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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203
#성육신
아마 칼빈선생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은 성육신 전에는 존재하지 않으셨으리라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성자 하나님의 신격을 논하기 위해 구약의 선지자들이 외친 여호와 하나님이 사도 바울이 전한 '그리스도' 그 분이시라고 성경의 예문을 들면서 의도치 않게 그리스도의 영원한 인성을 드러내고 있는 것 같다.'그리스도' 라는 말 자체가 기름부음 받은 자인데, 성육신 전에 인성이 없으셨다면 성자 하나님이 성부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셨다는 얘기가 된다. 하나님께서 하나님께 하나님으로 기름을 부으신다는 얘기는 매우 부자연스럽다. 게다가 이는 성령은 성부와 성자에게서 나오신다는 원리에도 위배된다.하지만 그리스도의 영원한 인성을 전제한다면 이 부자연스러움은 해결된다. 그리스도의 인성은 삼위일체 하나님과 영원전에 구원협약을 맺으시면서 독생자로서 성부께 맹세하셨고, 성부께서는 당신과 성자께로부터 나오시는 성령의 기름으로 그리스도의 인성에 한량없이 부어주신 것이라 설명될 수 있다.
구약에서 종종 사람의 모습으로 나타나시기도 하고 환상 중에 영광스러운 인자의 모습으로 나타나시는 여호와 하나님이야말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육신 전에도 인성을 가지고 계셨다는 중요한 근거가 된다. 왜냐하면 설령 천사들은 자기들이 가졌던 인간의 모습이 일시적일수 있으나 그 천사가 여호와 당신이시라면 취하신 인성을 임시로 쓰고 폐기한다는 것은 가당치 않기 때문이다. 아울러 사람의 모습을 한 여호와를 만난 족장들과 선지자들은 사람이신 그분께 경배를 드렸는데, 일시적인 인성이라면 그럴수 없었을것이다.
#20221203
#생명나무
생명나무 열매자체가 범죄한 아담에게 생명을 회복시키는 효력은 없었을 것이라는 칼빈선생을 비롯한 개혁주의자들의 견해에는 찬성하지 않는다.여호와 그리스도께서 아담에게 금지하신,선악을 알게하는 나무의 열매가 아담과 하와에게 원죄의 효력을 발생시켰던 것처럼,생명나무의 열매도 만약에 아담이 먹었었다면 생명의 효력을 발생시켰을 것이다.그렇다면 범죄한 아담은 왜 바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았느냐고 반문한다면,그것은 그만큼 자기죄악이 중대해서 여호와 그리스도께 대한 죄의식과 징벌의 두려움에 짓눌린 나머지 차마 그생각까지 못했다는것과,그럼에도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었을 경우에는 마치 구원받지 못한 악인들이 영원한 불못의 형벌에 처해지듯이 자신도 죄사함 받지 못한채 영원한 저주 가운데 살게 될 것이란 판단을 했었을 수 있다고 말할수있다.
#20191203
#성경묵상 #창세기 #Genesis 5장.
