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식 신부님과의 만남이 자신의 인생을 얼마만큼 바꾸게 될지 그때 진석은 알지 못했다. 첫 휴가를 맞아 부산으로 어머니를 찾아 나선 길에 친구가 소개한 신부님이었다.
상냥한 미소로 악수를 청하는 김 신부님의 손을 진석은 양손으로 잡고 꾸벅 인사했다. 신부님은 고아들을 먹이고 씻기느라 수척한 얼굴이었지만 따뜻한 눈빛과 밝은 미소가 사람을 푸근하게 만드는 분이었다.
김 신부님은 황해도 연백에서 고아들을 데리고 부산까지 피난을 와 계신 중이었다. 곧 부평에 있는 병참기지 근처로 고아들을 위해 이사할 것이라 귀띔해 줬다.
당시에는 다들 하루 세끼조차 먹지 못하고 굶주리기가 일쑤였기에 불쌍한 고아들에게는 기댈 곳이 미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미군들에게 밥을 얻어먹기 위해서도 그렇고, 지금도 영어를 잘하는 통역이 필요해.”
진석은 자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돕겠습니다, 신부님!”
신부님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진석을 바라보았다.
“나는 돈을 줄 형편이 못돼.”
당시 영어 통역을 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기에 잠깐 통역을 맡는 것도 부르는 게 값이었다. 신부님의 상황을 짐작한 진석은 신부님을 안심시키고 싶었다.
“돈 걱정은 마세요. 제가 하는 일을 마치고 찾아뵙겠습니다.”
진석은 짧은 인사를 드리고 갈 길을 재촉했다. 귀대하는 열차에 올라 차창 밖을 바라보니, 창밖 풍경과 함께 최근 2년간 일어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어린 시절 각별한 사이였던 벗 장건(張建, 안드레아, 전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의 친형)에게 얼마 전 편지를 보냈을 때도 꼭 그랬다. 도무지 잊히지 않는 시간을 버릇처럼 되새기고 있었다.
글=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장형 전(張兄 前)
그동안 어찌 지내셨소. 대단히 죄송하오.
무어라 사과의 말을 해야 할지. 무슨 말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
나는 감히 이 편지를 쓸 용기조차 얻지 못할 지경이오. 가뜩이나 쓸 줄 모르는 내가 이런 지경이 되었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오. 나는 참으로 부족하외다.
다른 것보다 서울에서 헤어진 후에 내 소식을 그다지도 걱정하였다니 내가 그대 심정을 짐작하는 바요. 아니 내가 가히 짐작 못 하게 걱정하였을 것으로 생각하오. 대단히 미안하오.
1950년 11월 19일 혜화동 댁(장건의 집)에 갔더니 “오늘 아침에 다 떠났다오” 하니 적적한 감 끝이 없었소이다.
12월 21일 제2국민병으로 서울에서부터 걸어서 마산까지 부득이 내려 가게 되었소. 그리고 1월 8일 경남 함안읍(마산서 진주 가는 길목)에 있던 국민방위군 제10교육대에 사병으로 입대하였소.
18일 동안에 매일 날마다 100리씩 걸어서 서울에서 덕소를 거쳐 여주 강을 건너고 충주를 거쳐 새재를 넘어 문경과 의성을 거쳐 함안까지 가는 동안에 죽을 고비를 두 번 넘겼소. 인생 대학은 못 되지만 인생 중학은 마친 격이오.
2월 18일 국민 방위군 교육대 본부 가문관(假文官)으로 선발되어 주먹밥 대신에 밥그릇에 밥을 담아 먹게 되어 굶주림을 면하고 잠시 배는 고프지 않았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교육대의 해산될 날이 머지않음을 느끼고 방위군 사관생도 모집에 응소하였소.
3월 3일 마산, 부산진, 동래를 거쳐 범어사에 있는 국민 방위군 사관학교 제3기생으로 입교하였고 4월 15일 방위군 사관학교 졸업과 동시에
육군 예비 사관이 되기를 면하고 나와서 4월 23일 수원을 거쳐 안성으로 국민 방위군 제3단 제6 지대 직속 제1구대 제2 초대장(哨隊長)으로 있다가,
4월 30일 풍문을 들으니까 또다시 사태가 좋지 않은 것 같기에 안성에서 나와 5월 3일 대구에 있는 국민 방위군 사령부에 경리관으로 사촌 형이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 가서 있다가, 5월 12일 방위군 사령관과 그 일당의 부정부패가 극심하여 방위군 해산 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소.
