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과거인이 살아가던 조건이나 환경을 무시한 채 자기시대의 어림짐작으로 과거사람의 행동을 평가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오늘은 고려 윤관장군의 동북9성정벌에 대한 단상입니다.
고려하면 떠오르는 북방정책. 영토확장. 커... 영토확장이라....좋지요.^^
고려라고 해서 영토확장에 대한 소망이 왜 없었겠습니까? 기것해야 고려시대사를 다룬 책 몇권 사는 비용이면 그 시대를 얼마든지 '품평'할 수 있는 현대의 우리입니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많은 재산과 인명피해를 감수하며 동북9성을 힘들여 개척한 장본인들이죠. 그런 그들이 동북9성을 포기하기까지 얼마나 심사숙고하고 마음 아파했는지를 현대인들은 알아야 할겁니다. 즉 그들이라고 해서 줏대없이 영토를 포기한게 아니란 말입니다.
물론 현지 야전군의 사령관으로 부하와 생사고락을 같이 하며 그 땅을 개척한 장본인인 윤관등이 상부에 불만을 품은 것은 당연한 입장입니다. 하지만 중앙정부의 입장에서도 단기전으로 끝나리라던 처음의 계산과는 달리 온 나라의 국력을 경제성 여부도 불투명한 동북의 변경에 밑도 끝도 없이 쏟아붓는 것은 재정적 차원에서뿐 아니라 민심의 수렴에도 매우 위험하며 큰 불이익이 됩니다.
그리고 관심과 인적자원이 오래도록 한 곳으로 몰리는 것은 지방 재지세력의 성장과 무신세력의 강화등으로 나타나 고려왕조의 존립을 기반에서부터 약화시킬 가능성이 큽니다. 일본의 헤이안 왕조가 붕괴된 것도 동북지역으로의 진출에 너무 많은 국력을 쏟아붓는 와중에 무신세력과 재지세력이 발호하면서 비롯되었으니까요.
당시 완안부의 아골타는 아직 청년이었지만 그의 후견인인 우야소가 만만치 않은 세력으로 여진의 통일을 주도하고 있었죠. 하물며 고려의 북벌군과 대적한 것은 완안부의 핵심이 아닌 끄트머리에서 살아가는 부족들이었습니다. 우야소가 그들의 편을 들면서 고려군은 점점 버티기 곤란한 상황에 직면합니다. 여진의 집요한 공격과 게릴라전은 지키기도 힘들게 만듭니다.
동북9성에서 철수하지 않았다면? 내 생각이지만...
오히려 고려는 군대의 비대화와 이로 말미암은 사회제도의 변화, 그리고 재정곤란으로 혼란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저도 고려장정 십수만이 동북9성에 있었다는 기록을 곧이곧대로 믿지는 않습니다만 몇만이 있었건간에 그 수치는 고려가 지속적으로 감내할 정도를 이미 넘어선 것이라는 것은 사실로 보입니다.
고려말 공민왕이 이성계로 하여금 요동을 공략한 후에 그 땅을 버린것을 아쉬워하는 주장도 있는 것으로 압니다. 그러나 이것은 말이 되지를 않습니다. 공민왕 말기의 고려는 기보유하고 있는 영토조차 제대로 지켜내지 못하여 중앙집권화가 위험할 정도로 떨어지고 외적의 침략에 시달림 당하는 터에 국제적 긴장관계를 몰고 올수도 있는 영토에 눈독을 들일 수는 없었을 겁니다. 많은 분들의 오해와는 달리 함경도로의 팽창은 어디까지나 쌍성총관부의 접수를 통하여 이루어진 결과입니다.
중국에도 보면 촉한의 제갈양은 수차례의 북벌 도중에 점령한 약간의 영토를 북벌의 실패 이후에도 지켜내려고 발버둥치지는 않았습니다. 천시와 지리가 따라주지 않은 상황으로 말미암아 철수하면서 힘들여 얻은 땅을 고스란히 위나라에 넘겨주고 철수했죠. 그라고 해서 왜 그냥 물러나고 싶었겠습니까? 그 땅을 게속 차지하려다가는 북벌군의 순조로운 후퇴마저 불가능해지고 휴식도 취하지 못한 상태에서 자멸할 것이 뻔했기 때문입니다.
나름대로는 당시시대에 합리적인 조치였었다고 생각이 됩니다.
다른 분들의 생각은 어떻습니까?
