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기술의 시대, 브레이크는 없는가?
1. 과학기술의 ‘과속’
천년 전 지구의 인구는 3억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지금 지구의 인구는 60억을 넘어서 있다. 그렇게 인구가 늘어나는 동안 인류의 중요한 과제는 어떻게 하면 자연으로부터 보다 많은 것을 얻어낼 수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그러한 인류의 삶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해준 것은 갈릴레이에서 시작한 17세기의 과학혁명이다. 갈릴레이 이후 과학이 이루어낸 것은 실로 엄청나다. 그 이전의 사변적인 철학에서 수량화되고 측정 가능한 실험의 학문이 과학으로 독립하게 되었으며, 특히 산업혁명은 특정 계층의 사람들만의 전유물이었던 과학을 우리 삶의 지평 안으로 끌어들이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의학의 발달은 인간의 평균 수명을 몇 배까지 늘려놓았고, 농업기술과 비료와 농약의 개발은 60억 인구를 먹여 살릴 수 있게 해주었다(진짜?). 과학은 기술과 함께 인간의 삶에서 없어서는 안 될 일부가 되었다. 그런데 상황이 달라졌다. 이제 지구 상의 어디에서 인간의 손길이 닿지 않은 곳은 없다. 이제 지구의 자원은 바닥이 보이고 있으며 불행히도 인구 증가 속도는 감소의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그게 사실 문제의 발단인지도 모른다. 인간의 손길은 단지 공간적인 영역에만 한정되지 않았다. 인간은 이제 신의 영역이었던 생명까지도 맘대로 만들도 조작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인류의 식량 문제와 의료 문제를 모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유토피아적 환상을 심어주고 있다. 과학기술과 관련하여 지난 세기의 화두가 ‘원자력’이었다면 지금 21세기는 ‘생명공학’이다. 이제 대다수의 사람들은, 자신이 과학 낙관론자이든 비관론자이든 상관없이 과학에 어떤 형태로든 제어장치가 있어야 한다는 데에 동의한다. 특히 생명공학의 가공할 발전 속도는 낙관론자들마저 불안하게 만들었다. 지금까지 과학기술은 가속 페달만 밟아왔다. 이제 사람들은 그 아찔한 속도에 현기증을 느끼기 시작했다. 어쩌면 우리는 벼랑 끝을 향해 달려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가속 페달에서 발을 떼고 조금 여유롭게 주변을 살피는 것이다. 앞에 벼랑이 있는지, 여전히 탄탄대로가 놓여 있는지. 우리가 속도에 몰두하는 동안 주변에서 놓쳐버린 좋은 풍경들은 없는지. 그런데 정작 과학기술에는 브레이크가 있는가? 있다면 누가 그걸 밟아야 하는가?
2. 문제의 원천 : 과학인가 기술인가?
그런데 본격적으로 문제에 대답하기에 앞서 문제의 타깃을 정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같다. 우리의 문제는 과학인가, 기술인가? 원래 과학(science)과 기술(technology)은 별개의 용어이다. 과학은 우주와 물질·생명현상에 이르기까지 자연을 실험과 관찰, 분석과 수학적 이론화 등의 방법을 통해 자연의 원리와 질서 그리고 운동의 법칙 등을 찾아내기 위한 지식의 탐구 행위와 그 결과로 나타난 이론체계, 축적된 지식체계를 말한다. 반면, 기술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간에) 과학적 지식이나 원리를 활용하여 인간의 경제활동이나 복리 증진을 위한 방법이나 노하우(know how) 또는 활용 지식을 의미한다. 또 과학은 진리 탐구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정신 활동을 말하며, 기술은 인간의 손을 통하여 유용한 기계나 설비 또는 제품을 만들어내고, 지식과 재화나 서비스의 효율성을 높이는 시스템 등을 발전시켜 인간 생활을 풍요롭고 편리하게 하여 주는 목적의식을 갖는 활동을 말한다. 그러므로 과학의 미덕이 가치중립성인데 반해 기술은 태생적으로 가치 의존적이다. 그런데 이런 구분은 원론적인 이야기에 그치고 만다. 가세트(Gasset J.Q)에 따르면 인류의 역사는 세단계로 구분되는데, 첫 단계는 기술이 우연히 획득되는 시대였던 선사시대였으며, 두 번째 단계는 장인에 의해 기술의 체계가 잡히고 직업으로서 전수되는 시기였다. 그때까지 기술은 과학과 분리된 전혀 다른 영역의 활동이었다. 