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6.25와 화재 등으로 옛 자취를 모두 잃은 구암사는 무엇보다 이름난 대종사들이 주석하였던 곳으로 유명하다. ‘화엄종주(華嚴宗主)’라 일컬어지는 조선 영조 때의 설파(雪坡 1707-1791) 대사가 머물 때는 전국 굴지의 사찰에서 모여든 스님들이 천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우리가 일찍이 탐방했던 백두대간의 덕유산 자락 용추암의 판전에서도 강좌를 펼쳤던 바로 그 스님이신데 전국에서 앞다투어 스님을 모시고 공부하고자 했던 당시의 수행풍토가 새삼 감동스럽다.
그 뒤를 이어 백파(白坡, 1767∼1852) 대사는 구암사 중창과 함께 선강법회(禪講法會)를 개최하는 등 선풍을 크게 진작시킴으로써 구암사를 해남 대흥사, 고창 선운사와 함께 조선후기 불교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한 중흥조였다. 선의 지침서라 할 『선문수경 禪門手鏡』을 저술하기도 하였는데 이 책은 당시 선사들 사이에서 일대 논쟁의 대상이 되었다.
서신으로 이루어졌던 초의 선사와의 교리논쟁뿐 아니라 추사(秋史)와의 논쟁 또한 후학들에게 이어져 근 백년 동안 지속되었으며, 선과 선, 불교와 유림과의 논쟁으로 이는 논쟁다운 논쟁이 부족한 오늘날에도 두고두고 되새겨볼 가치가 있다 하겠다.
백파 스님과 추사의 사이에서 재미난 이야기가 하나 전해온다.
백파 스님을 높이 추앙했던 추사는 평소 달마상(達摩像) 그리기를 즐겼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달마상을 그릴 때마다 많은 사람들은 “백파 상을 그렸다”고 하는 것이었다. 추사는 백파를 만난 적도 없고 보리달마를 그린 것이었지만 사람들은 믿지를 않았다.
백파를 친견하기 위해 구암사로 찾아간 추사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바로 자신이 그렸던 보리달마가 그림 속에서 뛰쳐나와 실제의 모습으로 현존해 있는 것이 아닌가.
이때부터 추사는 백파를 ‘해동의 달마’라고 부르며 각별한 교유를 갖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추사가 직접 쓴 ‘구암사’라는 현판을 비롯하여 백파와 주고 받은 많은 서간이 구암사에 남아 있었는데 안타깝게도 6.25 전쟁 때 절과 함께 불타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가 직접 쓴 ‘화엄종주 백파 대율사 대기대용지비(華嚴宗主白坡大律師大機大用之碑)’만이 선운사에 남아 있다.
백파 스님 이후에는 설두, 설유, 학명, 석전, 운기 스님 등이 주석하였는데 조선후기 이후 한국불교의 강맥을 주름잡아 온 그야말로 내로라하는 분들이다. 구암사가 한국불교 교학(敎學)의 중심지라 일컬어지는 이유이다.
특히 석전(石顚) 박한영(1870- 1948) 스님은 근세 불교개혁을 위해 앞장서 몸을 나투셨던 분으로 그 이력은 뒤로하고서라도 청담, 운허 스님을 비롯해 이광수, 최남선, 정인보 같은 인물들이 스님의 영향을 받았으니 근대 최고의 지성들까지 직간접적으로 구암사의 강맥과 끈이 닿아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른 아침 비질 소리에 눈을 떠보니 밤새도록 하얀 눈이 내려 앉아 있다. 엷은 안개 속 좌우로 안긴 산줄기와 손을 뻗으면 닿을 듯 눈 앞에 우뚝 선 화개봉이 신기하도록 아름다운데 안개 속 저 아래 세상이 아득하기만 하다.
전날 스님께서 출타중인지라 느긋하게 아침밥을 지어먹고는 눈길을 내려갈 걱정도 까맣게 잊은 채 드문드문 눈발이 휘날리는 은행나무며 부도전 주위를 이리저리 배회한다. 눈내리는 구암사의 그 아름다움이 소문에 비할 바가 아니다. 구암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월인석보(月印釋譜)」가 보존되어있다. 훈민정이 만들어진 후 한글로 씌어진 최조의 불경 해설서로 당시의 글자나 말을 그대로 보전하고 있어 한글을 연구하는데 없어서는 안될 귀중한 자료이다. 현재구암사의 거북바위는 볼 수가 없다 숫거북 모양의 바위는 길을 내는 통에 자연스럽게 흙 속에 묻히게 되었고 암거북 바위는 법당 밑에 앉아 있다고 한다.
지난 밤 묵었던 방의 환기를 위해 방문을 활짝 열어 놓고 청소를 하는데 아침나절 눈길을 걸어 올라오신 주지 지공 스님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눈이 더 내리면 3월까지도 눈이 녹지 않아 차가 내려갈 수 없다고 엄포(?)를 놓으신다. 하루 더 묵으려던 욕심을 거두고 짐을 챙겨 조심조심 길을 나선다.
체인을 친 자동차가 30m를 썰매처럼 미끄러져 내린다. 절 코앞까지 차를 끌고 올라갔던 무례와 겨울 산길에 대한 무지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다.
서울로 올라온 다음 날 백양사 서옹 큰스님께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듣는다. 큰스님께서도 내장산과 백양산에 펼쳐진 희디흰 세상을 오래도록 지켜 보셨으리라는 생각에 묘한 감회에 젖는다.
구암사(063-653-7641)를 다 내려와서 소나무 숲길을 되돌아보며 거듭거듭 올렸던 감사의 기도를 큰스님의 가시는 길에 다시 한번 올린다.
첫댓글 알고 보니 구암사가 유서깊은 사찰이군요
저도 잘 모르는데 너무 유명한 절 맞습니다.
알차고 유익한정보 고맙습니다.
다시한번 갈 기회가 있으면 저좀 델꼬가 주세요
저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