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채플린 감독,주연의 연화 <라임라이트>의 OST, 이 음악은 채플린 작곡입니다. 맨 아래는 이 음악을 번안한
<Eternally>인데 잉글버트 험퍼딩크가 부릅니다.
* 지베르니에 있는 모네가 말년에 살던 집
[ 빛의 마술사,끌로드 모네(1840~1926) ]
빛의 화가, 모네. 그는 일생동안 빛을 추구하였습니다. 인상주의라는 단어가 만들어지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화가가 바로 모네였습니다. 1872년 모네는 <해돋이(일출) 인상>이라는 작품을 전람회에 출품했습니다.
전람회를 보러 온 화가, 조젭 뱅상이 이 작품 곁에 서 있는 기자 루이 르르와에게 ‘도대체 이건 무엇을 나타내는 겁니까?”라고 묻자, “해돋이 인상이랍니다.”라고 기자가 답했습니다. 이 대답으로 ‘인상파’라는 단어가 생겨났고 이 단어는 당시 보수적 비평가들에게 야유의 상징이 되기도 했죠. 역사적인 작품 <해돋이 인상>은 아래에서 설명합니다.
그러나 모네는 이 사실을 자랑스러워 했고 평생동안 ‘인상주의자’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1874년부터 1886년까지 계속된 인상파전에 5회에 걸쳐 많은 작품을 출품하며 대표적 지도자로서의 위치를 굳혔습니다.
* 모네의 고향 <르아브르 항> - 모네의 작품
파리에서 태어났지만 영국 해협에 위치한 르아브르 항구도시에서 자란 모네는 사춘기 시절부터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바닷가에서 자랐기 대문에 자연스럽게 그를 도취시켰던 자연은 언제나 지식이나 이성이 아닌 자연 그대로의 인상을 갖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친구들과 미술관에 가도 풍경화 외의 다른 것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습니다.
1865년, 모델이었던 카미유와 사랑에 빠진 모네는 2년 뒤 아들을 낳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엔 창녀와 같은 취급을 받았던 모델을 가족의 일원으로 받아들일 수 없었던 모네의 부모는 경제적 지원을 끊었습니다. 양식과 물감을 살 돈조차 없어 작업을 멈춰야 할 만큼 가난했지만 이 부부에게는 사랑이 있어 행복했습니다. 모네의 그림에 등장하는 여인들은 대부분 그의 부인 카미유이기도 합니다.
* 작품 <아내 카미유와 아들 쟝>
빛에 대한 관찰에 몰두한 그는 이를 화폭에 담는데 일생을 걸었습니다. 예를 들어 <루앙 성당>시리즈처럼 같은 장소를 아침,낮,저녁으로 시간에 따라 다르게 그려내기도 했습니다. 모네의 인상주의는 눈에 비쳐지는 ‘순간성에 대한 끊임없는 추구’이기도 하였습니다. 미묘한 빛과 대기의 흐름, 사물과 풍경의 순간적 화면을 관찰하였는데, 그의 눈은 이미 알고있는 머릿속 지식과는 다른, 새로운 진실을 찾아 내었습니다.
모네는 가장 긴 세월동안 오직 시각에 충실해야 한다는 인상주의 원칙을 굿굿하게 지킨 화가였습니다. 자신의 집 근처 연못에 핀 ‘연꽃’연작을 그리면서 마지막 삶의 순간을 바쳤습니다. 연못 위 연꽃들이 수면에 비쳐 반사되는 빛과 반영의 하모니는 이 작품에게 ‘인상파의 시스티나 성당(미켈란제로의 성화가 그려져 있는 곳)’이라는 찬사를 안겨 주었습니다.
* 작품 <풀밭 위의 점심>
평생 빛을 바라보던 그의 눈은 지쳤는지 결국 눈병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점점 시력을 잃게 되었던 모네는 86세로 생을 마감하였는데 “죽음보다 어두움이 더 두렵다”라고 말하며 그림에 대한 자신의 열정을 토로하였습니다.
[ 아내 카미유의 죽음 ]
* 죽는 순간을 그린 <카미유의 죽음>
1879년 9월 5일 모네는 사랑하는 아내 카미유를 저 세상으로 보냈습니다. 결혼한지 5년만의 일이었습니다. 그로서는 너무도 견디기 힘든 가슴아픈 사건이었습니다.
우리 식으로 이야기하자면 조강지처였던 아내 카미유. 그 아내를 제대로 호강 한번 시켜주지 못한 남편 모네. 그 날 그가 한 지인에게 편지를 보내 "마지막으로 아내의 목에 걸어주게 저당 잡힌 아내의 목걸이를 찾아달아"고 부탁합니다. 이러면서 그는 아내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스스로에 대해 매우 충격적인 경험을 고백합니다.
