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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 '조선시대 "서귀포칠십리" ~ 우도(牛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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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에서 바라본.,"서귀포칠십리"
"서귀포칠십리(西歸浦七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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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여행을 하다가 보면
자주 듣게 되는.,"서귀포칠십리"
매우 다양한 의미가 담긴 말이다.
그래서, 서귀포칠십리를
가면 갈수록, 알면 알수록
혼돈스럽고, 헷갈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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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제주 '서귀포(西歸浦)의 상징'
"서귀포칠십리(西歸浦七十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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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부터 어디까지일까?'
'어떤 의미가 담겨있는걸까?'
조선시대 서귀포시 표선면 성읍리 정의현성
그곳에서 서귀포 서귀진(서귀포 방호소)까지
거리를 나타낸.,"서귀포칠십리(西歸浦七十里)"
오늘날은 서귀포를 상징하는 말로 개념 확대.
조선 초, 제주도 3고을(제주목· 정의현· 대정현)
정의현청 관문에서 서귀포 서귀진 관문까지 70리.
......조선시대 제주 3고을.........
조선시대 초인 1416년(태종 16)에
제주도는 고려시대 행정조직이었던
동·서도현(東·西道縣) 제도를 폐지하고,
3읍 행정조직을 도입, 대폭적인 개편 단행.
당시 제주목사 오식 건의에 의해서
한라산 동서로 뻗은 분수령을 경계로
북반면을 제주목으로 하였고, 남반면은
동쪽 정의현, 서쪽을 대정현으로 하였다.
1864년(고종 1) 8월 30일 조정에서
제주목의 정의현과 대정현 2개 현을
군으로 승격시키면서, 제주목사 관할에서
분리시켜 전라도 관찰사 관할 아래 두게 하였다.
하지만, 두 현이 제주목사 지휘권에서 벗어나
점차 체통이 문란해지고, 과폐(科弊)가 일어나는
등 문제점이 지적되면서 1880년(고종 17) 1월 27일
정의현·대정현으로 환원시켜 제주목사 관할 아래 귀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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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권38 정의현조를 살펴보면,
정의현성~홍롯내(洪爐川, 솟밧내) 거리가 64리,
'정의현성 관문 ~ 서귀포 방호소' 거리가., 71리.
1679년(숙종 5) 정의현감 김성구.,남천록(南遷錄)
“정의현청 관아~옷귀 30리, 옷귀~서귀포까지 40리.
그 길은 다 바다와 어우러져 있지만 험한 곳은 없었다.
70리 지나는 동안 옷귀와 쉐둔(효돈) 두 마을을 제외하고
사람 사는 곳이 없었으며 거칠게 멋대로 자란 풀들이 들판에
두루 널려 있고, 보이는 것은 끝이 없었다.” - 남천록(南遷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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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말에 쓰인 『제주읍지』의 「정의현지」를 보면,
“서귀리는 정의현청 관문에서 서쪽으로 70리의 거리에 있다.
천지연도 서쪽으로 70리 거리, 서귀포도 서쪽으로 70리 거리"
최근에 서귀포 해안선의 길이가 70리라는 데서,
또는 서귀포 앞바다의 섬 둘레가 70리라는 데서
‘서귀포 칠십리’란 말이 나왔다는 건 믿기 어렵다.
조선시대 서귀포는 정의현에 속했을뿐,
오늘날과는 달리 이름난 포구가 아니었다.
그러다가 일제 강점기 일본인이 많이 드나들며
제주도 남쪽에서는 가장 중요한 포구로 인식된 것.
조선시대 정의현 우면 지역은
서귀면 또는 서귀읍이라 하면서,
읍과 면의 중심지 역할을 하게된다.
‘서귀포 칠십리’의 유행.
‘서귀포 칠십리’ 말은 민간에서 전해지기도 했지만,
일제 강점기에 가요로 불리면서 더욱 널리 알려졌다.
