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크랩 [미술사학자 화선지畵禪智 조정육님] [6] 위대한 영혼의 빈 걸망 - 법정스님을 추모하면서

[카페주인(상주도림사자용스님)]

 [위대한 영혼의 빈 걸망-법정스님을 추모하면서(2010.03.14.)]



▲ 대나무 평상에 가사로 덮은 스님의 법구 ▲

 몇 해 전,
법정 스님의 얘기를 후배한테 듣고 감동을 받아 쓴 글입니다.

2년 전에 출간한『깊은 위로』에 실었던 내용인데
법정스님을 추모하면서 다시 올립니다.

다시 읽으니 새삼 제 자신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위대한 영혼은 시공간을 초월하여 변함없이 가르침을 주십니다.

조정육 합장
 


<오백나한>, 비단에 담채, 55.1×38.1cm, 고려시대, 개인 소장
 
수업을 마치고 지하철을 탔는데 목이 몹시 말랐다.
물 좀 마셨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이 몸 깊은 곳에서부터 올라왔다.

그 때문인지 피로와 목마름이 겹쳐 잠이 쏟아졌다.
이것저것 일이 겹친 탓인지 요즘은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다.

정신없이 눈이 감기는 것을 억지로 참고
버스로 갈아 타기 위해 신사역에서 내렸는데
생과일쥬스를 파는 집이 눈에 띄었다.



▲ 송광사 경내를 나서는 법구 행렬 ▲

반가움에 나는 조그마한 간이 까페로 한걸음에 달려 갔다.
바나나와 키위가 섞인 과일 쥬스를 얼음 없이 주문하자
그 자리에서 바로 갈아주었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플라스틱 컵에 담긴 쥬스에는
뚜껑이 덮여 있었고 빨대가 꽂혀 있었다.
요즘 많이 쓰는 1회용 컵이었다.

얼마나 목이 말랐던지 쥬스맛을 천천히
음미해볼 틈도 없이 다 마셔버렸다.



지하도에서 빠져 나가기도 전에 바닥까지 다 마셔 버렸다.

신선한 쥬스를 마시고 나니까
갑자기 생기가 돌면서 살 것 같았다.

다 마신 쥬스잔을 버리기 위해 쓰레기통을 찾아봤으나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 다비장으로 향하는 법구 행렬 ▲

한쪽 손에는 가방을, 다른 손에는 빈 쥬스잔을 들고
한참을 걸어 버스 정류장에 도달할 때까지
쓰레기통은 보이지 않았다.

양손에 물건을 들고 걷기가 귀찮아진 나는
빨대가 꽂힌 플라스틱 쥬스잔을 가방에 넣었다.

그리고 한참을 버스를 기다렸다.
출퇴근 시간이 아니어서인지 버스는 쉽게 오지 않았다.



▲ 제자들의 의해 운구되는 스님 ▲

그 때 어떤 남자가 내 곁에 와서 담배를 피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바람이 내 쪽을 향해서 불어오고 있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담배 연기.
나는 짜증섞인 눈빛으로 그 남자쪽을 바라 보았다.
왜 하필이면 이쪽에 와서 담배를 필게 뭐람.

그런데 그 남자가 하필 그 곳에서 담배를 핀 이유는
그 곁에 바로 재떨이를 겸한 쓰레기통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법구의 뒤를 따르는 추모객들 ▲

나는 버스만을 쳐다보느라 바로 곁에
쓰레기통이 있는 지조차도 모르고 서 있었다.

이 곳에 내 컵도 버려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서 쓰레기통을 바라보니까
얼마나 많은 일회용 컵과 캔이 버려져 있던지
바닥까지 넘쳐 있었다.



▲ 물결처럼 밀려가는 행렬 ▲

그 때, 마침 버스가 왔다.

아무리 얼굴이 두껍기로서니 바닥에까지 쓰레기를
버릴 수가 없어 가방에서 꺼낸 컵을 든 채 그대로 버스를 탔다.

버스에서 자리를 잡고 앉아 버리지 못한 컵을 보고 있자니
갑자기 후배가 한 말이 떠올랐다.

어제는 가끔씩 전화통화를 하는 후배와 통화를 했었다.

그 후배는 대학원에서 만났는데,
대학원에 오기 전에는 스튜어디스를 했단다.

공부도 그렇고 일도 그렇고 아이 기르는 문제까지도
억척스러울 정도로 딱 부러지게 잘 하는 후배다.

아마 스튜어디스를 할 때도
그녀의 보살핌을 받는 승객들은 편안했을 것이다.

이런 저런 얘기가 오간 후 우리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무덤덤한 일상 속에서
어떻게 하면 의미있게 살 것인가에 대해 화제를 옮겼다.



▲ 불들어갑니다를 외치며 불을 지피는 장면 ▲

그러다 우연히 법정스님 얘기가 나왔다.

얼마 전에 길상사에서
법정 스님의 해제 법문이 있어서 다녀왔다고 했다.

어린애가 둘이나 있는 주부가 웬만한 정성 아니고서는
스님의 법문을 듣기 위해 쫓아가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닐 터였다.

특별히 법정 스님을 좋아하는 이유라도 있느냐는
나의 말에 그녀의 과거 한 토막이 흘러 나왔다.