17세기 과학 혁명 이후 오늘에 이르는 ‘기능인의 기술 시대’인 세 번째 단계는 ‘과학기술’이라는 신조어를 창조하였다. 특히 오늘날의 과학과 기술은 새로운 과학적 지식이 첨단 기술개발의 원천이 되고, 고도의 기술은 첨단 과학 실험 장치를 가능하게 하여 상호 보완적·상승적으로 발전하기 때문에 양자를 구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서로 밀착되어 있다. 이 때문에 과학기술이라는 하나의 용어로 부르게 되었다. 오늘날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과학 기술 문명의 특징은 바로 과학과 기술이라는 서로 다른 두 개념이 합쳐져서 하나의 개념처럼 굳어 버린 과학기술이라는 말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3. 해결 주체의 요건
현대 과학기술의 과속을 제어하려는 해결 주체는 다음의 두 요건을 만족시켜야 한다. 문제 해결의 주체가 갖추어야 할 첫 번째 요건은 문제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의 객관성이다. 문제의 해결자는 문제를 있는 그대로 치우침 없이 파악해야 한다. 어떤 정파나 당파, 종교, 자본이나 여러 이익 단체들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객관성은 본디 과학자의 기본 덕목이다. 그러니 과학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할 때 이 덕목은 워낙 근본적이어서 별로 고려치 않아도 될 것 같은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다. 과학은 둘째 치고라도 ‘과학기술’은 분명 객관성 위반의 혐의를 받을 만하다. 특히 자본은 문제 평가의 객관성을 위협하는 가장 큰 요소로 작용한다. 그런데 그런 순수하고 치우침 없는 자세가 갖추어져 있다 하더라도 아무나 문제를 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 위에 요구되는 것이 전문성이다. 문제의 해결자는 문제를 볼 수 있는 전문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17세기 과학혁명 이후 현대의 과학은 인접한 분야의 동료 과학자조차도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전문성을 요구하게 되었다. 그러니 그런 전문성이 결여되어 있다면 논의의 장에 들어설 수조차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전문성은 그렇게 협소하게만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과학기술의 평가에 있어서 전문성은 오히려 그 외에 다양한 항목들에 대한 평가의 객관성을 부수적으로 요구한다. 첫 번째가 그 과학기술 분야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라면, 두 번째로 인접 분야의 파급 효과에 대한 전문성 있는 성찰이 요구되며, 또 그 과학기술이 사회에 가져다 줄 파급 효과에 대한 사회 정치적 시각에서의 성찰이 요구된다. 그리고 특히 요즘 문제시되고 있는 생명공학과 관련해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과학기술의 윤리적 파급효과에 대한 깊은 철학적 성찰이다. 그러니 과학기술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요구되는 전문성은 그 과학기술의 파급 효과만큼이나 다중적인 전문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4. 누가 브레이크를 밟을 것인가?
인간은 과학기술의 발전에 상응하는 다중적인 판단 능력을 배양하고 있는가? 사회 윤리적인 면에서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추진되는 과학기술의 급속한 발전은 브레이크가 파열된 줄도 모르고 무한 질주하는 고속 열차와 같다고 볼 수 있다. 과학기술의 발전이 인류의 삶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왔음은 사실이다. 하지만 기술 발전의 그늘에 가리워진 부정적인 모습에 대한 대비가 없으면 과학기술의 발전은 인류에게 해악이 될 가능성도 많다. 과학기술의 전개가 도를 지나쳤다고 판단한다면 우리는 그 과속의 질주를 제어할 브레이크를 마련해야 한다. 그럼 누가 그 브레이크를 밟을 것인가? 일반적으로 세 부류가 그 후보로 거론되고 있다. 먼저 첫 번째 후보는 과학자 집단이다.