28 라멕은 백팔십이 세에 아들을 낳고
29 이름을 노아라 하여 이르되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시므로 수고롭게 일하는 우리를 이 아들이 안위하리라 하였더라
30 라멕은 노아를 낳은 후 오백구십오 년을 지내며 자녀들을 낳았으며
31 그는 칠백칠십칠 세를 살고 죽었더라
여기에 또 한 명의 라멕이 나오는데 그는 바로 노아의 아버지이다. 앞서 나왔던 가인의 후예인 라멕은 간음과 살인과 교만을 스스럼 없이 저지르는 악인이었으나 아벨을 뒤이은 셋의 후손인 라멕은 여호와 하나님께서 땅을 저주하셔서 인간들의 삶이 고달프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기는 의인이다. 그래서 그는 아들의 이름을 노아라고 지어 사람들이 여호와로부터 참된 안위를 얻기를 소망하였다. 라멕이 여호와께서 땅을 저주하신 것을 안 것은 9대 조상 아담으로부터 전해 내려온 신앙을 제대로 전수받고 믿음으로 받아들였으며 여기에만 그친 것이 아니라 별다른 문제 없이 평안해 보이는 인생들이 사실은 죄로 인해 매우 비참한 상태임을 간파하였다. 패역한 세대에서 믿음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것이 언제나 그렇듯이 그런 라멕의 모습은 믿음 없는 자들이 보기에는 유별나 보였을 것이다. 기후는 쾌적하고 땅은 비옥하여 온갖 풍성한 채소와 열매가 열려 조금만 수고하면 먹고 살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는데, 저 라멕은 이 평화로운 일상을 누리거나 즐기지 않고 왜 저렇게 허구헌날 여호와라느니 저주라느니 수고라느니 안위라느니 하는 걱정스러운 말만 입에 달고 사느냐고 비웃음을 당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라멕은 그렇게 모두에게 당연해 보이는 모습 속에서 당시 사람들이 아무리 수 백 년씩 살아간다 하더라도 언젠가는 죽어 없어진다는 것을 알았으며 아무리 좋은 것을 먹는다고 하여도 배고픔은 반복된다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그래서 아마도 그는 첫 조상 아담과 하와가 범죄 전 에덴 동산에서의 삶을 깊이 묵상하고서는 지금의 인생들이 당시에 비해서 너무나 비참하고 초라한 것을 깨닫고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런 모습은 비단 라멕의 시대에만 국한 된 것은 아니다. 오늘날에도 심지어 교회 내에서도 별다른 문제나 부족함이나 걱정거리 없이 편안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은 그 현실에 안주하여 영원을 바라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지금의 삶이 아무리 넉넉하더라도 나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분명히 있고, 내가 아무리 오래 살아봤자 기껏해야 백 년 남짓이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교인들 조차도 지금 여기가 좋사오니 초막 셋을 지읍시다 하면서 안주하려 한다. 그러나 길다고 생각하는 인생은 사실 지극히 짧은 한 순간에 불과하며 그 후에 있을 영원에 비하면 단지 스쳐지나가는 시간일 뿐이다. 그럼에도 하나님께서 이 짧은 인생을 주신 이유는 바로 영원한 삶을 준비하게 하시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주신 백 년 남짓의 이 땅에서의 인생을 영원을 위해 준비하지 않는 자는 기름 없이 신랑을 마중나간 어리석은 처녀와 같아서 결국에는 쫓겨나 영원한 지옥에서 울며불며 이를 갈게 될 뿐이다. 그러나 라멕과 같이 인생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하나님께 순종하면서 영원을 준비하는 성도들은 기름을 넉넉히 준비하고 신랑을 맞으러 나간 지혜로운 처녀와 같아서 영원한 하나님 나라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의 삶을 누리게 된다.
라멕의 수명 777세는 조부 에녹을 제외하면 가장 짧은 수명이다. 심지어 그는 자기 아버지 므두셀라보다도 일찍 죽는다. 므두셀라는 노아의 홍수가 일어나는 해에 죽었으나 라멕은 그러기 5년 전에 죽기 때문이다. 남들만큼 살지도 못하고 부모보다 먼저 죽는 등의 이런 라멕의 외적인 상황만 보면 대체로 연민을 가지게 마련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욥의 세 친구들처럼 라멕이 분명 하나님께 큰 죄를 지어서 저주와 벌을 받은 것이라고 판단하기도 하고 어떤 이는 오라비를 일찍 여읜 마르다와 마리아처럼 슬픔을 이기지 못하고 애통해 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결과론적으로 라멕의 상대적으로 짧은 인생은 도리어 그에게 축복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가 하나님의 심판의 홍수를 보고 당하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라멕의 아들 노아는 5백 세에 하나님의 계시를 받아 방주를 만들기 시작하여 6백 세에 완성하였는데, 아마도 라멕은 노아가 방주를 만드는 동안에도 부친 므두셀라와 아들 노아와 함께 3대가 같이 하나님의 심판을 경고하고 다녔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어떤 신자가 이 땅의 좋은 것들을 충분히 누리지 못하고 일찍 떠났다 하더라도 지나치게 안타까워하거나 슬퍼하기보다는 그가 이 땅에서 주님께서 맡기신 사역의 분량을 다 채우고 간 것에 감사하며 위로를 얻어야 한다.
