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원하노라! (욥기 31장 1절 – 40절) 31:1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 2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의 전능자께서 주시는 기업이 무엇이겠느냐… 4 그가 내 길을 살피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 6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 7 만일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거나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랐거나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다면 8 내가 심은 것을 타인이 먹으며 나의 소출이 뿌리째 뽑히기를 바라노라… 13 만일 남종이나 여종이 나와 더불어 쟁론할 때에 내가 그의 권리를 저버렸다면 14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겠느냐 15 나를 태속에 만드신 이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이가 한 분이 아니시냐 16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거나 과부의 눈으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였던가… 23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그런 일을 할 수 없느니라 24 만일 내가 내 소망을 금에다 두고 순금에게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다면… 26 만일 해가 빛남과 달이 밝게 뜬 것을 보고 27 내 마음이 슬며시 유혹되어 내 손에 입맞추었다면… 28 위에 계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리라 29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고 그가 재난을 당함으로 즐거워하였던가… 35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 37 내 걸음의 수효를 그에게 알리고 왕족처럼 그를 가까이 하였으리라… 40 하고 욥의 말이 그치니라 (개역개정) 오늘의 성경 본문은, 욥이 당한 고난의 원인을 두고 친구들 간에 벌어진 3차 변론(22-31장)의 마지막 부분(26-31장) 중에서, 욥의 독백 부분(29-31장)을 마무리하며 욥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내용입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31:6)는 독백을 통해서, 구체적으로 자신의 의로운 행위들을 열거하며 자신이 행한 의를 근거로 하나님의 공의로운 구원의 손길에 대한 소망을 피력합니다. 욥은 이미 “인생이 어찌 하나님 앞에 의로우랴? 사람이 하나님께 변론하기를 좋아할지라도 천 마디에 한 마디도 대답하지 못하리라”(9:2-3)고 했던 것처럼,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으로 의롭다는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밝혔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친구들은 욥의 무죄 주장을 오해하거나 왜곡했습니다. 엘리바스는 “사람이 어찌 하나님보다 의롭겠느냐?…사람이 어찌 깨끗하겠느냐?”(4:17,15:14)라고 공격했고, 소발은 항변하는 욥에게 “말이 많은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함을 얻겠느냐?”(11:2)라고 공격했고, 빌닷 역시도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어찌 의롭다 하며, 여자에게서 난 자가 어찌 깨끗하다 하랴?”(25:4)라고 공격했습니다. 욥은 친구들이 도식적이고 현세적인 인과응보 논리로 자신의 재앙을 자신이 지은 죄의 결과로만 몰아가는 것에 대해서, 자신은 친구들이 지적하는 그러한 죄를 지은 적이 없다는 의미에서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던 것입니다. 