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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만 리 한반도 둘레길 전설의 백두령 길..............
남백두 아래 첫 동네 장백현에서 새벽을 맞이한다. 장백현은 해발고도 1.000m 넘는 고지대에 자리한
압록강 최상류 국경도시며 연변 조선족 자치주에서 따로 독립된 북간도 유일의 조선족 자치현이다.
자치현을 유지하려면 일정 인구가 충족돼야 하는데 조선족 인구 감소로 현재 장백현 조선족 자치현이 위기에 처했다...
새벽 일찍 숙소를 나서자 간밤에 내린 많은 눈이 쌓여있고 지금도 눈보라가 세차게 날린다
백두산 고 지대라는 것이 실감 난다.
압록강변 한 곳에 북한과 물물교환 형태의 번개시장이 열린다는 정보를 듣고 찾아갔으나 많은 눈으로
오늘 장이 열리지 않는다고 한다 숙소 맞은편에 문이 열린 새벽식당으로 들어간다
중화식 찬과 밥, 만두 등 깨죽, 팥죽, 녹두죽, 강냉이죽 등 여러 가지 음식들이 뷔페식으로 차려져 있다.
강냉이 죽을 퍼 담는다. 60년대 학교급식으로 받던 노란 강냉이빵에 대한 아련한 추억이다, 맛이 괜찮다,
두 그릇을 비우고
돈을 건네자 받지 않는다, 죽 종류는 무한 리필에 1원인데 받기 그렇다고 한다.
1원은 우리 돈 160원 정도다.
산골사람들의 포근한 인심이다. 고맙습니다. 우리 일행들이 일어나면 다시 오겠다.
잠시 후 우리 팀 일부가 식당에 모여들어 왕성한 식성을 갖고 갖가지 음식을 퍼 담는다, 찐빵. 만두, 녹두죽, 깨죽등 맛이
다 괜찮다며 모두가 많은 종류를 먹었는데 1인 3~4원 정도다, 한국의 새벽 식당 10분의 1 정도의 가격이다.
인민들의 저렴한 식생활 물가가 중국 경제성장을 견인하는 동력으로 보인다.
많은 눈이 내리고 있으나 오늘도 일정을 따라 또 가야 한다. 8시경 숙소를 출발한다.
도로변 간판 상호 대부분 한글로 표기돼 있고 한글 아래 한자가 적혀 있다, 조선족 자치현으로 한글은 의무적이라고 한다
우리 남쪽의 시골 읍내 같은 분위기로 한반도 선구자들이 대륙에서 일궈낸 한글이라 더 값지게 다가온다
잠시 도심을 빠져나오자 개천 정도의 압록강 최상류 부근이다, 백두산 계곡의 많은 지류들이 이곳 가까운 상류
지점에서 하나식 합류해 압록강 물줄기가 시작된다. 강 건너편은 북한의 군사도시 혜산시다.
혜산 시가지에는 현대식 건물은 보이지 않는다 대부분 판잣집 같은 허름한 가옥들로 간밤에 내린 많은 눈이 지붕을
하얗게 덮고 잇다. 6~70년대 당시 강원도 탄광촌을 연상케 한다. 상류 강변길을 따라 약 300m 지점 좌측으로 왕복 2차선 포장도로가
나오는데 이곳이 백두산 횡단도로 시발점으로 북백두까지 600리(233km)다, 북녘의 동백두 삼지현까지
연결되면 백두산 둘레는 1.000리가 넘는 엄청난 거리다, 히말라야보다 넓고 세계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
산이라는 개 실감 나게 다가온다.
이곳 강변 전 지역이 사진촬영 금지구역으로 여행객들은 늘 조심해야 한다.
뜻하지 않는 봉변을 당할 수 있다.
혜
횡단도로 초입에 접어들자 눈발은 더 세차게 날리고 간밤에 내린 많은 눈이 쌓여 도로와 인도를 구분할 수 없게 하고 있다...
