소외의 현상이 심화되고 인간 존엄성이 말살되는 상황에서 반독재와 민주화 쟁취를 위한 의지와 노력이 다른 종교 집단보다 상대적으로 강했다고 볼 수 있다. 광주 민중 항쟁에 대한 참여와 지원으로부터 민주화 운동을 시작하였다. 1987년에는 정의구현사제단의 ‘민주 개헌’ 촉구 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이른바 6월 항쟁에 깊숙이 관여하였다. 또한 이 해에는 ‘민주쟁취공동위원회’가 결성되었고, 1988년 ‘정의구현전국연합’이 발족하게 되었다.1980년대 전반에 걸친 노동 운동 탄압 과정에서 교회의 노동 운동도 상당히 위축되었으나, 교회의 노동 운동가들은 ‘노동법 개정 청원 운동’(1985) 등 대중 운동을 추진하였으며, 노동상담소 활동 등을 통해 노동자의 권익 신장에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반면에, 이 시기 농민 운동은 비교적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가톨릭농민회는 전국농민회의 결성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민족의 화해와 재일치를 지향하며 이 시기에 한국천주교회 안에서 일어난 일 가운데, 이른바 ‘통일 열사’ 조성만 군의 죽음(1988), 임수경 양과 문규현 신부의 북한 방문(1989)은 한국천주교교회내의 보수적이고 권위적인 주교단과 사제들에게 거센 반발을 하였다. 이 당시 한국천주교 주교단회의는 문규현신부에 대해 강한 비판과 사문난적으로 규정하려는 움직임까지 있었다.
한국천주교회의 사회참여 운동은 일반 사제와 수도자들 중심으로 이루어지다가 1980년 5월 광주항쟁을 기점으로 평신도들의 적극적인 현실참여 운동으로 새로운 전환기를 맞이하였지만, 한국천주교회의 보수성과 폐쇄성을 깨뜨릴순 없었다. 교회내부의 문제보다는 교회외부의 사회참여 운동이 우선할 수 밖에 없는 현실에 기인하는 것이기도 하였지만, 군사독재시절이라는 시대적 상황은 교회내부의 보수성과 폐쇄성, 이로 인한 교회의 권위주의에 대한 문제는 논의될 계재가 되지 못한 것이다. 민주화 운동과정에서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로 불리울 수 있었던 것은 김수환추기경이라는 한국천주교회의 수장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이 아니라 암울한 시대의 횃불을 밝히고자 한 수많은 평사제들가 수도자, 신도들이 이 땅의 민중들과 함께 낮은 곳에 임하기 위해 노력한 결과였던 것이다. 명동성당이 민주화의 성지라는 상징성과 더불어 서울대교구청의 대주교였던 김수환추기경의 상징성이 계속 존속되고 이어지기 위해선 과거와 같은 민주화 운동을 위해 헌신하는 그런 상징적인 노력들이 계속 될때에 존중되어지고 존경받을수 있는 것이다.
