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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 사진---^^ 스크랩 발칸 및 동유럽 여행 ⑬ : 천년왕국이 만들어낸 음악가들의 도시, 비엔나
가을하늘 추천 0 조회 79 15.07.13 04:5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여행지 : 발칸반도 및 동구유렵

 

여행일 : ‘14. 10. 19() - 30()

여행국가 : 독일, 오스트리아,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헤르체코비나, 체코(7개국)

 

여행 일곱째 날 : 오스트리아의 수도 비엔나(Vienna)

 

특징 : 도나우강(Donau river) 상류 우안(右岸)에 있는 유럽의 고도(古都), 지금도 중부 유럽에서 경제·문화·교통의 중심을 이룬다. BC500년에 켈트 족이 정착하면서 형성된 도시로 1440년 합스부르크(Habsburg)왕가가 들어오면서 정치, 문화, 예술, 과학과 음악의 중심지가 되었으며 사실상 신성 로마 제국의 수도로 자리매김했다. 1805년 오스트리아 제국의 수도가 되었고,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신탁통치를 받으며 수도로써의 기능을 독일 베를린에 넘겨주었다가 1954년 독립하면서 다시 수도가 되었다. 비엔나는 음악가들의 도시다. 이곳에서는 악성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1827)이 생애 대부분을 보냈고, 가곡의 왕 슈베르트(Franz Schubert, 1797~1828)가 태어났으며, 요한 슈트라우스(Johann Strauss, 1825~1899)가 감미로운 빈의 왈츠를 작곡했다. 그리고 모차르트(Mozart)등 수많은 음악가들을 배출한 도시이기도 하다. 건물들로는 오스트리아에서 가장 훌륭한 고딕 양식의 건축물로 꼽히는 슈테판 성당(Stephansdom)과 합스부르크(Habsburg)왕가의 여름 별궁으로 사용되었던 쇤부른 궁전(Schloss Schonbrunn), 빈 공원(Wiener parks) 등이 유명하다. 석유 수출국 기구(OPEC)와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ZE), 국제 원자력 기구(IAEA)등과 같은 중요한 국제기구들의 본부가 이곳에 위치한다.

 

비엔나(Vienna)의 시내로 들어가면 빈의 전성기를 보여주는 소박한 스타일의 건물들을 어디에서도 만날 수 있다. 이 건물들은 주로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좋아했던 황색으로, 특히 안개 낀 석양에는 그녀의 황색이 꿈속에 떠오를 듯 여수(旅愁)를 느끼게 한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풍경에 빼앗길 시간은 우리에게 없다. 빈에서 머물 수 있는 시간은 고작해야 오늘 하루뿐, 내일 아침이면 체코로 떠나야 하기 때문이다. 빈에 도착한 시간은 늦은 오후, 조금 후에는 해가 질 것이다. 이럴 경우에는 관람시간에 제약이 있는 관광지를 먼저 찾아보는 게 우선이다. 그렇다. 비엔나에서의 투어를 쇤부른 궁정(Schonbrunn Palace)’에서 시작해야만 하는 이유이다.

 

 

궁전 앞에 웬 동상(銅像)? 아니다. 저건 동상이 아니라 온몸에 금박(金箔, gold foil)을 입힌 거리의 예술가이다. 앞에 놓인 건 돈을 넣는 통, 돈을 안내고 그냥 구경만 할 수는 있지만, 만일 그와 함께 사진이라도 찍었을 경우에는 꼭 돈을 넣어 주시도록 충고를 드린다. 까딱 잘못하면 낭패를 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긴 매너 팁(manner tip)이란 게 이런 때 내라고 있는 것 아니겠는가.

 

 