4.1. 과학자 집단의 자기 규제
과학자들은 스스로가 과학기술 전개의 감시자가 되고자 한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고 말한다. 문제 해결을 위한 객관성과 전문성은 그들이 과학자이기에 이미 갖추고 있는 능력이라는 것이다. 물론 사람들은 과학자가 인류 역사에서 저지른 과오들을 들먹이며 과학자가 스스로 통제할 수 있을 것이란 약속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는다. 과학자 집단의 윤리의식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연 그런 과오들이 과학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것인가? 예를 들어, 지난 세기 핵무기 개발은 명백히 과학자들의 잘못인가? 오히려 세계를 둘로 나눈 이데올로기 창시자들의 몫이 아닌가? 과학자들을 옹호하는 이런 주장은 설득력 있어 보인다. 왜 우리는 과학자들의 윤리 의식 혹은 사회 의식은 일반인들보다도 현저하게 떨어진다는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가? 잘못된 과학자가 잘못된 정책 입안자보다 위험한 존재인가? 미국의 한 통계에 의하면 가장 개혁성이 강한 집단 중 하나가 과학자 집단이라고 한다. 그들은 대부분 좌파적 윤리의식을 지니고 있으며, 그런 의미에서 여타 집단보다 상대적으로 깨끗한 집단일지도 모른다. 또 현실적으로 보아도 과학자 집단이 정치가 집단보다 비윤리적이라는 말은 상식적으로도 거부되는 개념이며, 이런 의미에서 과학자들의 윤리의식을 문제 삼는 것은 과학기술자를 과학기술의 규제자로 삼자는 주장을 거부할 논리적 근거가 될 수 없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현대 과학기술자들에게 윤리 의식을 요구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은 어떤 방향이어야 하고, 실제로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1989년 미 과학학술원에서는 <과학자가 된다는 것>이라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이 보고서는 과학자간, 그리고 과학자와 사회 일반간의 관계를 규정한 ‘과학에서의 사회적 메커니즘’을 포함한 과학 또는 과학자의 윤리에 해당된다. 과학은 그 메커니즘에 과학자간 윤리를 통제할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 있다. 학술 논문 발표 절차를 통해 대부분 관련 윤리 위반이 가려진다. 하지만 예를 들어 과학자의 날조 등 이를 벗어나 사회 문제화 되는 경우도 있다. 이때에도 과학자 집단은 정치인 등 외부의 개입을 거부한다. 자체 내에서 윤리를 적용하여 해결할 문제이며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강조한다. 과학자의 사회적 책임성에 대해 보고서는 “사회의 관심사에 부응하며 사회에 해가 될 연구를 하지 않는다”와 “과학의 가치를 계몽한다”는 두 가지 윤리를 언급하고 있다. 예를 들어 사회는 어떤 과학 연구가 중요한지, 우선 순위에 관심이 많다. 또한 인간 복제, 유전자 조작 식물, 인간 유전자와 인권 등 유전자와 관련된 위험성에도 관심이 크다. 이때 과학자의 윤리는 해가 되는 연구를 하지 말며 갈등적 문제에서 사회와 합의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합의과정에서 필요할 경우 과학자는 최대한 사회를 설득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이것이 과학자의 참여를 촉구하는 과학의 정치이지만, 이보다 과학자의 윤리는 사회의 민주적 의사결정에 역할을 할 책임성을 강조한다. 과학자가 이러한 과학자 집단의 자기 규제에 대해 호의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너무 당연해 보인다. 그리고 그만큼 그들의 주장은 설득력이 없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유사한 호의적인 주장을 저명한 사회학자에게서도 들을 수 있다. 작고한 프랑스 사회학의 거장 부르디외는 과학자들에게 과학 공동체를 만들 것을 권하고 있다. 단순한 이익 단체의 성격이 아니라 적극적인 정치적 참여를 촉구하는 것이다. 과학자가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서는 과학 논의장의 자율성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며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과학자 집단이 집단적 모임을 형성해야 하며 정치세력으로서 존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항존 정치세력임을 표방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할 때만, 또 필요한 만큼만 정치적 발언을 하고 다시 본연의 임무로 돌아와야 한다고 부르디외는 주장한다. 이들의 요구가 집단적 이익만을 추구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부르디외는 일단 자신의 자율성을 강조하고 자신의 특수한 이익을 방어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만일 실천의 철학자 부르디외가 과학자들의 윤리 의식을 믿지 않았다면 이런 단체의 형성을 권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4.2. 과학자 집단의 한계