32 노아는 오백 세 된 후에 셈과 함과 야벳을 낳았더라
노아는 5백 세가 될 때 까지 단 한 명의 자녀도 낳을 수 없었다. 게다가 5백 세가 되어 세 아들을 낳은 후에도 950세가 되어 죽을 때까지 그가 세 아들 이외의 다른 자녀들을 낳았다는 기록은 없다. 즉, 노아는 거의 1천 년 가까이 살아가는 동안 단 세 명의 아들만 낳았을 뿐이다. 홍수 이후에야 그와 그의 가족만이 있었으므로 논외로 치더라도, 그는 5백 세가 되기까지 고통스러운 편견들을 주위로부터 받아왔을 것이며 스스로도 자녀가 없는 것에 대한 심한 자괴감에 시달렸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노아의 상황도 결과적으로는 그에게 복이 되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왜냐하면 자녀라고는 아들 세 명이 전부이므로 모든 아들들과 며느리들이 방주에 탈 수 있어 홍수 심판을 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로써 우리가 참된 신앙을 추구한다면 비록 우리에게 주어진 것들이 남들보다 넉넉하지 않고 부족해 보여 때로는 멸시와 조롱을 당하더라도 전혀 주눅 들 이유가 없음을 알 수 있다. 예수님께 다시 살림을 받은 나사로는 비록 거지가 되어 가난과 질병으로 비참하게 삶을 마감했더라도 천사들의 손에 이끌리어 아브라함의 품에서 안식을 누렸다. 반면에 나사로를 도와주지 않은 탐욕스러운 부자는 이 땅에서는 날마다 호화로운 연락을 즐겼으나 저 세상에서는 혀 끝에 물 한 방울만 있었으면 하는 소원을 가질만큼 지옥불의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과부가 드린 두 렙돈이 다른 부자들이 드린 많은 헌금보다 더 많다고 하셨고 주의 형제라 하여 냉수 한 그릇을 주는 자는 반드시 하늘의 상급을 받을 것이라 하셨다. 또한 모두에게 존경받는 바리새인의 자기 자랑 기도가 아니라 모두에게 멸시를 받고 차마 고개를 들지도 못하여 가슴을 치며 죄인이라 눈물로 회개하는 세리가 죄사함을 받았다고 하셨다. 그러므로 참된 성도들은 교회 안이건 밖이건 간에 사람들을 외모나 주변 상황으로 판단하는 우를 저질러서는 안된다. 또한 특히나 교회에서 누군가가 어려운 상황에 놓이게 되면 위로와 격려를 해준다 하여 성급하게 그 사람의 처지에 대해 왈가왈부 해서는 안되고 잠잠히 그를 위해 기도하고 그의 필요를 채워줄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성도 된 우리 각자에게 노아와 같이 남들보다 어려운 처지에 놓이게 되면 그 상황에 비관과 불평만 하기보다는 이를 통해 나를 연단하셔서 더욱 정결하게 하실 하나님의 큰 일을 믿고 소망하며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한다.
#20211203
#여호수아 #Joshua 9:14-27
14 무리가 그들의 양식을 취하고는 어떻게 할지를 여호와께 묻지 아니하고
15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조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16 그들과 조약을 맺은 후 사흘이 지나서야 그들이 이웃에서 자기들 중에 거주하는 자들이라 함을 들으니라
17 이스라엘 자손이 행군하여 셋째 날에 그들의 여러 성읍들에 이르렀으니 그들의 성읍들은 기브온과 그비라와 브에롯과 기럇여아림이라
18 그러나 회중 족장들이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했기 때문에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을 치지 못한지라 그러므로 회중이 다 족장들을 원망하니
19 모든 족장이 온 회중에게 이르되 우리가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로 그들에게 맹세하였은즉 이제 그들을 건드리지 못하리라
20 우리가 그들에게 맹세한 맹약으로 말미암아 진노가 우리에게 임할까 하노니 이렇게 행하여 그들을 살리리라 하고
21 무리에게 이르되 그들을 살리라 하니 족장들이 그들에게 이른 대로 그들이 온 회중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가 되었더라
