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약 신학, 그 구속사의 허위(虛僞)"라는 제목을 써 놓고 보니
성경에 대한 일필휘지의 필력이 검증의 시험대에 올랐습니다.
구속사는 편협한 성경 이해라고 비판할 수 있는 사람은
장일선의 주제별 신학에서나 가능할 것입니다.
언약 신학, 그 구속사의 허위(虛僞)는 성경과 기독교의 안티적 이해요,
그것도 사탄의 계략 , 그 악마의 한 수로 오해할 수도 있습니다..
개혁주의 신학의 골격인 구속사적 언약 신학은
개혁주의 신학자와 그 신학도, 그리고 사역자의 가장 올바른 성경 이해라는 보람이요, 자긍심일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렇게 언약 신학, 그 구속사의 허위(虛僞)라는 제목의 글을 쓰는 것은
섶을 안고 불에 뛰어드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약처방의 위험한 제목의 글을 쓰는 것은
이것이 성경을 이해하는 성경지대의 에베레스트, 그 최정상이기 때문입니다.
성서의 절곡, 그 상그릴라의 주상 절리를 향한 등정은
정상에 오르지 못하면 그 높이 솟은 낭뜨러지에 추락할 것입니다.
성서지대의 산맥, 그 수 많은 봉우리 가운데
언약 신학, 그 구속사의 허위라는 제목의 글은 최고의 봉우리가 될 것입니다.
땅을 짚고 헤엄치는 얕은 성경 이해로는
환상의 에루살렘과 소통하다가 흰놈의 골짜기를 지나다가 몰렉의 제물이 될 것입니다.
성서지대의 난맥, 그 난제를 극복하다보면
난맥의 절봉에서 평탄한 길에서는 전혀 보지 못하였던 피안의 세계를 엿볼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언약과 구속사에 대한 연구는
성경 이해의 최정상으로 연구하였습니다.
언약과 구속사에 대한 완전한 이해는
언약 신학, 그 구속사의 허위라는 양날의 칼잡이가 되었습니다.
장점을 알고 단점에 대한 이해는
정상의 봉우리가 보다 깊은 절곡을 가진 것과 같습니다.
낮은 봉우리는 절곡이 없지만
높은 봉우리일수록 깎아지른 절벽을 가졌습니다.
신학의 가장 큰 적은 성경이요, 성경의 가장 큰 적은 신학이라는 이율배반적인 이해는
그 첨예한 대립과 갈등의 모순 떄문일 것입니다.
이것이 성경적이다는 이해는
곧 이현령비현령의 아전인수식 성경이해와 젖가락 두 짝입니다.
성서지대의 대립과 그 갈등 구조는
하나님의 선한 말씀으로서의 율법, 그 저주 위에 선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게 합니다.
성서지대의 대립과 갈등 구조에 대한 풀무의 학습이 되지 않으면
율법의 저주, 그 위에 선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해불가의 불가사이일 것입니다.
사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율법의 저주로 말미암아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고난과 부활의 영광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예수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명제가 성립하기 위해서
언약 신학, 그 구속사의 허위라는 개념을 밟고 넘어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성경에 대한 말씀의 지력이 없으면
그 얕은 상식으로 나사렛 예수 이단의 괴수로 몰아 세울 것입니다.
구속사적 언약 신학의 실상인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과정은
죽은 자의 십일조와 산 자의 믿음에 대한 히브리서의 관문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도 바울은
소위 말하는 언약 신학, 그 구속사의 허위를 땅에 속한 하갈 언약이라고 치부해 버렸습니다.
사도 바울의 최고 단계의 복음 이해는
모세의 율법에 뿌리를 둔 언약 신학, 그 구속사의 허위를 하갈의 언약으로 땅에 묻었습니다.
땅에 속한 하갈의 언약은 모세의 율법이요,
그 시내산 언약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구속사의 의미를 완전 짓뭉개버렸습니다.
결과적으로 구속사적 언약 신학은 구약 시대의 율법처럼
한국 교회를 비롯한 세계 기독교의 역사를 이단과 시이비의 사슬이 되게 하였습니다.