육군 헌병이 방위군 사령부를 접수하여 보초를 서고, 방위군 사령부 안에 근무하던 사병은 제대시키고, 장교는 예비 사관 임관 때까지 대기하라 하였소.
5월 23일 국군 제5군단에 방위군 사령부가 사무 인계를 함으로 나는 사촌 형과 함께 나와서 마침 모집하고 있던 미8군 제60병기단 소속 통역으로 선발되었소. 5월 27일 시민증, 제2국민병 등록증, 여행증 없이 무사히 영등포로 왔소.
6월 2일 미군 부대 통역으로서 트럭 앞자리에 타고 대구에서 춘천까지 갔소. 앞산에 대포들, 기관총, 소총 소리가 콩을 볶는 것 같은 소리를 내는 춘천에 갔소이다.
이런 일선에 와서 보니 온몸에 소름이 끼쳤소이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면서 차차 대포 소리도 멀어지며 시민들도 춘천에 차차 들어오게 될 즘에 9월 14일 내가 소속된 제7병기 수리 부대가 춘천 북방 21마일 지점인 화천으로 이동하였소이다.
현재 내가 근무하는 곳은 화천 발전소에서 멀지 않은 화천읍인데 이 읍이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소.
제2국민병에 있을 때에는 밥맛이 과자와 같고 소금이 사탕과 다름이 없더니, 미군 부대에 들어가 보니 그 인종차별이 심한 지경이고, 젊은 몸으로 허송세월한다는 느낌으로 불안한 감 그지없었소이다.
그 무지막지한 자동차 수리공들을 데리고 있음으로 낮에는 그들에게 시달려 시름을 모르나, 저녁 후 그들이 술집으로 색시 집으로 또는 노름을 할 때 나는 그들의 지휘자로서 홀로 남아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니 눈물이 절로 났소. 더구나 달 밝은 밤에는 이상한 느낌이 나를 뒤덮어 깰 줄을 몰랐소이다.
12월 8일 내가 처음으로 휴가를 맞을 때까지 무려 6개월 동안 10여 차례 걸쳐 편지를 써보았으나 답장은 한 장도 받아보지 못하였소.
무인지경, 그야말로 사회 사람과 떨어져 내 주위에서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 지냈으며, 나와 말을 같이 할 사람을 갖지 못한 나는 귀머거리와 소경과 다름없이 지내고 있소.
그나마 기다리는 답장은 오지 않았소. 이것으로 나의 그동안의 소식은 그치기로 하겠소.
이미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요. 앞으로의 우리의 할 일이 많고도 많소. 이 부패한 사회를 어찌 개조해야 하는가? 나는 지금껏 매일 밤이면 신공 후 이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왔으며, 한숨으로 잠이 들곤 하였소.
그러나 안드레아, 우리는 청년이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새로운 체계를 세우며, 세계 국가를 만들려는 붉은 피가 우리의 가슴속에 용솟음치지 않소?
우리는 할 일이 많은 청년이오. 인류를 위해서 우리의 최선을 정신적, 도덕적, 물질적으로 봉사하지 않겠소? 우리는 펄펄 뛰는 청년이오. 인류를 괴롭히는 모든 악을 지상에서 해 중에서 공중에서 일소하기를 선언합시다. 우리는 앞길이 양양한 청년이외다.
동물은 일생이 그의 전 생명이지만 사람은 일생이 그의 전 생명이 아니오. 영원히 살 수 있지 않소? 더구나 그 꽃인 청년은 그 하루하루를, 아니 그 한시한시를 어떻게 지내야 하겠소?
나는 현재 나의 나라가 내 마음에 맞지 아니하게 된 것, 다시 말하면 세상이 이다지도 타락된 원인을 나의 친구 그대와 내가 어리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소.
만약에 우리가 더 나이가 많았다면 이러한 세상을 만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 생각하오. 또 그리되기를 원하는 바외다.
미국에 가니 어떻소? 일본을 거쳐서 갔다 하니 그 소식이나 듣고 싶소. 그러면 다음번에 더 재미나는 소식을 기다리며, 집안 여러분께 안부 전해 주시오.
주께 항상 그대 성공하기를 빌며,
(1951년) 12월 17일 밤 부산에서 진석 씀
※이 편지는 50여 년이 지나 장건 안드레아가 아버지 장면 박사에게 받은 오래된 편지함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1999년 당시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에게 자신의 편지와 함께 동봉한 것이다.
김영식 신부님과의 만남이 자신의 인생을 얼마만큼 바꾸게 될지 그때 진석은 알지 못했다. 첫 휴가를 맞아 부산으로 어머니를 찾아 나선 길에 친구가 소개한 신부님이었다.