유능한 지휘관이 이끄는 정예 수천 기병이면 수만 보병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듯 보입니다만ㅡㅡ;; 게다가 고려의 재정 여건상 17만 대군을 언제까지 주둔시킬 수도 없고 상시가용 가능한 병력은 수만에 지나지 않는데...이정도면 게릴라전으로 충분히 해볼만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고요...
여진과의 전투는 다른 전투보다는 병력이 맞붙는게 수가 좀 떨어지죠. 거기다가 위에서 말했듯이 여진편제는 50기 단위의 소규모입니다. 50기 단위 하나하나마다 명령을 내리는데서 2000~3000명 규모만 처도 40~60부대입니다. 2000명이나 3000명도 40~60부대나 되는데 이런
부대의 간단한 통솔체계도 마련하지않고 갑자기 2만~3만 데려다 놓으면 지휘가 될까요? 물론 거란이야 500~700명 단위제입니다. 7만 데려다 놔봤자 기껏해야 100단위죠. 근데 여진은 2만 동원했다처도 400단위입니다. 물론 중간단위도 있었겠죠. 하지만 2000~3000 명에서 만도 40~50단위나 되니 여기서 확립한 지위체계는
괴자마 제도는 정확하게 입증되는것은 거란과 북송 정벌전이었죠. 하지만 괴자마 제도의 전신은 있었습니다. 초기 괴자마 제도는 막강한 적 앞에서도 후퇴하지 말자는 각오로 중장기병 여럿의 몸을 묶고 돌진하는것이었죠. 고려와의 전투에서 이 괴자마 전투의 전신이 활용됬습니다 ^^
그런데 괴자마란게 정말로 사슬로 묶어 연환마를 만들어 뛰어드는 건가요, 아니면 멘엣암즈에 나온 것 처럼 놀라운 밀집 대형이나 연계 작전으로 봐야 하는건가요? 물론 기동성을 포기한 괴자마가 사슬로 밀집대형을 유지하려 한건 이해가 가지만 어느 쪽이 맞는지;;(개인적으론 전자가 맞는 것 같습니다만;;)
글쎄요;; 그건 엄청나게 특수한 상황이고;; 그 엄청나게 특수한 상황때에 약한것을 모든 전투에 취급하는건 무리가 있지않을까요 ^^: 예를들어 모든젙우의 보병은 담력이 세기 때문에 괴자마의 다리를 자를수 있다;; 라고 추측해서 괴자마는 다리자르면 약하다;; 라고 보기엔 무리가있죠
장창을 들고 선 보병이 장창만으로 기병에게 승리할 수는 없습니다. 규율이나 사기 같은 훈련상태가 오히려 더 중요합니다. 서양에서도 장창진 등장 이후에도 중기병이 창병을 꺾은 사례가 없지는 않았고(자세한 사례는 기억이 안 납니다) 장창 없이도 보병만으로 기병을 격퇴한 사례도 있죠.
파이크가 6미터 7미터 하는 식으로 말하니 기병돌격을 저지하려면 창이 그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지만, 실제로 3m만 돼도 '아주 긴' 창입니다. 3m짜리 막대기를 앞으로 세우고 걸어가 보세요. 힘이 좀 약하다 싶은 분들은 끝을 고정시키는 것도 약간 벅찰 정도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반적인 기병창(삭, 랜스) 평균이 3m이긴 하지만, 기병은 창을 양 손으로 쥘 수가 없으니 창을 좀 짧게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보병과의 창 길이 경쟁에서는 창 길이가 같다면 말 몸통 때문에 기병창이 더 불리하구요. 적의 창이 내 말의 목을 뚫었는데 내 창은 아직 적의 몸에 닿지 않는 거죠.
지금 생각해보면 중국 역사에서 파이크방진이 등장하지 않은 이유는 아무래도 전투방식의 차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실제 중기병이 파이크병을 격파한 사례도 몇 차례 있기는 합니다만...진열이 정비되기 전 행군대형에서 공격받은 경우가 많았거든요. 어차피 회전에서 써먹으라고 있는 파이크 방진인데 중국 전쟁에서 써
성 주요전투는 강동6주와의 거란과의 전투와 다릅니다. 뭐 거란군과의 싸움이야 간단하게 한전투에서 5~6만 넘겼죠. 귀주대첩에서야 말로 고려군 20만에 거란군도 15만 정도;;; 하지만 여진하고 싸울때는 기껏해야 2~3만을 넘지 않았습니다.
