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콜린스는 우리에게 영화로 많이 알려져 있습니다. 아일랜드 출신의 감독 닐 조단과 역시 아일랜드 출신의 영화배우 리암 니슨이 만든 이 영화는 1996년 베니스 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함으로써 논쟁에 다시 불을 붙인 격이 되었습니다.
마이클 콜린스에 대한 아일랜드인 사이의 평가는 여전히 갈립니다. 무장투쟁을 통해 완전식민 상태를 극복한 영웅이라는 평가와 아일랜드 남북분단의 주역이라는 비난이 엇갈려 역사책도 이 부분을 정리하지 못하고 있어 공식적인 역사책에서 그의 이름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향의 마이클 콜린스의 생가 표지판은 지금도 야유와 흠모의 상반된 낙서가 가득합니다. 게다가 영국 입장에선 콜린스가 흉악한 테러리스트일 뿐이어서, 영국 본토와 영국령 홍콩에선 영화 상영이 금지되고 있기도 합니다. 도대체 그는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저 역시 자세히 모르는 상황이므로 가치판단을 되도록 유보한 채 사실만 기술하기로 하겠습니다.
1916년 4월 24일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아일랜드 독립군은 중앙우체국을 점거하며 영국와의 대대적인 투쟁을 벌입니다. 이것이 이른바 부활절봉기 또는 중앙우체국 전투입니다. 당시 런던에서 공무원생활을 하던 콜린스는 의용군 장교로서 이 전투에 참가하게 됩니다. 하지만 6일간의 항쟁 끝에 영국군의 압도적 군사력 앞에 무릎을 끓게 됩니다. 지도자들은 미국 시민권을 갖고 있는 아몬 드 발레라를 제외하고 전원 처형을 당하고 마이클 콜린스를 포함한 생존자들은 모두 투옥이 됩니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절친한 친구 해리 볼랜드와 함께 독립운동을 다시 일으키기 시작합니다. 그는 중앙 우체국 전투처럼 끝이 뻔한 정면 대결을 지양하고 게릴라군을 조직, 경찰에서 탈취한 무기들로 무장을 시킵니다. 동시에 분리주의를 표방하는 신 페인당(Sinn Fein : "Ourselves")을 지지하는 캠페인에 나섭니다.
민족주의 진영의 리더 아몬 드 발레라의 탈옥을 지휘한 후 아몬 드 발레라를 의장으로 하는 신 페인당의 정보기구 담당자로서 게릴자 조직 '아일랜드 의용군'을 이끌며 곳곳에서 영국의 철권 통치에 항거하는 게릴라전을 펼칩니다. 막강한 영국군에 대항하는 그의 군대는 변변한 무기 하나 없는 농민과 노동자 계급 출신 청년들로 구성된 아일랜드 의용군이었기에 그는 게릴라전을 펼칠 수밖에 없었고 그는 중국의 모택동과 이스라엘의 독립운동가 샤미르가 모범으로 삼은 게릴라전의 천재였습니다. 그에 이어 광범위한 지하정보망을 구축하고 아일랜드 의용군을 미제 톰슨 기관총으로 무장시켜 처음으로 아일랜드는 대 영국 상황의 주도권을 쥐게 됩니다.
그러자 영국 정부는 혈안이 되어 그를 찾지만 체포는 커녕 얼굴도 알아내지 못합니다. 영국 정부는 이같은 아일랜드의 투쟁에 대해 무차별 투옥과 고문으로 응수를 합니다. 주택과 공장을 불태우고 수백명의 혐의자를 재판도 없이 처형을 하는 등 무시무시한 테러가 아일랜드에 보복으로 가해졌습니다.
상황을 호전시키기 위해 드 발레라는 아일랜드 문제에 있어 미국의 지지를 얻기 위해 미국행을 감행합니다. 이 와중에 마이클 콜린스는 지하정보조직을 바탕으로 암살단을 조직하여 경찰들을 차례로 제거를 하고 영국 정부는 더블린에 정보 요원들을 파견하고 테러 목적의 반군사조직 블랙엔텐스를 창설하여 이에 응수를 합니다. 콜린스는 이 정부기구를 무력화시키기 위해 영국-아일랜드 전쟁 역사상 가장 대규모적인 암살을 감행합니다. 1920년 11월 21일 일요일 새벽 12명의 영국군 장교가 암살을 당했고 그 중 일부는 아내가 지켜보는 가운데 살해됩니다. 이것이 그 유명한 '피의 일요일' 사건입니다. 그에 대해 영국 정부는 암살자를 수색하는 과정에서 결승전이 한창인 크록 파크 풋볼 스타디움을 포위하고 경기장에 운집한 군중을 향해 난사를 함으로써 12명의 관중이 사망을 합니다. 미국에서 돌아온 드 발레라는 콜린스에게 암살 및 게릴라전을 포기할 것을 명령하고 그에게서 의용군의 작전권을 회수합니다.
그 후 영국은 평화를 선포하고 협상을 요구합니다. 이 때 드 발레라는 뒤로 물러서고 자신은 게릴라이지 정치가가 아니라는 콜린스의 항의를 무시하며 그를 억지로 런던의 협상테이블로 내 보냅니다. 여기서 콜린스는 아일랜드 일부만으로 구성되는 아일랜드 공화국의 수립을 약속한 런던협약을 가지고 돌아오게 됩니다. 비난이 쏟아지는 와중에 아일랜드 의회는 근소한 표차로 협약을 받아들이기로 결의를 합니다. 그러나 발레라는 지지자들을 이끌고 아일랜드 의회를 탈퇴하게 되고 협약지지파와 반대파 간에 내전이 시작됩니다. 그는 내전을 종식시키기 위한 평화협상을 위해 아일랜드 자치국 반대세력(즉 완전독립을 주장하는)의 중심지인 코크로 가는 도중 포위를 당해 영국인이 아닌 아일랜드인의 손에 살해를 당합니다.(1922년 8월) 이 소속불명의 아일랜드 젊은이에 대해 전해지는 것은 없지만 근처에 드 발레라가 있었다는 것이 사실로 확인되면서 그의 지시에 의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을 낳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