우측 산비탈이 백두산 남쪽 끝자락이며 백두산 최고봉 장군봉이 이곳 가까운 곳에 있다.
장군봉에서 발원된 백두대간의 산줄기는 지리산 천왕봉까지 뻗어 내렸는데
온갖 동물들이 대간을 타고 백두에서 지리까지 한반도 구석구석을 자유롭게 넘나들었다/
해방 이후에는 남로당 빨치산들이 주 이동 통로로 이용했던 빨갱이들의 길이다, 지금 남쪽의 백두 대간은 생태계를 침범한
인간들의 발길로 온 대간이 반들반들하다. 산 사람도 호랑이도 떠난 지 오래다.
토끼 몇 마리 살아남아 대간을 찾는 인간들과 함께 겨우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장백현을 출발해 한 시간여 지나 남백두 삼거리(해발고도 1200m)에 도착한다. 삼거리 우측 길이 남백두
산문 초입으로 산문까지는 16km며 산문에서 4호 경계비 천지 전망대까지는 30km다.
이곳에서 더 이상 입산할 수 없다. 어젯밤 장백현에서 얻어들은 정보다. 남백두에는 겨우 내 찾는 사람이 없어 산문이 열리지 않으며
제설 작업도 하지 않는다며. 찾는 사람이 있어야 제설 작업도 할 것 아니냐며 반문한다.
이곳 삼거리에서 송강하 까지 300여 리 남은 지점으로. 통행 차량은 거의 없다 두께를 가늠할 수 없는 빙판길을
차는 시속 60 km가 넘고 있다.
상당히 위험할 것 같지만 현지 눈길에 잘 적응된 기사는 스노타이어만으로 별 탈 없이 잘 운행하고 있다.
언덕과 절벽이 없고. 대부분 평지길이며 차가 미끄러져도 도로변에 쌓인 눈이나 나무들이 완충 역할을 해준다.
우리는 지금 차가 미끄러지는 것을 오히려 즐기고 있다.
백두령
삼거리에서 20여 분 지나 백두정간의 첫 고개 백두령(해발고도 1776m)을 넘고 있다,
설악산 대청봉(1708m) 보다 높은 고개를 넘고 있지만 고개라는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한다.
백두령은 백두산에서 뻗어 내린 모든 산줄기 고개에서 가장 높은 고개다.
한반도 남쪽의 백두대간에서 가장 높은 고개는 설악산 한계령으로 해발고도 1004m다.
백두정간의 산줄기는 서백두와 남백두 사이 능선에서 발원되고 장백현에서 압록강을 따라 남쪽으로 약 800km를
뻗어 내려, 어적도와 마주한 고구려 박작성에서 그 맥을 다 한다.
백두정간에는 혜산에서 북간도를 넘는 이곳 백두령과 임강에서 백산시로
넘는 중갈령 국내성에서 퉁화시로 넘는 국내령. 관전현에서 환인 졸본성으로 넘는 고려령등 4개의 고개가 전부다
남쪽의 백두대간(800km)은 백두정간의 길이와 비슷하다, 백두대간은 백두산 장군봉에서 발원돼 남쪽으로 치닫는데.
한반도를 동서로 가르며 지리산 천왕봉까지 길게 뻗어 내렸고 사람이 다니는 고개는 한계령을 비롯 56개가 있다.
휴전선 부근 향로봉에서 시작되는 남쪽의 백두대간은 가장 먼저 진부령이 솟았고
미시령. 한계령. 구룡령. 선자령, 대관령, 죽령, 이화령, 추풍령, 육십령 등을 지나 백두대간의 마지막 고개. 지리산을 동서로
갈라놓은 벽소령을 넘고 천왕봉까지 약 800 km에 달한다 북한 구간까지 합치면 백두대간의 산줄기는
4.000리(1600km)가 넘고 고개는 100개 넘는다,
조선 민초들이 대륙을 넘나들던 전설의 고개 백두령, 중강령, 국내령, 고려령 등 4개가 전부다..