그런데 정말 과학자들은 스스로 자기를 규제할 수 있을 만큼 객관적 위치에 있으며, 전문성을 띄고 있을까? 어쩌면 과학자들의 윤리 의식이 정말 일반인들의 윤리 의식보다 깨끗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사실이 그런 것도 같다. 그런데 그렇다는 사실이 과학자들로 하여금 자기 규제의 권한을 부여할 근거가 될 수 있을까? 과학 외부에서는 이런 질문에 그리 긍정적인 대답만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먼저 과학 내부에서의 자기 규제는 결과적으로 연구 개발에 대한 불확실한 결과를 상정하며 건전한 연구 활동을 위축시킬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또 과학자들의 전문성은 오히려 편협한 전문성에 머물 가능성이 있다. 많은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다양한 논의를 하지 않으면, 기술 개발이 미래에 초래하게 될 결과에 대한 불확실성을 충분히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불확실한 결과에 대해 규제할 수 있는 권한을 주게 되면, 규제의 대상이 정치화될 가능성이 증대된다. 특히 연구 개발 기금을 제공하는 기관이 정부의 예산으로 운영된다면 정책 개입으로 인한 연구 개발의 위축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연구자들 간에 자율적인 조절 메커니즘을 구축하는 방법이 연구의 자율성을 확보해주고 전문적인 입장에서 영향 평가를 할 수 있기 때문에 바람직한 방법이라고 볼 수 있지만, 이 경우에도 동료 집단의 연구 활동을 효과적으로 제한할 수 있을지 불확실하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와 같이 전문 연구 인력의 규모가 작은 곳에서 객관적이고 효과적인 평가가 이루어질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그런데 보다 근본적인 문제 제기는, 과학과 기술이 아닌 ‘과학기술’의 시대인 지금, 그것도 생명과학의 시대인 지금, 과학기술자가 자본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으며 그러므로 객관성을 유지할 수 없다는 것이다. 흔히 과학기술을 암흑상자에 비유한다. 그들만의 언어로 논의되고, 그들만의 시각으로 판단 및 결정하는 과학기술은 일반 시민들의 접근을 원천봉쇄한다. “우리 전문가들이 알아서 잘 결정한 것이니 시민들은 그저 그 혜택만 구가하면 그만이라는 식의 가부장적 신화”를 너그럽게 각인시킨다. 특히 생명공학은 전문지식으로 접근 가능한 과학기술을 넘어선다. 특허라는 장벽으로 겹겹이 둘러싸인 그 성격상, 돈 없이 통과할 수 없는 상업주의를 지향한다. 사실 상업주의는 비단 생명공학만의 문제는 아니다. 과학이 기술과 손잡는 순간 상업주의는 과학기술의 운명이 되었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과학과 기술이 만나면서 과학은 자신들이 늘 강조하던 '가치중립' 이라는 지고의 명제를 잃었다. 과학기술에 자본이 투여하자 수요가 공급을 창출하던 시대에서 공급이 수요를 창출하는 시대로 접어들어, 과학기술은 돈벌이의 거대한 수단이 되었다. 인류복지를 위한다는 생명공학자들은 특정 회사의 특정 농약에 견디는 씨앗을 개발한다. 그 특정 회사는 그 씨앗과 함께 그 특정 농약까지 판매하는 부가가치를 챙긴다. 이는 소비자를 위한 식량증산과 무관하다. 생산자를 위한다고 선전해대지만 생산자와도 무관하다. 오직 공급자를 위한 생명공학인 것이다. 학문 연구는 과학자들의 기본권이라며 알아들을 수 없는 과학용어를 동원하며 주장하지만, 연구기금을 제공하는 주체의 의지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과학기술은 본시 가치중립일 수 없다. 저마다 인류복지를 내세우지만, 생산자에게 돈이 되는 연구라야 연구비를 마련된다는 것을 생명공학은 잘 알고 있다. 그래서 부가가치를 운운한다. 결국 돈이 동인이라는 뜻이다. 현대 사회에서 그 사회를 구성하는 여러 집단이 있지만 어느 집단도 자기들이 스스로 정한 내부 규준만을 가지고 자신들의 행위에 대한 윤리적-법적 판단을 내리지는 않는다. 그런 처지는 과학자 집단이라고 예외일 수는 없다. 그런 의미에서 과학자 집단이 스스로의 감시자가 되겠다는 생각은 위험한 발상일지도 모른다.