상냥한 미소로 악수를 청하는 김 신부님의 손을 진석은 양손으로 잡고 꾸벅 인사했다. 신부님은 고아들을 먹이고 씻기느라 수척한 얼굴이었지만 따뜻한 눈빛과 밝은 미소가 사람을 푸근하게 만드는 분이었다.
김 신부님은 황해도 연백에서 고아들을 데리고 부산까지 피난을 와 계신 중이었다. 곧 부평에 있는 병참기지 근처로 고아들을 위해 이사할 것이라 귀띔해 줬다.
당시에는 다들 하루 세끼조차 먹지 못하고 굶주리기가 일쑤였기에 불쌍한 고아들에게는 기댈 곳이 미군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미군들에게 밥을 얻어먹기 위해서도 그렇고, 지금도 영어를 잘하는 통역이 필요해.”
진석은 자신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가 돕겠습니다, 신부님!”
신부님은 고개를 천천히 들어 진석을 바라보았다.
“나는 돈을 줄 형편이 못돼.”
당시 영어 통역을 하는 사람은 아주 드물었기에 잠깐 통역을 맡는 것도 부르는 게 값이었다. 신부님의 상황을 짐작한 진석은 신부님을 안심시키고 싶었다.
“돈 걱정은 마세요. 제가 하는 일을 마치고 찾아뵙겠습니다.”
진석은 짧은 인사를 드리고 갈 길을 재촉했다. 귀대하는 열차에 올라 차창 밖을 바라보니, 창밖 풍경과 함께 최근 2년간 일어난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갔다.
어린 시절 각별한 사이였던 벗 장건(張建, 안드레아, 전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의 친형)에게 얼마 전 편지를 보냈을 때도 꼭 그랬다. 도무지 잊히지 않는 시간을 버릇처럼 되새기고 있었다.
글=허영엽 신부(서울대교구 홍보국장) 장형 전(張兄 前)
그동안 어찌 지내셨소. 대단히 죄송하오.
무어라 사과의 말을 해야 할지. 무슨 말부터 어떻게 꺼내야 할지….
나는 감히 이 편지를 쓸 용기조차 얻지 못할 지경이오. 가뜩이나 쓸 줄 모르는 내가 이런 지경이 되었으니 어찌해야 할지 모르오. 나는 참으로 부족하외다.
다른 것보다 서울에서 헤어진 후에 내 소식을 그다지도 걱정하였다니 내가 그대 심정을 짐작하는 바요. 아니 내가 가히 짐작 못 하게 걱정하였을 것으로 생각하오. 대단히 미안하오.
1950년 11월 19일 혜화동 댁(장건의 집)에 갔더니 “오늘 아침에 다 떠났다오” 하니 적적한 감 끝이 없었소이다.
12월 21일 제2국민병으로 서울에서부터 걸어서 마산까지 부득이 내려 가게 되었소. 그리고 1월 8일 경남 함안읍(마산서 진주 가는 길목)에 있던 국민방위군 제10교육대에 사병으로 입대하였소.
18일 동안에 매일 날마다 100리씩 걸어서 서울에서 덕소를 거쳐 여주 강을 건너고 충주를 거쳐 새재를 넘어 문경과 의성을 거쳐 함안까지 가는 동안에 죽을 고비를 두 번 넘겼소. 인생 대학은 못 되지만 인생 중학은 마친 격이오.
2월 18일 국민 방위군 교육대 본부 가문관(假文官)으로 선발되어 주먹밥 대신에 밥그릇에 밥을 담아 먹게 되어 굶주림을 면하고 잠시 배는 고프지 않았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교육대의 해산될 날이 머지않음을 느끼고 방위군 사관생도 모집에 응소하였소.
3월 3일 마산, 부산진, 동래를 거쳐 범어사에 있는 국민 방위군 사관학교 제3기생으로 입교하였고 4월 15일 방위군 사관학교 졸업과 동시에
육군 예비 사관이 되기를 면하고 나와서 4월 23일 수원을 거쳐 안성으로 국민 방위군 제3단 제6 지대 직속 제1구대 제2 초대장(哨隊長)으로 있다가,
4월 30일 풍문을 들으니까 또다시 사태가 좋지 않은 것 같기에 안성에서 나와 5월 3일 대구에 있는 국민 방위군 사령부에 경리관으로 사촌 형이 근무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그곳에 가서 있다가, 5월 12일 방위군 사령관과 그 일당의 부정부패가 극심하여 방위군 해산 안이 국회에서 가결되었소.