그러다가, 시인 겸 작사가 조명암.,'서귀포 칠십리'
1936년 박시춘 작곡, 1938년 남인수 노래로 유행하며
일제 강점기 후반부터 전국에 널리 알려졌던.,가요 제목.
1943년 6월 나온 ‘오케(Okeh) 신보(新譜)’로 출반된
음반[음반번호 31167]의 가사를 옮기면 다음과 같다.
가요 : 서귀포칠십리
'시인' 조명암 작사
박춘석 작곡
남인수 노래.
가사 - 1절
바닷물이 철썩철썩 파도치는 서귀포
진주 캐는 아가씨는 어데로 갔나
휘파람도 그리워라, 쌍돛대도 그리워
서귀포 칠십리에 물새가 운다
자갯돌이 철썩철썩 물에 젖는 서귀포
머리 빨던 아가씨는 어데로 갔나
저녁달도 그리워라, 저녁별도 그리워
서귀포 칠십리에 황혼이 졌다
모래알이 철썩철썩 소리치는 서귀포
고기 잡던 아가씨는 어데로 갔나
모래알도 그리워라, 자개알도 그리워라
서귀포 칠십리 맹서가 컸소
가사 - 2
바닷물이 철썩철썩 파도치는 서귀포
진주 캐던 아가씨는 어데로 갔나
휘파람도 그리워라, 뱃노래도 그리워라
서귀포 칠십리에 황혼이 온다.
금비늘이 반짝반짝 물에 뜨는 서귀포
미역 따던 아가씨는 어데로 갔나
은조개도 그리워라, 물 파래도 그리워
서귀포 칠십리에 별도 외롭네.
진주알이 아롱아롱 꿈을 꾸는 서귀포
전복 따던 아가씨는 어데로 갔나
물새들도 그리워라, 자갯돌도 그리워
서귀포 칠십리에 물안개 곱네.
광복 후 조명암이 북한으로 넘어가면서,
추미림·박남포 등의 가공인물이 작사한 것으로
기록되었고, 개사한 재취입 음반이 나오기도 했다.
〈1950년대 재취입 음반 가사〉
바닷물이 철썩철썩 파도치는 서귀포
진주 캐는 아가씨는 어데로 갔나
휘파람도 그리워라, 뱃노래도 그리워
서귀포 칠십리에 황혼이 온다.
은비늘이 반짝반짝 물에 뜨는 서귀포
미역 따던 아가씨는 어데로 갔나
은조개도 그리워라, 물 파래도 그리워
서귀포 칠십리에 별도 외롭네.
진주알이 아롱아롱 꿈을 꾸는 서귀포
전복 따던 아가씨는 어데로 갔나
물새들도 그리워라, 자갯돌도 그리워
서귀포 칠십리에 물안개 곱네.
남인수 & 이난영.
......................................
남인수는 '목포의 눈물'을 부른
가수 이난영의 무릎을 베고
마지막 눈을 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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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과 42세에
폐병으로
떠났다.
남인수(1918~1962)
이난영(1916~1965 )
오늘날 ‘서귀포 칠십리축제’(2011년 17회 개최)
이를 통해 ‘서귀포 칠십리’ 의미를 되새기고 있다.
옛 기록을 분석해 보면,
중산간 성읍리 정의현성에서
서귀포의 서귀진에 이르기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곳을 거쳤음을 알 수 있다.
'정의현성에서
옷귀[衣貴 의귀리]'
거리가 약 30리였다.
성읍리와 옷귀 사이에는
가시리, 신흥2리, 수망리 마을들.
조선 시대 신흥2리는 번성한 마을이 아니었고,
수망리는 의귀리 위쪽에 있는 마을이었으므로,
서귀포칠십리는 두 마을을 거치지는 않은 듯하다.
조선 후기 옷귀에는 동옷귀와 옷귀[의귀리 중심지],
서옷귀[지금 남원2리의 서의동] 등이 있었으며 당시
서옷귀에 옷귀원(衣貴院), 열녀(烈女) 정씨(鄭氏) 비.