“내게 매우 소중했던 여인이 죽음을 기다리고 있고 마침내 죽음이 찾아왔습니다.그 순간 나는 너무 놀라고 말았습니다.(아내의 주검 위로) 시시각각 짙어지는 색채의 변화를 본능적으로 추적하는 제 자신을 발견했던 것입니다......저의 깊숙한 본능은 벌써 색채의 변화에 반응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내의 임종 자리에서도 시시각각 변하는 빛과 색채의 상태를 무의식적으로 쫓는 화가. 도대체 그 경황 중에 어떻게 빛과 색의 놀이에 마음을 둘 수 있었을까요? 그는 과연 아내를 사랑하기나 한 것일까요?
그러나 그는 단순히 시각적 효과를 연구,관찰한 것이 아니라 부인의 마지막 이미지를 그 모습 그대로 영원히 기억하려다 부지불식간 빛의 운동 속으로 빨려들었던 것이였지요. 생사를 가르는 절대적 순간에도 모든 사물에 공평하게 스쳐가는 찰나의 빛. 인생의 덧없음과 무상함을 그럴 수 없이 정직하게 가르쳐주는 순간의 빛.
모네의 눈이 그 빛을 쫓은 것은 그만큼 자신이 추구해온 빛 자체가 인생과 세상의 이치를 그대로 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지베르네의 모네의 집 정원 ]
모네는 아내와 사별한 후 4년 후에 알리스 오슈데라는 여인과 재혼하고 1883년,노르망디의 지베르니로 이사했습니다. 그 뒤 죽을 때까지 40여년간 지베르니를 떠나지 않았으니, 그가 얼마나 지베르니에 애착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지베르니야말로 진정 모네 예술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심은 수련이지만, 그 수련의 의미를 이해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오. 나는 그저 보고 즐기려고 수련을 심었던 거지요. 그걸 그리겠다는 생각일랑 아예 없었단 말이오. 하나의 풍경이 하룻밤 사이에 우리에게 그 의미를 온존히 드러내는 법은 없는것이거든요.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연못의 신비로운 세계가 내 눈앞에 드러나기 시작한 거예요. 나는 부랴부랴 팔레트를 찾았지요. 그 이후 이날까지 나는 다른 모델일랑 거의 그려본 적이 없소."
* 작품 <수련>
빛의 마술사 클로드 모네. 인상주의 화가 가운데서도 가장 인상주의적인 그림을 그린 남긴 화가. 그 거장이 말년에 자신의 말처럼 다른 것에 한눈 팔지 않고 집요하게 추구했던 대상이 바로 수련입니다.
그만큼 수련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이 매력적인 모델이었고 그는 아름답고 화사한 꽃그림을 미술사의 화포 위에 무수히 수놓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연못에 수련을 심어 바라보고 싶다는 그의 소박한 소망에서 비롯되었죠. 위대함은 이처럼 소박한 동기에서 출발합니다.
지베르니. 모네가 말년을 살았던 곳. 파리에서 서쪽으로 70킬로미터쯤 떨어진 세느 강변의 마을 이름입니다. 파리 생 라자르 역에서 루알 행 열차를 타고 베르농 역에서 내리면 역 바로 옆에서 지베르니로 가는 버스가 출발합니다 .옹기종기 모여있는 전원주택들과 파리 교외의 부드러운 공기가 퍼져있는 곳. 여기가 바로 그 유명한 모네의 정원이 있는 곳입니다.
* 모네의 정원 그림
"이곳 정원은 무척 아름답습니다. 여기 와서 이 정원을 구경하라고 편지에 쓰고 싶었답니다.정원은 지금이 한창때이니 한 번 와 볼 만할 겁니다." 고 모네는 친구 제프루아에게 편지를 써 보냈습니다.
연못 위로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햇빛. 그 햇빛을 받을수록 더욱 아름답게 피어오르는 꽃봉오리. 그 빛과 색의 잔치는 목욕하는 아름다운 아가씨처럼 보면 볼수록 싱싱하고 화사하기 그지없습니다. 모네의 연못은, 그리고 수련은 바로 그 영원한 님프의 향기로 충만한 세상인 것입니다.
[ 작품 감상 ]
* 해돋이(일출) 인상
이 작품은 햇빛과 기후, 분위기와 색깔이 한데 뒤섞여 아침바다 풍경이 아름답게 보입니다. 그는 아름다운 아침을 그리려 했던 것이 아니라, 그때의 현상이 실제로 눈에 어떻게 보여졌는가를 기록하려고 했습니다.