백두령 정상 부근 전방에서 백두산 호랑이를 대신하듯 승용차 한 대가 나타난다. 우리 팀을 마중 오듯
라이트를 깜빡인다. 호랑이 눈 같다. 호랑이 없으니 조심히 가라는 신호다. 중국 공안 차댜
중국 오지 치안상태가 생각 이상 안정돼 있어 보인다.
백두령 정상 부근에 눈보라가 더 세차게 날린다, 차를 잠시 멈추게 하고 눈보라 속 겨울
백두산 정취에 취해본다. 백두산에서 많은 눈을 만나는 것도 쉽지 않은 행운이다. 한반도 본토 주인들을 반기듯
무궁화 꽃송이만 한 함박눈이 꽃처럼 쏟아진다, 전설의 백두령 고개 눈보라 속을 걸으며 한 한 세기 전을 떠올려본다
당시 함경도 혜산에서
북간도를 넘나들던 유일한 길로 전설의 고개다. 장백현에서 송강하까지 400리가 넘는 길. 지금도 민가가 없다. 한 세기 전 당시에는
원시림 그대로 열악한 산길로 백두산 호랑이 수백 마리가 백두산 전역에 서식하고 있어 사람들의 희생도 따랐을 것이다.
지금도 백두산에는 호랑이 20여 마리 서식하고 있다고 중국 측은 밝히고 있다. 지난달 눈보라 속 밀림지대에서 어미 호랑이가
세끼 2마리를 데리고 먹잇감을 찾아 헤매다 동물의 사체를 물고 세끼들과 함께 사라지는 모습이 중국 측 CC 카메라에
포착되고. 중국 측은 다음 날 사슴 수십 마리를 헬기로 공수해. 호랑이 주변에 풀었다고 한다
백두산 호랑이는 현재 세계 멸종 위기 동물로 보호되고 있으며. 중국도 현재 백두산 호랑이 보호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
백두령
2차 5월
장백현을 출발해. 남백두 입구 삼거리(해발고도 1200m)를 지나 남백두 산문에 도착한다.
산문에서 미니 승합차를 타고 20여 분 후 우측에 압록강 대협곡이 북. 중 국경을 이루고 있는데.
안전을 이유로 차는 세워주지 않는다.
동승한 경호 군인과 차량 기사들이 키를 쥐고 있다. 이들을 움직이는 것은 인솔자나 탑승자들의 테크닉이다.
남백두를 찾는 우리 여행객 대다수가 이곳을 압록강 발원지로 잘못 알고 돌아오는데 여기에는 조선족 가이드들의
역할이 컸다.
지금도 이들은 한국 여행객들에게 아니면 말고식의 이곳이 압록강 발원지라고 소개하며 혼란을 부추기고 있다.
압록강 대협곡의 물줄기는 남백두 관면봉(2525m)과 와호봉(2549m) 사이 남쪽 산기슭 물줄기들이 이곳 협곡으로
흘러들어 북, 중 국경 라인을 을 따라 70km 이상 더 흘러가 장백현 못 미쳐 압록강 발원지에서 흘러오는 물줄기와 합류한다.
압록강 대협곡의 물줄기는 백두산 계곡 등에서 흘러오는 압록강의 많은 지류 중 한 줄기일 뿐이다
산문에서 30여 분이면 4호 경계비 천지 전망대에 도착한다.
4호 경계비를 중심으로 우측 와호봉과 좌측 관면봉 양 봉우리 사이 안부에 4호 경계비가 자리하고 있다.
4호 경계비 정상 부위 전체는 한반도 영토다, 4호 경계비에서 정상 능선을 따라 서백두 5호 경계비까지 일직선 형태의
가늘푼 줄로 쳐놓은 것이 현재 한반도 국경 라인이다
국경 라인을 중심으로 우측 정상 부분과 천지절벽 부분이 한반도영토며. 좌측 산기슭 전체는 현재 중국 영토에 속하는데.
중국 측은 북녘땅 4호 경계비 정상부근의 능선 일정 부분을 북한으로부터 임대받아 천지 전망대로 개방한 것이다.