옷귀 위쪽에는 수망리가 있었고,
그 서쪽에는 부등개[지금 한남리]
옷귀 위쪽 산간에는 산마장(山馬場)이라는 목장이 있었는데,
조선시대 산마 감목관 김만일(金萬鎰) 및 그 후손이 주로 관리.
옷귀에서 서귀진까지는 40리였는데,
그 사이 큰 마을은 쉐둔[牛屯][상효리]
이 마을은 조선 시대에 ‘쉐둔’이라 부르고
‘우둔(牛屯)’으로 썼는데, 조선후기에는 ‘웃쉐둔.
ᄆᆞ을’이라 하여 ‘상우둔촌(上牛屯村)’으로 썼다.
그러다가 ‘우둔(牛屯)’은 ‘효돈(孝敦)’으로
바꾼 뒤부터 ‘상효(上孝)’라 했다. 상효 동쪽에는
호촌(狐村)[나중에는 예촌(禮村)으로 바꿈]이 있었다.
호촌과 쉐둔은 영천내[효돈천]를 경계로 나뉘는데,
마을 위쪽에 있는 목장도 이 내를 경계로 나뉘었다.
곧 동쪽은 산마장이 되고, 서쪽은 9소장이 되었다.
영천오롬[靈泉岳] 서쪽 영천내[靈泉川]에는
영천관(靈泉館)과 영천사(靈泉寺)가 있었다.
[서귀포와 주변 관광지와 문화재]
서귀포는 탐라가 중국 원나라에 조공할때인
고려 시대에는 후풍처(候風處)로 이용되었고,
일제 강점기부터 중요한 포구로 이용되었다.
서귀포 앞 바다에는 범섬[虎島], 섶섬[三島],
문섬(文島), 옷벗은섬, 두라기섬 등이 있다.
그 안쪽에는 천지연폭포가 있고, 그 동쪽에는
정모시폭포[오늘날은 정방폭포라 한다]가 있다.
서귀포 서쪽에는 세미양오롬[삼매봉]이 있고,
그 굼부리[분화구]에는 하논[大畓]이 형성
되어 있고, 그 안에는 망소[藻淵]가 있다.
서귀포 바로 서쪽 해안가에는
'제주도 지질공원' 서귀포층이 있다.
이곳에는 천지연 폭포 입구에서 서쪽 해안가
절벽까지 1.5㎞에 걸쳐서 해양 퇴적물 층이 형성.
문섬과 범섬 일대는 천연기념물 제421호 지정
문섬에는 감탕나무 참식나무 등 27종 상록활엽수.
특히 커다란 담팔수나무가 많이 자생하고 있어서,
제주도의 상록수림지대의 원식생이 그대로 보존되어
학술 연구 자료로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천지연폭포 일대 난대림지대
천연기념물 제379호로 지정.
폭포 아래 소에는 무태장어 자생지
천연기념물 제27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방폭포는 바닷가로 직접 떨어지는
동양 유일 해안 폭포로 각광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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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칠십리’의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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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귀포 칠십리 시 공원
서귀포 칠십리 시 공원은 서귀포시
서홍동 천지연폭포 서남쪽 언덕을 끼고
조성되어 2007년에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이곳은 효돈동 바닷가 쉐소깍에서 시작하여
호근동 바닷가 웨돌개에 이르는 제주 올레 6코스
이중섭 미술관에서 시작하여 소암 기념관까지 연결
생전에 이중섭 ‘작가의 산책길’에도 포함되어 있다.
천지연폭포와 새섬·서귀항·문섬 등을 포함하는
서귀포 해안 경관,서귀포에 바라보는 한라산 경관
등이 아름다워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고 있는 곳이다.
