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부와 말초신경에 생긴 병소가 특징인데, 눈·고환·코와 인두 점막도 침범한다. 나균은 말초신경을 파괴하여 감각을 잃게 하고 차츰 조직이 변성되며 결과적으로 사지(四肢)가 변형되고 파괴된다. 나병에는 크게 2종류가 있다.
나종라(癩腫癩) 또는 피부라(皮膚癩)는 피부 밑이나 상기도(上氣道)의 점막·얼굴·고환 등에 작은 만성염증성 결절을 만드는데, 치료하지 않으면 예후가 나쁘다.
결핵양라(結核樣癩)는 초기에는 가장자리가 붉고 약간 튀어오른 반점이 나타나다가, 나중에는 이 반점들이 커져서 크고 물리적 자극에도 감각이 없는 반점이 생기는 것이 특징이다. 결핵양라는 무활동성으로 남거나 증세가 좋아지기도 하고, 저절로 병소가 사라지면서 완전히 낫기도 한다.
현재 쓰이는 치료법은 2종류 모두
술파제를 장기간 복용하도록 하는 것인데 대부분은 즉시 감염이 그치며 병이 호전되나 심한 부작용이 생길 수도 있고 심지어 증상이 더 나빠질 수도 있다. 때로는 계속 약물치료를 해도 감염이 계속되기도 한다. 1980년대초에 보건담당 관리들은 전세계적으로 나병치료제로서 가장 많이 쓰이는 '답손'(dapsone)에 대한 내성(耐性)이 증가하는 것을 관찰했으며, 따라서 앞으로 나병 발생률이 증가되리라고 예측했다. 나병은 그 기원이 오래되었으며, 지대가 낮고 습한 열대나 아열대 지방에 가장 많이 발생한다. 특히 아시아·아프리카·남아메리카와 태평양 연안의 섬들에서 대다수 환자가 발견된다. 전세계적으로 보고된 환자수는 적어도 200만 명이나 실제 감염된 사람의 수효는 1,100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감염경로는 아직 잘 모르나 감염된 사람과 오랫동안 가까이 신체적으로 접촉하면 감수성이 있는 사람은 대개 감염이 되는 것으로 보인다. 선천성 나병은 알려져 있지 않으며 감염된 부모에게서 태어난 아기를 태어나자마자 부모와 격리시키면 병이 생기지 않는다. 소독이 제대로 안된 바늘로 주사를 맞거나 문신을 새길 때도 전염될 수 있다.
나병을 예방하는 방법은 박테리아 검사에서 양성이 나온 환자들을 격리시킨 뒤 치료하는 것이다. 병이 나은 환자의 재활을 위해서 물리요법, 재건 성형수술, 직업훈련 등이 매우 중요하다
우리나라에서 처음 나병으로 의심할만한 기록이 등장하는 것은 고려 고종때에 간행된
〈향약구급방 鄕藥救急方〉에서이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의서인 〈향약구급방〉에는 천포창(天泡瘡), 양매창(楊梅瘡), 음창(淫瘡) 등을 가장 악독한 창(瘡)이라 기록하고 있는데, 이중의 하나가 나병이 아닐까 추정된다. 이후 발간된 〈삼국유사〉·〈고려사〉·〈향약집성방〉 등에 나병으로 의심되는 병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으나 나병이라는 문자가 뚜렷하게 표기된 것은 조선왕조시대에 들어서이다. 조선 세종대(1419∼50)에는 이미 나병의 전염설을 폈고 격리구호치료라는 나병관리개념을 채택한 사실이 〈세종실록〉 권 41에 기록되어 있다. 문종대(1450~52)에는 구료막(救療幕)을 설치하고 1백여명의 나환자를 남녀별로 수용하여 고삼원(苦蔘元)이라는 약으로 치료하면서 바닷물에 목욕을 시켰다는 기록이 〈문종실록〉 권7에 나타나고 있다. 광해군대(1608∼23)에는 경상·강원·충청도에 환자를 수용, 치료케 하였으며, 도사(都事)로 하여금 각처를 순시케 하여 환자의 상황을 등록시키되 만약 태만한 자가 있으면 엄벌토록 하였다는 기록이 〈광해군 일기〉 권 52에 남아 있다. 조선중기에는 전래의 무속신앙도 큰 몫을 했고 속설에 의한 미신요법도 성행하였다. 즉 기도, 주술, 무복, 속설요법을 사용하거나 인육(人肉)이나 사람의 장기를 약재로 썼다.