서백두 5호 경계비 우측 공간도 같은 이치다.
몇 해 전 5호 경계비나 이곳에서 북한의 어린 초병들을 만날 수 있었는데 2013년 들어 철수하고
없다. 당시 굶주린 어린 초병들이 운무에 가려진 틈을 타 여행객들의 배낭을 낚아채 국경을 넘어 달아나던
황당한 일이 벌어지곤 했다. 지금 여행객들에게 가장 큰 부담은 입산경비다. 2015년 여름시즌부터 중국 측 백두산 관리
위원회 측이 지정한 현지여행사 소속 가이드의 안내와 신변 위험을 이유로 중국 인민군들의 밀착경호를 받아야 입산이 가능하다.
가이드와 인민군들의 경호 등을 포함해 1인 입산경비가 20만 원 넘게 소요된다.
히말라야나 알프스 등 세계적 추세로 보면 비싼 요금은 아니나 국내 산 무료입장에 익숙한 우리 남쪽
여행객들에게는 큰 부담이다.
압록강 대협곡
4호 경계비 자리에 올라서면 우측 정면에 천지가 펼쳐지고 우측 첫째 봉우리가 와호봉. 두 번째 봉우리가 제비봉.
해발봉으로 네 번째 봉우리가 백두산 최고봉 장군봉이다. 직선거리 2km 남짓 손에 잡힐 듯 장군봉이
선명하게 시야에 들어온다.
장군봉은 본래 병사봉이다. 광복 이후 백두혈통을 내세운 김일성 장군 우상화 작업의 일환으로 북한에서
발행되는 모든 지도에서 장군봉으로 표기됐고 이후 장군봉으로 정착했다.
남쪽의 월출산 등 백두대간에서 독립된 몇 개의 작은 산을 제외하고는 한반도의 모든 산줄기는 백두산과
거미줄처럼 연결돼 있고
한반도 어디서 던 백두산 에너지가 넘치고 우리 국민 전체가 백두 혈통이다, 북한의 양강도와 함경도는 백두대간의 뿌리에
해당되고 평안도와 강원도는 원둥치에 해당된다, 경상도와 호남 지역은 가지 끝자락이다,
가지 끝에 열매가 달리는 것이 자연의 이치로 이것이 한반도 남쪽에서 수많은 인재들이 탄생하는 이유다.
앞으로 세계를 움직이는 많은 위인들이 한반도에서 더 많이 나올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넓은 면적을 차지한 산이 백두산이다. 백두산은 지구에서 가장 많은 에너지를 쏱아내고 있다.
그러나 아쉬움이 있다. 남쪽의 백두대간과 정맥 지맥 등 많은 곳에서 현재 도로가 가로질러 대부분 맥을 끊어 놓은 상태다.
산업화 과정에서
무분별한 개발의 대가다. 대표적 추풍령은 경부 고속도로가 백두대간을 남북으로 반으로 갈라놓았고
기(氣)가 넘치는 진영 봉하산(140m)은 백두대간 낙남정맥의 끝자락이나 남해 고속도로가 맥을 끊어놓아 백두대간에서;
독립된 나 홀로 산이다.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은 이순신 같은 영웅들이 다시는 한반도에 태어나지 못하게 한다며 백두대간의 중요지점
곳곳에 쇠말뚝을
박고 힘이 넘치는 백두대간의 기(氣)를 다 끊어 놓은 지난 역사가 있었다. 70년대 후반 당시 전국 산악인들이 중심이 돼
쇠말뚝 뽑기 운동이 있었고 당시 백두대간에 박힌 쇠말뚝 대부분 제거됐다.
이제 정부가 훼손된 생태계를 원상 복구해야 한다.
최소한의 여유 있는 생태계 이동 공간부터 전 구간에 설치해
백두대간을 자연에 돌려주고 여우도 늑대도 호랑이도 돌아와 산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져 사는 한반도,
기(氣)가 넘치는 한반도의 백두대간을. 다음 세대에 유산으로 남겨야 할 지금 세대의 의무가 있다.