2. 서귀포 칠십리 야외공연장
서귀포 칠십리 야외공연장은 서귀포시 서홍동
천지연 폭포로 들어가는 입구 서남쪽인 서귀항
안쪽 칠십리로에 접해 있다. 서귀포시의
주요 야외 공연을 즐길 수 있는 곳이다.
3. 서귀포 칠십리 축제
서귀포 칠십리 축제는 서귀포시를 대표하는 행사 중 하나.
1995년에 처음 시작하여 2012년 현재 18회째를 맞고 있다.
이 축제는 해마다 9월 말이나 10월 초에, 짧게는 3일, 길게는
6일에 걸쳐, 천지연 폭포 일대와 서귀포시 일원에서 진행된다.
축제 주요 내용은 칠십리 대행진, 개막행사와 공연,
해순이 섬돌이 선발 대회, 미스터 칠십리 선발 대회,
칠십리 가요제, 새연교 문화 예술 공연, 시민화합 한마당,
향토 음식점 운영 등이 있으며 이 축제는 문화관광부에서
2012년 문화 관광 유망 축제로 선정된.,서귀포 칠십리 축제.
4. 서귀포 칠십리 국제 걷기 대회 축제
서귀포 칠십리 국제 걷기 대회 축제는
1999년 처음 시작해 2012년 14회를 맞이.
해마다 3월 넷째주 토요일과 일요일.
서귀포 월드컵 경기장을 출발하는데,
서귀포시 자연 경관을 배경으로 해서
10㎞·20㎞·30㎞에 걸쳐 걷기대회 행사.
이 축제는 국제시민스포츠연맹[I.V.V.]이 공인행사,
참가자들에게 완보증·완보훈장 등 푸짐한 상품제공.
국내외 관광객과 시민이 함께 환상의 코스를 걸으며
우정을 나누고, 이웃을 생각하고, 자연을 생각케 하는
소중한 기회를 맛볼 수 있어서, 참가자 건강도 지키고
서귀포 관광도 즐기는 서귀포칠십리 국제 걷기대회 축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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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 칠십리」는 조명암이 작사, 박시춘 작곡,
당시 유명가수 장세정이 노래를 부르기로 했으나,
남인수의 요청에 의해 남인수가 부른 대중가요이다.
「서귀포 칠십리」는 1934년 6월에 O.K레코드사의
이철 사장과 함께 제주를 다녀간 조명암이 작사했다.
1937년 발표된「서귀포 칠십리」는 당시 일제 강점기의
많은 이야기를 간직해 서귀포를 전국에 알리게 되는 계기.
1930년대 후반만 해도 보잘것 없는 촌락.,서귀포.
이곳을 널리 알리게 된 것은 '서귀포 칠십리' 노랫말.
이는 일제 치하에 억눌려 살던 국민들에게 끝없는 향수와
애틋한 그리움을 이끌어내면서 큰 인기를 끌게 되었고, 덩달아
서귀포 지역이 자주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리는 계기가 되었다.
바닷물이 철썩철썩 파도치는 서귀포
진주 캐는 아가씨는 어디로 갔나
휘파람도 그리워라 뱃노래도 그리워
서귀포 칠십리에 황혼이 온다
금 비늘이 반짝반짝 물에 뜨는 서귀포
미역 따는 아가씨는 어디로 갔나
금조개도 그리워라 물 파래도 그리워
서귀포 칠십리에 별도 외롭네
진주알이 아롱아롱 꿈을 꾸는 서귀포
전복 따는 아가씨는 어디로 갔나
물새들도 그리워라 자개돌도 그리워
서귀포 칠십리에 물안개 곱네
[내용]
서귀포 칠십리를 부른 남인수의
미성과 가창력은 일제강점기 격동기인
1940년대를 풍미하고, 금지곡·개사곡·해금 등의
우여곡절 끝에 노랫말이 더욱 서정적으로 되었다.
가사 처럼 당시 조명암이 본 서귀포구는
천혜의 자연 포구였고 동쪽으로는 정방폭포
서남머리 단애에서 서쪽으로는 남성동 절벽과
외돌개 기암에 이르기까지 절경아닌 곳이 없었다.