유능한 지휘관이 이끄는 정예 수천 기병이면 수만 보병 정도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듯 보입니다만ㅡㅡ;; 게다가 고려의 재정 여건상 17만 대군을 언제까지 주둔시킬 수도 없고 상시가용 가능한 병력은 수만에 지나지 않는데...이정도면 게릴라전으로 충분히 해볼만 합니다. 실제로 그렇게 되었고요...
여진과의 전투는 다른 전투보다는 병력이 맞붙는게 수가 좀 떨어지죠. 거기다가 위에서 말했듯이 여진편제는 50기 단위의 소규모입니다. 50기 단위 하나하나마다 명령을 내리는데서 2000~3000명 규모만 처도 40~60부대입니다. 2000명이나 3000명도 40~60부대나 되는데 이런
여진족은 항상 적에 비해 숫적열세인 반면 기동성에서 앞섰기 때문에 웬만한 병력 차이는 크게 신경쓰지 않을 것 같습니다. 수백년 뒤 금의 후예 후금군이 조명 연합군을 몰살시킬 때도 전력비는 1:2에서 심지어 1:10으로 추정할 정도로 열세였으니...
부대의 간단한 통솔체계도 마련하지않고 갑자기 2만~3만 데려다 놓으면 지휘가 될까요? 물론 거란이야 500~700명 단위제입니다. 7만 데려다 놔봤자 기껏해야 100단위죠. 근데 여진은 2만 동원했다처도 400단위입니다. 물론 중간단위도 있었겠죠. 하지만 2000~3000 명에서 만도 40~50단위나 되니 여기서 확립한 지위체계는
2만명정도의 단위부대를 지휘하고 통솔하는데 큰 도움이 됬을겁니다.
그렇군요. 잘 알겠습니다. (오랜만에 확인해 봤더니 많이 달려 있었네요^^;)
워게임초보 님 말대로 여진족에게 소대 단위 부대가 있다는게 전투력 향상에 크게 기여했을 듯 싶네요. 하급부대 지휘관들로선 병력을 유연하게 운용하고, 정찰, 소규모 전투에서도 훨씬 용이하게 기동할 수 있었을테니...결과적으로 대부대의 유기적인 병력운용에 기여했을듯.
그런데 여진이 그 때부터 과자마를 운용했었나요;;;?
괴자마 제도는 정확하게 입증되는것은 거란과 북송 정벌전이었죠. 하지만 괴자마 제도의 전신은 있었습니다. 초기 괴자마 제도는 막강한 적 앞에서도 후퇴하지 말자는 각오로 중장기병 여럿의 몸을 묶고 돌진하는것이었죠. 고려와의 전투에서 이 괴자마 전투의 전신이 활용됬습니다 ^^
그런데 괴자마란게 정말로 사슬로 묶어 연환마를 만들어 뛰어드는 건가요, 아니면 멘엣암즈에 나온 것 처럼 놀라운 밀집 대형이나 연계 작전으로 봐야 하는건가요? 물론 기동성을 포기한 괴자마가 사슬로 밀집대형을 유지하려 한건 이해가 가지만 어느 쪽이 맞는지;;(개인적으론 전자가 맞는 것 같습니다만;;)
사슬로 3마리씩 묶어서 돌진시키는겁니다. 이렇게 하면 속력, 기동성은 떨어져도 충돌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따라서 이런 괴자마들은 중앙에 절대로 배치 안합니다;; 주로 양익에 배치하죠; 선회는 아주 크게 원을 만들면서 할수밖에 없으니까요^^
근데 괴자마라는게 3마리중 한마리의 다리를 도끼로 잘라내버리면 3마리가 전부 못움직이는 단점이 있지않나요?
