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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수범회장님의 카톡에서]
모정의 뱃길’ 40년후
5.16혁명 초기의 일이다.
육영수 여사는 남부지방으로 시찰을 떠나는 남편에게
전남 여수에 가시거든 한 어머니를 만나 전달해 달라며 한통의 편지를 건네었다.
여수 앞바다 외딴섬에 사는 한 소녀의 어머니였다.
외딴섬에서 목포까지 20리 바닷길을 나룻배에 딸을 태워 통학을 시킨 어머니였다.
노 젓는 어머니와 단발머리의 초등학생 소녀.
눈비가 오고 풍랑이 와도 모녀의 나룻배는 6년 동안 단 하루도 거르는 날이 없었다.
졸업식날, 학교에서는 6년 개근상을 탄 소녀의 어머니에게 ‘장한 어머니상’을 드렸다. 친구와 아우들과 선생님과 정든 교실과 한꺼번에 헤어지는 마지막날은 나룻배 모녀의 사연으로 더욱 숙연했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졸업식의 노래’ 첫구절처럼 소녀의 졸업장이 빛나는 것은 그 어머니의 지극정성과 그것도 학교 문턱을 넘어본 사람이 없는 외딴섬에서 처음 생긴 남다름에 있었다.
섬에 집이라곤 세 가구에 스무명 안되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다. 작은 통통배조차 오지 않는 곳이라 섬사람들은 장을 보거나 다른 볼일을 보러 나룻배로 육지를 건너다니곤 해서 아이들이 커도 학교에 보내는 것은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 어머니는 비록 딸자식이지만 가르쳐야 한다고 마음을 먹었다. 아버지는 펄쩍 뛰며 반대했다. 딸을 학교에 넣어본들 20리나 되는 바닷길을 무슨 수로 왕래하느냐는 것이었지만 모진 결심으로 딸을 입학시키고야 말았다.
전기도 시계도 없는 섬마을에서 새벽어둠에 딸을 깨워 밥을 먹이고 나룻배를 저어 학교에 보내고, 공부가 끝날 때면 다시 가서 데려오곤 했다.
어머니의 나룻배는 강풍이 불어도 눈보라가 몰아쳐도 단 하루도 쉬지 않았다. 어머니의 일은 그것뿐이 아니었다. 아버지가 병든 몸이라서 농사를 도맡아 했다. 농번기에는 소를 빌려 논밭일을 하고, 장이 서는 날에는 채소를 팔아 생필품을 사고 아버지의 약도 사왔다.
그래도 어머니는 공부하는 딸이 대견스럽기만 해서 육신의 고달픔을 모르고 6년 세월을 훌쩍 넘겼고, 그 세월 동안 모정의 뱃길을 손꼽아 보니 3만4천리를 헤아렸다.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그렇지 않아도 눈물나는 졸업식에 소녀도 울고 어머니도 울고, 모녀를 바라보는 모든 사람들이 눈물바다를 이루었다.
1962년 매서운 추위가 가시지 않은 2월, 목포의 한 초등학교 졸업식은 신문보도를 통해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의 눈시울을 적셨다(한국일보 2월14일).
육영수 여사는 신문기사를 읽고 그 어머니에게 편지를 썼던 것이다.
박정희 의장은 여수에 가서 이 가난한 섬의 모녀(어머니 박승이, 딸 정숙현)를 만났다. 육여사의 편지를 전하고, 그 어머니의 굳은살 배긴 손을 잡아주며 위로와 격려의 말을 아끼지 않았다.
그로부터 40년 후 한국일보는 딸 정숙현씨의 글을 게재하면서 모녀의 뒷소식을 전해 다시 한번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했다.
다음은 2004년 7월8일자 한국일보에 게재된 정숙현씨의 글이다.
‘모정의 뱃길’ 주인공 정숙현씨
나는 모른다, 물결 위에 일렁이는 그림자를몇 억겁이 지난 후의 이 파도 위에도
한 오라기 주름살이 굽이칠까.
살을 에이는 어머니의 뱃길 따라
왜 오고 갔는지를 나는 모른다.