모네는 이른 아침, 그 순간의 태얍빛과 조성된 포구의 분위기를 바꾸는 순간적인 색채의 변화에 관심을 가졌던 겁니다. 잔잔하게 출렁이는 파도의 움직임과 빨간 해, 배에서 뿜어져 나오는 회색 연기가 어우러져 하늘, 대기, 파도, 배, 보트에 반영된 섬세한 색깔들의 파노라마를 보여줍니다.
모네는 바다의 포구 풍경을 그리기보다는 자기 눈에 느껴지는 색의 감흥인 인상을 그리려 한 것입니다. 사람들이 타고있는 듯한 인상을 주는 몇 척의 보트와 굴뚝에서 연기를 올리는 큰 화물선은 자세히 들여다보면 정확한 형상이 아니라 안개 속의 막연하고 희미한 형상으로 되어 있습니다.
* 양산을 들고 있는 아내 카미유, 아들 장과 산책하기
이 두 그림 속의 주인공은 모네의 아들 쟝과 아내 카미유입니다. 모네는 아내 까미유를 1874년에 만났습니다. 모네의 그림에 자주 등장하는 까미유는 아름답고 청순해 보입니다. 바로 위에 함께 산책하는 그림을 그린 4년 뒤, 1879년 9월 5일, 아내 카미유는 5년의 인연을 접고 모네 곁을 떠나 먼저 저 세상으로 가고 맙니다.
* 생 라자르 역, 기차의 도착
<인상파 전시회>라는 조롱 섞인 비평을 들은 모네를 비롯한 인상파 화가들은 첫 번째 전시회를 열기는 했지만, 여전히 경제적으로 고전을 면치 못하고 있었습니다. 살롱의 환영은커녕, 이들의 그림을 구매해줄 미술 시장은 여전히 성숙하지 않았습니다. 악조건이었죠.
그러나 이들은 아무리 가난해도 예술에 대한 집념을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모네도 힘들기는 마찬가지였습니다. 인상파 화가들이 살아간 방식은 단순했습니다. 한번 큰 건수를 올리면 당분간 작품 활동에 매진하는 식이었습니다. 르누아르가 대표적이었습니다. 초상화를 그려주고 그 돈으로 연명하면서 자기가 그리고 싶은 그림을 그렸던 거죠.
이렇게 첫 번째 인상파 화가전을 한 뒤로 몇 년이 흘렀습니다. 1877년 모네는 엉뚱한 그림 하나를 구상했습니다. 비평가가 내뱉은 비난에서 그림에 대한 발상이 일어난거죠. 어떤 비평가는 인상파 화가전을 둘러본 뒤에, 르누아르의 그림을 두고 “불쌍한 장님 천치들”이라고 조롱했습니다.
안개가 끼어 있는 풍경을 너무 선명하게 그렸다는 것이 불만이었습니다. 모네는 이런 비난을 되받아칠 생각을 했습니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생 라자르 역,기차의 도착>입니다. 안개 타령을 하니 그 안개를 그려서 보여주겠다는 심사에서였습니다.
생 라자르 역을 그리겠다는 마음으로 모네는 역장을 찾아갔습니다. 상상 속에 들어 있는 기차가 아니라 실제의 기차를 그려야 했기 때문입니다. 패기 넘치게 역장을 찾아간 모네는 다짜고짜 자기 자신을 ‘화가 모네’라고 소개했다. 역장은 그림에 대해 전혀 아는 것이 없는 사람이었지만, 당시에 화가라고 하면 대체로 유명인이었기 때문에 얼떨결에 모네의 인사를 받았습니다.
모네는 방문 목적을 간단하게 밝혔습니다. 이 역에 있는 기차를 그리기 위해 왔다고 말이죠. 덧붙여서 근처에 있는 노드 역보다 생 라자르 역이 훨씬 더 그림 소재로 적합하기 때문이라고 이유도 설명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얼굴에 절로 웃음이 피어나는 장면입니다.
역장도 물건인지라, 역장은 파격적으로 화가에게 그림 그릴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모든 기차를 플랫폼에 세우고 엔진에서 연기와 수증기를 내뿜도록 지시했습니다. 그림을 위해 승객의 출입을 일시적으로 금지했고요. 그렇게 해서 탄생한 그림이 바로 <생 라자르 역, 기차의 도착>입니다.
기차의 엄청난 수증기와 연기가 돋보이는 이 작품은 모네의 그림 중 가장 잘 알려진 작품 중의 하나입니다. 모네가 장담한 비평가들의 조롱에 대한 복수는 결국 인상주의의 자부심을 담은 이 작품으로 인해 통쾌하게 이루어졌고, 이 작품은 비싸게 팔리기까지 했습니다.
이 작품은 나중에 <생 라자르 역>의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다시 여러 점이 제작되었습니다.물론 시점을 달리하여 시시각각 변화하는 <라자르 역>의 형상을 묘사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