▲ 처음 다비의 장면 ▲

지금으로부터 10여 년 전,
파리에서 한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였다고 한다.

승객을 300여명 수용할 수 있는 비행기인만큼
스튜어디스들도 담당구역이 정해져 있었다.

그녀는 2층에 있는 2등석이 담당구역이었다.
그런데 그 날은 일반석이 만석이어서
2등석을 일반석으로 전환하여 손님을 받았다.

그렇게 해서 일반석 표를 산 법정스님이 뜻하지 않게
2등석에 앉아 오게 되었고 그녀의 시야에 들어오게 되었다.



우리가 비행기를 타면,
승무원들은 그냥 기내식과 커피나 가져다 주고,
내릴 때쯤이면 면세품을 사려는 사람들을 위해
예쁜 미소로 물건을 건네주는 사람 정도로 알고 있었다.

나는 그 정도로만 생각했다.
만약 커피를 서비스할 때 승객이 잠들어 있으면,
무식하게 흔들어 깨우지 않고 앞좌석 뒷면에
포스트잇을 붙여 놓는 센스를 가진 사람들.
그 정도가 내가 알고 있는 승무원의 이미지였다.

그런데 후배 얘기를 들어 보니까, 그 정도가 아닌 모양이었다.
승무원들은 승객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세심하게 알고 있어야 하며,
승무원 교대가 있을 경우 다음 근무자한테
각 승객들에 대해 상세하게 정보를 넘겨 준다고 한다.

어떤 승객이 몸 상태가 안 좋은지,
식사는 했는지 안 했는지,
화장실은 얼마나 자주 가는 지 등,
승객에 관한 정보라면 시시콜콜한 것까지도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그렇게 자세히 관찰해야 하는 승객이고,
또 법정스님은 평소 후배가 책을 통해 잘 알고 있는 분이셨다.

당연히 더 신경이 쓰였을 것이다.



▲ 영정影幀 ▲

그런데 프랑스에서 김포로 오는 9시간 동안
법정스님은 일체 식사를 하지 않으셨다.

고기나 생선은 물론이고
야채에 연어알이 뒤덮인 샐러드조차도 전혀 입에 대지 않은 채
처음 비행기를 탄 모습 그대로 내릴 때까지
꼼짝도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아 계셨다.

그래서 너무 걱정이 된 후배가
구아바 쥬스와 빵을 갖다 드리면 그것은 조금 드셨다.

법정스님이 승무원을 먼저 부르는 일은 한 번도 없었고
후배가 먼저 갔다 드리면 거절하지는 않으시고 받으셨다.

9시간 동안을 쥬스 몇 잔과 빵과 물만을 드시면서도
아무런 불만을 느끼지 못하시는 스님을 보면서 후배는
글 속에서보다 더 깊은 감동을 받았단다.

그 분은 그렇게 정갈하게 살아가는 것이 생활화 된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여기까지 얘기가 진행되었더라면 그저 그러려니,
하고 잊어버릴 수도 있는 에피소드였다.



이야기는 그 다음부터였다.

후배가 한국에 와서 경복궁을 구경한 후
우연히 그 곁에 있는 법련사에 들르게 되었다.

법련사 1층 서점에서 책이나 몇 권 볼까 해서였다.
그런데 그 곳에서 법정 스님을 다시 만나게 된 것이다.

법정 스님은 대번에 후배를 알아보면서
차 한 잔 하고 가라고 하셨다.

그러면서 안쪽에 있는 어느 스님 방에 가서
다락을 뒤적거리면서 당신의 걸망을 꺼내셨다.

그 때 걸망 안에서 나온 컵이 바로 후배가 스님께
구아바 쥬스를 대접했던 1회용 종이컵이었다는 것이다.

비행기 안에서는
원래 한 번 쓴 컵은 두 번 다시 쓰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한 번 비행기가 이륙하여 착륙할 때까지
쓰는 컵이 대략 2천개 쯤 된단다.

후배도 또한 스님한테 쥬스와 물을 대접할 때마다
당연히 새 컵에 담아서 드렸고,
누구나 그러하듯 스님도 그 컵을 버렸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법정스님은 끈적거리는 종이컵을 버리지 않고
빈 걸망에 넣어 가지고 나와 씻은 후
그걸 말려서 다시 쓰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 스님을 보고 후배는 엄청난 충격과 경이로움을 느꼈다.
그 날 이후 후배는 어떤 것도 함부러 버리지 않았다고 한다.

컵을 보고 있노라니 법정 스님의 가르침이
그대로 내게 전해지는 것 같았다.

돈 몇 푼이 문제가 아니라
아낄 수 있는 것은 최대한 아낄 수 있는 마음.
다른 사람이 뭐라 하든 상관없이 자신의 신념대로 살아가는 사람.

그런 사람의 모습에서는 향기가 난다.

그 향기로 후배의 인생이 달라졌고
또 나의 인생도 달라질 것이다.

종이컵보다 더 단단하고 견고한 플라스틱컵이
찬장 속에 있는 한 이 지상의 어느 한 켠은 조금 더
깨끗하고 정갈해질 것이다. (『깊은 위로』중에서)

조정육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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