한국천주교회는 성직자들과 신자들 양 축으로 움직여지고 있다. 성직자들의 최고의사 결정기관은 "한국천주교회 주교회의"이고 신자들의 의사결정의 대표적 기관은 한국천주교회 평신도사도직협의회가 있다. 주교회의는 사실상 한국천주교회의 모든 정책과 활동에 대해 결정하는 최고위 결정기관으로서 한국천주교회는 바로 주교회의에서 움직여지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잘 알고 있는 "정의구현 사제단"은 한국천주교회내에서 공인되지 않는 비공식 단체이다. 한국천주교회의 현실참여 활동과 운동의 정신은 바로 정의구현 사제단에서 주도해 왔고 형성해 온 것이지 한국천주교회의 공식대표기구인 주교회의에서 이끌어 온 것이 아니다. 교회의 수구보수화를 사수하는데 양축이 되고 있는 것이 바로 주교단과 평신도사도직협의회이다. 한국천주교회는 이들 양날개로 날고 있는 것이다. 일반인들이 보기엔 정의구현 사제단이 한국천주교회의 공식 기구로서 한국천주교회를 대표하는 상징적인 존재로 오해하는 경우가 태반인데, 죄송한 애기이지만 아직도 정의구현 사제단은 주교단으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평신도사도직 협의회등 각 교구청 산하의 성당에서 활동하는 사목위원회등, 신도들의 사목활동은 대다수가 사회적 약자들이 아니라 사회적 강자들 내지 이들 사회적 강자들이 인정한 신심이 강한 신자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한국천주교회의 수구보수성에 불구하고도 사회적 약자들과 함께 하기 위해 저 낮은곳으로 임하려는 깨어 있는 평사제들과 신도들에 의해서 한국천주교회는 필요이상으로 과대평가 받고있고 사회적 강자들의 사회적, 정치적 논리를 수용하면서 교회의 수구보수화를 재촉하고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김수환 추기경이며 각 교구청의 교구장인 대주교나 주교들, 그리고 각 교구청에서 목자의 길보다는 행정관료성에 젖어 있는 권력지향적인 사제들이 한국천주교회의 수구보수화를 재촉하는 핵심들로서 이들의 각 교구청의 경제적 정치적 힘을 가진 신도들과의 밀월관계는 새로운 사회를 나아가는데 걸림돌로서 작용하고 있다.
한나라당의 최대표가 국회 대표연설에서 "대통령 한 사람이 바로서면 다른 것은 저절로 된다라고 김수환 추기경께서 말씀하셨습니다"라는 말을 통해서, 상징성이 가득한 성직자와 신자로서 사회적 강자를 대표하는 최병렬로 대변되는 한국천주교회의 현주소를 가늠하는 바로미터라 하지 않을수 없다. 폭압적인 인권유린, 민주주의를 부정하는 반민주적 정치구조, 부패와 부정의 먹이사슬구조, 민주적 절차를 파괴시키고 민주적 정치소양을 억압하는 권위주의 사회구조를 공고하게 만들어 온 군사정권에서 기생해온 수구세력들에 대해선 하느님의 가르침대로 화해와 관용을 베푸는 아량을 한껏 보여주었다. 그러나 저들이 저질러온 온갖 사회부조리와 부패구조를 청산하고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노력을 하는 이들과 이를 지지하는 지지자들을 나라를 혼란시키는 주범으로 몰아가는 현실인식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임해야 할 성직자로서의 기본 역할을 스스로 내던짐으로써 자신에게 가지게 된 시대의 양심이라는 상징성은 사라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땅의 주류는 해방후 친일세력들이 사라지지 않고 부정,부패, 타락, 억압을 일삼은 이승만, 박정희정권, 전두환-노태우 신군부정권, 김영삼 정권까지 단한번도 권력의 쓴맛을 모른채 권력에 기생하면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려온 "친미-반북"세력들이. 이들은 여전히 우리사회의 주류이며 가공할 힘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에겐 면죄부를 그렇게 쉽사리 주면서 온갖 사회의 쓰레기와 권력의 부패물을 청소하려는 정부와 그 지지세력을 도리어 우리사회의 총체적 부패구조와 사회악을 만들어 낸 주범으로 몰고가는 지난날 민주화의 등불로 상징된 종교지도자 김추기경의 모습은 볼수가 없다. 이젠 그분에게서 과거의 등불을 보고자 하는 것은 일찍감치 접고 새로운 사회에 맞는 사회의 등불을 찾아야 하는 것이 시대의 소명이자 과제일 것이다. 무릇 세상의 모든 만물의 그 쓰임은 시기에 달라질수 밖에 없는 것이다. 과거에 희망의 불꽃이었다고 하더라도 바뀌어 가는 사회에서도 여전히 희망의 불꽃으로 착각해서는 안된다. 과거의 명성을 통해 이루어진 상징성의 권위가 영원하기 위해선 부단한 자기 성찰과 자기 노력을 통해 올바른 시대의 눈과 귀를 갖고서 진정으로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낮은 곳으로 임할려고 할때에 우리 사회의 원로로서 지도자로서 추앙을 받을수 있는 것이다. 이라크파병에 찬성을 표한 김추기경의 모습에서 결코 평화주의자의 모습을 볼수 없음이요, 하나님의 이름을 내걸고 이루어진 성스러운 기독교의 십자군이 자행한 다른 종교민족의 살륙, 다른 종교문명의 파괴와 그들의 재물을 약탈한 중세의 교황의 모습과 오버랩되는게 비애감만이 남겨질 뿐이다.