4.3. 시민단체의 역할과 한계
리프킨은 자신의 저서 <바이오테크의 시대>에서 '조기 치료가 가능한 치명적 질환', '다음 세대가 구명용 의약품을 생산할 수 있도록' '유전자조작 기술을 이용할 수 있는 문을 열어'두어야 함을 조심스럽게 주장하고 있다. '기술의 우선 순위'를 잘 설정하면 생명공학을 유용하게 활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 지금까지 분자생물학자, 기업, 정부, 그리고 일부 비평가만이 참여한 생명공학에 관한 토론에 '쟁점의 양측면을 대표하는 권위자들이나 전문가 이외에 사회전체가 참여'하여 '폭 넓고 깊은' 논의를 전개해야 한다고 리프킨은 시민의 참여를 제안한다. 리프킨의 말마따나 이제 대안은 시민단체인 것 같다. 과학자들은 자신들의 전문성과 과학 본연의 객관성을 자랑하지만 기술과 만나면서 그 둘을 과학자들의 유산목록에서 빼내 버렸다. 특히 과학기술의 첨병인 생명공학의 영역에 들어와서는 더 그렇다. 그런데 시민단체가 과학의 과속을 막을 대안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가장 큰 장애는 그들의 비전문성에 근거한 반론이다. 대표적인 예가 있었다. 1999년 9월 연세대학교에서 있었던 '생명복제기술 합의회의'에서 시민 패널로 참석한 16명은 생명윤리 및 안전에 대한 의식이나 기술이 현재와 같이 취약한 상황이라면 인간복제는 물론 배아복제도 위험하다고 의견을 합의해냈다. 당시 합의회의에 전문가 패널로 참석했던 생명공학자는 시민들의 의견을 존중하겠다고 밝혔음에도 국회의원 앞에 다가서자 시민들의 무지로 돌렸다. 그런데 찬성과 반대 전문가의 말과 글을 동등하게 청취한 후, 3박4일간의 논의 끝에 결론을 낸 시민들은 진정 무지했을까. 합의회의의 주제는 ‘생명안전과 윤리’였지 생명공학 자체는 아니었다. 건강한 상식을 지닌 시민들이 참여하는 합의회의지 생명공학 세미나나 학회발표회장이 아니었던 것이다. 연구자마다 설명이 다른 복잡한 생명공학을 인접학문 전공자도 알아듣지 못할 전문용어로 설명할 수 없다면 무지한 것일까? 합의회의는 육성 일변도의 생명공학으로 발생될지 모르는 생명윤리와 안전의 문제를 살펴보자는 취지였다. 따라서 자신의 전공 이외에 아는 것이 없는 생명공학 전문가들보다 사회학자, 법률학자, 윤리학자, 환경학자가 차라리 전문가이고, 무엇보다 자식을 키우는 시민이 가장 확실한 전문가라고 믿는다. 당시 시민단체의 회원들은, 시민패널 선정부터 두 차례의 예비회의, 3박4일간의 본회의에 꼬박 참석하여 자신의 주장을 그렇게 강조하던 생명공학자가 의원 앞에서 시민을 깔아뭉갠 소행은 윤리적으로 용납하기 어렵다고 강변한다. 합의회의에서 시민들은 생명공학자들의 윤리교육을 강조했다. 그 생명공학자의 행동을 보니 시민들의 판단은 일면 타당해 보인다. 생명공학자들의 윤리의식 무지가 매우 염려스런 수준임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시민단체에서는 경직된 전문가주의와 섣불리 매몰된 과학기술 신화는 다른 의미의 무지일 뿐 아니라, 후손에게 차라리 위험이 된다고 주장한다. 사회적 합의 없는 과학기술이 빚어낸 돌이킬 수 없는 위험은 우리 경험 속에서 이미 차고 넘친다. 유전자를 돌연변이 시키는 생명공학이라는 과학기술은 그럴 가능성이 더욱 농후하다. 여기에 시민단체의 역할이 있다. 자식 키우는 시민에게 정확한 사실을 전달할 책임과, 자신들이 무지하다는 사실도 모르는 과학기술자의 편협한 전문가주의를 극복할 수 있게 인도해야할 필요가 있다. 정부당국에게 참여민주주의를 강력히 요구해야 할 의무도 있다. 시민의 일원으로 시민과 함께 하는 시민단체의 역할, 시민운동이라는 덕목은 21세기 생명공학의 세기를 앞두고 그래서 중요하다.