기브온이 가져온 양식은 여호수아가 취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 무리가 취했다고 하였고 여호수아가 여호와께 묻지 않은 것이 아니라 무리가 여호와께 묻지 않았다고 하였으며 이스라엘 회중이 여호수아를 원망한 것이 아니라 족장들을 원망하였다고 기록된 것으로 봤을 때 아마도 여호수아는 최고 지도자로서 여호와께 묻고 결정을 하려고 했으나 족장들이 기브온과 화친을 맺자는 분위기로 몰아가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결정을 내리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물론 최고 지도자인 여호수아에게 아무런 불찰과 책임이 없었다고 할 수는 없겠지만 그렇다고 제 3자의 관점과 결과론적인 시각으로 모든 책임을 여호수아에게 씌우는 것은 그의 신앙과 성품으로 미루어볼때 부당해보인다. 교회가 어떤 중요한 결정을 할 때 담임목사는 바른 결정을 하고자 하나 당회가 그릇된 결정을 주장함으로써 담임목사도 내켜하지는 않지만 어쩔 수 없이 잘못된 결정을 했을 때에는 물론 당회장으로서 져야 하는 책임에서 배제될 수는 없겠지만 가장 큰 원인과 책임은 마땅히 당회가 지고 그로 인한 문제를 적극적으로 수습해야 한다. 담임목사가 억지로 잘못된 결정을 밀고 나간다면 담임목사가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하고 당회는 담임목사의 잘못된 결정을 얼마나 저지하기에 힘썼는지에 따라 어느 정도의 면책을 받을 여지는 있다. 만약에 당회가 담임목사의 잘못된 결정을 적극적으로 저지하지 않고 수수방관하거나 내버려둔다면 담임목사와 같은 정도의 책임을 져야 한다.
여호와께서는 이스라엘이 아간의 죄로 인해 아이 성에서 패배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들이 기브온 주민과 화친을 맺는 여부에 대해서도 미리 여호수아와 족장들에게 알려주시지 않으시고 그들이 어떻게 결정하는지 내버려두시고 두고 보셨는데 우리로서는 여호와께서 왜 지켜만 보셨는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다. 육체에 속한 자들은 당연해 보이는 것은 당연하게 여기고 일을 진행하면 당연한 성과를 얻게 되지만, 적어도 하나님께 속한 자들은 아무리 당연해 보이는 것이라도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는 것처럼 매사에 주님께 아뢰고 성경에 근거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가르치시려는 것으로 보인다.
아마도 이스라엘은 가나안 땅을 행진하는 중에 기브온 등의 성읍들을 발견하고서는 여리고 성이나 아이 성처럼 공격을 하려고 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기브온 성읍들을 공격하려던 찰나에 화친을 맺으러 온 기브온 사신들이 여호수아와 족장들 앞에 나와 엎드리며 이실직고 하면서 멸하지 말아주기를 간구하였을 것이다. 여호수아와 족장들과 이스라엘은 그제서야 자기들이 여호와께 품하지 않음으로써 기브온 사신들의 속임수에 넘어가서 화친 조약을 맹세하게 된 것을 알고서 적잖이 당황하고 소동이 벌어졌을 것이다. 아마도 이스라엘의 대다수는 기브온 사신들이 속임수를 써서 맺게 된 화친 조약인만큼 이제는 아무런 효력이 없고 가나안 족속들을 멸하라는 여호와의 언약과 명령이 가장 상위에 있는 것이니 기브온 족속들을 진멸해도 되지 않느냐며 족장들에게 거세게 항변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족장들은 비록 백성들의 항변이 매우 그럴듯하고 설득력이 있었어도 그러한 대의를 빌미로 자신들의 불찰과 실책을 숨기려 하지 않고 여호와께 묻지 않았던 불찰을 시인하며 백성들의 원망을 그대로 받고 감수하기로 결정하였다. 자칫하다가는 족장으로서의 권위를 잃게 될 상황이었으나 그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시인함으로써 도리어 권위를 세울 수 있었고 기브온과의 화친을 지켜야 한다고 백성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하였다.