깊고 또 깊은 곳에 남아 있거라.
물보라가 그리는 한 장의 초상화
아, 나의 어머니 모정의 뱃길.
굳이 거창하게 시(詩)라고 말하지 않아도 좋다. 단지 물길처럼 마음 또한 이렇게 흐르는 것을.
1956년, 모두가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 초등학교 6년을 졸업한다는 것은 지금의 대학을 졸업한다는 것보다 더욱 귀한 일이었다. 그것도 스무명이 채 못 사는 자그마한 섬마을 출신의 여자아이에게는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말이 좋아 섬마을이지, 내 가족을 포함해 겨우 세 가구가 살았던 그 섬에서는 생계를 위해 약간의 채소와 나물을 육지에 팔러 나가기 위해 이용했던 나룻배 한 척만이 외부를 잇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어머니는 남들이 다 자는 깊은 밤, 달빛에 의지해 혼자 노 젓는 방법을 익히셨다. 병중인 아버지와 늙은 시어머니를 모시며 오랜 세월 동안 배우지 못한 것을 원통하게 여기신 어머니는 절대로 딸에게 문맹을 대물림할 수 없다고 결심하셨다.
내 어머니 박승이는 그렇게 6년간 전남 여천군(현재 여수시) 가정도에서 목포까지 20리 바닷길 노를 저었다. 시계는커녕 수탉도 없던 새벽, 어머니는 오직 바람소리와 파도소리로 그날의 날씨를 가늠하며 조각배를 띄웠다. 초등학교 3학년 때 태풍 사라호로 산산조각이 난 배의 파편을 안고 통곡했던 어머니, 한겨울 추위에 갈라진 손등으로 여자도 배워야 한다는 일념만으로 파도를 헤쳐 나가던 어머니였다.
말로는 표현 못할 6년의 세월. 마침내 졸업식 날이었다. 어머니는 박수갈채와 울음바다 속에 ‘장한 어머니상’을 받았다. 그리고 당시 우리의 사연을 취재했던 한국일보 이문희 기자로 인해 ‘모정의 뱃길 3만4천리’는 전국 방방곡곡에 알려지며 우리 모녀는 한국일보와 인연을 맺게 됐다. 1962년 2월14일자로 날짜까지 정확히 기억한다.
그때 받은 격려 편지는 국내외에서 하루 200여 통 이상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모정의 뱃길’이란 이름으로 영화가 만들어졌고 어머니를 소재로 한 노래(필자 주 : 이미자의 ‘꽃피는 여수바다’)도 불려졌다. 라디오 연속극까지 만들어졌다. 당시 박정희 대통령이 여수에 내려와 어머니와 나를 격려하며 장학금을 주던 일을 잊을 수 없다. 그후 나는 여수에서 중고등학교를, 서울에서 대학(성균관대 국문학과)을 나왔다.
이제 아이 세 명을 키우는 나는 당시의 어머니보다 나이가 많다. 딸 가족을 위해 새벽 기도를 다녀온 후 낮은 목소리로 찬송가를 부르는 어머니의 얼굴은 마냥 평화롭다.
내가 한석봉이나 이율곡이나 맹자처럼 훌륭하지 못한 탓으로 내 어머니가 그들의 어머니처럼 길이길이 기억되지 못한다는 안타까움이 있다. 그러나 이젠 거의 잊혀져 가고 있는 어머니를 기억해 이런 지면을 통해 어머니에게 감사와 사랑의 글을 올릴 수 있게 해 준 한국일보에 감사한다. 나 또한 어머니의 발끝에도 전혀 미치지 못하나마 당신의 모습을 닮으려 한다.
이제 57세가 된 정숙현씨는 서울 강남구 도곡동에서 아직도 정정한 80세 어머니를 모시고 행복하게 살고 있다. 1986년부터 공생복지재단 산하 서울특별시립 한남직업전문학교 미용과 교사로 일하고 있다.