더군다나 친구들의 논리대로라면, 자신이 그동안 행한 일들로 볼 때에 오히려 하나님의 축복이 내려야 할 텐데 그렇지 않지 않느냐는, 안타깝고 답답한 자신의 마음을 토로하고 있었습니다. 1. 욥은 도덕적 의를 어떻게 주장합니까? 욥은 친구들이 정죄하는 오해와 달리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으로 사회적으로 신앙적으로 어떠한 자세로 살아왔는가를 고백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라고 하는 것은 코람데오 곧 신전의식(神前意識)으로서, “그가 내 길을 살피지 아니하시느냐? 내 걸음을 다 세지 아니하시느냐?”(31:4)라며, 매사에 하나님이 자신의 모든 것을 지켜보고 있다는 자세로 양심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아왔다고 고백합니다. 욥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 윤리적으로 어떻게 의롭게 살아왔다고 고백합니까? 첫째로, 욥이 죄악된 것은 쳐다보지도 않았다는 것을, “내가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어찌 처녀에게 주목하랴?”(31:1) 곧 “젊은 여인을 음탕한 눈으로 바라보지 않겠다고, 나 스스로 엄격하게 다짐하였다.”(새번역)고 고백합니다. 음욕은 행동으로 나타내지 않으면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다는 점에서, 혹이나 마음으로조차 어떠한 악한 생각도 품지 않기로 했다는 결단의 고백입니다. 욥이 “내 눈과 약속하였나니” 곧 “내 눈과 언약을 세웠나니”(개역)라고 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어떤 사소한 죄악도 등한시 하지 않겠다고 스스로의 의지적인 결정으로 결단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결단은 에덴동산에서의 첫 인류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이, 사탄이 유혹하는 말을 듣고 “여자가 그 나무를 본즉, 먹음직도 하고 보암직도 하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기도 한 나무인지라. 여자가 그 열매를 따먹고, 자기와 함께 있는 남편에게도 주매 그도 먹은지라”(창3:6)고 한 원죄적 사건의 시작이 모든 것을 바라보는 “눈”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마5:28)고 하신 말씀처럼, 위선적인 바리새인들이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것은 죄가 아니라는 변명에, 그런 마음을 품은 것 자체가 이미 죄악이라고 경고하셨던 것을 기억하면 됩니다. 둘째로, 욥은 자신이 모든 일에 정직하게 행했다는 것을 “만일 내가 허위와 함께 동행하고 내 발이 속임수에 빨랐다면,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31:5-6) 곧 “나는 맹세할 수 있다. 여태까지 나는 악한 일을 하지 않았다. 다른 사람을 속이려고도 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내 정직함을 공평한 저울로 달아 보신다면, 내게 흠이 없음을 아실 것이다.”(새번역)라고 분명하게 고백합니다. “공평한 저울”은, 인간의 행위를 어떤 편견이나 그릇됨 없이 정확히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심판대를 의미합니다. “나의 온전함”이 절대적으로 흠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상대적인 기준으로서의 온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거짓되고 위선된 생활을 한 욥을 징계한 것이라는 친구들의 정죄에 대한 반박으로서, 자신의 무죄를 입증해주실 분은 하나님 밖에 안 계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따라서 욥은 “만일 내 걸음이 길에서 떠났거나, 내 마음이 내 눈을 따랐거나, 내 손에 더러운 것이 묻었다면, 내가 심은 것을 타인이 먹으며, 나의 소출이 뿌리째 뽑히기를 바라노라”(31:7)며, 욥은 자신이 친구들이 정죄한 그런 죄악을 행했다면 마땅히 하나님이 내리신 그 어떤 징계도 받기를 거부하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욥이 이런 고백을 한 것은, 어떤 죄악적인 행동에 앞서 어떤 죄악의 생각조차 마음에 품지 않겠다고 결단(31:1)한 이유를, “그리하면 위에 계신 하나님께서 내리시는 분깃이 무엇이겠으며, 높은 곳의 전능자께서 주시는 기업이 무엇이겠느냐?”