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왕 뜸부기입니다. 의왕의 새(鳥) 찾기 전문가들이신 S선생님께서 발견하시고 K회장님께서 출몰 지역을 조사하셔서 찍을 수 있었습니다. 두분께 감사드립니다.
사실 뜸부기가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은 오빠생각이란 노래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최순애여사가 작사했다는 이 노래는 일제강점기 때 나온 노래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언제 나온지는 잘 모르겠군요. 단지 최순애 여사가 12살에 작사했다하니 1920년대로 추정됩니다. 네이버를 검색해도 최순애 여사의 연표는 나오지 않군요(최순애를 검색하니 최순애미용실이 나옵니다)
최순애 여사는 시적 재능이 상당했던 분인 모양인데 남편은 고향의봄을 작사하신 이원수선생이었습니다. 이원수 선생은 애국 운동으로 감옥 생활을 한 경력도 있고 항일 운동의 대표적인 아동문학가였습니다. 제가 초등학교 시절 5학년 국어책에 ‘소가 된 게으름뱅이’라는 이야기를 지은 분이었습니다. 그의 고향은 경상도 마산인데 ‘고향의 봄’ 시적 소재지는 이원수 선생이 성장했던 창원시의 소답동이라고 합니다. 반면에 최순애 여사는 경기도 수원이 고향이었습니다. 즉 의왕이란 말이지요. 그 당시 수원에서도 많은 뜸부기가 있었던 모양이고 이번에 발견한 뜸부기는 80년이 지나서 다시 보는 오빠생각의 정감이 살아나는 그 뜸부기란 말이지요.
뜸북 뜸북새 논에서 울고/ 뻐꾹 뻐꾹새 숲에서 울 제/ 우리 오빠 말타고 서울 가시면/ 비단 구두 사가지고 오신다더니
서정적인 이 노래는 구전(口傳)으로 내려와서 이제는 전 국민들의 귀에 익은 국민동요가 되었습니다. 아뭏던 최순애 여사는 서울가신 오빠를 생각하며 이 가사를 지은 듯합니다. 그 당시 수원에서 서울 가는 길은 두가지 코스가 있었다고 생각됩니다.
(1)고려시대 때부터 길이 있었던 코스인데 수원에서 지지대 고개를 넘어서 현재 우리 아파트 뒤에 있는 모락산을 지나서 백운호수를 지나고 가수 주현미 집을 지나서 과천을 지나서 말죽거리(서울 양재)를 올라가는 방법이고
(2)다음 코스는 정조 이후에 길이 좀 나있다가 일제가 들어오면서 경부선 부설로 본격적으로 개발된 코스인데 수원에서 지지대 고개를 넘어서 안양 만안교를 넘어서 시흥 영등포로 빠지는 길입니다.
하여튼 오빠는 (2)번 코스로 서울로 간듯한데 비단구두를 사온다고 철석같이 약속하고서 오빠는 어디로 샜는지 돌아오지 않아 여동생 애를 태웁니다. 오다가 영등포의 룸살롱에서 퍼져버렸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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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 그림은 우리 아파트 뒷산(모락산)에 등산 가서 모락산 위에서 과천 방향을 보고 찍은 사진입니다. 요즘은 거의 매일 올라갑니다. 가수 주현미가 사는 집 근처도 행정구역상으로는 경기도 의왕시에 속합니다.
우리동네 뒷산 모락산은 많은 역사가 살아숨쉬고있습니다. 즉 옛날 먼 옛날 (1)번 코스로 한양을 가는 길목이었습니다. 과연 옛날에는 한양으로 올려면 어떤 길을 와야했을까요?
아마도 이런 방법으로 온 것같습니다. 경상도이던 전라도이던 대전(한밭)을 거칩니다. 물론 경상도는 경북 김천의 추풍령고개를 넘습니다.
바람도 울고 가고/ 구름도 쉬어가는~/ 추풍령 고개마다 한많은 사연~
이렇게하여 대전에 도착하면 여장을 풀고 쉬었다가 다시 괴나리봇짐에 짚신짝을 매달고 천안삼거리를 거쳐 수원에 도달합니다. 수원과 한양은 88리이므로 80리가 넘었습니다. 80리가 왜 중요하냐하면 옛날 임금은 성으로부터 80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규정이 있어서 임금은 수원을 갈 수 없었습니다. 과거에도 위수구역이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수원에서 한양으로 어떻게 입성하느냐가 관건인데 길은 하나 밖에 없었습니다. 그 길은 현재 제가 살고 있는 제 2의 고향인 의왕과 과천 길이었습니다.
의왕시 고천동에서 백운호수로 오려면 모락산 기슭 고갯길을 오게되는데 입구에 보면 오매기라는 마을이 있고, 그기서 작은 다리 쪽으로 좌회전을 하면 모락산 쪽으로 등산로가 나있습니다. 이 길이 과거 한양 길이었다고 합니다. 생각보다 아주 좁은 길입니다. 옛날에 자동차도 없으니 큰 도로가 필요가 없을 것이고 현재의 백운호수로 가는 고갯길은 모두 요즘 건설된 도로입니다.