육영수 여사의 편지 내용은 알 길이 없으나, 어머니의 지극정성에 감사를 전하며 용기를 북돋아주는 것이었으리라. 어머니들끼리만 아는 이야기도 있으리라.
무정세월 40년.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그 세월이 네번 굽이쳐 흘렀어도 주인공 정숙현씨는 “박정희 대통령이 여수에 내려와 어머니와 나를 격려하며 장학금을 주던 일을 잊을 수 없다”고 했다.
지도자의 이런 보살핌으로 이 땅의 고난을 다 감당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외딴섬의 고립과 가난을 숙명이라 여기지 않고 바다를 건넌 그 어머니의 결연한 ‘도전’에 뜨겁게 악수하는 것이 고난을 딛고 일어나려는 모든 사람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의미로는 부족함이 없었다. 세계 최빈국의 신세를 면치 못하던 60년대초, 어떻게든 궁핍을 딛고 몸부림쳐 일어나야 한다는 의지가 절박했던 그 시기였음에랴.
이 땅에 수많은 지도자들이 거쳐가고 지금도 내로라하고들 있지만 거의 서민의 삶과 무관한 ‘나으리’들뿐, 서민을 가슴으로 만나고 그들의 삶 속에 들어가 애환을 나누고 함께 꿈을 꾼 지도자가 박정희 외에 누가 있는가를 돌아보게 된다.
‘박정희 매도’가 극성을 부리던 때에 이런 댓글이 올라온 적이 있다.
“이놈들아, 난 그 분 이름만 들어도 눈물이 난다”
한마디 설명이 필요치 않은 말이다.
역사적 평가를 차치하고도 그가 존경받는 이유 중의 하나는 일거수일투족 꾸밀래도 꾸밀 수 없는 그의 서민 기질에 있다. 그는 대통령이었지만 갈데없는 한국의 전형적인 평민이었다. 이 땅의 서민들, 수많은 사람들이 대통령 박정희를 인간 박정희로, 그를 자신과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지도자가 박정희 말고 또 누가 있던가?
어제를 돌아보는 것은, 어제가 내일을 비춰주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어제의 고난과 꿈은 내일도 새롭게 이어져, 어제 내린 비와 눈보라가 용기와 지혜를 주고 꿈길을 열어주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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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스트의 탄생
- 가난한 나라에서 기술대국으로! 이런 사연이 있었네요 -
최형섭 원장은 미국을 돌며 젊은 과학자들에게 “조국을 살려달라” 호소했는데
연구인력을 모으는 것도 한 편의 드라마였다.
초대 원장 최형섭은 미국을 돌며 한인 과학자들에게 호소했다.
그는 돈이 없어 허름한 숙소에 묵으며 조국의 젊은 과학자들의 손을 붙들고 호소했다.
“가난한 조국은 당신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런 정성이 통했음인지 첫해인 1966년 18명이 귀국한 후 1990년까지 영구 귀국한 과학자가 1,000명을 넘었다.
귀국 과학자들은 당시 국립대교수 연봉의 3배를 받았지만, 그것도 미국에 있을 때의 절반이 안됐다.
그런데도 국내에서는 이들을 흘겨보는 이들도 있었다.
주로 서울대학교에 재직 중인 교수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보다 귀국한 과학자들의 연봉이 월등히 높은 것을 알고 이런저런 경로로 문제를 제기했다.
논란이 일자 박 대통령은 그들의
급여 명세서를 훑어 보았다.
그 후 '이대로 시행하시오!'라고
지시했다.
훗날 밝혀진 바에 따르면 박 대통령은 이날 몇몇 과학자의
연봉이 일국의 대통령인 자신의 연봉보다 높은 것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그런 것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이대로 시행하라’는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서울대를 비롯한 국립대 교수들이 제기한 ‘형평성 논란’은
잠잠해졌다.
부자 나라 미국에서 과학자들이 이렇게 유출된 역사는 없었다.
휴버트 험프리 부통령은
‘한국의 젊은 과학자들이 세상에서 제일 부자 나라인 미국을 등지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받고
“KIST의 재미한국인 과학자 유치는 세계 최초의 역(逆) 두뇌 유출 프로젝트다”며 혀를 내둘렀다고 한다.