비엔나의 남서쪽 교외에 있는 쇤부른 궁정(Schonbrunn Palace)’은 합스부르크가의 여름 별궁으로, 합스부르크 왕조 600년의 역사를 간직한 유서 깊은 곳이다. 마리아 테레지아를 비롯한 많은 왕들이 이곳에서 정무를 보았고, 나폴레옹에게 점령당했을 때는 나폴레옹군의 사령부로 사용되기도 했다. 한 때 유럽을 호령했던 왕가의 사람들은 보이지 않지만, ‘아름다운 샘(Schonner Brunnen)’에서 유래한 쇤부른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빼어난 모습을 보려는 이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다. 최초의 건물은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를라흐(Johann Bernhard Fischer von Erlach)’에 의해 황제의 수렵용 소궁전이 있던 자리에다 4(1696~1700)에 걸쳐 지어졌다. 이어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 때인 1744년부터 1749년 사이에 니콜라우스 파카시(Nicolaus Pacassi)의 설계에 따라 대대적인 개축이 이루어졌다. 알력관계에 있던 이웃나라 프랑스에 국력을 과시하려는 의도도 다분히 있었던 터라 프랑스 베르사유 궁전에 견줄 만한 화려하고 아름다운 궁전이 탄생하게 되는 계기이다. 덕분에 애초의 모습은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궁전은 부드러운 황색의 외벽이 인상적인 거대한 3층 건물로 방이 1,441개나 된다. 바로크 양식의 건물에 화려한 로코코 양식의 실내장식을 해 전체적으로 화려하면서도 따뜻한 분위기다. 일반인의 출입이 허용된 45개의 방을 통해 합스부르크 왕가의 화려했던 과거를 엿볼 수 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거실, 마리 앙투아네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방, 남아메리카산 장미나무 뿌리로 꾸민 방 등 어느 곳이든 일반인의 눈에 호사스럽지 않은 곳이 없다. 사방이 온통 거울로 둘러싸인 거울의 방은 여섯 살 된 모차르트가 마리아 테레지아 앞에서 피아노를 연주했던 곳으로 유명하다. 당시 또래였던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어린 모차르트가 청혼을 했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하나 아쉬운 것은 궁전 내부에서는 사진촬영이 금지되어 있다는 점이다. 쥐도 새도 모르게 몇 커트(cut) 찍어볼까도 생각해봤지만 금방 단념해버린다. 90년대 중반 베르사유궁전에서 촬영하다가 걸려서 된통 당한 기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에는 영어가 서툴러 촬영이 금지된 줄도 모르고 촬영하다가 들켰지만 말이다.

 

 

궁전 뒤로는 1.7달하는 광대한 프랑스식 정원이 펼쳐진다. 화단과 분수, 정교한 조각상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정원은 궁전과 함께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정원 끝 언덕에는 프러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해 세운 일종의 개선문인 글로리에테(Gloriette)가 있다. 아치형의 주랑과 정교한 조각이 일품인 신전풍의 건물 자체도 아름답지만, 이곳에서 바라보는 궁전과 정원의 전망이 좋기로 유명하다. 정원에는 이외에도 1752년에 세워진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동물원, 아치형의 독특한 모양을 한 온실, 1690~1918년까지의 마차가 전시된 궁정마차박물관 등이 있다.

 

 

 

 

 

궁전의 뒤편 2층 난간에서 바라본 풍경, 개선문이랄 수 있는 글로리에테(Gloriette)의 웅장한 외관을 멀리에 두고 쇤부른의 정원은 완벽한 대칭구도를 자랑하고 있다.

 

 

 

 

 

 

 

정원에 가로수용으로 심어진 린덴바움(Lindenbaum, 보리수)은 잎을 모두 떨군 채 쓸쓸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지만 정원의 한 축을 담당하고 있는 화단에는 아직도 탐스런 꽃들이 축제를 열고 있다. 그 꽃들이 만들어내는 문양 또한 하나의 예술품으로 족하다. 하나하나의 문양이 나름대로의 멋진 그림으로 승화되고 있는 것이다.

 

 

 

 

쇤부른궁전의 투어를 끝내고 다시 비엔나 시내로 돌아오는 길, 달리는 차창 너머로 비엔나 시가지가 펼쳐진다. 어둠으로 물들어가는 중세도시는 하나 둘 새로운 색깔로 옷을 갈아입기 시작한다. 휘황찬란한 불빛들이 디자인한 각양각색의 예쁜 옷들로 말이다. 그리고 사이사이에 뭔가 이야깃거리가 있는 건축물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사라진다. 유럽 3대 오페라 극장 중에 하나로 꼽히는 빈 국립 오페라 극장, 유럽 거장들의 작품을 비롯하여 회화 7000여 점을 소장하고 있는 미술사박물관, 모차르트가 잠시 살았던 피가로하우스(Figaro House), 11세기에 건설된 빈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페터 교회(Peter Church) , 그 숫자가 하도 많아 머릿속에 모두 담을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렇다. 이곳은 비엔나에서도 유명한 환상도로(環狀徒路, Ring strasse)인 것이다. 그리고 소문난 역사유적들은 대부분 이 도로의 주변에 몰려 있기 때문이다. 빈 중심부를 감싸고 있는 이 도로는 1857년에 건설된 것으로 길이는 4km에 불과하지만 폭이 50~60m나 되는 넓은 도로다. 참고로 유네스코는 2004년 비엔나의 역사 중심지를 파괴 위험에 처한 위기유산(Danger Heritage)’으로 지정했다. 무분별한 개발로 인해 역사 중심지가 본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는 증거이다.