(31:2)라고 고백했습니다. 욥은 사람을 두려워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경외하는 마음 때문에 자신은 어떤 죄악도 멀리하기로 했다는 고백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은 인간의 마음을 감찰하시는 분(잠21:2)이자, 또한 징계와 심판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불의한 자에게는 환난이 아니겠느냐? 행악자에게는 불행이 아니겠느냐?”(31:3)라고 자신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셋째로, 욥은 성욕으로 이웃의 아내를 탐하지 아니하였다는 것을 “만일 내 마음이 여인에게 유혹되어, 이웃의 문을 엿보아 문에서 숨어 기다렸다면, 내 아내가 타인의 맷돌을 돌리며 타인과 더불어 동침하기를 바라노라”(31:9)고 고백합니다. 과거나 지금이나 경제적으로 부유하고 권력과 힘을 가지면 행하는 것이 음행일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욥은 단호하게 “그것은 참으로 음란한 일이니, 재판에 회부할 죄악이요”(31:11) 곧 “이는 중죄라. 재판장에게 벌 받을 악이요”(개역)라며, “멸망하도록 사르는 불이니 나의 모든 소출을 뿌리째 뽑기를 바라노라”(31:12)고 선언합니다. 이것이 단순히 간음죄만을 의미하기보다, 자신에게 주신 하나님의 번영의 축복과 힘과 권력과 지위를 가지고서 자신이 해서는 안 될 짓을 했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멸망을 자초하는 패역한 행위로서, 친구들을 향해 자신은 그렇게 살지 않았다는 항변의 고백이었습니다. 넷째로, 욥은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이 차별하지 않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대했고 그렇기에 하나님께 긍휼의 은혜를 베풀어주실 것을 암시하며, “만일 남종이나 여종이 나와 더불어 쟁론할 때에, 내가 그의 권리를 저버렸다면”(31:13) 곧 “내 남종이나 여종이 내게 탄원을 하여 올 때마다, 나는 그들이 하는 말에 귀를 기울이고, 공평하게 처리하였다.”(새번역)라고 고백합니다. 욥이 그렇게 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를 가리켜서, “하나님이 일어나실 때에 내가 어떻게 하겠느냐?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겠느냐?”(31:14)라며,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선한 의지가 무엇인가를 알기에 하나님 앞에 마땅히 행해야 할 신앙인들의 자세라는 것입니다. 이 고백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무엇보다 욥은 “나를 태속에 만드신 이가 그도 만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를 뱃속에 지으신 이가 한 분이 아니시냐?”(31:15) 곧 한마디로 “나를 창조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 내 종들도 창조하셨다.”(새번역)라고 선언합니다. 욥은 종들을 소유물로서가 아니라 인격적 존재로 대우했고,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서 종들을 자신과 같은 동등한 인격적 권리를 가진 존재로 창조하셨기 때문이라고 고백합니다. 오늘날도 쉽지 않은 놀라운 신앙 인격과 윤리 의식을 가진 욥의 자세를 어떻게 생각합니까? 2. 욥은 사회적 의를 어떻게 주장합니까? 욥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부끄러움이 없이 살아왔다는 것을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31:6)고 친구들에게 선언했습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이 단지 개인적이거나 추상적인 지식과 관념적인 신앙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하나님의 뜻에 순종했던 구체적인 사랑의 실천적인 신앙으로 살아왔음을 고백합니다. 