이 산길로 올라가면 고개를 넘게 되는데 여기에 보면 임영군의 사당이 나옵니다. 현재도 이 길은 등산로로서 보존되어 있고 모락산은 개인사유지라는 팻말이 붙어있고 모두 임영군의 후손들이 관리하고 있습니다.
모락산과 그 일대는 아직도 이씨 소유입니다. 왕손 고을이지요. 이 자손들은 근래 택지조성의 보상을 받으면서 벼락부자가 되었고, 아직도 많은 전답과 산을 소유하고 있다고합니다. 그 옛날에는 한양으로 갈 때 이 백운호수 길가에서는 말에서 내려 갔다고합니다. 왕손이 살고 있는 마을에 말타고 가다가는 혼줄이 나기 때문입니다. 역시 조상을 잘 만나는 복이 제일 큰 복이니...
지금도 임영군 사당에는 한양가는 고갯길이 나있고 옆에는 우물가가있습니다.
얘기를 다시 거슬러 올라가서 때는 1700년대...
정조는 수원으로 자주 놀러갔습니다. 정조는 불운하게 죽은 아부지 사도세자에 대해서 대단한 애석함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부지 능도 경기도 양주에 있는 것을 수원(정확하게 화성시 태안읍)으로 이장시키고 아부지 산소에 가보는 것이 중요한 일과였습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임금은 80리를 못 벗어나게 되어있으므로, 거리가 88리가 되는 수원까지는 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수원까지는 80리라고 빡빡 우기고 아부지 산소에 갔습니다. 이러다가 수원성을 축조하게 되고 서울도 수원으로 옮길 계획을 세웁니다. 그 이유가 아부지 산소를 보기위한 것인지는 알 수없으나 정조는 대단한 효자임에는 틀림없겠지요. 정조는 아부지 산소에 갈려고 지지대고개를 넘어갈 때면, 아부지 산소에 빨리 가고싶어서 닥달을 했다고합니다.
‘이 고개에서는 왜 이리 가는 것이 지지부진하냐?’
이리하야 이 고개를 ‘지지대고개’라 불렀다합니다. 현재의 지지대고개는 넓은 대로가 나있고 그리 험한 고개는 아닌데 그 당시는 험했던 모양입니다. 우쨌던 이렇게도 효심이 강한 정조가 과천을 지나갈 때는 속이 쓰려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그것은 과천의 찬우물을 지날 때 바로 보이는 김상로의 무덤 때문이었습니다. ‘찬우물’은 인덕원으로 넘어가는 삼거리 지역인데, 현재도 찬물이 나오는 우물이 있다고합니다(저는 의왕에서도 찬우물 팻말을 본 적이있습니다). 찬우물 바로 옆 산중턱에는 아부지 사도세자를 뒤주 속에 넣어 죽이는데 적극적으로 가담한 김상로가 무덤 속에 버젓이 있으니, 정조는 무덤쪽으로 부채로 가리고 지나갔습니다.
김상로는 영조 때 영의정을 지냈으나 정조는 죽은 김상로의 관직을 삭탈합니다. 사도세자의 죽음은 당쟁싸움의 소산으로 봐야합니다. 영조의 윗 왕인 경종이 숙종의 장희빈 소생인데 소론들이 적극 옹위하여 왕위에 오릅니다. 영조는 어머니가 무수리 출신이었으므로 정비인 장희빈 소생 경종보다는 신분이 낮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허나 경종의 어머니 장희빈도 결국 사약(賜藥)을 받아 죽었고 폐비가 되었으므로, 경종도 별시리 나을 것도 없었습니다. 그기다가 몸도 허약해서 삐리리한 왕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러니 소론들이 살판이 났고, 노론들을 모조리 씨를 말리겠다는 각오로 당쟁싸움에 돌입합니다. 이래서 경종 즉위 단 4년만에 수십명의 노론들이 죽었고 정국은 엉망진창이 됩니다. 경종이 4년만에 죽고 노론들의 힘을 얻은 영조가 왕이 되는데, 영조는 당쟁싸움에 진저리가 났습니다. 원래 노론과 소론은 서인에서 갈라진 같은 파벌이었는데 이 때는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되어있었습니다. 영조는 어머니가 무수리 출신이란 열등감에다 당쟁싸움에 지쳐서 탕평책을 실시하면서 당쟁이 없는 태평성대인 요순시대를 꿈꿉니다. 한마디로 유토피아 사회를 건설해보자는 것이지요. 허나 세자로 책봉한 사도세자는 삐딱한 성격이 있어, 성문 밖으로 무단 외출도 하고, 궁궐 나인들을 죽이기도하는 괴팍한 면을 보고 뒤주 속에 넣어 8일 동안 굶겨 죽입니다. 이 때 사도세자를 죽여야한다고 적극 주장한 사람이 김상로였으니 정조가 김상로의 무덤을 쳐다볼리 없었습니다.