종교는 영혼을 구한다면서도 영혼이 깃들어져 있는 수많은 육체를 파괴한 전쟁을 일으키고 있는 미국을 반대하고 이라크 파병반대하는 것이 과연 우리의 영혼을 멍들게 하는 것인가. 적어도 종교지도자라면 자신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타 종교국가의 국민들의 육체를 파괴하여 영혼을 죽게 하는 전쟁에 우리의 젊은이들을 보내는 것에 반대를 해야 하는 것이 합당하지 않은가. 김추기경의 이율배반적이고 자기모순성에서 벗어나긴 힘들 것이다. 바뀌어 가는 사회에 맞지 않은 종교관과 현실인식이기에 김추기경의 시대적 역할의 소임은 더 이상 주어져 있지 않은 것이다. 시몬느 베이유는 전쟁에 대한 고찰이란 글을 통해서 이렇게 말하였다. "정면에 있는 적만이 진정한 적이 아니다. 우리의 행복을 위한다면서 우리를 수단으로 밖에 보지 않는 자가 바로 진짜 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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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노트] 미국인 신부, 인혁당을 기록하다
한겨레21 | 입력2004.10.06 08:38 [한겨레]
<1975년 4월9일> 발간한 제임스 시노트 신부… 강제추방 뒤의 ‘인혁당 사건조작’ 기록 드디어 빛 봐 무고한 시민 8명에게 사형선고를 내린 인혁당 사건. 유신정권의 사건 조작을 처음폭로한 건 파란 눈의 신부였다. 그가 남긴 기록이 드디어 세상에 나오게됐다.
▣ 이춘재 기자 cjlee@hani.co.kr
박정희 정권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드러낸 사건 중의 하나가 바로 인혁당사건이다. 지난 1974년 5월 중앙정보부는 북한의 지령을 받아 남한 정부를전복시키려 한 혐의로도예종?서도원?하재완?송상진?우홍선?김용원?이수병?여정남 등 8명을구속했다. 이들은 1975년 대법원에서 사형이 확정된 뒤 19시간 만에 형장의 이슬로사라졌다.
이는 박정희 정권이 유신독재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을 억누르기 위해 조작한사건이었다. 처형된 8명은 국가전복 기도는커녕 ‘인혁당’이라는 이름조차들어보지 못한 평범한 시민들이었다. 박 정권은 살인적인 고문으로 이들한테서거짓 자백을 받아내 완벽한 공안사건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박 정권은 이 사건으로오히려 궁지에 몰리게 됐다. 조작 사실이 드러나 시민들의 강한 저항을 받게 됐고결국 5년 뒤 종말을 맞게 된 것이다.
간첩조작 폭로 뒤 한국서 쫓겨나 인혁당 사건의 조작 사실은 어떻게 알려졌을까. 조작 사실을 가장 먼저 제기한사람은 한 사람의 미국인 신부였다. 사건 당시 천주교 인천교구 총대리로 활동했던제임스 시노트(76) 신부가 그 주인공이다. 시노트 신부는 최근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하 사제단) 창립 3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출간될예정인 <1975년 4월9일>에서 인혁당 사건의 전모를 자세히 밝혔다. 1975년4월9일은 인혁당 사건 피해자들이 처형된 날이다. 시노트 신부는 같은 해 4월30일한국에서 추방당해 미국으로 돌아간 뒤 자신이 인혁당 사건 발생 무렵 겪었던 일을상세하게 기록했다. 이 기록은 지난 2001년 함세웅 신부에 의해 ‘발굴’돼 최근빛을 보게 됐다.