욥은 사회적 약자인 가난한 이웃을 외면하지 않고 도움을 베풀었음을 “내가 언제 가난한 자의 소원을 막았거나, 과부의 눈으로 하여금 실망하게 하였던가? 나만 혼자 내 떡덩이를 먹고, 고아에게 그 조각을 먹이지 아니하였던가?”(31:16-17)라고 고백합니다. 이것은 사실 친구인 엘리바스가 욥이 갑작스런 재앙을 당한 이유를 가리켜서, “네 악이 크지 아니하냐? 네 죄악이 끝이 없느니라? 까닭 없이 형제를 볼모로 잡으며, 헐벗은 자의 의복을 벗기며, 목마른 자에게 물을 마시게 하지 아니하며, 주린 자에게 음식을 주지 아니하였구나!… 너는 과부를 빈손으로 돌려보내며, 고아의 팔을 꺾는구나!”(22:5-9)라고 정죄한 것에 대한 반론이었습니다. 욥이 당시 신분의 귀천이 있던 종들에 대해서 “나를 창조하신 바로 그 하나님이 내 종들도 창조하셨다.”(31:15,새번역)는 고백을 할 정도이면, 사회적 약자에 대한 어떤 차별도 할 수 없었습니다. 따라서 욥은 “실상은 내가 젊었을 때부터 고아 기르기를 그의 아비처럼 하였으며, 내가 어렸을 때부터 과부를 인도하였노라”(31:18)고 했습니다. “내가 어렸을 때부터”는, “철이 나서는”(새번역)으로 곧 자신이 기억하는 한에서는 최선을 다했다는 의미입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너는 이방 나그네를 압제하지 말며, 그들을 학대하지 말라.… 너는 과부나 고아를 해롭게 하지 말라”(출22:21-22)고 명령하면서, 그 이유를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였음이라… 네가 만일 그들을 해롭게 하므로 그들이 내게 부르짖으면, 내가 반드시 그 부르짖음을 들으리라”(출22:21,23)고 경고하셨습니다. 그런데 욥은 이 출애굽 시대도 아닌 그 이전의 아브라함 시대에 이미 이 율법의 정신을 지켰다는 것이 대단합니다. 결국 이것은 우리에게 율법이 있느냐 없느냐 이전에, 하나님의 마음과 뜻 가운데 살려는 사람은 당연히 그 마음과 뜻으로 살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이들은 다른 사람을 의식하기보다 하나님이 자신을 통해 세상과 사람들 속에 펼쳐가기 원하시는 그 마음과 뜻을 따르는 삶과 생애를 살아갑니다. 따라서 욥은 친구들이 지적한 것처럼 사회적 약자인 고아와 과부와 가난한 자를 외면하는 일을 결코 하지 않았음을, “만일 내가 사람이 의복이 없이 죽어가는 것이나 가난한 자가 덮을 것이 없는 것을 못 본 체 했다면,… 만일 나를 도와주는 자가 성문에 있음을 보고 내가 주먹을 들어 고아를 향해 휘둘렀다면”(31:19-21)이라는 가정법적인 표현으로 고백합니다. 욥은 결코 어려움에 처한 사람들을 외면하거나 인색함이 아니라 넘치도록 풍성하게 도왔고, 힘 있는 자들과 결탁해서 연약한 자를 억울하게 한 적도 없다고 선언합니다. 욥은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백성과 자녀로 부름 받은 사람이 반드시 수행해야 할 명령이자 의무가 무엇인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자신이 사회적 약자들을 소홀히 했다면, 하나님의 징계로 “내 팔이 어깨뼈에서 떨어지고, 내 팔 뼈가 그 자리에서 부스러지기를 바라노라.”(31:22)면서, 왜냐하면 “나는 하나님의 재앙을 심히 두려워하고, 그의 위엄으로 말미암아 그런 일을 할 수 없느니라”(31:23)며, “나는 차마 그런 파렴치한 짓은 할 수 없었다.”(새번역)라고 고백합니다. 3. 욥은 신앙적 의를 어떻게 주장합니까? 욥이 도덕적 사회적으로 사람들을 차별하지 않고 하나님이 창조하신 동일한 형상으로 대했다는 증언은 대단히 중요한 신앙고백입니다. 욥은 당시의 세상적인 가치관보다 인간을 향하신 영원하신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우선했기 때문입니다. 욥이 매사에 하나님을 의식하고 살았기에 자신이 저지른 죄악을 합리화할 수 없었다는 것을,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에 내가 무엇이라 대답하겠느냐?”(31:14)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살아온 욥이 자신의 신앙적 의를 어떻게 증언합니까? 첫째로, 욥은 신앙적으로 오직 하나님을 의지했지 재물을 의지하지 않았음을, “만일 내가 내 소망을 금에다 두고, 순금에게 너는 내 의뢰하는 바라 하였다면, 만일 재물의 풍부함과 손으로 얻은 것이 많음으로 기뻐하였다면”(31:24-25)이라고 고백합니다. 