22 여호수아가 그들을 불러다가 말하여 이르되 너희가 우리 가운데에 거주하면서 어찌하여 심히 먼 곳에서 왔다고 하여 우리를 속였느냐
23 그러므로 너희가 저주를 받나니 너희가 대를 이어 종이 되어 다 내 하나님의 집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가 되리라 하니
24 그들이 여호수아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당신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사 이 땅을 다 당신들에게 주고 이 땅의 모든 주민을 당신들 앞에서 멸하라 하신 것이 당신의 종들에게 분명히 들리므로 당신들로 말미암아 우리의 목숨을 잃을까 심히 두려워하여 이같이 하였나이다
25 보소서 이제 우리가 당신의 손에 있으니 당신의 의향에 좋고 옳은 대로 우리에게 행하소서 한지라
26 여호수아가 곧 그대로 그들에게 행하여 그들을 이스라엘 자손의 손에서 건져서 죽이지 못하게 하니라
27 그 날에 여호수아가 그들을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회중을 위하며 여호와의 제단을 위하여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자들로 삼았더니 오늘까지 이르니라
백성들의 원성을 진정시키는 것은 족장들이 전담하였고 여호수아는 자신들을 속인 기브온 사신들을 불러서 엄중하게 질책한 후에 화친 조약을 위배하지 않는 선에서 기브온 족속들에 대한 영구적인 처벌을 내리게 된다. 그들은 이스라엘에게 진멸 당하지 않는 대신에 대대손손 여호와의 성전과 제단을 위한 육체노동과 허드렛일을 전담해야 했다. 여호수아가 기브온 족속을 이스라엘의 왕궁에 필요한 노역이나 백성들의 농사나 목축 등의 일을 맡기지 않고 여호와의 전과 제단의 일을 맡긴 것은, 기브온 족속을 살리게 된 것은 여호와께 묻지 않은 자신의 불찰이었기 때문에 백성들의 육적인 유익을 위한 일에 동원시키는 것은 가당치 않으므로 기브온 족속을 여호와의 손에 맡기고 바친다는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기브온 주민들에게 있어서는 해야 하는 일 자체로만 본다면 노예들이나 하는 허드렛일 육체노동에 불과하지만 그것이 이스라엘 백성들의 일이 아니라 여호와의 제단을 위해 하는 일이기 때문에 영으로는 존귀한 사역을 맡게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즉 그들은 원래는 이스라엘에게 진멸되기에 합당한 버림받을 족속이었으나 마치 여리고의 창녀 라합이 생명을 건지게 된 것처럼 진멸을 면하게 된데다가 여호와의 제단을 위한 일에 동참함으로써 제단에서 이루어지는 제사와 의식들을 체험하여 알 수 있는 복을 누리게 된 것이었다. 다윗은 이 땅에서 천년동안 왕으로서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며 사는 것보다 단 하루라도 여호와의 전의 문지기로서 섬기기를 바라고 소망하였는데, 기브온 주민들은 여호와의 제단 사역에 가장 가깝게 동참하게 된 것이다.
여호수아의 이스라엘이 기브온 족속과 맺은 화친 조약은 사사시대까지 이어지다가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이 자기의 지나친 열정에 충동되어 일방적으로 파기해버리고 기브온 주민들 얼마간을 잔인하게 학살하고 만다. 사울 왕은 아마도 분명 베냐민 지파를 중심으로 해서 다른 모든 지파에까지 기브온을 진멸해야 할 명분을 끊임없이 내세웠을 것이고 이스라엘 지파들도 수백년 전 여호수아가 맺은 화친 조약이 이제는 더이상 유효하지 않는다고 여기고 원래부터 이스라엘 민족도 아니었던 기브온 족속을 말살한다 한들 자기들에게 유익이 되면 됐지 해가 되지는 않을 것으로 여기고 사울 왕이 기브온 사람들을 학살하는데 동조하거나 묵인했던 것 같다. 이로 인해 기브온 주민들 중 많은 사람들이 사울 왕에게 부당하게 학살 당하게 되었으나 그들은 자신들의 억울함을 아무데도 하소연 할 곳이 없었다. 육적으로는 이스라엘에 속하지 않은 가나안 족속 중 하나였고 수백년 전에 자기들이 목숨을 부지하고자 여호수아를 속여 화친조약을 맺고 지금까지 여호와의 제단을 위해 나무를 패며 물을 긷는, 육적으로 비천해보이는 일을 해왔기 때문이었다. 