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오후 3시께 청와대 영빈관에서 ‘장애인차별 금지 및 권리구제에 관한 법률’ 서명식 행사가 열렸다. 서명식은 지난 3월 6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한 장애인차별금지법의 중요성을 알리고, 그 의미를 기념하기 위해 마련된 것으로 노무현 대통령, 유시민 복지부 장관, 안경환 국가인권위원장 등 8명이 법률에 서명하는 행사였다.
좋은 취지의 행사였지만, 서명식 중간에 장애인 두 명의 기습시위가 있었다. 대통령이 법률안에 서명하려는 순간 두 명의 장애인이 휠체어를 밀고 대통령이 바로 보이는 곳까지 다가와 “서명을 하기 전에 우리 이야기를 들어달라”며 플래카드를 꺼내 펼쳤다. 이들은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 상임공동대표 등의 자격으로 이날 행사에 참석한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준) 집행위원장과 박김영희 장애여성공감 대표였다.
이들이 펼친 플래카드에는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하라’, ‘시설비리 척결! 사회복지사업법 개정하라’, ‘활동보조인 서비스를 권리로 보장하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다. 이들의 기습시위에 노 대통령은 ‘발언이 필요하면 말 할 시간을 주겠다’고 이야기했으나, 이들이 계속해서 시위를 벌이자 ‘말씀 계속 하시면 밖으로 모시겠다‘며 경호원들을 대동해 이들을 행사장 밖으로 내 보냈다. 하지만 이들은 행사장 밖으로 밀려나가는 순간 “야만적인 대한민국”이라고 소리쳤다. 하지만 노 대통령이 앉은 자리 뒤 벽에는 ‘행복한 장애인, 아름다운 대한민국’이라고 적혀 있었다.
노 대통령은 서명식 후 축사를 통해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은 장애인정책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역사적인 일”이라고 이야기하며, “앞으로는 장애인이 사회에 적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장애인이 적응할 수 있도록 사회가 변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노 대통령은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이뤄지기는 어렵다”며 “물론 이 법에는 차별금지를 의무화하고 이를 지키지 않을 때 처벌하는 규정도 있습니다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 사회의 인식과 태도를 바꾸어 가는 일”이라고 했다.
이날 대통령 면전 앞에서 일어난 기습시위에 대해 조선일보가 <어허! 대통령이 보고 계신데>라는 제목으로 사진 기사를 썼을 정도로 대통령 바로 앞에서 시위를 하는 것은 흔한 일도 쉬운 일도 결코 아니다. 어떤 절박한 이유가 그들을 그렇게 움직인걸까. 시위를 벌인 두 명에게 전화를 걸어 그 이유를 들어봤다.
박경석 전장연(준) 집행위원장은 “행복한 장애인, 아름다운 대한민국이라고 하는데 지금 현재 수많은 장애인들은 행복하지 않을 뿐 아니라 장애인을 차별하는 대한민국은 전혀 아름답지도 않다”며 “대통령이 서명식을 하기 이전에 이런 문제를 알아야 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박 집행위원장은 “장애인들이 교육도 못 받고, 시설에서 인권유린 당하고 있다. 또 국가가 활동보조인 서비스를 지원한다고 하면서 장애인에게 비용을 부담시키고 있는 게 지금의 현실이다. 장애인이 처한 아름다운 대한민국의 현실을 대통령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기습시위를 진행했다”고 덧붙였다.
박김영희 장애여성공감 대표는 전화통화에서 활동보조인 서비스 이야기부터 꺼냈다. 박김 대표는 “오늘 청와대에 들어가기 전에 기자회견도 했는데, 현재 활동보조인 서비스가 상당히 기만적인 형태로 진행되고 있다. 활동보조인 서비스에 드는 비용을 장애인에게 자부담시키는 문제나 서비스 중개기관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는 문제 그리고 서비스를 이용하기 전에 먼저 자부담부터 내라고 하는 사업지침까지 나오고 있다. 이는 장애인의 인권을 침해하는 문제라 생각한다.”고 했다.
박김 대표는 “이 뿐만 아니라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을 위해서 장애인 부모와 교사들이 10일 째 단식농성을 하고 있고, 시설에서는 장애인들이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장애인차별금지법이 제정됐다”며 “그런데 대통령이 이런 현실을 얼마나 알고 있겠는가, 장차법에 서명하기 전에 대통령이 이런 장애인들의 절박한 현실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해 기습시위를 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현재, 서울역 앞에서는 사회복지사업법 개정을 위한 천막농성이 열흘 째 진행되고 있다. 국가인권위원회 안에서는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을 원하는 장애인 부모들의 단식농성이 열흘째 진행되고 있다. 장애인들의 요구에 의해 이달부터 시행되고 있는 활동보조인 서비스에 대한 불만도 많다.
이날 대통령이 서명한 장애인차별금지법은 장애를 가진 사람들이 나서 스스로 만들어낸 법이다. 장애인단체 297곳으로 구성된 장애인차별금지법제정추진연대가 전국을 돌며 차별 사례를 수집하고, 이를 바탕으로 법안을 만들어 국회로 보냈다. 장애인들이 법을 만들어 내기까지 7년이 걸렸다. 노무현 대통령은 2002년 대선 당시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을 약속했지만, 법 제정 과정에서 정부의 역할은 미미했다. 결국 이 법을 만들어낸 것은 장애인 당사자들이었다.
그렇게 ‘장애인차별금지법 제정’이라는 큰 산은 넘었지만 장애인들은 여전히 자신의 기본권을 보장해 줄 법을 만들기 위해 단식, 삭발, 노숙농성 등을 가리지 않고 있다. 장애인교육지원법 제정, 활동보조인 서비스의 권리 확보, 사회복지시설의 비리 척결 등 인간답게 살기 위해 넘어야 할 산들이 많다.
하지만 과연 이 운동이 온전하게 장애인들만의 몫이어야 할까? 또 장애인들은 이 기본적인 문제들을 두고 얼마나 오래 싸우게 될까? 정부는 자신이 했어야 하는 일임에도 장애인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올 때까지 이런 저런 핑계를 대고 눈감아 왔다. 이날 박경석 집행위원장과 박김영희 대표가 대통령 앞에서 항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이런 과거 때문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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