또한 그 앞의 범섬·새섬·문섬·섭섬이
미려하게 자리 잡은 사이로 통통배와
고깃배가 오고 가고, 해녀들의 물질하는
모습까지 가미된 해안 풍광이 담긴 노랫말.
[의의와 평가]
지난 1993년 금지가요 해금조치에 의해 「서귀포 칠십리」는
당시 일본에서 가수로 활동 중이던 이성애가 일본어로 취입하여
오사카 등지에서 부르게 되었다. 이에 당시 나이 많은 제주 출신
재일동포들에게는 고향의 향수를 달래주는 최고의 노래로 자리매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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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시는 서귀포의 대표적 가요인 「서귀포 칠십리」와
작사가 조명암을 기리기 위해 1997년 외돌개 해안 동쪽 구릉에
조각가 이영학이 제작한 무쇠 노래비를 세웠다.
그러나 지난 2003년 9월에 불어 닥친 태풍 매미로 인해
노래비가 부서졌기 때문에 오는 2004년 8월 천지연폭포
북쪽 절벽 위에 조각가 김혜숙 작품으로 화강암 노래비.
버튼식 음향장치를 설치하여 버튼만 누르면
서귀포를 소재로 한 노래를 들을 수 있게 운영.
우도에서 바라본.,성산 일출봉.
우도
우도
우도 등대
우도
성산 일출봉 & 우도.
서귀포칠십리/ 노래 : 남인수
서귀포칠십리 축제
..................서귀포칠십리 축제...............
제주도 서귀포시에서 매년 열리는 지역 축제.
서귀포시의 축제 중 가장 규모가 큰 축제이다.
원래 ‘칠십리’는 정의현청이 있었던 성읍 마을에서
서귀포 포구까지의 거리적 개념으로 사용되었는데,
오늘날 서귀포의 신비경을 대변하는 고유명사로 사용.
주요 프로그램 - 무대에서 펼쳐지는 문화예술 공연.
불로장생을 테마로 한 다양한 프로그램 등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칠십리 대행진.
2006년 7월 1일 제주특별자치도가 되면서
서귀포 시민, 남제주 군민[17개 읍·면·동]이
설화· 민속· 문화를 재현하는.,주민 참여 행사.
서귀포 칠십리 축제는 1995년부터 개최 시작.
처음에는 前 서귀포시민 중심으로 이루어지다가
2006년 7월 1일 제주특별자치도가 되면서 통합된
서귀포 시민과 남제주 군민이 함께 하게 되었다.
제17회 서귀포 칠십리 축제는
2011년에는 10월 1일부터 3일까지
서귀포 칠십리 詩 공원 일대에서 진행.
2011년 서귀포 칠십리 축제가
문화 체육 관광부에서 선정하는
‘2012년도 문화 관광 축제 유망 축제’.
4천 2백만원 인센티브를
관광 진흥기금으로 받았다
....................................
.................서귀포 칠십리 축제
서귀포시의 축제 중 가장 규모가 큰 축제이다.
원래 ‘칠십리’는 정의현청이 있었던 성읍 마을에서
서귀포 포구까지의 거리적 개념으로 사용되었는데,
오늘날 서귀포 아름다움과 신비경을 대변하는 고유명사.
주요 프로그램으로 무대에서 펼쳐지는 문화 예술 공연과
불로장생 테마 다양한 프로그램 등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중심이 되는 것은 2006.7.1부터 시작된.,칠십리 대행진.
제주특별자치도가 되면서 통합된 서귀포 시민과
남제주 군민[17개 읍·면·동]이 참가하여 각 고장이
설화·민속·문화를 재현하는 지역 주민 참여 행사이다.