박정희 대통령이야말로 KIST를 살린 인물이라고 평했다.
“대통령께서는 설립 후 3년 동안 적어도 한 달에 한두 번씩은
꼭 연구소를 방문해 연구원들과 대화를 나눠 연구소의 사회적
위상을 높여주었고, 건설 현장에 직접 나와 인부들에게 금일봉을
주는 등 각별한 신경을 써주었다.”
박 대통령은 그뿐 아니라 국가기관의 부당한 간섭도 원천 예방해 주었다고 최형섭 초대 원장은 기록하고 있다.
“청와대에서 열린 KIST 소장의 임명장 수여식에서 박 대통령은 ‘예산을 얻으려고 경제기획원에 들락 거리지 마라.’
‘절대로 인사 청탁을 받아들이지 마라.’고 당부하셨다.
그것이 오늘의 KIST를 만든 원동력이었다.”
이렇게 어렵게 출범한 KIST는
국가 건설의 초석을 쌓았다.
KIST의 시작은 미약하고 초라하게
출범했으나 그 KIST가 이 나라 과학의 근간이 되었고 기업의 두뇌를 산출해서 오늘의 IT 강국 대한민국을 탄생시켰다!
KIST는 1965년 박정희 당시 대통령과 미국 린든 존슨 대통령이 발표한 '한국의 공업기술 및 응용 과학연구소 설립에 관한 공동성명' 에 근거해 1966년 2월 '한국과학기술연구소'라는 명칭으로 설립됐다.
미국 정부는 당시 베트남전 파병에 대한 감사의 표시로 한국 정부에 1,000만 달러를 원조했다.
원조금의 사용처를 두고 복지사업, 산업체 지원 등 다양한 방안이
검토 되었지만 박 전 대통령은 "과학기술이 한국의 미래"라며
연구소 건립을 지시했다.
연우회 관계자는
"KIST가 설립된 1966년은 한국이 현대 과학기술 연구개발에 나선 원년(元年)" 이라며
"박 전 대통령은 과학기술의 중요성을 알고 있는 '과학대통령' 이었다" 고 말했다.
이후 KIST는 국산 1호 컴퓨터,
자동차와 반도체 원천 기술 등을
개발하며 한국 산업과 과학계를 이끌었다.
한국과학기술원(KAIST), 한국전자통신연구원, 한국생명공학연구원, 한국표준과학연구원 등
20개가 넘는 대학·연구소도
KIST에서 탄생해 독립했다.
'박정희' 이분의 이름 석자와 그를 떠올리면 괜스레 눈가가 뜨거워지고 그리워진다!
마치 많은 이들에게
'엄마가 마음의 고향' 인 것처럼, 이분은 '나의조국 대한민국의
고향'인것 같다!
<최형섭박사(1920~200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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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혼길에 선 어느 노인이 전하는 인생 助言(조언)
- 나의 편지를 읽게 될 고마운 지인들에게!
오늘도
그대들은 바쁜 하루를
보내고 있겠지요?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밥은 꼭 챙겨드세요.
여기까지 와보니
알겠습디다.
비싼 돈으로 산 핸드폰
70프로의 성능은
사용하지도 않았고,
나의 비싼 차도
70프로의 성능은
필요도 없는 것이었고,
호화로운 우리 집도
70프로의 면적은
비여있는 공간이나
마찬가지였으며,
옷과 일용품들
70프로 또한 지극히
필요가 없는 것들이였소!
"살아보니 인생은
경기장과 같더군요"
전반전은
학력, 지위, 권력,
돈을 비기며 살아왔고,
그런것들이
높고 많으면
이기는 것인줄
알았지요!
하지만 후반전은
다릅디다.
전반전의 승리를 위해
청춘을 바쳤던
하나밖에 없는 몸
혈압, 혈당, 당뇨,
뇨산을 낮추기에
후반전은 급급했지요.