욥은 하나님의 은혜로 물질의 축복을 누렸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물질에 대한 탐욕이나 안일과 향락에 빠지지 않았고, 또 이웃의 고난을 외면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내가 재산이 많다고 하여 자랑하지도 않고, 벌어들인 것이 많다고 하여 기뻐하지도 않았다.”(31:25,새번역)고 함으로써, 결코 하나님의 선한 청지기의 사명을 잊지 않고 물질에 마음을 빼앗겨 이웃이나 하나님을 대적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욥은 신앙적으로 하나님이 아닌 해와 달과 별을 경배하는 우상숭배를 행하지 않았음을, “만일 해가 빛남과 달이 밝게 뜬 것을 보고, 내 마음이 슬며시 유혹되어 내 손에 입 맞추었다면, 그것도 재판에 회부할 죄악이니, 내가 그리하였으면 위에 계신 하나님을 속이는 것이리라”(31:26-28)고 고백합니다. “내 손에 입 맞추었다면”은, 해와 달과 별이 멀리 있기에 자신의 손에 입맞춤을 함으로써 존경과 경의를 표현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셋째로, 욥은 신앙적으로 원수를 적대하거나 증오하지 않았음을, “내가 언제 나를 미워하는 자의 멸망을 기뻐하고, 그가 재난을 당함으로 즐거워하였던가? 실상은 나는 그가 죽기를 구하는 말로, 그의 생명을 저주하여 내 입이 범죄하게 하지 아니하였노라”(31:29-30)고 고백합니다. 고대에는 원수를 파멸시키는 것이 자기 영광이었습니다. 또한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에게 하나님은 원한을 무한정 갚지 말고 당한 만큼으로 끝낼 것을, “생명은 생명으로,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덴 것은 덴 것으로, 상하게 한 것은 상함으로, 때린 것은 때림으로 갚을지니라”(출21:23-25)고 하는 동해보복법(同害報復法)을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욥의 신앙은 이 차원을 뛰어넘는 신약적인 차원의 신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마5:43-45)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넷째로, 욥은 낮은 자들과 나그네들을 환대했음을, “내 장막 사람들은 주인의 고기에 배부르지 않은 자가 어디 있느뇨 하지 아니하였는가? 실상은 나그네가 거리에서 자지 아니하도록, 나는 행인에게 내 문을 열어 주었노라”(31:31-32)고 고백합니다. “내 장막 사람들”은, 욥의 집에서 일하는 이들과 또 욥의 집에 들어온 모든 이들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과거 애굽에서 힘들던 종살이에서 구원받은 것을 기억하여, 사람들에게 권위적인 자세를 버리고 연약한 자들을 돌볼 것을, “너희는 마음에 할례를 행하고, 다시는 목을 곧게 하지 말라.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사람을 외모로 보지 아니하시며, 뇌물을 받지 아니하시고, 고아와 과부를 위하여 정의를 행하시며, 나그네를 사랑하여 그에게 떡과 옷을 주시나니, 너희는 나그네를 사랑하라. 전에 너희도 애굽 땅에서 나그네 되었음이니라”(신10:16-19)고 명령했습니다. 놀랍게도 욥은 이러한 율법적 명령이 주어지기 전에 이미 그렇게 살아갔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게 되면 누가 가르쳐주지 않더라도, 이미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하는지를 성령의 감동으로 알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다섯째로, 욥은 신앙적으로 하나님과 사람 앞에 자신의 죄를 감추는 위선을 행치 않는 삶을 살았음을, “내가 언제 다른 사람처럼 내 악행을 숨긴 일이 있거나, 나의 죄악을 나의 품에 감추었으며, 내가 언제 큰 무리와 여러 종족의 수모가 두려워서 대문 밖으로 나가지 못하고 잠잠하였던가?”(31:33-34)라고 고백합니다. 결국 욥은 이러한 자기 결백의 주장을 통하여, 친구들에게 자신들이 보지도 않은 것을 가지고 욥이 죄악을 행했기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재앙을 당했을 것이라고 추측하는 막연한 인과 응보적인 논리로, 욥을 정죄하는 공격을 멈춰달라는 당부이기도 했습니다. 따라서 욥은 이제 자신의 최종적인 변론의 결론을 “누구든지 나의 변명을 들어다오. 