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인사 원당암(海印寺 願堂庵)
원당암은 「해인사 1번지」 같은 상징적인 암자다. 해인사와 형제처럼 역사를 같이 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당 앞에 보물 518호로 지정받아 보호받고 있는 석탑과 석등에도 암자의 나이테가 새겨져 있다.
신라 애장왕(哀莊王)은 공주의 난치병이 낫자 부처의 가호(加護)로 여기고 해인사의 창건을 발원한 순응(順應)대사를 몸소 크게 도와주었다고 한다.
왕은 서라벌을 떠나 가야산에 임시로 작은 집을 지어 절 공사를 독려하고 정사(政事)를 보기까지 하였는데 이것이 바로 오늘의 당암이라는 것이다.
암자가 다시 활기를 찾게 된 것은 혜암(慧菴)스님이 머무른 이후부터였다고 한다.
혜암스님은 해인사의 정신적 지주라고 할 수 있는 해인총림 방장('93년~'96년)스님을 지내시고 1999년 4월에 조계종 제10대 종정스님으로 추대되었다.
또한 원당암에서는 스님들과 똑같이 일반인들도 여름과 겨울에 한 철씩 안거(安居)에 들어가 수행을 하는 국내 제일의 재가불자 참선도량으로 변모되었다(출처 : 원당암).
합천 해인사 원당암 다층석탑 및 석등(陜川 海印寺 願堂庵 多層石塔 및 石燈. 보물. 경남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41-22 (치인리))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호국신앙의 요람인 해인사의 원당암 안에 있는 다층(多層) 석탑이다. 탑신(塔身)을 점판암으로 만든 청석탑(靑石塔)으로, 점판암은 벼루를 만드는데 주로 사용되는 석재이다.
땅과 맞닿아 탑의 토대가 되는 바닥돌은 화강암을 이용하여 3단으로 쌓았으며, 그 위에 탑신을 받치는 기단(基壇)과 지붕돌은 점판암으로 구성하였다.
기단은 1단으로 밑면에는 돌아가며 연꽃무늬를 장식하였고, 윗면은 네 모서리에 대리석 돌기둥을 세웠으며, 맨윗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탑신의 몸돌은 남아있지 않고 지붕돌만 10층이 쌓여 있다. 지붕돌은 경사진 4면이 매우 평평하고 얇으며 밑면엔 낮은 3단의 받침이 새겨져 있고 처마는 네 귀퉁이에 이르러 위로 살짝 들려 올라갔다. 탑의 꼭대기에는 화강암으로 만든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이 낮게 있고, 그 위로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 모양의 장식)만이 높직하게 남아 있다.
청석탑은 대체로 고려시대에 본격적으로 유행하게 되지만 이 석탑은 신라 말에 만들어져 청석탑의 선구라 할 수 있다.
석등은 탑의 옆에 있으며, 탑과 거의 동일한 시대의 작품이다.
땅과 맞닿은 6각형의 바닥돌 위에 아래받침돌과 중간받침돌, 지붕돌로 이루어졌는데, 아래받침돌과 지붕돌이 점판암으로 되어 있고 다른 부재는 화강암이다.
현재는 지붕돌 밑의 불을 밝히던 부분인 화사석(火舍石)이 남아 있지 않다. 중간받침돌은 가늘고 긴 편으로 아래위에 상(上)·하(下)의 글자가 움푹하게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6각형으로 윗면은 편평하며, 머리장식은 원기둥 모양의 돌 하나가 얹혀있을 뿐이다.(출처 : 문화재청)
모두 보광전 전방에 나란히 배치되었는데 먼저 석탑은 특이한 청석탑이다.
이 같은 청석탑은 국내에서 흔치 않은 이른바 점판암 계통의 석재를 이용한 공예적 소탑이 주종을 이룬다.
이 탑 역시 현재의 총 높이는 240cm에 지나지 않는다.
석탑의 구조는 지대석을 포함하여 3단의 화강석 기단 위에 대리석 탑신부를 마련하였고, 탑신의 네 모서리에는 독립된 석주를 배치하여 상부 옥개석을 받치고 있다.
초층 탑신부는 공간을 형성하여 내부에 사리 장엄이 있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초층 탑신 상부에는 각층에 옥개석을 받쳤던 탑신석이 본래부터 없었는지 알 수 없으나 석탑의 체감률이 거의 없어 옥개석을 포개 넣은 듯하다. 곧 연화문 갑석 위에 모두 10매의 옥개석을 차례로 쌓아 두었고, 최상부에는 약간 불완전한 노반이 놓여 있다. 그리고 석등 역시 특이한 형태였다고 짐작된다. 곧 점판암을 이용한 희귀한 자료로서, 견고한 화강석 간주(竿柱)를 이용하여 시각적으로 단조롭게 처리되었다.