비록 자기들이 여호와의 제단을 위해 섬기는 일을 하였어도 여호와께서 과연 자기들까지도 보살피시는지를 확신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기브온 주민들은 억울한 학살을 당해도 그 원한을 속으로만 쌓아둘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는 기브온 주민들이 당한 억울함을 간과하지 않으시고 수십년 후 다윗 시대에 3년의 극심한 기근으로 사울 왕의 만행을 묵과했던 이스라엘에게 갚아주시고 특별히 사울 자손 일곱 명은 기브온 자손들에게 넘겨주셔서 처형하도록 갚아주셨다. 왜 여호와께서 사울 왕이 지은 죄악을 다윗 시대에 전가하셨는지는 알 수 없으나 분명한 사실은 여호와께서는 아무리 비천한 자가 당한 억울한 일이라도 더욱이 그것이 여호와의 택하신 백성에 의해 자행된 죄악이라면 절대로 묵과하지 않으시고 아무리 오랜 세월이 흐른다 하더라도 반드시 그 원한을 풀어주시고 주범과 공범들 모두를 처벌하신다는 것이다. 교회에서 관심을 받지 못하는 교인이 억울한 일을 당해 희생되고 당시 담임목사와 당회와 많은 교인들이 작당해서 쉬쉬하며 넘어가려 한다 하더라도, 담임목사가 바뀌고 교회에서는 그 사건에 대한 기억이 점점 희미해진다 하더라도 당시의 죄악에 대해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제대로 해결하지 않고 시간을 끌면 끌수록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진노의 분량만 쌓게 되어 3년의 대기근과 사울의 일곱 자손을 처형하는 것과 같은 무시무시한 형벌을 당하게 될 뿐이다.
#20201203
#민수기 #Numbers 12:6-8
6 이르시되 내 말을 들으라 너희 중에 선지자가 있으면 나 여호와가 환상으로 나를 그에게 알리기도 하고 꿈으로 그와 말하기도 하거니와
7 내 종 모세와는 그렇지 아니하니 그는 내 온 집에 충성함이라
8 그와는 내가 대면하여 명백히 말하고 은밀한 말로 하지 아니하며 그는 또 여호와의 형상을 보거늘 너희가 어찌하여 내 종 모세 비방하기를 두려워하지 아니하느냐
여호와께서 누군가를 선지자로 세우셔서 꿈이나 환상으로 알리시고 드러내시는 것도 선지자에게는 매우 망극한 일이고 사람들도 그 선지자를 인정할 수 밖에 없으며 함부로 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호와께서는 그런 선지자들보다도 더 탁월하고 특별하게 모세를 세우셔서 충성되다 하시고 숨김없이 명백하게 말씀하시며 당신의 형상을 보이신다고 하신다. 이는 구약의 수많은 걸출한 선지자들이 있었더라도 모세만큼 여호와와 친밀한 사람은 없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모세를 비방한다는 것은 모세보다 자기가 더 높다거나 여호와와 친밀하다거나 그것도 아니면 여호와를 정면으로 비방하기 위한 것일 수 밖에 없다. 아론과 미리암은 후자는 분명 아니었을 것이므로 전자로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굳이 모세를 치켜 세우시면서 선지자들을 언급하신 이유는 아론과 미리암이 스스로 선지자들과 비교해보라는 뜻인 것 같다. 즉, 모세보다 뭇한 선지자들에게도 여호와께서는 꿈이나 환상으로 당신을 은밀하게나마 알리시고 드러내셨는데, 선지자들보다 높은 모세를 감히 비방하는 아론과 미리암은 과연 그러한 꿈이나 환상을 받은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아론은 모세의 형이었어도 애굽에서는 모세의 대변인이었고 광야에서는 모세에 의해 대제사장으로 임명되었다. 그가 셋째 하늘을 잠깐 볼 수 있었던 것은 그 자신의 탁월함 때문이 아니라 모세를 통한 여호와의 은택 덕분이었다. 여호와께서는 단 한 번도 모세를 제쳐두시고 아론에게 직접 나타나신 적이 없으셨다. 한편 모세의 누이 미리암은 어떠한가. 그녀는 혈육으로는 모세보다 무려 열 살 정도나 더 많고 죽을뻔한 아기 모세를 위해 큰 누이로서 노력한 인간적인 공로가 있다. 애굽 군대가 홍해에서 몰살 당했을 때에는 이스라엘의 모든 여인들을 데리고 여호와를 찬양하기도 하였다. 성막과 휘장을 짤 때는 여인들을 통솔하여 힘써 만드는데 참여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녀가 여호와께로부터 무슨 직분을 받은 것이 있었는가. 그녀는 아론과 같은 대제사장은 물론이거니와 백성들을 다스리기 위한 장로와 지도자의 반열에도 들지 못하였다. 그런 그녀가 모세를 단지 혈육의 동생으로만 여겨 비방한 것은 매우 망령된 죄악이었던 것이다.