 

 

한참 시가지를 달리던 버스는 어느 한곳에서 우리를 내려준다. ‘쇼핑센터근처이다. 그러나 난 가이드에게 쇼핑센터의 위치만 파악하고는 주변을 둘러보기로 한다. 마침 근처에 국립 오페라극장이 있기 때문이다. 이 극장은 파리의 오페라극장, 밀라노의 스칼라극장과 함께 유럽 3대 오페라극장으로 평가 받는다. 비엔나 국립 오페라극장의 전신은 1869년 세워진 '궁정 오페라극장'이다. 1918년부터 지금의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2차 세계대전으로 건물 대부분이 파손됐으나 모차르트의 도시빈의 자존심을 되찾아야 한다는 시민들의 성원과 후원금을 바탕으로 약 10년 동안의 대대적인 보수 작업을 거쳐 옛 모습을 되찾았다. 이 때문에 건물 외형은 19세기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지만 내부 시설은 현대식으로 갖춰져 있다. 참고로 세계적인 오케스트라 비엔나 필하모닉이 이 극장에 소속돼 있다. 또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1897~1907), 헤르베르트 폰 카라얀(Herbert von Karajan, 1956~1964), 로린 마젤(Lorin Maazel, 1982~1984) 등 거장들이 이곳의 음악 감독을 역임했다. 극장 안으로 들어가지는 않았다. 오케스트라 연주회를 들어볼 시간도 없었지만, 이곳 비엔나 필하모닉’, ‘뉴욕 필하모닉과 함께 세계 3대 교향악단으로 꼽히는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Berlin Philharmonic Orchestra)’의 연주는 벌써 두 번이나 들어봤기 때문이다. 그보다 더 큰 이유는 음악회라는 것이 내 취향에 잘 맞지 않다는 것이지만 말이다.

 

 

 

 

쇼핑이 끝나면 이번에는 비엔나의 상징물이 되다시피 한 성 슈테판 성당(St. Stephen's Cathedral)’으로 이동한다. 물론 걸어서이다. 8백여 년 역사를 자랑하는 슈테판 성당은 오스트리아 최대의 고딕 사원으로 꼽히는 곳이다. 또한 유럽의 고딕 종교 건축물의 가장 훌륭한 표본중의 하나이기도 하다. 대성당의 외부 벽은 화려하게 도안된 석회암으로 구성되었으며 지붕은 윤이 나는 타일로 만들어져 있다. 성당이 1147년 처음으로 지어졌을 당시에는 단조로운 바실리카양식이었다고 한다. 1258년 화재로 인해 크게 손상된 것을 1263년 복원했고, 이후 합스부르크의 로돌프 4세가 지금의 고딕양식으로 짓기 시작하여 137m 높이의 슈테판탑이 만들어졌다. 이후로도 1683년의 투르크 침공, 1809년의 나폴레옹 침공,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등의 수차례의 파괴가 있었고, 이에 따른 복구가 반복된바 있다. 참고로 슈테판탑의 상부에 오르면 비엔나 시가지가 한눈에 들어온다고 하니 시간이 난다면 한번쯤 올라가볼 일이다.

 

 

 

성당은 서쪽 정면과 그 위의 탑이 가장 오래된 부분이다. 고딕 스타일의 남탑(1433)은 높이 137m로 매우 높으며 25만개의 벽돌(기와)로 만들어진 모자이크 지붕이 인상적이다. 343개의 계단을 오르면 예전에 화재망루로 썼던 발코니에서 비엔나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또한 68.3m의 북탑(北塔)은 르네상스 양식으로 서쪽 탑과 비대칭의 독특한 조화를 이루어 눈길을 끈다.