과천쓰레기 소각장 옆에는 옛날 한양 가는 길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이 길을 조금 걸어오면 가수 주현미집이 나옵니다. 주현미 집 앞의 작은 길이 과거의 한양길입니다.
찬우물에서 김상로의 무덤을 옆으로 수원가는 길을 재촉한 정조는 현재의 쓰레기 소각장의 조그만 옆길로 주현미 집 앞의 길로 갑니다. 이 길을 따라 위에 나온 그림대로 모락산 아래 임영대군 동네로 들어섭니다. 현재 이 길은 등산로로 일부가 아직도 남아 있는데, 저는 나중에 이 길을 따라 한번 등산을 해볼 요량입니다.
이렇게 다니다가 정조는 김상로 무덤이 죽어라고 보기 싫어서, 노량진·시흥·안양을 거쳐 수원으로 가는 새 길을 만들게 되는데 이 길이 지금의 경부선 철로가 지나가는 길입니다. 여기에서 건설된 다리가 만안교인데 현재 이 다리는 안양에 옮겨져 보관되어 있고, 평촌을 안양시 만안구라 부르고 있습니다.
과천 길을 통하여 서울로 입성할 때는 과천에서 며칠 묵고 난 뒤 서울의 양재(말죽거리)으로 갔고 말죽거리에서 말을 묶어놓고 한강나루를 건너서 갔다고 합니다. 이 길 외에는 한양으로 입성하는 길이 없었으므로 과천은 아주 중요한 행정, 전략적 요충지였습니다. 지금도 과천의 인구가 10만이 안되는 작은 전원 도시이지만 정부종합청사가 위치한 핵심 요지이듯이, 조선시대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따라서 과천현감은 아주 힘이 있었는데, 지방의 관찰사도 과천에 오면 현감에게 문안인사를 해야했습니다. 조선말기 명성왕후 아부지가 과천 현감을 했을 때는 그 위세가 하늘을 찔렀는데, 바로 인사하기는 힘들어 대기자 명단에 올려야했습니다. 이러면 모두 인사를 할 차례를 기다리기 위해서, 과천 마을에서 몇며칠씩 묵게 되는데 이 장소가 현재 호프호텔자리입니다. 여기에는 각종 술들을 팔았고 주막이 즐비하게 있었습니다.
과천은 삼국시대에는 율목, 또는 율진이라고 불리웠는데 여기서 율(栗)은 밤을 말하므로, 그 옛날에도 과천에는 밤나무가 많았던 모양입니다. 현재도 과천은 밤나무 가로수가 제법있습니다. 그러다가 ‘부림’으로도 불리웠는데 제가 살았던 동네가 부림동이었습니다.
그러면 안양은 도데체 어떻게 된 걸까요? 옛날에는 안양은 동네도 없었고 서울 가는 길도 없었습니다. 안양으로 서울 가는 길이 열리게 된 것은 조선 정조 이후이고, 그 뒤 경부선이 지나가면서 사람들이 어울려 살기 시작합니다. 따라서 현재도 과천초등학교의 역사는 100년이 다되어가는 오랜 학교이지만 안양은 그 역사가 길지 못합니다.
과연 오빠생각의 오빠는 의왕에서 시흥 방면으로 서울을 갔을까요 아니면 우리 동네 쪽으로 하여 서울을 갔을까요. 올해도 의왕에서는 뜸부기가 논에서 우는데, 이 오빠는 21세기가 되어도 돌아오지를 않으니 걱정입니다.
첫댓글 탐조만 잘 하시는줄 알았는데 별것을 다 잘아시네요, 주현미 가수 집 위치를 어덯게 그리 잘 아시는지요, 한때 짝사랑을 하셨나요 아니면 노래를 좋아하셨나요?. 암튼 박선생님덕에 새로운사실들을 습득합니다. 늘 건강하십시요.
박 선생님의 해박한 지식에 탄복입니다 ㅎㅎㅎㅎㅎㅎㅎㅎ
^^ 더운데 잘계신지요? 저도 지금 뜸부기를 잘 찍을려고 거의 15일을 공을 들이고 있지만 아직 잘된 사진은 못 찍고 허접한 사진만 많이 찍고 있습니다. 항상 열심히 노력하시는 박선생님의 모습에 오늘도 홀딱 반했습니다. ㅎㅎㅎ
많이 아는 게 아니고 우연히 들은 내용을 적었습니다. 날도 더운데 부끄럽사옵니다.
헉~ 대단한 사진과 글입니다. 출판원고가 유출된 것 같습니다..^^..뜸부기 만나고 싶은데 아직 기회가 없습니다.ㅠ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