또 한국 전력공사에서 백두대간 등 개인소유 임야에 까지 산업화 당시 내로남불식 심어둔
고압철탑은 반드시 철거되야 한다. 당시 이들은 국유지나 사유지에 한 푼의 보상도 없이 전국토에 철탑을 심고
백두대간의
긍정적
기(氣)를 다 끊어 놓고 국민들의 조망권을 해치고 고압의 전류는 또 국민들의 건강을 위험하고 재산권을 침해하고 있으나
눈감은 민초들은 다 부처님이다. 90년대 들어 통신 회사도 한몫 거들었다,
왜구들이 심어놓은 쇠말뚝은 기(氣)를 끊는 것이며 자신들이 심은 것은 산업화다.
백두산정계비
조선과 청나라 간의 국경 완충 역할을 하던 백두산에서 1685년(숙종 11) 백두산을 답사하던 청나라 관리들이
조선 심마니들의 습격을 당해 살해되는 등 당시 양국 민초들의 월강 침입이 자주 일어났고 때로는 수십 명식
강을 건너 다니며 관원과 군인들을 납치하는 일들이 빈번히 일어났다. 국경이 명확하지 않던 백두산 자락에서
매번 사고가 잇따르자 청나라에서 먼저 이의를 제기하고 국경을 명확히 하기 위해 조선에 칙사를 보낸다.
1712년(숙종 38) 5월 초순 함경도 혜산에 목극등이 청나라 강희재의 명을 받고 국경 문제를 들고 나타난다.
조선은 접대사 박권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보가 이들을 맞이했고 양국 대표들은 혜산에서 삼지연을 거쳐
200(81km)리가 넘는 험준한 산길을 걸어올라 10여 일이 걸려 백두산 장군봉에 올라선다.
이때 박권과 이선보는 고령의 이유로 같이 오르지 못했고 이들을 대신해 순찰사 이의복 군관 조태상 등
6명이 목극등과 함께 장군봉에서 살펴보고 물줄기를 따라 현지 답사한 결과
조, 청 국경은 서쪽은 압록강 물줄기가 되고 동쪽은 토문강(土門) 물줄기가 된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양국 대표는 양 강의 물줄기를 조. 청 국경으로 한다는데 합의했고 후일을 기해 그 내용을 돌에 새겨
양강의 발원지 분수령에 국경비를 세우기로 합의한다.
장군봉에서 동남쪽 약 4km 내린 지점(해발 2200m) 능선 부분이 양강의 발원지로 이곳 주변에서 호랑이가
엎드린 모양의 바위 하나를 찾았다. 이 바위를 비석의 기초로 삼고 높이 약 67㎝, 폭 약 45㎝ 크기의
자연석 바위에 西爲鴨綠 東爲土門 (서위압록 동위토문)의 글을 새겨
이곳에 세우게 된다
비로소 조선과 청나라는 양국의 국경을 명확히 기록한 최초의 국경비를 백두산에 세우게 되고 국경이 확정
된다 이날이 1712년 음력 5월 15일이다. 정계비를 중심으로 서쪽 물줄기는 압록강을 발원시켜 서해로 흘러가고
동쪽 물줄기는 토문강을 발원시켜 북간도를 동서로 가르며 송화강으로 흘러간다. 송화강 물줄기는
조선의 영토를 따라 아무르강에 흘러들어 연해주 중앙을 가르며 동해 (오호츠크해)로 흘러간다
이것이 당시 백두산정계비에 기록된 한반도의 정확한 국경 라인이다.
정계비를 당시 장군봉에 세우지 않고 백두대간을 따라 약 10여 리(4km) 내린 지점에 세웠는지 의문이 남는다.
이해를 돕는다면 설악산 대청봉에서 발원된 물줄기는 내설악. 외설악, 남설악 세 곳의 분수령이 된다. 대청봉에서
중청을 거쳐 소청봉에 내려오면 소청봉의 능선 물줄기는 외설악, 내설악 두 곳의 분수령이 된다. 같은 이치로 이해하면 된다
.