 

 

 

성당의 내부에 들어서면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와 기둥에 새겨진 정교한 조각들을 볼 수 있다. 그 중 특히 16세기에 안톤 필그림(Anton Pilgrim)이 만든 설교단은 복잡하고 세밀하게 조각되어 관광객들의 감탄을 자아내기 충분하다. 성당 안에 있는 지하무덤(카다콤)은 성직자들이 아닌 역대 합스부르크 왕과 왕비들의 내장을 석관에 넣어 보관하고 있다. 이 지하무덤은 가이드 투어를 통해서만 볼 수 있으니 시간에 맞춰 가는 게 좋다. 참고로 모차르트는 이곳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그의 장례식 또한 이곳에서 열렸다.

 

 

성당을 둘러봤다면 이번에는 게른트너 거리(Karntner strasse)를 거닐어볼 차례이다. 게른트너 거리는 국립 오페라하우스에서 성스테판 성당까지의 약 600m에 이르는 거리를 이르는 이름이다. 이 거리는 빈 최대의 번화가이자 보행자의 천국으로 알려져 있다. 당연히 사람들로 넘칠 수밖에 없다. 그래선지 도로 전체를 보행자 전용으로 묶어 놓았다. 참고로 게른트너라는 이름은 오스트리아 남쪽 지방인 카린티아(Carinthia)로 출발하는 시점(始點)이라고 해서 붙여졌다고 한다.

 

 

 

 

 

빈 최고의 번화가 답게 거리는 사람들로 넘친다. 현지인도 많지만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모습을 보니 여행자들의 숫자가 더 많은 것 같다. 거리 곳곳에는 특이한 악기를 연주하는 이름 모를 악사를 비롯해 풍선으로 갖가지 모양을 만들어 내는 광대 그리고 독특한 분장의 행위예술가까지 눈을 돌리는 곳마다 빈 사람들의 끼가 유감없이 발휘되고 있다. 그리고 주변에는 카지노를 비롯해 유명 브랜드 상점, 보석가게 등이 자리 잡고 있어 특별한 계획 없이 방문해도 즐거움을 만끽할 수 있을 것 같다.

 

 

 

 

 

다채롭게 펼쳐지는 문화의 향연을 즐기다가 노천카페로 들어선다. 지나다니는 사람 구경도 할 겸 카페에 앉아 빈의 커피를 맛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자리에 앉자마자 그런 생각은 자취도 없이 사라져버린다. 동유럽의 맥주를 다 마셔보려면 아직도 멀었다는 사실을 떠올렸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엔나를 제대로 느껴보려면 이 두 가지를 다 마셔보는 게 옳다. 비엔나 하면 아메리카노 위에 하얀 휘핑크림을 듬뿍 얹은 비엔나커피(Vienna Coffee)’와 마치 염주처럼 줄줄이 매달린 비엔나소시지(Vienna sausage)’를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만약 비엔나에서 위의 두 가지를 주문했을 경우엔 낯선 풍경이 펼쳐질게 틀림없다. ‘웬 뚱딴지같은 소리냐는 얼굴표정을 보일게 분명하다. 쉽게 말해 비엔나에는 비엔나커피비엔나소시지가 없다는 얘기이다. 우리가 알고 있던 단어들은 특정회사에서 만들어낸 상품들 중 하나일 따름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비엔나에서는 어떤 커피를 마실까? 1600년경 커피가 처음 유럽에 알려지고 사람들로부터 많은 인기를 끌자, 커피 하우스가 곳곳에 들어서게 되었는데 어른, 아이 모두 즐겼다고 한다. 당시 택시 역할을 하던 마차를 끄는 마부들도 커피를 좋아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그들은 왼손엔 말고삐를 잡아야 하기에 커피에 설탕, 생크림을 거품으로 해서 마시게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비엔나에서는 이 커피를 아인슈벤나(Einspanner), 즉 서 있는 한 마리 마차라고 부른다고 한다. 아무튼 아인슈패너는 에스프레소의 진한 풍미에 생크림의 부드러운 맛이 잘 어우러진 커피이다.

 

 

야간투어까지 마치고서야 식당으로 향한다. 조금이라도 더 많은 곳을 보려다보니 늦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사실 정해진 일정을 소화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이었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녹초가 된 몸뚱어리를 이끌고 찾아든 곳은 베토벤의 생가가 있는 그린칭(Grinzing)마을에 있는 1,137년에 걸어놓는다(Hengler)’는 뜻을 지닌 성을 하사받은 Hengl 가문의 호이리게인 알테 바흐 헹엘(Alte Bach-Hengl)’이라는 유명한 맛집이다. 어쩌면 비엔나 여행에서 누렸던 최고의 호사(豪奢)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비엔나에 온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할 것 없이 한번쯤은 꼭 들러보는 음식점이었기 때문이다. 음식은 돼지고기와 닭다리, 소시지, 미트볼 등의 육류와 포테이토, 야채 등 다양한 요리들이 제공되지만 대부분 조금 짠 편이다. 아마 술안주를 겸하느라 그런 모양이다. 달콤하면서도 뒷맛이 약간 씁쓰름한 와인에 곁들이면 아주 환상의 조합을 연출하기 때문이다.