;;;; 사람과 말이 옷을 3벌로 껴입고 3마리를 묶어서 거의 그당시 중전차와 같은 충돌력으로 달려오는데 그앞에서 버틸수있을 보병이 있을까요?;;; 그리고 달려오는말 다리를 도끼로 어떻게 자르시려는것인지 ^^:
실제 악비가 치뤘던 전투들은 중보병을 이용해 금의 기병돌격을 막아내지 않았나요?;;
대체로 창병을 이용하면 막을수있죠^^ 또 고려시대에는 앞에 검차를세워놓아서 막았기도 햇구요. 그리고 위에 쓴말은 기병 3마리가 달려오는데 엎드려서 말다리를 도끼로 자를수있을만큼 담력센 보병이 있을까 하는의도였습니다^^:
담력센보병있습니다 중국의 어느전투인지는 몰라도 있었던일입니다 알기쉬운손자병법인가에서 봤어요 어떤장군인지는 몰라도 보병들한테 도끼를 나눠준후 괴자마의 다리를 자르라고 시켰고 실제로 아주 잘 잘라서 승리했습니다
글쎄요;; 그건 엄청나게 특수한 상황이고;; 그 엄청나게 특수한 상황때에 약한것을 모든 전투에 취급하는건 무리가 있지않을까요 ^^: 예를들어 모든젙우의 보병은 담력이 세기 때문에 괴자마의 다리를 자를수 있다;; 라고 추측해서 괴자마는 다리자르면 약하다;; 라고 보기엔 무리가있죠
기병은 다리가 약점이라는 식으로 많이들 말하긴 합니다만, 실제로 기병의 다리를 공격하긴 정말 힘듭니다. 특히 '도끼'로 그 다리를 자른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요. 말 다리를 베려면 무기를 가로로 휘둘러야 되는데 그럼 병사 주변 공간이 텅 비거든요.
말 다리를 베려고 보병을 듬성듬성 배치한다? 그럼 보병들 다 밟혀 죽지요. 보병을 빽빽하게 배치한다? 그럼 말 다리를 못 벱니다.
그러고보면 중국에는 어째서 15~16세기에 서양에서 그랬던 것처럼 파이크방진이 본격적으로 등장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네요=_=;; 파이크방진+중국식 강력한 석궁 조합은 기병에게 쥐약이련만;;; 역시 기마궁수 때문일까-ㅅ-;;
파이크방진이라고 해도 파이크라는 무기 하나만으로 끝나는 건 아니니까요. 창이 길어지는 만큼 보병 개개인의 숙달도도 더 높아야 하고, 전열도 더욱 정교하게 맞춰야 합니다. 그렇게 긴 물건 잘못 쓰다 동작이라도 엉켜버리면 혼란속에 떼죽음 당하겠죠.
게다가 장창을 들면 보병 개개인의 방어력은 떨어지게 됩니다. 방패와 갑옷이 경량화되니까요. 또 창이 길어지는만큼 창 값도 더 비싸지게 되죠.
장창을 들고 선 보병이 장창만으로 기병에게 승리할 수는 없습니다. 규율이나 사기 같은 훈련상태가 오히려 더 중요합니다. 서양에서도 장창진 등장 이후에도 중기병이 창병을 꺾은 사례가 없지는 않았고(자세한 사례는 기억이 안 납니다) 장창 없이도 보병만으로 기병을 격퇴한 사례도 있죠.
파이크가 6미터 7미터 하는 식으로 말하니 기병돌격을 저지하려면 창이 그정도는 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분이 많지만, 실제로 3m만 돼도 '아주 긴' 창입니다. 3m짜리 막대기를 앞으로 세우고 걸어가 보세요. 힘이 좀 약하다 싶은 분들은 끝을 고정시키는 것도 약간 벅찰 정도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반적인 기병창(삭, 랜스) 평균이 3m이긴 하지만, 기병은 창을 양 손으로 쥘 수가 없으니 창을 좀 짧게 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보병과의 창 길이 경쟁에서는 창 길이가 같다면 말 몸통 때문에 기병창이 더 불리하구요. 적의 창이 내 말의 목을 뚫었는데 내 창은 아직 적의 몸에 닿지 않는 거죠.
굳이 못 만들 수준은 아니라고 봅니다;; 송의 철강 생산량은 세계 최고였고 어차피 서양에서도 파이크든 화승총이든 제대로 된 훈련방식이 등장하는 것은 나사우 마우리츠 이후이고 그 전까지 스위스 창병이든 란츠크네흐트든간에 특별한 제식훈련은 없었으니까요.
지금 생각해보면 중국 역사에서 파이크방진이 등장하지 않은 이유는 아무래도 전투방식의 차이 때문인 것 같습니다;; 실제 중기병이 파이크병을 격파한 사례도 몇 차례 있기는 합니다만...진열이 정비되기 전 행군대형에서 공격받은 경우가 많았거든요. 어차피 회전에서 써먹으라고 있는 파이크 방진인데 중국 전쟁에서 써
먹으려던 것은 좀 무리였을까요;;; 물론 스위스 창병같은 경우 파이크주제에 기동 가능합니다만 이 정도 수준의 파이크병을 만드는건 힘드니까요-ㅅ-
아뇨, 전 못 만든다는 게 아니라 만들 필요가 없었다는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