나의 서명이 여기 있으니, 전능자가 내게 대답하시기를 바라노라. 나를 고발하는 자가 있다면, 그에게 고소장을 쓰게 하라. 내가 그것을 어깨에 메기도 하고, 왕관처럼 머리에 쓰기도 하리라”(31:35-36) 곧 “내가 한 이 변명을 들어줄 사람이 없을까? 맹세코 나는 사실대로만 말하였다. 이제는, 전능하신 분께서 말씀하시는 대답을 듣고 싶다. 내 원수가 나를 고발하면서, 뭐라고 말하였지? 내가 저지른 죄과를 기록한 소송장이라도 있어서, 내가 읽어 볼 수만 있다면, 나는 그것을 자랑스럽게 어깨에 메고 다니고, 그것을 왕관처럼 머리에 얹고 다니겠다.”(새번역)라고 호소합니다. 욥은 친구들에게 그들이 지목한 죄악을 고발한 “고소장”을 찾기라도 한다면 그것을 자랑해보이겠다며, 철저한 자기 결백을 주장합니다. 이것이 욥이 자신의 절대적 의를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들이 욥을 정죄한 죄목에 대한 반론이라는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욥은 친구들의 정죄에 대한 자신의 억울함을 호소한 것으로서, 자신의 모든 삶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신앙적으로 떳떳했음을 “내 걸음의 수효를 그에게 알리고, 왕족처럼 그를 가까이 하였으리라”(31:37) 곧 “나는, 내가 한 모든 일을 그분께 낱낱이 말씀드리고 나서, 그분 앞에 떳떳이 서겠다.”(새번역)라고 고백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욥이 “하나님께서 나를 공평한 저울에 달아보시고, 그가 나의 온전함을 아시기를 바라노라”(31:6)고 탄식하며 호소했던 욥의 심정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놀랍게도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무의식적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정면에서 정죄하고 난도질하는 참혹한 일을 저지를 때가 많습니다. 욥은 결코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절대적으로 의롭다는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최소한 친구들이 주장하는 그런 죄악만큼은 추호도 지은 적이 없다는 항변입니다. 우리는 어떤 사람이 겪는 어려움을 가지고, 욥의 세 친구들처럼 인과 응보론적인 편협한 신앙으로 함부로 단죄하지 않습니까? 욥은 마지막으로, 자신은 사람들이나 심지어 자신이 농사짓는 땅과 소작농으로부터도 착취하거나 인색하게 굴지 않고 살았음을, “만일 내 밭이 나를 향하여 부르짖고, 밭이랑이 함께 울었다면, 만일 내가 값을 내지 않고 그 소출을 먹고, 그 소유주가 생명을 잃게 하였다면”(31:38) 곧 “내가 가꾼 땅이 훔친 것이라면, 땅 주인에게서 부당하게 빼앗은 것이라면, 땅에서 나는 소산을 공짜로 먹으면서 곡식을 기른 농부를 굶겨 죽였다면”(새번역)이라며, 만약 자신이 그렇게 행했다면 “밀 대신에 가시나무가 나고, 보리 대신에 독보리가 나는 것이 마땅하니라”(31:40)고 했습니다. 욥은 참으로 재앙을 당한 것도 힘든데, 죄인으로 정죄하는 친구들의 충고가 더 힘들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마지막 말을 마치면서 “욥의 말이 그치니라”(31:40)고 함으로써, 욥의 모든 변론이 끝났음을 나타냅니다. 사도 바울이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갈6:7)고 한 경고처럼, 하나님의 섭리 중에는 분명 인과응보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모든 상황에 적용한다거나,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을, 하나님은 또한 경계합니다. 따라서 야고보 선생은 “내 형제들아, 너희는 선생된 우리가 더 큰 심판을 받을 줄 알고 선생이 많이 되지 말라. 우리가 다 실수가 많으니, 만일 말에 실수가 없는 자라면 곧 온전한 사람이라.…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3:12,8)고 경고한 의미를 깨닫는 이들이 복됩니다. 우리는 문자적인 율법적 신앙에 머무는 이들이 아니라, 욥처럼 오직 하나님을 사랑함으로써 율법의 정신을 깨닫고 율법을 뛰어넘는 하나님의 마음과 뜻을 실현해가는 복음적 신앙의 사람들로 자라가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