 

 

국제적으로 알려진 유명 인사들의 사진이 입구 벽면에 즐비하게 결려있다. 다들 이곳을 방문한 사람들이란다. 클린턴 대통령에게 눈길을 맞추다가 좌우로 시선을 옮겨본다. 혹시라도 우리네의 이웃 얼굴을 발견할 수 있을까 해서이다. 그러나 그런 행운을 얻지는 못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많이 찾는 걸로 봐서 충분히 걸어둘 만도 하건만 그러지 않은 것을 보면, 어쩌면 우리나라의 높은 사람들은 이곳을 찾지 않는 모양이다.

 

 

 

그린칭(Grinzing)마을은 호이리게(Heurige)로 유명하다. 호이리게는 올해의 어원을 갖고 있으며 그 해에 생산된 와인을 판매하는 선술집이다. 호이리게의 역사는 포도재배 농민들이 프란츠 요셉 황제를 상대로 포도주 판매권을 요구하면서 부터 시작된다. 농민들의 요구를 받아들인 프란츠 요셉 황제는 자신이 수확한 포도로 만든 포도주는 직접 판매할 수 있는 권한을 농민들에게 부여했다. 이렇게 되자 포도주를 판매하는 농가가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고 포도 재배 단지였던 그린칭은 자연스럽게 호이리게 마을이 되었다. 호이리게는 그해 만든 포도주(Heuriger Wein)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포도주를 판매하는 주점(Heurigenlokal)이란 뜻도 내포하고 있다. 호이리게 와인(Heuriger Wein)과 호이리게 주점(Heurigenlokal)이 복합되고 줄어들면서 호이리게(Heurige)라는 말이 생겨나게 된 것이다. 하여간 투박한 병에 담겨 나오는 호이리게의 맛은 일반 와인보다 거칠고 어리다. 숙성된 화이트 와인은 깔끔하고 부드러우면서 달착지근하지만 호이리게는 톡톡 쏘는 맛이 강하고 상큼하다. 이런 호이리게는 비엔나소시지와 감자를 곁들여야 제격이다. 이런 맛을 보고 비엔나스럽다라고 하지 않을까 싶다.

 

 

그린칭의 호이리게에는 소속 악사(樂士)들이 흥을 돋우기 위해 테이블을 돌아다니며 바이올린과 아코디언으로 음악을 연주하기도 한다. 한국 노래도 곧잘 연주하는 걸 보면 그만큼 한국 여행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란 의미일 것이다. 악사들이 자기 테이블에 찾아왔을 때 듣고 싶은 노래 한곡쯤 부탁해보면 어떨까? 낯선 이국땅에서, 그것도 달콤한 와인을 앞에 놓고 맘에 드는 선율을 들어보는 것도 하나의 낭만일 테니까 말이다. 다만 그들이 아는 곡이어야 한다는 것이 전제조건일 테고, 거기다 매너 팁(manner tip)’은 기본이다. 테이블(table)5유로(EURO)에 선곡 등 뭔가 추가적으로 주문했다면 조금 더 보태야 할 것이다.

 

 

투어를 끝내고나서 하룻밤을 머문 유로호텔 비엔나 에어포트 (Eurohotel Vienna Airport), 공항주변이라는 지리적 편의성을 갖춘 이 호텔에 대한 첫 선입견은 규모가 작은 호텔이라는 느낌이었는데, 안으로 들어서니 객실의 넓이까지도 다른 호텔들에 비해 약간 좁다는 느낌이었다. 하긴 별 세 개짜리의 호텔이 크면 얼마나 크겠는가. 그러나 갖출 건 다 갖춘 심플한 호텔이니 걱정할 필요는 없다. 특히 과일이나, 요구르트, 그리고 야채 등이 많은 아침 뷔페(buffet)는 여행객들의 마음에 쏙 들것이다. 여행의 피로를 풀어주는 데는 비타민C’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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