이후 조선에서 월강이 철저히 금지되고 양 강을 건너는 자들에게는 극형에 처하는 등 강력한 단속이 실시되고.
청나라 봉금 정책은 이후 200여 년 가까이 지속된다. 1869년 고종 초기 당시 수년에 걸쳐 대흉년이 들고 기근에
허덕이던 함경도 농민들이 목숨을 건 월강이 시작되고 사람이 살지 않던
북간도에 200여 년 만에 처음 조선인들이 들어간다. 초기 이들은 관헌들의 눈을 파해 깊은 산골을 찾아 땅을 일궈
조, 옥수수 등 밭농사를 짓고 가을에 수확해 다시 강을 건너오는데 당시 이러한 농사를 조선 농민들 사이에서는
도둑 농사라고 일컬었다.
백두산정계비에 기록된 조, 청 합의에 따르면 압록강을 건너면 월강 행위가 된다, 그러나 백두산 북쪽이나
두만강 건너편 북간도 지역은 조선의 영토며 토문강 물줄기를 따라 동쪽의 북간도 전체는 조선의 영토가 된다.
당시 조선의 관료들이 이사실을 인지하지 못했거나 알고도 청나라 눈치를 보거나 두만강이 국경이라는 반도사관에
갇혀 입을 닫은 것으로 추정된다.
1911년 청나라에서 신해혁명이 일어나고 다음 해 청나라는 역사에 사라지고 공산당 모택동이 등장한다,
당시 북간도를 장악한 일본은
1931년 만주사변을 일으켜 청나라 마지막 황제 부이를 내세워 만주국을 세운다. 이 무렵 일본은 백두산정계비를
철거해 버린다.,
광복 후 1950년 김일성과 모택동은 같은 공산당 계열 항일무장 투쟁의 동지로 양국의 수장이 돼 국경회담을
가지는데 당시 모택동은 간도협약을 근거로 토문강은 두만강이라며 억지 주장을 펼치자 회담은 무산된다.
이후 남북전쟁이 일어났고 이때 모택동은, 국공내전에 참전했던 조선인들을 중공군과 함께 한국전에 투입시킨다.
당시 김일성은 죽음의 문턱에서 다시 살아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1962년 10월 김일성과 다시 마주 앉은 모택동은 토문강은 두만강이라며 인정하라고 한다.
전쟁빚이 있던 김일성은 결국 국경 조약에 서명하고 만다.
당시 반쪽 조약이 현재 백두산에 그어진 한반도 국경 라인이다.
정계비에서 천지까지 약 4km의 백두산과 또 천지 절반 이상과 압록강 하류 비단섬과 황금평을 비롯해 압록강 두만강
하중도 대부분
한반도 영토로 확보한 것이 그나마 다행으로 당시 김일성의 외교 능력을 충분히 가늠할 수 있다.
중국 공산당은 지금 남북통일 후 통일 한국과 다시 불거질 국경 문제를 대비해 역사 왜곡과 동북공정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는
사실.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중국은 5.000년 역사 내내 분열의 역사를 갖고 있다.
4호 경계비
4호 경계비에서 바라본 천지다, 우측으로 장군봉이 손에 잡힐 듯 중국에서 장군봉을 가장 가깝게 만날 수 있는
곳이다.
이곳 4호 경계비서 능선을 따라 북 중 국경라인이 5호 경계비까지 이어진다.
좌측 관면봉은 남백두 트레킹 출발점으로 4호 경계비에서 금강폭포로 하산해 서백두 수목 한계점에 도착한다.
이곳에서 도로를 따라 5호
경계비 주차장으로 이어진 루트로 사실상 남백두 트레킹은 별 의미가 없다, 반은 5호 경계비 포장길 도로와
겹치고 천지도 접할 수 없다.
몇몇 영리 단체나 여행사 등에서 거창하게 포장해 추진하는 상업화된 루트다.