서귀포 칠십리 축제는 1995년부터 개최되기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통합되기 전 서귀포 시민 중심으로 이루어지다가
2006년 7월 1일 제주특별자치도가 되면서 통합된 서귀포 시민과
남제주 군민이 함께 하게 되었는데 제17회 서귀포 칠십리 축제는
2011년 10월 1일부터 3일까지 서귀포 칠십리 시(詩) 공원에서 진행.
2011년에는 서귀포 칠십리 축제가 문화 체육 관광부에서
선정하는 ‘2012년도 문화 관광 축제 유망 축제’로 선정되어,
4천 2백만원 인센티브를 관광 진흥 기금으로 지원받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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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 걸그룹' 팔산대
'탐라국입춘굿'., 공연
탐라국입춘굿 전야제.
서귀포칠십리 축제
서귀포칠십리 축제.
제주도 태풍전야
1950년.,서귀포 & 새섬.
서귀포칠십리.
조선시대 정의현은 오늘날 서귀포시 동쪽 지역.
즉, 남제주군 서쪽은 대정현이고, 동쪽은 정의현.
정의현은 '서귀포~우도' 제주도 1/4., 동남쪽 지역.
조선시대 새로 부임한 정의현 현감이
성읍 객사에서 출발하여 서귀포구까지
초도순시를 나섰던 길의 거리가 70리였다.
서귀포 일대.
한라산 동남쪽,
성산 일출봉 & 우도.
서귀포시(남제주군) 지역.
주민들의 고향.,'서귀포70리.'
제주도 서귀포 보목리 앞바다.,지리돔 물회 맛.
청보리 익어갈 무렵인 5월이 가장 맛있다고 한다.
자리돔은 젓갈을 담그기도 하고, 구이로 먹기도 한다.
자리돔은
서귀포칠십리
제주도민에게는
고향과 같은.,음식.
객지를 떠돌아다니거나
고향이 그리운 해외동포는
자리돔 젓갈로 향수를 달랜다.
'자리돔을 뼈째로 썰어 채소와 함께 토장으로 양념하여
찬물을 부어 먹는 자리물회는 서귀포 여름 음식의 대명사.
서귀포 자리돔은 청보리가 익을 무렵인 5월이 가장 맛있지.'
서귀포 해안가 주민들에게
고향을 떠나, 객지에 나가면
또 다른, 마음의 고향은.,새섬.
자나 깨나, 앉으나 서나
눈앞에 보이던., 고향의 새섬.
꿈결에 들려오는 자장가 파도소리.
서귀포동 아랑조을거리.,안덕계곡.
서귀포 앞 새섬은 본래 썰물 때만 들어갈 수 있는 곳.
2009년 9월에 새연교가 놓이면서 관광명소로 떠올랐다.
'서귀포항~새섬'을 연결하는 길이 169m, 높이 45m 새연교.
'새섬'을 한 바퀴 도는 산책로.,1.2㎞.
서귀포에서 새로운 인연을 만든다는 길.
새연교는 일출부터 밤 10시까지 개방한다.
야경까지도 아름다워
낮도 좋고 밤도 좋은 곳.
새연교.
서귀포의 '낭만과 예술.'
'문화 행사'가 잦은.,새연교.
유명 연예인들이 즐겨 찾는 곳.
인근 '카악'의 최고명소.,쇠소깍.
'민물 &바닷물'의 어울림.,'‘쇠소깍.'
깊은 수심, 기암괴석, 소나무 숲.,조화.
국가지정문화재 명승인 쇠소깍은
'하효동~ 남원읍 하례리' 효돈천 하구.
'소가 누워 있는 형상의 연못'이라는 뜻말.
쇠소깎.
‘쇠소’ + '마지막을 뜻하는.,'깍.'.,제주 방언이다.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유난히 푸르고 맑은 연못.
썰물 때 솟는 지하수 경관도 바라볼 수 있는.,쇠소깍.
쇠소깍은 서귀포 칠십리에 숨은 비경 중 하나.
'감귤 주산지' 마을 곳곳마다 향긋한 감귤 냄새.