오늘날 교회에는 원활한 복음 사역을 위해 역할에 따른 직분을 비롯한 여러 외적인 질서가 마련되어 있다. 그중에서도 목회자들은 나이가 많건 적건 간에 특별히 성경으로 여러 연단과 훈련과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러한 과정이 어떤 신비한 것이 아니라 규정과 절차에 따른 것이라 하더라도 이 또한 목회자를 세우시기 위한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섭리의 방식으로 알고 그 권위를 인정하는 것이 마땅하다. 일반 교인이 아무리 성경을 잘 해석한다 하더라도 목회자가 거친 과정을 지나지는 않았기 때문에 당연히 권위는 덜할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자기가 아무리 성경을 많이 읽고 해석을 잘 한다 하더라도 교회의 목회자를 비방하는 것은 용납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교회에는 목회자보다 나이와 그에 따른 연륜이 많다고 해서, 목회자보다 성경이나 경건서적을 많이 읽는다고 해서, 목회자보다 기도를 많이 하고 어떤 신비한 은사가 있다고 해서 목회자를 무시하고 비방하는 일이 적지 않게 발생하는데, 이는 거의 대부분 모세를 비방한 아론과 미리암의 죄를 짓는 것과 같다.
국가 지도자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각 나라의 특성에 맞게 지도자를 세우셨으므로 적어도 교회는 국가 지도자를 어떤 이유에서건 비방해서는 안된다. 설령 국가 지도자가 교회에 악을 행한다 하더라도 교회는 물리력을 동원하여 맞대응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될 수 있으면 그 부당함을 묵묵히 당하는 것이 모세의 온유함을 실천하는 것이다. 부당함에 대한 호소는 비방이나 저주나 조롱 등이어서는 안되고 평이하고 품격있게 하되 마치 심판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앞에 서듯이 두려움과 공경함으로 해야 한다. 오늘날 교회는 그 누구보다도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국가 지도자를 향해 아론과 미리암의 죄를 스스럼 없이 저지르고 있다. 아론과 미리암은 강림하신 여호와 예수 그리스도를 뵘기라도 했지만 오늘날 국가 지도자를 비방하는 교회와 목사들은 자기들을 주시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있다. 나도 한때는 정의감에 불타올라서 이전 대통령들을 저주하고 비방하고 조롱하기도 했으나 지금은 그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 적절하지 않은 행동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의 교회와 성도라면 국가의 부정부패와 불의함에 대해서 애통한 마음을 가지되 그것을 비방과 저주로 표출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도로 승화시켜야 할 것이다.
목회자들 중에는 이러한 구절을 가지고 자기들의 권위에 교인들은 무조건 복종해야 한다고 하는 자들도 있는데, 도리어 그들에게는 모세의 지극한 온유함과 여호와의 집에 온전히 충성됨을 먼저 갖추고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한다. 즉, 목회자들은 교인들 앞에서 억지로 권위를 내세우려 한다거나 맹종하기만을 바라서는 안되고 교회 내에서 스스로 아무런 권위와 권리를 누리려 하지 말고 설령 모세처럼 억울한 비방을 받더라도 항변하기보다는 잠잠히 받아들이며 주 안에서 인내하는 덕목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래서 설령 교회가 어떤 목회자가 눈엣 가시처럼 거슬려 부당하게 쫓아낸다고 하더라도 그 목회자는 인간적으로는 너무나 억울하고 분통이 터질수는 있어도 모세의 온유함을 본받아 묵묵히 받아들이며 주님께 탄원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한다. 그렇게 설령 이 땅에서는 모세처럼 여호와의 강림하심과 변호를 받는 일이 생기지는 않더라도 그 이후 영원한 하나님 나라를 바라보는 소망으로 견고히 인내하며 복음의 씨앗을 뿌릴 수 있어야 한다.