천지
남백두 산문에서 4호 경계비 천지 전망대까지 3시간이면 여유 있게 다녀올 수 있다.
4호 경계비서 하산해 남백두 삼거리를 지나 백두령을 넘는다. 지난겨울 눈으로 덮여 알 수
없었는데 지금 도로는 비포장길의 민낯을 그대로 드러 내고 있다. 크고 작은 요철들로 차는 속력을 내지 못한다..
오히려 눈 덮인 겨울에 차량 이동이 더 편하고 빠르다..
백두령을 넘자 말끔히 포장된 아스팔트 포장도로가 나오고 지난겨울 눈이 덮여 볼 수 없었던 냇가가 나온다, 차를 잠시 멈추게 하고
냇가를 따라 걷는다. 봄바람이 스치는데 너무 신선하다.
사람이 살지 않는 곳으로 원시림 그대로 청정 지역이다. 간혹 한 두대 지나는 차량 매연이 전부다.
좌측 도로변에 영지버섯 등이 많이 보이고 누가 한뿌리 캐 들고 온다. 엄청 큰 영지버섯이다.
조금 깊이 들어가면 산삼 등 온갖 약초들이 늘려 있을 것 같은데 시간이 없다.
1차 1월.
서백두 사거리에 도착되고 30여분 후 송강하 재래시장에 도착한다.
장백현서 눈보라 길을 출발해 네 시간 만이다, 재래시장 범위가 꽤나 크다. 도로변 노점에 야생 동물 등
한약재들이 많이 보인다.
잠시 후 재래시장 인근 숙소에 도착되고 객실이 배정된다. 객실에는 싱글베드가 3 개식 정돈돼 있는데 도시 호텔에
비해 격이 많이 떨어진다
객실에 짐을 풀고 호텔 정문을 나선다. 우측 편 도로를 따라 100여 m 지점에 송강하 재래시장이 열려있고 단고기.
염소 등 혐오 식품까지 없는 게 없다.
작년 겨울 음식 때문에 발품을 팔았다. 특별히 먹을 게 없었고. 개구리와 단고기등 대부분 보양탕이 많은데 보양탕을
먹어 본 적 없는 필자는 깔끔한 곳이라 찾은 샤부샤부 체인점이 떠오른다.
그곳을 찾아가 셋이 들어가 3인분을 주문한다.
쇠고기, 양고기, 오징어 등 귀한 천마까지 육수는 매운맛 시원한 맛 담백한 맛 세 가지 함께 나오고 다양한
야채 한 소쿠리와 이름도 알 수 없는 버섯 한 소쿠리까지 식탁 전체가 버섯과 야채 등 고기로 가득하다.
면은 투박한 손국수로 밥도 함께 나온다.
셋이 여유 있게 먹었는데 반이상 남는다, 대륙의 통 큰 음식 문화다.
중국에서 하루 버려지는 음식물이 아프리카 한 국가에서 1년을 먹고 남는다고 한다. 중국에서 하루 버려지는 음식물 량이
가히 짐작이 간다. 셋이 먹은 가격이 210원으로 우리 돈 3만 5천 원 정도다. 쇠고기 육질이 아주 좋고 그 기다 반주까지
서울에서 이 정도의 음식이면 적게 잡아도 50만 원이 넘는다며 모두 좋아한다.
송강하진은 인구 3만이 채 안 되는 작은 산골도시로 백두산을 찾는 여행객들과 외지 상인들의 왕래가 잦아 유동인구가 많다.
시장 중심으로 들어가자 사람들의 온기가 묻어난다.
이름도 알 수 없는 동물 등 한약재들이 많고 얼음 위에서 살아 숨 쉬는 개구리들이 특히 많이 보인다.
남방에서 가져온다는 신선한 과일과 생필품 등 없는 게 없다.
갓 구워낸 군고구마 누가 사들고 와 맛보라며 건네주기도 한다.