돈내코 탐방로는 '서귀포 ~한라산' 유일한 등산로.
돈내코 탐방로는 고도에 따라 수직적으로 분포된
기후변화에 따른 식물 변화상을 관찰할 수 있다.
동백나무, 사스레피나무 등 상록 활엽수림.
단풍나무, 서어나무 등 낙엽 활엽수림.
구상나무, 시로미 등 한대수림.
약 7㎞ 탐방로는. 편도 3시간 30분 소요.
돈내코 유원지 상류.,탐방안내소(해발 500m).
평궤대피소(1450m)~한라산 남벽 분기점(1600m).
남벽분기점., 6월 6일 진달래꽃 & 설경.
'평궤~남벽' 일대는 백록담 현무암이 넓게 분포해 있고
작은 용암 동굴, 백록담 라바돔(용암 언덕)을 볼 수 있다.
윗세오름과 연결된 남벽 순환로 따라가면.,'어리목 & 영실'.
윗세오름.
표선면 가시리 따라비오름은 제주도 368 오름 중 여왕.
북쪽에 새끼오름, 동쪽에 모지오름, 장자오름이 있기에
가장 격이라고 하여 ‘딸 애비’ ‘따래비’ 등으로도 불리운다.
따라비오름.
높이 342m, 둘레 2633m.,따라비오름은
가을에 출렁이는 은빛 억새 물결이 장관.
그곳 인근 갑마장길도 유명세를 타고 있다.
갑마장은 조선시대 최고급 갑마를 키우는 국영목장.
광활한 초원, 억새밭, 따라비오름 등이 멋진 갑마장길.
'제주마 유물 등 100여점 전시장' 조랑말 박물관도 있다.
'섶섬이 보이는 풍경.' - 서귀포 이중섭 미술관.
제주도를 즐겨찾는 사람들은
누구나 한번쯤은 새섬이 보이는
서귀포를 이상향으로 여기게 된다.
'여기 이대로.,
눌러앉아 살까?'
그리하여, 최근에는
'서귀포칠십리' 유토피아.
'유토피아 출발점' 이중섭거리.
1952 국방부 정훈국 종군화가단 단원.,이중섭.
1916년 4월 10일 ~ 1956년 9월 6일 (향년 40세)
한국 근대미술을 대표하는 서양화가의 한 사람이다.
서귀포 이중섭거리.
이중섭거리 작은 음악회
천재화가 이중섭(1916~1956)은 1951년 1·4 후퇴 때
고향 평남을 떠나 부산에 잠시 머물다가 서귀포로 피란.
서귀포 새섬이 보이는 초가집 한평 남짓 셋방에서
피란살이를 하다가 그해 12월에 서귀포를 떠났다.
1997년 그는 옛 삼일극장 일대를 ‘이중섭거리’로 명명.
서귀포에서 세들어 살던 초가집을 복원하였고
2002년 11월에는 그옆에 이중섭미술관을 세웠다.
부인 야마모토 마사코는 그의 유품인 팔레트를 기증.
이중섭으로부터 '사랑의 징표'로 받았던., 팔레트.
70년간 고이 간직하다가 서귀포 시민을 위해 기증.
서귀포칠십리는 타향살이 실향민에게 마음의 고향.
.........서귀포 칠십리(西歸浦 七十里)...........
1938년 조명암 작사「서귀포 칠십리」노랫말이
박시춘 작곡, 남인수 노래로 널리 알려진.,유행가.
일제강점기에 제주도민의 정서가 가득 담겨있는 노래.
끝없는 향수, 애틋한 그리움을
불러 일으키는.,"서귀포 칠십리".
일제강점기 탄압을 피해 고향을 등졌던 제주도민들.
타향살이의 설움을 달래주던 노래가.,서귀포 칠십리.
서귀포 칠십리 제주도민들의 향수가 가득 담겨진.,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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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수.
........'서귀포70리' 자연경관 23선...