그런데 시민단체의 이러한 항변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생명공학을 위시하여, 과학기술을 평가할 전문적인 능력을 가지고 있는가라는 질문은 여전히 남는다. 물론 과학기술의 제어를 생각할 때 말하는 전문성은 그렇게 편협한 의미의 전문성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렇더라도 전문적인 과학적 지식이 아닌 비전문적인 사람들의 의견을 통해 과학 발전의 미래를 재단하자는 생각은 시민단체의 객관성이라는 장점을 고갈시키고도 남을 것 같다. 여론은 무시되어서는 안 된다. 그런데 아침저녁으로 다를 수 있는 게 여론의 속성 아닌가? 과학기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그에 맞는 정책과 인프라의 구축은 장기적인 안목을 가지고 기획되어야 하는 것이다. 시민단체의 규준이 비전문적 시민들의 여론으로부터 얼마나 자유로울 수 있는가가 시민단체의 역할의 폭을 결정지을 것이다. 또한 요즘처럼 시민단체가 정당으로 가는 전초기지 역할을 하는 것을 볼 때, 과연 그들에게서 진정 객관적인 도덕적 책임감을 물을 수 있을지도 보다 깊게 생각해보아야 할 문제 제기이다.
4.4. 국가 개입의 형태
과학자 집단과 시민단체 말고도 우리가 또 하나 생각해 볼 수 있는 대안은 국가이다. 그런데 국내의 상황을 보면 국가의 적극적 개입은 아직은 소원해 보인다. 따라서 어떤 형태로 국가가 개입할지, 어떠한 긍정적 효과가 있으며 부정적 효과는 무엇인지에 대해서도 아직은 잘 모른다. 하지만 타산지석으로 삼을 외국의 사례는 여럿 있다. 과학기술 개발에 대한 정부의 체계적인 정책 평가는 미국의회 산하에 있었던 기술영향평가국(OTA: Office of Technology Assessment)의 기능이 대표적이다. OTA는 의원들의 과학기술 정책에 대한 보좌 기능을 수행하면서 다양한 기술 영향 평가 보고서를 제출했다. OTA는 기술이 현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나 미래 사회에 미치게 될 영향을 평가하고, 기술 개발과 사회적 영향과의 인과 관계를 밝히고, 대안적 기술 개발 가능성을 탐색하고, 대안적 방법과 프로젝트의 영향에 대한 평가를 비교해서 의회에 제안을 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OTA는 의회의 업무를 보조하는 기능을 담당했기 때문에 의원들의 요구에 의해 과학기술 개발에 대한 다양한 평가 작업을 실시했다. 이를 통해 의원들이 과학기술과 관련된 예산을 배정하는 데 보다 많은 정보를 제공해주고, 기술 개발로 인해 사회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연구에 대해 정보를 제공해주는 역할을 담당했다. 예를 들어 OTA의 기술 영향 평가를 통해 오존층을 파괴하게 되는 초음속 비행기의 개발이나 환경 피해가 심각하게 초래될 화학제품의 판매를 허가하지 않는 등의 조치를 취해서 국가가 예기치 않았던 비참한 결과를 피할 수 있게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OTA는 지나치게 완벽한 평가 작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의회의 불신을 얻게 되었으며, 결국 1995년 보수적인 공화당 중심의 의회에서 예산 배정을 거부당함으로써 23년간의 기술 영향 평가 업무를 마감하게 되었다. 반면에 유럽에서 추진된 기술 영향 평가의 방법은 보다 효과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영국의 POST(Parliamentary Office of Science and Technology)의 경우에는 OTA와 달리 아무리 길어도 보고서가 100쪽을 넘지 않고, 서너 쪽의 보고서도 많았다고 한다. 또한 의원들의 요구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몇 주 내에 짧은 보고서을 제출하기도 하고, 길어야 아홉 달을 넘기지 않았다고 한다. POST에서 1994년 4월부터 2년 사이에 평가된 내용은 16건인데 주된 내용은 사회적 영향을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면 원자력 산업의 평가, 유전공학, 박테리아 병원체에서 약의 저항력, 쓰레기 재처리, 지속 가능한 교통, 수자원 등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다. 