전반전은 나보다 높은
코치의 명령을 따라야 했고,
후반전은 나의 명줄을
잡고 있는 의사의 명령을
따라야 했습니다!
이제야 알겠더군요.
전반전에서
높이 쌓았던
모든 것들이
잘못하면
후반전에서
누릴 수가 없다는 걸...
하물며 경기도
중간에 쉼이 있었거늘
나도 쉬며 쉬며
갔어야 했던 것을...
전반전에서 앞만 보고
정신없이 살았던 날들
이제는 씁쓸한
추억으로 남았소...
나의 편지를 읽는
아직은 건강한
지인들에게!
아프지 않아도
해마다 건강검진을
받아보고,
목마르지 않아도
물을 많이 마시며,
괴로운 일 있어도
훌훌 털어버리는
법을 배우며,
양보하고 베푸는 삶도
나쁘지 않으니
그리 한번 살아보시구려!
돈과 권력이 있다해도
교만하지 말고,
부유하진 못해도
사소한것에 만족을 알며,
피로하지 않아도
휴식할 줄 알며
아무리 바빠도
움직이고 또 운동하세요.
3천원짜리 옷 가치는
영수증이 증명해주고,
3천만원짜리 자가용은
수표가 증명해주고,
5억짜리 집은 집 문서가
증명해주는데,
사람의 가치는
무엇이 증명해주는지
알고 계시나요?
바로, 건강한
몸이랍니다!
건강에 들인 돈은
계산기로
두드리지 마세요.
건강할때 있는 돈을
자산이라고 부르지만,
아픈뒤 그대가
쥐고 있는 돈은
그저 유산일뿐이니...
세상에서 당신을 위해
차를 몰아줄 기사는
얼마든지 있고,
세상에서 당신을 위해
돈을 벌어줄 사람도
역시 있을것이오!
하지만 당신의
몸을 대신해
아파줄 사람은
결코 없답니다!
물건을 잃어버리면
다시 찾거나 사면 되지만,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것은
하나뿐인 생명이라오!
내가 여기까지 와보니
돈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무한한 재물의 추구는
나를 그저 탐욕스러운
늙은이로 만들어 버립디다.
내가 죽으면
나의 호화로운 별장은
내가 아닌 누군가가
살게 되겠지요.
내가 죽으면
나의 고급스러운 차 열쇠는
누군가의 손에
넘어가게 되겠지요.
내가 한때 당연한 것으로
알고 누렸던 많은 것들...
돈, 권력 , 지위
이제는 그저
쓰레기에 불과할 뿐...
그러니...
전반전을 살고 있는
사람들아,
너무 총망히
살지들 말고,
후반전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아,
아직 경기는
끝나지 않았으니
행복한 만년을 위해
지금부터라도
자신을 사랑해보세요.
전반전에서
빛나는 승리를
거두었던 나는
후반전은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패배로 마무리 짓지만,
그래도 이 편지를
지인들에게
전할 수 있음에
따뜻한 기쁨을
느낀답니다.
바쁘게 세상을
살아가는 그대들이여...
자신을 사랑하고
돌보며 살아가기를
힘없는 나는
이젠 마음으로
그대들의 행운을
빌뿐이라오!
누구보다도
먼저 웃고 많이 웃는
행복한 나날들로
가득 채우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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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 세대의 만상 ㅡ 친인척 무세대 - 현 세대의 만상
삼촌, 고모, 이모, 친인척이
없다
현 세대는 방향 잃은 시대.
도덕 윤리 법치도 모호하고
정의 균등 공정만 부르짖고
거짓말 궤변만 늘어난다.
먹고 사는 경제 문제도
공짜만 즐기고
투자는 소홀히 넘긴다.
농경. 산업사회 때는
그래도 살만 했었다.
꿈이 있고 인심이 후했고
노소간에도 소통이 되였고
아들 선호. 장남 우선 속에
문중. 제사. 족보와
여러 형제 속에 결혼 출산
우애를 나누며 살아왔다.