모세의 율법, 곧 시내산 언약을 땅에 속한 하갈 언약이라고 치부한 바울의 시선을 갖는다면
동방 교회와 로만 카톨릭을 비롯한 개신교의 역사는 언약 신학,
그 구속사의 허위에 속하는 티끌이요 검불일 수 밖에 없습니다.
사도 바울이 삼년 동안 눈물로 훈계하였던 에베소 교회를 떠난 자리는
양떼를 아끼지 않는 삯꾼의 무법천지가 되었고 그 난장판은 그대로 기독교 역사가 되었습니다.
☞ 내가 떠난 후에 사나운 이리가 여러분에게 들어와서 그 양 떼를 아끼지 아니하며
또한 여러분 중에서도 제자들을 끌어 자기를 따르게 하려고
어그러진 말을 하는 사람들이 일어날 줄을 내가 아노라
그러므로 여러분이 일께어 내가 삼 년이나 밤낮 쉬지 않고
눈물로 각 사람을 훈계하던 것을 기억하라(행20:29-31)
바울이 떠난 자리는 바울의 복음과 그 사역 정신이 사라졌으며
양떼를 아끼지 않는 탐욕의 목장은 다른 복음, 다른 예수, 다른 영을 전하는 사이비의 온상이 되었으며
그것의 연장은 곧 기독교 역사의 걸레가 되었습니다.
모세의 율법이 이스라엘의 역사를 움직이는 동력이었다면
신약시대 기독교 역사의 동력은 언약 신학을 포함한 그 모든 신학일 것입니다.
어쩌면 히브리서의 말씀인 멜기세덱의 반차를 쫓아 대제사장이신 믿음의 주에 대한 이해와
모세의 율법을 하갈 언약으로 치부한 바울의 이해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복음적 이해일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언약을 사라 언약과 하갈 언약으로 구별한 바울의 알레고리는
모세의 율법을 땅에 속한 하갈 언약이요,
사라의 언약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하늘의 새 예루살렘,
그 실상을 낳은 우리의 어머니라고 하였습니다.
바울의 율법과 성령에 대한 최종 이해는
바알을 여호와로 섬기는 타락한 하나님 나라의 신약 시대를 절대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율법과 선지자의 증거로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복음 이해는
언약 신학, 그 구속사의 허위를 역사적 과정의 모순으로 이해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역사적으로 아브라함의 언약은 애굽의 이스라엘을 낳았고
모세의 율법, 곧 시내산 언약은 다른 세대의 가나안 땅의 이스라엘을 낳았습니다.
다윗 언약은 혈통적으로
애굽 왕 바로에게 임한 여호와의 말씀도 이해하지 못하는 요시야의 므깃도 전투는
그의 죽음으로 사실상 단절되었습니다.
실로의 성막은 사무엘 시대에 무용지물이 되었고
솔로몬의 성전은 이사야 시대에 소의 제물은 살인이요, 양의 제물은 개의 목을 꺾음이요,
예물은 돼지의 피와 같고 분향은 우상을 찬양함이다는 말씀으로 사실상 끝이 났습니다.
게다가 예레미야의 확인 사살로 여호와의 전은 도적의 소굴이라는 말씀으로
바알의 전당이 된 성전은 이스라엘의 멸망과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그 후 바벨론의 귀환과 스룹 바벨 성전의 재건은
말라기 시대 레위 언약의 파괴로 하나님의 영광이 완전히 떠나고
유적으로 남은 성전은 헬라 시대와 로마 시대로 연장되었습니다.
하늘의 온전한 장막으로 이 땅에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보좌의 기초요,
하나님의 거하시는 영원한 성전으로 주 예수를 믿는 성도는 그 성령의 전이 되었습니다.
이렇게 완성된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언약 신학, 그 구속사의 허위라는 모순을 더 이상 용납하지 않습니다.