영국의 POST와 함께 네덜란드의 NOTA(Netherlands Organization of Technology Assessment)는 미국의 OTA와 같이 사후 평가를 한 것이 아니라 형성 평가를 한 것으로 유명하다. 1986년에 설립된 NOTA의 구성적 기술 영향 평가(constructive technology assessment)라고 하는 평가 방법은 과학기술 개발이 정책적으로 추진되는 과정에서 다양한 이해 당사자 및 과학기술 전문가들이 참여하여 사회적으로 바람직한 정책이 추진되고 있는가를 평가하여 피드백 하는 과정 평가나 형성 평가의 성격이 강하다고 볼 수 있다. 즉 정책 결정 과정에서 관련 당사자 및 이해 당사자들의 참여를 통해 과학기술 정책이 사회의 요구를 수용하여 결정되게 하는 구성적 특성을 갖고 있다. 따라서 이곳에서는 과학기술 개발에 있어서 기술적 합리성보다는 정치적 합리성에 더욱 큰 비중을 둔다고 볼 수 있다. 또한 과학기술 개발이 초래하게 될 영향을 사전에 평가하여 이를 연구 개발 정책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반영함으로써 사회적으로 부정적인 영향을 극소화한다는 것이다.
4.5. 자본주의의 성장 논리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과학자 집단이나 시민단체의 규제와 비교할 때, 정부 차원의 개입은 효율성에서 앞서간다. 미국이나 영국, 네덜란드처럼 정부 차원에서 과학기술의 사회적 영향에 대한 평가 기능을 담당하게 되면, 과학기술의 개발로 인한 부정적인 영향을 비교적 효과적으로 막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실험실에서 배출되는 유해 물질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의 구축이나, 사회적 해악을 초래할 수 있는 기술 개발에 대해 철저한 감독이나 관리를 행정 절차 등을 통해 사전에 예방할 수 있다. 또한 생명 복제의 경우와 같이 윤리적으로 부적절하다고 판단되는 연구 개발에 대해서는 연구비의 지원을 중지하는 등 다양한 형태의 정책적 개입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러한 정부의 과학기술 개발에 대한 일방적인 관리와 감독은 자칫 잘못하면 건전한 과학기술 개발 활동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게다가 전문성이 확보되어 있지 않은 국회에서 영향 평가를 하게 될 때 많은 연구 개발 사업들이 정치적 논의에 휩싸여 효과적으로 추진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예를 들어 원자력 기술의 이용에 대한 논의가 정치화되면 소위 NIMBY 현상과 같이 지역 이기주의에 의해 사회 전체적으로 필요한 연구 개발도 제한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것이 극복해야 할 문제일지 모르지만 이것 때문에 국가의 개입을 반대하기엔 부족하다. 17세기 과학 혁명을 거쳐 오면서 등장한 ‘과학기술’이라는 새로운 개념은 더 이상 과학이 사회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실험실 속의 소수의 천재 과학자들에 의해 행해지는 활동일 수 없음을 보여준다. 오히려 사회적 요구에 의해 과학기술이 연구되고 결실을 맺기도 하고, 과학기술의 연구 성과가 일정한 사회적 반향을 창출하기도 한다. 과학기술의 발전에 대해 정부의 개입이 정당화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사회적 분위기 또는 과학기술 개발의 환경적 요인이 과학기술 발전에 직접적으로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정부는 시장 기구에 과학기술의 개발을 맡기지 않고 적극적으로 개입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과학기술의 제어에 대한 정부차원의 개입이 안고 있는 난점은 보다 근본적인 곳에 있다. 국가는 전문성과 객관성이라는 두 가지 미덕을 갖춘 것 같다. 그런데 정말 그런가? 과학자 집단과 마찬가지로 한 꺼풀 벗긴 국가의 속살은 국가가 자본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음을 보여준다. 특히 성장위주 정책이 중요시되는 자본주의 국가가 과학기술에 대한 건전하고도 객관적인 윤리적 판단을 할 수 있을까? 전문성과 관련해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이다. 국가의 전문성이란 것은 결국 과학자들의 전문성을 빌려온 것 아닌가? 그럼 과학자의 전문성과 관련해 제기된 문제는 국가에 대해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국가에 전문성을 가져다 준, ‘선택된’ 과학자들의 처지를 볼 때 그들의 판단이 객관성을 보장 받을 수 있을지 의심스럽다.