지식 정보 사회가 되면서
결혼, 출산, 직업도
능력 고시 사회로
형제도 없고,
딸 아들 구분 없고,
오히려 딸을 더 좋아하고
4촌도 멀어지고,
인성보다 지식이 우선되고.
밥 못하는 석박사 며느리.
설겆이 아기보는 아들.
처갓집에
더 신경쓰는 아들.
벌초 문중 제사도
주관자가 없어지고
"난 어쩔 수 없이
제사(祭祀) 지내지만
자식에겐 안 물려 준다" 는
부모들.
유아기부터 고도의 경쟁.
나홀로 살다 간다는 처녀 총각들,
개. 고양이를 반려자로 모시며
인간보다 나은 세상!
앞으로 각급 학교가 없어지면
개. 고양이 대학교가
생길 것이고,
개. 고양이 죽으면
인간이 조문 시대
개, 고양이 죽으면 화장하여
봉안당에 모시는
시대가 되였으니
개보다 못하는 인간이
소멸되는 것이 아닌지?
원룸이 성행하고
1인 가구는 늘어가지만
인구는 매년 줄어간다.
(여자는 개와 즐기고.
고양이와 살고 있어)
328개 대학이 5년 내
반정도 줄어든다는
말이 나온다.
부모 되기는-- 쉬워도
부모 답기는-- 어려운 시대.
무지(無知)하고 돈 없는
부모(父母)는 설땅이 없다.
아파트마다 잔치, 집들이,
생일이 없어지며,
삼촌 이모가 없어
가족 모임이 없다보니
필요 없는 교자상, 병풍,
밥상이 수북히 버려지고 있다..
어른들도 젊어선 주산(珠算)
문명시대엔 능력이 있었지만,
< 컴퓨터 문명 >
교육을 받지 못해
젊은이에 비해 순발력도
이해력도 앞설 수 없다.
역(驛)이나 터미날에 갈때도
집에서 예매하는
젊은이와 달리
줄을 서서 헤메는
어른들을 볼 수 있고,
식당도 젊은이는 맛집 찾아
예약하고 할인쿠폰으로
싸게 먹는데,
어른들은
뒷골목이나 단골만 찾고,
은행도 젊은이는 이율 높은 은행
인터넷 가입 우대금리를 받는데,
어른들은 번호표 뽑고
줄서서 기다린다.
지하철도 남녀노소
핸드폰만 보고 있어
거들떠보지 않는
젊은이 옆에 서 있는 어른이
되레 민망하여 출입구 쪽으로
피하는 시대이다.
앞으로 아버지도 필요 없고
선생님도 필요 없고
심판도 운전사도
필요없게 되어
직업 중 200여 개가
없어진다고 한다.
예식장 풍경도 주례 없이
컴컴한 곳에서 노래와
괴성을 지르고,
부모. 자신들 편지를 읽고
하객들은 밥표를 받아
부지런히 먹고 나오고,
장례식장도 조화(弔花)만
서 있고 상여(喪輿)도
필요 없이
자동화된 화장율 90%인
세상에서 한 줌 재가되어
한구덩이에 넣는 납골묘나
책장 같은 추모관에 안치되면
끝나는 세상에 우린 살고 있다.
인생살이에 정답은 없다.
세대에 따라 흘러가고
순응해 가야 풍속(風俗)에
따르는 것이다.
슬퍼하거나 비관핱 필요도
없이 현 세대를 고찰할 뿐이다.
짐승만치도 대접 못받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으니...
이노무 세상 어쩔고
우린 살만큼 살았으니
바람은 없네마는.....
막걸리 한 잔 나누는
정이 그립다.
어느덧 12월의
마지막 달력
희망을 가져 봅시다.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으니
다들 건강
유의하시고,
그래도 멋있는 세상이니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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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 손흥민 선수의 미담사례 소개
■ 들어가는말
대한민국의 자랑인 손흥민 선수는 축구뿐만
아니라 정신적인면에서도 월드클레스다.
필자는 다음과 네이버에서 집필자료를 수집
하다가 우연히 손흥민 선수의 미담사례를 발
견하여 필자 혼자만 보기에는 너무 아까워
지인들과 공유하고 싶어 다음과같이 소개드
린다.