불을 켜는 화사석은 결실되어 알 수 없으나 이 석등의 본래의 모습은 우아한 기품을 지녔던 것으로 판단된다. 그것은 간석을 받치고 있는 6각 점판암의 하대석 역시 6면에 6엽의 복련을 아름답게 조각하였고, 시원하게 솟은 6각의 간석 위에는 연화문을 지닌 상대 받침석과 옥개석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비록 석등의 화사석이 없어져 현재는 전테 높이 180cm에 불과하지만 본래의 모습은 다른 곳에서 그 유래를 찾기 어려운 귀중한 자료로 판단된다. 그것은 점판암과 화강석을 혼용하여 높이 솟은 화강석 간석 위에 화사석을 배치한 혼용의 석재를 이용하였고, 또한 하대석 아래의 화강석 지대석은 이 석등을 지탱하기 위한 구조적 배려가 있었을 뿐 아니라 상하에 적용된 연화문 조각은 그 기품을 더해 주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청석탑 좌측에 있는 배례석은 보광전을 향하여 길이로 놓여 있다. 그것은 이 돌 위에서 예배하는 상징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법당을 향하여 길이로 놓여 있다고 생각된다. 건립 초기부터 이렇게 길이로 놓였는지는 알 수 없다.
배례석의 상부 판석 중앙에는 직경 22.5cm의 연화문을 두텁게 양각하였고, 다시 7.5cm의 연꽃 자방(子房)을 조각하였기 때문에 이 위에서 예배하기에는 매우 불편할 것으로 판단된다.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법당을 향하여 길게 놓이는 배례석도 있으므로 배례석의 용도는 그 위에서 예배하기보다는 향료와 촛대 등 의식 용구를 배치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곧 배례석이 위치하는 곳이 석탑의 전면인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위에 의식 용구를 놓고 법요(法要)를 행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곧 큰 법요 때에는 그 전방 누각 건물에서 의식을 집행한 조선시대 이후의 사례로 보아 더욱 그러하다.
이 배례석의 전체 길이는 93cm에 폭 47cm, 그리고 높이 33cm의 한 돌로써 제작되었다. 배례석의 측면에는 안상을 조각 하였는데 이들은 전후에 각각 두 구 그리고 측면에 한 구를 새겨 그 아름다움을 더하였다. 따라서 그 크기로 미루어봐서도 배례석 위에서 직접 예배하는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출처 : 원당암)
기단은 1단으로 밑면에는 돌아가며 연꽃무늬를 장식하였고, 윗면은 네 모서리에 대리석 돌기둥을 세웠으며, 맨윗돌에는 연꽃무늬를 새겼다.
석등은 탑의 옆에 있으며, 탑과 거의 동일한 시대의 작품이다.
땅과 맞닿은 6각형의 바닥돌 위에 아래받침돌과 중간받침돌, 지붕돌로 이루어졌는데, 아래받침돌과 지붕돌이 점판암으로 되어 있고 다른 부재는 화강암이다.
현재는 지붕돌 밑의 불을 밝히던 부분인 화사석(火舍石)이 남아 있지 않다.
중간받침돌은 가늘고 긴 편으로 아래위에 상(上)·하(下)의 글자가 움푹하게 새겨져 있다. 지붕돌은 6각형으로 윗면은 편평하며, 머리장식은 원기둥 모양의 돌 하나가 얹혀있을 뿐이다.
청석탑 좌측에 있는 배례석은 보광전을 향하여 길이로 놓여 있다. 그것은 이 돌 위에서 예배하는 상징적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법당을 향하여 길이로 놓여 있다고 생각된다. 건립 초기부터 이렇게 길이로 놓였는지는 알 수 없다.
배례석의 상부 판석 중앙에는 직경 22.5cm의 연화문을 두텁게 양각하였고, 다시 7.5cm의 연꽃 자방(子房)을 조각하였기 때문에 이 위에서 예배하기에는 매우 불편할 것으로 판단된다.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법당을 향하여 길게 놓이는 배례석도 있으므로 배례석의 용도는 그 위에서 예배하기보다는 향료와 촛대 등 의식 용구를 배치하였던 것으로 짐작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