시노트 신부는 인혁당 사건 발표 한달 전인 1974년 4월 한 미국 대사관직원한테서 “곧 대규모 간첩사건이 일어날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박 정권이긴급조치를 막 발표한 시점이었다. “천주교 신자인 그 직원을 평소 알고 지내던미 군무원의 집에서 만났는데, 그가 그런 충격적인 얘기를 한 겁니다. 당시 미대사관 직원들은 한국의 정보요원들을 상대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나는깜짝 놀라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냐고 물었죠. 그랬더니 그가 ‘조금만 지나면알게 될 것’이라며 ‘얼마나 잘 꾸며내는지 지켜보라’고 했습니다. 그는 그날술을 많이 마셨는데, 당시 미 대사관이 한국 정부의 못된 짓을 수수방관하는 것에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시노트 신부는 그 직원의 말이 거짓이기를 바랐다. 하지만 한달 뒤 그 직원의말은 사실로 입증됐다. “신직수 중앙정보부장이 이른바 인혁당 사건을발표했는데, 어찌나 잘 꾸며대는지 나도 속을 뻔했어요. 그 신직수라는 사람은 가톨릭 신자였습니다.” 시노트 신부는 이를 계기로 국내 천주교 신부들이 박정희정권에 대한 저항에 나설 수 있도록 힘썼다. 그때는 천주교보다는 개신교 목사들이민주화와 인권운동에 더 많은 관심을 보였다. “김수환 추기경께 편지를 써서불의에 저항하도록 촉구해달라고 말씀드렸죠. 박형규 목사 등 개신교 사람들은감옥 가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고 불의에 저항했지만 당시 천주교는 비교적조용했습니다. 지학순 주교 외에는 독재정권에 저항하는 분들이 별로 없었죠.” 시노트 신부의 외침은 함세웅 신부 등 젊은 사제들의 호응을 받았다. 시노트신부와 뜻을 같이한 외국인 신부들은 함 신부 등 국내 젊은 사제들과 함께 기도회등을 열며 인혁당 사건의 부당함을 알렸다. 당시 <워싱턴포스트> 등 미국과 영국의기자들도 이 사건에 많은 관심을 보였는데, 우리말 실력이 뛰어난 시노트 신부는이들의 통역으로 활동했다.
이 기사 주소 http://media.daum.net/v/20041006083824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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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세웅 신부, 또 김수환 추기경 비판
연합뉴스 | 입력2004.07.16 04:40
함 신부는 15일 인터넷 언론 오마이뉴스와 인터뷰에서 김 추기경이 특정 언론에이용당하고 있다는 취지의 말을 하면서 "한국 사회의 인권과 개혁을 위해 사제들과학생들이 단식할 때는 찾아가지도 않던 분(김 추기경)이 정치적 목적으로 단식하는한나라당 모의원을 찾아가셨을 때 저희는 사실인가 하고 눈을 비볐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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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종교 : 사회 : 뉴스 : 한겨레 | | “주교단이 4대강 반대한다는 소리 안했다 ” | | | | 조현 기자 | |
| 정진석 추기경 |
정진석 추기경 의견 밝혀…“4대강 종교인 영역 아니다”한국 가톨릭 최고지도자인 정진석 추기경이 8일 서울 명동성동 집무실에서 “주교단이 4대강 사업이 자연을 파괴하고 난개발의 위험을 보인다고 했지 반대한다는 소리는 안 했다”며 “위험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개발하라는 적극적인 의미로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정 추기경은 이날 자신이 쓴 단행본 <하느님의 길, 인간의 길>(가톨릭출판사 펴냄) 출간에 맞춰 한 기자간담회에서 이렇게 밝혔다. 정 추기경은 또 “4대강 문제는 토목 공사하는 사람들이 전문적으로 다룰 문제지 종교인들의 영역은 아니다”라며 “4대강이 올바로 개발되느냐 안 되느냐는 결과를 보고 판단할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이날 추기경의 발언은 그동안 4대강 개발에 대해 반대해온 주교단을 비롯한 상당수 가톨릭 정서와 전혀 다른 내용이어서 논란을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인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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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사등록 : 2010-12-09 오전 09:16:28 | | ⓒ 한겨레 (http://www.hani.co.kr). 무단전재 및 재배포금지 | | =================================================================== | | | 종교 : 사회 : 뉴스 : 한겨레 | | 한국교회에 경종 “세속적 유혹에 빠지지 말라” | | | | | |