■ 미담 사례
1. 영국에서 지난 6년간 100억여원 자선
손흥민 선수는 영국 명문 프로팀인 토트넘에
입단이후 지금까지 약 100억원을 헌납한것
으로 알려졌다.
손흥민 선수는 기부사실을 비밀리에 해왔으나
BBC 방송에 손흥민의 감동적인 기부사실이
제보되어 BBC 방송은 이 헌금사실을 보도하
면서 감동의 눈물을 보였다.
영국 BBC 방송인이 방송중 눈물을 흘렸다는
것은 손흥민이 7,000여만 영국인들을 감동시
키기에 충분한 것이다.
손흥민은 세계적인 축구선수일뿐만 아니라
대한민국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홍보대사이
기도 하다.
2. 축구황제 펠레 병원비 제공
손흥민 선수는 1년 6개월전부터 축구황제인
펠레의 병원비를 토트넘 소속인 동료 히살리
송(브라질 선수)과 분담해왔다.
손흥민 선수는 직접 펠레를 병문환 하였고 종
종 영상통화도 한것으로 알려졌다.
손흥민은 브라질과 16강 경기전 경기결과에
상관없이 펠레가 무사히 항암치료를 마쳤으
면 한다는 덕담을 전했다.
축구황제 펠레는 브라질 선수도 아닌 대한민
국 선수가 이렇게 병원 치료비, 병문환 및 영
상통화등을 해온 손흥민 선수에게 직접 감사
함을 전했다.
3. 벤투 감독에게 10억원 사례금 전달
손흥민 선수는 2022년 월드컵 경기가 끝나고
벤투감독이 포르투칼로 귀국길에 오르자 무려
10억여원을 드려 그간의 노고에 감사함을 표
했다는 것이다.
벤투 감독은 그간 대한축구협회와의 갈등 및
서운함등을 메스컴에 노출시켰지만 손흥민의
이런 사례금은 벤투감독의 마음을 충분히 감
동시켰을 것이다.
손흥민 선수의 이런 각종 선행들을보니 손흥
민을 훌륭히 키워온 손흥민 선수의 부친인
손웅정님의 훌륭한 인품까지도 돋보인다
4. 오현규 선수에게 온정을 제공
금번 카타르 월드컵에는 손흥민 선수가 안면
골절부상으로 출전여부가 불확실해지자 예
비선수로 26명외 추가로 오현규 선수를 동행
하였다.
그러나 월드컵이후 한국축구선수들에게 포상
금은 2억8천만원~3억 4천만원이 지급되었으
나 오현규 선수는 제외되었다.
그러자 손흥민 선수외 26명 전원이 십시일반
으로 돈을모아 오현규 선수에게 전달했으니
이들은 대한민국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정신
을 모범적으로 보여준것이다.
게다가 손흥민 선수는 별도로 오현규 선수에
게 1억원을 전달코자했으나 오현규 선수가 사
양하여 전달하지는 못했지만 오현규 선수가
나중에라도 마음이 바뀌면 다시 연락을 주라
고 했다한다.
■ 맺음말
상기 사례를 보면 손흥민 선수는 그간 알려지
지않은 수 많은 선행들을 해온것으로 추정된
다.
손흥민 선수의 선행들을 보면 선수이전에 훌
륭한 인간이 되라는것을 느끼게 된다.
앞으로 손흥민 선수는 안면골절의 신속한 회
복과 더불어 계속 건승하길 바란다. - 끝
한국문화안보연구원. 부원장. 김 명수 박사
2022년 1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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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의
마지막 금요일
다사다난했던
임인년 그동안
수고가 많았습니다.
세월은 흘러 이렇게
한 해가 저물고
계묘년 새해가
밝아옵니다
2023년 계묘년에도
더 좋은 인연으로
오래 이어가길
기원합니다
새해에는 더 건강하시고 좋은일만 있으시기 바라며
가정에 만복이 있으시길 기원합니다 🙏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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