영하 20도가 넘고 백두산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강한 바람에 체감온도는 더욱 차갑다,
시장통 거리에 수레 한대가 굴러온다, 수레를 끄는 사람은
세상사 온갖 잡동사니 티끌 다 끌어 가듯 표정이 없다 나이도 짐작할 수 없다. 흔한 방한모자나 장갑 하나 없다.
고구려 사극 드라마 대역으로 착각을 일으킨다.
중국의 급성장 뒤편에 숨겨진 중국 인민들의 모습이다. 같은 인간으로 마음이 짠하다.
중국 공산당은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면서도 공산당 일당체제라는 이상한 모순을 가진 나라가 현재 중국이다..
하나의 공산당 독재 권력으로 자유시장 경제체제를 순탄하게 견인할 것 같지만 쉽지 않을 것이다..
저들이 긴 잠에서 께어 날 때 중국 공산당의 위정자들은 단단히 각오해야 한다.
벌써부터 중국 사회 곳곳에서 부작용과 한계점을 드러내고 있다는 게 많은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정면으로 카메라를 갖다 댈 용기가 나지 않는다.
송강하 재래시장
장터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해가 저물고 숙소에 돌아온다.
2층 식당에 석식이 준비돼 있고 메뉴는 산천어회와 불고기 파티다 자연산 산천어회는 금세 바닥이 난다.
겨울 산천어는 이곳에서도 귀하다고 한다..
잔이 돌아간다.
내일은 서백두 일정과 북백두 천문봉에서 해넘이 일정과 천문봉 꼭대기서 1박한다.
천지가 환하게 열리길 기대하면서...
잔을 높이 들어라
8시가 넘자 연락이 온다. 2층 식당에서 손님이 기다린다고 한다.
호텔 2층 식당에 들어서자 남루한 50대 부부와 3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성과 또 이들을 안내해 온 조선족 할머니들이
함께 반긴다, 셋은 탈북자들이며 이곳 조선족 할머니들이 교회에서 만나 이들의 처지를 알고 돕고 있다고 한다.
인사를 나누고 옥수수 막걸리 한잔 따라 올리겠다며 잔이 돌아간다.
부부가 양강도 혜산에서 압록강을 건너기 직전 혼자 탈북을 시도하던 30대 여인을 만나 함께 사선을 넘었고
낯에는 산속에 숨어 지내고 밤에는 도로를 따라 셋이 함께 걸어 일주일이나 걸려 이곳에 도착했다고 한다.
우리 팀이 오늘 장백현에서 네 시간 넘게 차로 이동한 길을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다.
장백현서 송강하까지는 400리(159km)다
야생 동물이 많았지만 동물은 오히려 겁이 나지 않았고 사람이 가장 무서웠다고 한다.
하나뿐인 이들은 6년 전 탈북해 현재 한국에서 대학을 다니는데 여기에 큰 위안을 받으며 지금
자신들은 이곳 종교 시설에서 함께 생활하며 한국을 가기 위해 폐지와 고철을 주워 열심히 저축하고 있다고 한다.
하루 수입이 수십 원이지만 그래도 북한에서보다 희망이 있어 행복하다고 한다.
현대판 신종 이산가족이다..
한국행은 신중히 생각해야 한다..
한국 사회 적응을 못해 다시 돌아가는 사람들도 많다.
가장 좋은 방법은 각자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하는 것이다.
분명 좋은 날이 올 것이다. 여기서도 늘 조심 하라며
이들에게 지금 가장 필요한 게 현금이다.
손에 꼭 쥐어 준다.
이 방법 외는 내가 해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20년 넘게 내 방식의 보람이다.
이 정우
팔공산 자락에서
백두산과 1만 리 한반도 둘레길 어느 구간이던 정보 지원 하겠습니다.
현지정보 및 교통 숙박 숙식등 상세한 정보 나누겠습니다
모두가 함께 하길 기대합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 걸으면 우리길이 된다.
역사는 기록하는 자 승리한다
이정우 E_mail : kdjj80@hanmail.net
손전화 : 010 9477 8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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