육군 헌병이 방위군 사령부를 접수하여 보초를 서고, 방위군 사령부 안에 근무하던 사병은 제대시키고, 장교는 예비 사관 임관 때까지 대기하라 하였소.
5월 23일 국군 제5군단에 방위군 사령부가 사무 인계를 함으로 나는 사촌 형과 함께 나와서 마침 모집하고 있던 미8군 제60병기단 소속 통역으로 선발되었소. 5월 27일 시민증, 제2국민병 등록증, 여행증 없이 무사히 영등포로 왔소.
6월 2일 미군 부대 통역으로서 트럭 앞자리에 타고 대구에서 춘천까지 갔소. 앞산에 대포들, 기관총, 소총 소리가 콩을 볶는 것 같은 소리를 내는 춘천에 갔소이다.
이런 일선에 와서 보니 온몸에 소름이 끼쳤소이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면서 차차 대포 소리도 멀어지며 시민들도 춘천에 차차 들어오게 될 즘에 9월 14일 내가 소속된 제7병기 수리 부대가 춘천 북방 21마일 지점인 화천으로 이동하였소이다.
현재 내가 근무하는 곳은 화천 발전소에서 멀지 않은 화천읍인데 이 읍이 완전히 폐허가 되어 있소.
제2국민병에 있을 때에는 밥맛이 과자와 같고 소금이 사탕과 다름이 없더니, 미군 부대에 들어가 보니 그 인종차별이 심한 지경이고, 젊은 몸으로 허송세월한다는 느낌으로 불안한 감 그지없었소이다.
그 무지막지한 자동차 수리공들을 데리고 있음으로 낮에는 그들에게 시달려 시름을 모르나, 저녁 후 그들이 술집으로 색시 집으로 또는 노름을 할 때 나는 그들의 지휘자로서 홀로 남아 이런 생각, 저런 생각 하니 눈물이 절로 났소. 더구나 달 밝은 밤에는 이상한 느낌이 나를 뒤덮어 깰 줄을 몰랐소이다.
12월 8일 내가 처음으로 휴가를 맞을 때까지 무려 6개월 동안 10여 차례 걸쳐 편지를 써보았으나 답장은 한 장도 받아보지 못하였소.
무인지경, 그야말로 사회 사람과 떨어져 내 주위에서는 사람을 보지 못하고 지냈으며, 나와 말을 같이 할 사람을 갖지 못한 나는 귀머거리와 소경과 다름없이 지내고 있소.
그나마 기다리는 답장은 오지 않았소. 이것으로 나의 그동안의 소식은 그치기로 하겠소.
이미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요. 앞으로의 우리의 할 일이 많고도 많소. 이 부패한 사회를 어찌 개조해야 하는가? 나는 지금껏 매일 밤이면 신공 후 이 문제에 대하여 생각해 왔으며, 한숨으로 잠이 들곤 하였소.
그러나 안드레아, 우리는 청년이오.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고 새로운 체계를 세우며, 세계 국가를 만들려는 붉은 피가 우리의 가슴속에 용솟음치지 않소?
우리는 할 일이 많은 청년이오. 인류를 위해서 우리의 최선을 정신적, 도덕적, 물질적으로 봉사하지 않겠소? 우리는 펄펄 뛰는 청년이오. 인류를 괴롭히는 모든 악을 지상에서 해 중에서 공중에서 일소하기를 선언합시다. 우리는 앞길이 양양한 청년이외다.
동물은 일생이 그의 전 생명이지만 사람은 일생이 그의 전 생명이 아니오. 영원히 살 수 있지 않소? 더구나 그 꽃인 청년은 그 하루하루를, 아니 그 한시한시를 어떻게 지내야 하겠소?
나는 현재 나의 나라가 내 마음에 맞지 아니하게 된 것, 다시 말하면 세상이 이다지도 타락된 원인을 나의 친구 그대와 내가 어리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소.
만약에 우리가 더 나이가 많았다면 이러한 세상을 만들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라 생각하오. 또 그리되기를 원하는 바외다.
미국에 가니 어떻소? 일본을 거쳐서 갔다 하니 그 소식이나 듣고 싶소. 그러면 다음번에 더 재미나는 소식을 기다리며, 집안 여러분께 안부 전해 주시오.
주께 항상 그대 성공하기를 빌며,
(1951년) 12월 17일 밤 부산에서 진석 씀
※이 편지는 50여 년이 지나 장건 안드레아가 아버지 장면 박사에게 받은 오래된 편지함에서 우연히 발견하고 1999년 당시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대주교에게 자신의 편지와 함께 동봉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