5. 브레이크는 없는가?
과학기술의 제어를 생각 할 때 등장하는 주요 개념은 전문성과 객관성이었다. 과학자 집단은 전문성과 객관성을 모두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을 한 꺼풀만 파고들면 그렇지 않아 보인다. 이런 문제점은 ‘과학’과 ‘기술’이 아닌 ‘과학기술’이라는 개념에서도 드러나듯이 과학기술의 자본 의존성에 기인하며 그들의 객관성을 위협하는 가장 치명적 약점이다. 시민단체는 일단 객관성을 갖추고 있어 보인다. 그리고 전문성은 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그들의 과학기술의 파급효과와 문제점을 중심으로 하는 논의에서 전문성은 과학자집단에서 말하듯이 그렇게 편협한 전문성은 분명 아니다. 오히려 시민단체의 일반인들이 그 문제의 해당 당사자이며, 그러기에 과학자들보다 더 전문적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을 갖는 것 같다. 그런데 오히려 시민단체들의 객관성이 문제시된다. 시민단체는 사회 윤리적으로 얼마나 객관적인 위치에 있는가? 대답은 회의적이다. 특히 우리 사회에서 보여지는 여러 시민단체들의 모습은 그들의 객관성을 의심케 하는 대목들이 많다. 더군다나 과학기술의 거시적인 프로젝트에 비해 시민단체의 ‘의견’은 너무 급변한다. 시민단체가 스스로 중심을 잡을 수 있는 능력을 갖출 수 있는지에 따라 시민단체의 역할이 결정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제안될 수 있는 것은 과학기술을 평가하고 제어하는 국가의 역할이다. 국가는 효율성의 측면에서 가장 큰 장점을 갖는다. 그리고 과학기술의 거시적 활동에도 적합한 거시적 안목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국가 또한 과학자 집단과 마찬가지로 자본으로부터 자유롭지 않아 보인다. 특히 자본주의 국가의 성장위주의 경제 정책은 과학기술의 문제 평가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객관성을 부차적인 요소로 끌어내린다. 전문성도 마찬가지이다. 국가의 전문성은 단지 평가 대리인인 과학자의 전문성이며, 그 경우 과학자 집단의 문제가 그대로 남게 된다.
과연 현대 과학기술의 과속을 막을 조종자는 누구인가? 누가 브레이크를 밟을 수 있는가? 희미하게나마 떠오르는 마지막 대안은 앞에서 말한 세 집단이 함께 하는 것일 게다. 리프킨의 주장은 이런 형태를 암시하는 것으로 들린다. 그런데 그것이 보다 구체적으로 어떤 식으로 조직되고 운영될 지에 대해선 아직은 막연한 것 같다. 과학 기술이라는 자동차는 지금도 열심히 달리고 있다. 어쩌면 지금 그 자동차는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앞에 낭떠러지가 있을지, 절벽이 가로막고 있을지 모른다. 브레이크가 없이 달리는 차는 진짜 차든, 비유된 과학기술이든 위험하기 짝이 없다. 누구든 빨리 브레이크를 밟을 사람이 있어야 하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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