여호와께서는 모세에게 은밀하게가 아니라 명백하게 말씀하신다고 하셨다. 이는 여호와께서는 특별히 택하신 사람에게는 당신을 아는 지식을 분명하고 명확하게 드러내시고 처음에는 그 지식이 미약했어도 갈수록 넓고 깊고 창대하게 해주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모든 성도 개개인은 각자의 주어진 분량과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일생동안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장성해 가야 할 의무와 권리가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신자라 하면서 처음 받은 그 지식에만 머물러 있고자 한다면 자기의 신앙이 과연 참된 것인지 처음부터 돌아보고 점검해야 할 필요가 있다. 하냐님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은 복음 사역을 맡은 목회자들에게 더욱 특별히 요구된다. 하나님과 그리스도께서는 당신을 아는 지식을 모세에게는 대면하셔서 주셨으나 우리에게는 기록된 보편적인 말씀으로 주셨다. 따라서 목회자들은 성경을 읽는 학습 능력은 물론이거니와 그 성경을 복음으로 깨달을 수 있는 성령의 인도하심도 일반 신자들보다 탁월해야 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러므로 목회자나 목회 지망생들은 과연 성령께로부터 남들보다 탁월한 지성과 영성을 은사로 받았는지를 먼저 점검해야만 한다. 그런 가장 기초적이고 필수적인 은사도 없으면서 단지 한때의 격앙된 감정에 휩쓸려 목회자가 되려 한다면 큰 낭패를 보게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세가 산에 올라 없을 때 아론을 앞세워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하는 죄를 저질렀을 때, 모세는 너무나 낙담한 나머지 여호와의 영광을 보여달라고 간구한다. 여호와께서는 그런 모세를 긍휼히 여기셔서 모세가 두번째 산에 올랐을 때 하늘의 모든 영광을 가지고 예수 그리스도로서 강림하셔서 그에게 드러내신다. 이 때 그리스도께서는 행여나 모세가 당신의 영광으로 해를 입지 않도록 바위 틈에 숨기시고 당신의 손으로 친히 덮으신 후에 그를 지나가시고 얼굴 대신 등만 보여주신다.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보여주신 당신의 형상은 신성으로나 인성으로나 당신의 영원한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의 육신과 그분으로부터 나오는 모든 영광인 것이다. 이를 통해서도 그리스도의 인성은 영원 전 태초에 상고에부터 성자 하나님과 연합하여 계셨음을 유추할 수 있다. 당시 모세의 낙담하여 절망한 심령이 회복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여호와의 형상을 뵙는 것으로만 가능하였다. 즉, 모세처럼 지극히 신비하고 신령한 체험은 그가 맡은 사역이 얼마나 막중한지와 그 사역으로 인한 심령의 곤고가 얼마나 막심한지에 따라 비례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제자들과 사도들이 받았던 탁월한 성령의 은사와, 사도 바울이 경험한 셋째 하늘 등의 신비는 그만큼 그들의 사역과 그로 인한 곤고함이 통상적인 수준을 뛰어넘은 어마무시한 것이었음을 알 수가 있다. 따라서 오늘날 이러한 은사와 능력을 추구하는 신자들은 고린도 교인들처럼 자기 자랑응 삼으려는 목적이 아니라 그만큼 큰 사역을 감당할 각오를 먼저 해야 하는 것이다.
사유의 정당함을 빌미로 비방하는 것은 참소하는 마귀의 짓이다. 마귀는 우리가 이미 용서받은 죄들을 가지고 집요하게 물고늘어지면서 참소하기를 그치지 않는다. 띠라서 자기의 정당함을 주장하려거든 상대를 비방하려 하지 말고 살대가 고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책망하며 권고해야 하는 것이다. 과거에 교회에서 발생한 중대한 문제에 담임목사가 적절하지 않은 언행을 보인 것에 크게 실망하여 한동안 분에 이기지 못해서 정당함을 구실로 성경묵상이라는 방식으로 그를 비방했던 적이 있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여전히 사유는 정당했다고 보지만 방식은 선하지 않았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