교황, 한국 주교단과 만남서 “교회의 원래 목적은 가난한 이들 위해 존재하는 것 그들의 희망 지킴이 되라”프란치스코 교황은 역시 그다웠다. 그의 교회론은 상황에 따라 변하는 상황논리가 아니었다. 그는 초지일관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었던가’를 주지시킨다는 점에서 베드로의 후계자다웠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방한 첫날 마지막 일정은 한국 주교들과의 만남이었다. 한국 주교들은 늘 그랬듯이 교황의 치하를 기다렸을지 모른다. 이 땅에 들어온 지 불과 200여년 만에 굳건히 뿌리를 내리고, 현재 모든 주류 종교 가운데 신자 수가 가장 급증하고 있는 한국 가톨릭이니 그럴 만도 하다. 더구나 사제와 수도자 지원자 감소에 허덕이는 유럽과 미주와 달리 여전히 지원자가 많고, 신자들의 신앙 열기가 세계 최고라 할 만한 그 역동성에 신앙의 선배 국가들에서 온 사목자들도 늘 놀라곤 했을 정도니 말이다. 그런데 14일 서울 중곡동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에서 30여명의 주교들을 만난 교황이 선택한 것은 칭송이 아니었다. 그는 “교회가 너무 잘나갈 때 가난한 사람들을 잃어버리는 경향이 있다”고 말했다. 한국 교회가 가난한 이들이 문턱을 높게 여길 만큼 부자들 중심으로 움직인다거나 많은 사제들이 부자 교인들과 어울려 골프를 즐기는 등의 한국적 상황을 너무도 잘 파악하고 있는 듯한 발언이었다. 실제 한국 가톨릭은 인구 대비 신자 수가 서울 목동은 20%가 넘는 데 반해 신정동은 5%밖에 안 될 정도로 빈부 지역 간에 신자 수가 큰 차이가 날 정도로 부자화되어 가는 실정이다. 따라서 교계 주요 지도자들도 사회적 약자보다는 부자와 권력자들의 이익을 위한 발언으로 이어지고 있다는 분석이 나오고 있다.교황은 “한국 교회가 번영했으나 세속화되고 물질주의적인 사회의 한가운데 살고 있어 기업적 능률만을 중시하며 세속적 기준과 생활양식, 사고방식을 우선하려는 유혹을 받는다”며 “정신적 사목적 세속성에서 하늘이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빈다”고도 했다. 교회 선교라는 미명하에 교회도 권력적 힘을 갖고, 부를 축적해야 한다며 사회적 약자를 외면하고 권력과 부자 편만 들며 반그리도적 수단을 정당화시키는 것에 대한 분명한 경계였다. 사목적 목적으로 방한한 그가 이날 주교들에게 내린 사목 지침은 세 가지였다. “첫째, 예수가 가난한 사람들을 얼마나 사랑했는지와 교회의 원래 목적이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둘째, 한국 가톨릭은 초기 평신도들에 의해 세워져 성직자들이 가질 수 있는 유혹을 쉽게 극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따라서 성직자주의를 경계하라. 셋째, 주교는 사제들이 대화하기 원하면 언제든 응하며 사제와 가깝게 느낄 수 있게 해야 한다.” 조현 종교전문기자 cho@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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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
나무아미타불
한국천주교단 뒤에는 미국과 로마교황청이 있잖아요. 든든한 빽을 믿고 큰소리 치는 것이지, 무슨 개인적 소신?
박, 전 등 독재정권하에서도 자기 목소리 낼 수 있었던 이유죠. 불교는 뒤에 누가 있나요. 결국 5공, 1980년 10. 27일(일명 10. 27법난)에
전국의 사찰 법당에 군인들이 군화를 신고 들이닥쳐 많은스님들을 연행해 고문을 했습니다. 5공정부를 지지해달라는 요구를 당시 총무원에서 무시한 이유가 큰 것이죠.
물론 명목은 불교정화 이유를 들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