여자의 후손 사라의 언약에 대한 바울의 완성된 이해는
율법과 선지자의 증거로 오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완전한 복음의 이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언약 신학의 구속사적인 맥은 성경 연구의 산물인 개혁주의 위대한 신학이지만
완전한 성경 이해의 율법적 대립과 갈등 구조의 그 대척지점에 지나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갈 언약의 종의 멍에는 시내산 언약의 율법적 배반으로 말미암은
광야의 성막과 실로의 성막과 솔로몬의 성전과 스룹바벨의 성전 등
이스라엘의 멸망, 그 사망의 줄이 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바울의 완전한 복음의 이해는
종의 멍에를 메게한 모세 율법의 하갈 언약뿐만 아니라 복음서의 증거를 초월하였습니다.
바울 서신 가운데 복음서의 검증을 받은 바 없고
또 복음서를 인용한 적도 없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의 완전한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였습니다.
바울의 복음 이해는
언약 신학과 구속사의 틀에 전혀 메이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구원의 역사(役事)를 이루지만
구속사라는 신학에 갇혀있지 않습니다.
결과적으로 언약 신학의 구속사적 이해는
언약에 대한 과정 신학의 알레고리라는 허위에 대한 깊은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철없는 신학도는 개혁주의 신학의 놀이터가 마냥 즐겁겠지만
구속사적 언약 신학의 허위라는 갈등은 깨어 있는 개혁주의 신학자의 성경적 깊은 고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지대, 그 언약의 맥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役事)로는 흐르지만
구속사의 강은 실개천과 같은 와디에 지나지않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役事)와 구속사를 구별하지 않는 비극은
구속사의 아전인수라는 알레고리의 늪에 빠졌습니다.
언약의 정점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役事)를 이루는 동력이지만
구속사의 지대는 몇 백년의 세월이라는 황폐로만 역사의 흔적으로 남았습니다.
남은 자의 그루터기는 하나님의 구원(役事) 역사의 뿌리이지만
구속사의 폐허는 짐승의 거처와 승냥이의 소굴이 되었습니다.
구속사적 관점의 성경이해는
성경적인 최상의 성경 이해같지만 율법주의의 또 다른 패턴일 뿐입니다.
성경지대의 인물 가운데 하나님의 구원 역사를 구속사로 이해한 사람이 없고
오히려 구속의 역사가 끊어진 심판에 대한 참담한 심정을 신탁을 남겼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役事)에 구속사의 옷을 입히면 실로의 성소 파괴는 솔로몬의 성전을 위한 제물이요,
솔로몬 성전의 파괴는 이방 구원의 제물이라는 몰렉의 광장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의 역사(役事)를 구속사로 궤면......
종말론적인 성경의 궤변, 음모론적 사관에 빠질 수 밖에 없습니다.
언약의 맥이 흐르는 구속사의 강은
영적 알레고리의 허상이라는 허위의 상그릴라 주상절리가 될 것입니다.
구속사적 관점의 설교, 그 실상은
심층 구조 분석과 표층 구조 분석의 옷을 입혀 오브라의 기드온 집에 있는 에봇을 만들었습니다.
구속사적 설교의 알레고리와 그 메타포는
이단과 사이비 종교의 시스템을 위한 사탕발린 설교의 현주소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役事)와 구속사를 구별하지 않는 비극은
성경을 음모론의 사각지대로 만들어 구속사적 관점의 설교라는 명목의 사이비 온상을 만들었습니다.
성서의 지대는 양떼의 목장 그대로이지만
신학과 그 설교는 평온한 양떼의 목장에 나타난 이리의 무법천지가 되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올바른 믿음은 그 대상에 대한 순전한 믿음이지만
성경을 오브라에 있는 기드온 집의 황금 에봇을 섬기는 신념의 이데올로기,
그 우상을 섬기는 인본주의 믿음은 허위입니다.
정통과 이단 모두가 신봉하는 언약 신학과 구속사는 사이비의 늪이요,
성서지대의 정상을 향한 위대한 도전이지만 그 영적 상그릴라의 주상절리는 허상입니다.
언약 신학과 그 구속사는 이단과 사이비의 옷이 되어
성경을 음모론의 사각지대로 몰아 그리스도의 구속을 농단하는 무속의 칼춤을 추고 있습니다.
이렇게 성서지대의 절봉에 올라서고 보니
하늘이 가깝고 성서지대의 산맥과 수 천 봉우리가 한 눈에 들어 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