광해군 이래 300년 가까이 단절되었던 구라사업(救癩事業)은 서구의 영향을 받아 1909년 다시 태동하기 시작하였는데, 광주의 제중병원장 R.M. 윌슨이 이 해에 광주나병원을 설립하였으며, 이어서 1911년 스코틀랜드의 선교사 매캔지에 의하여 부산나병원이 설립 되었고, 미국인 선교사 A.G. 플레처에 의해 1913년 대구나병원이 설립되었다. 이후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1916년 조선총독부에 의해 전남 소록도에 자혜의원이 설립되어 엄격한 격리를 통한 나병의 치료활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28년에 조선나병근절책연구회가 발족되어 민간구라활동이 시작되자 조선총독부도 이에 대응하여 1932년 조선나예방협회를 창립하였다.
해방후, 일제하에서 경찰행정의 일부로 취급되었던 보건행정이 복지행정으로 개편되면서 구라사업은 질적인 진전을 보이기 시작했다. 1948년 대한나예방협회가 창립되고, 1949년에는 1934년 국립소록도갱생원으로 확대·개편된 소록도 자혜의원을 중앙나요양소로 개칭하고 다시 국립소록도병원으로 발전하게 된다. 한편으로 6·25전쟁 이후 성나자로요양원 등 요양원 및 정착촌이 전국 곳곳에 발족하여 격리, 구호, 치료라는 현대적 개념의 구라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현재 나환자를 위한 치료기관으로는
국립소록도병원을 주축으로 대한나관리협회의 진료소 등이 있다.
현재 나관리사업은 검진 및 환자발견사업, 등록관리 치료사업, 나불구 및 나양로자(癩養老者) 보호, 나정착촌을 자립기반 조성 및 환경 개선, 나병에 관한 교육홍보사업 등을 중심으로 실시되고 있다. 전국의 보건소와 외래진료소 및 나이동진료반이 검진 및 환자발견사업을 펴고 있으며, 환자진료를 담당하고 있는 나전문진료기관을 중심으로 등록관리를 실시하고 1989년부터는 대한나관리협회 본부를 중앙등록소로 정하여 등록사업을 실시하고 있다. 등록된 나환자의 치료는 병의 형태별로 복합나화학요법(複合癩化學療法)에 의한 투약을 통해 이루어진다. 그리고 불구의 정도가 심하거나 노약자로서 무의무탁인 나환자의 경우에는 수용보호시설에서 보호치료하며, 전국 98개 정착촌 중 취약지역에 대하여는 재정지원을 통해 자립기반을 조성하도록 하고 있다. 우리나라의 나병 유병율(有病率)은 나관리사업의 꾸준한 실시로 인하여 매년 감소하고 있는데, 1980년도의 환자수 27,964명(인구 1,000명당 유병율 0.73)에서 1990년도에는 환자수 23,833명(인구 1,000명당 유병율 0.56)으로 감소되었다.
출처: 다음백과
의학역사드라마였던 허준에서도 문둥병에 대해서 나온바 있습니다. 거기서도 인육을 먹는 경우를 보여주는 미신적 행위가 있었다는 점도 들어나지요. 한번 이넘의 영화를 보면서.. 안타까운 비운의 왕 보두엥4세를 보면서 문둥병 관련 한국역사에서의 자료를 올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