색달해안 갯깍주상절리대, 쉬리의 언덕,
중문해수욕장, 중문 대포해안 주상절리대,
천제연폭포, 천지연폭포, 정방폭포, 엉또폭포,
소정방폭포, 월평 해안경승지,강정천, 외돌개,
섬속의 섬, 서귀포 칠십리 해안경승지, 소남머리,
거문여해안 경승지, 쇠소깍, 거린사슴 전망대,
영실기암, 제2산록도로, 돈내코, 선돌, 백록담.
..............서귀포 70리 자연생태체험 14선...............
서귀포자연휴양림, 하논, 솜반내, 서귀포 해안산호군락,
군산, 고근산, 각시바위, 삼매봉, 제지기오름, 한라산영실 숲,
녹차재배단지, 한란, 담팔수나무자생지, 도순동 녹나무 자생지군락.
......................서귀포70리 문화유적체험 12선......................
서귀포 층의패류화석. 예래동 환해장성. 서귀포 연대방어유적.
무오법정사 항일운동발상지, 존자암지, 법화사지, 하원동 탐라왕자묘,
황우지 해안 열두굴, 서귀진지, 서불과지, 영천관지, 막숙 등.,12선.
..........................서귀포70리 생활문화유산 9선.........................
서귀포 잠녀, 서귀포 향토오일시장, 제주전통초가모형제작가 송기홍,
서귀포돌담, 서귀포감귤, 지장샘, 갈옷, 자리테우, 서귀포 자리물회 축제
......서귀포70리 축제 및 민간신앙...
서귀포칠십리축제, 칠선녀축제, 당굿.
겨울바다펭귄수영대회, 백중날물맞이 등.
서귀포시(西歸浦市)는 제주특별자치도 남부 행정시.
과거 남제주군에 속했으나 서귀포항을 중심으로 도시화.
1981년 자치시, 특별자치도 출범후 남제주군과 통합된 행정시.
1915년 서귀는 제주도 우면, 중문은 좌면,
1935년 서귀면과 중문면으로 개칭되었다.
1946년 제주도에 도제(道制)가 실시되었다.
옛 대정군과 정의군을 관할로 남제주군이 설치되었다.
현 시가지는 각각 남제주군 서귀면, 중문면이 되었다.
1956년 서귀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1년 7월 1일 서귀읍과 중문면이 통합
남제주군으로부터 분리되어 시로 승격하였다.
2006년 7월 1일 제주특별자치도의 출범과 함께
남제주군과 통합됨과 동시에 자치시와 달리
지방자치단체가 아닌 행정시로 전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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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초 제주목사 오식의 건의에 따라
1416년 한라산 남쪽에 정의현, 대정현이 설치.
서귀읍 지역과 동쪽의 읍면은 정의현,
중문면 지역과 나머지 읍면은 대정현.
조선 태종 때에 서귀는 정의현의 우면,
중문은 대정현의 동좌면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서귀포는 대정현과 정의현 관아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일찌감치 소외되었던 서귀포 일대.
해안가 기암절벽, 폭포, 섬, 항구 등.,총면적 870.40㎢.
인조 7년(1629년)부터 순조 말, 1825년까지 200여년 동안
출륙금지령’에 묶인 이곳 주민들에게는 창살 없는 감옥 생활.
범선 운항은 금지되고, 떼배 만 섬주위를 돌며 물때를 기다렸다.
조선시대 약 200년 간 출륙금지령에 묶여 살았던.,제주도민.
조선 말, 출륙금지령이 풀렸지만, 일제치하에서 강제노역 동원
태평양전쟁 징병 등으로 고향을 떠나야만 했던 이곳 제주도민들.
본래, 서귀포칠십리 사실기록은 1416년(조선시대 태종16년).
제주가 '제주목, 대정현, 정의현' 3 행정구역으로 나뉘었고.
1423년(세종 5년)에는 안무사 '정간'에 의하여 정의현청(고성)이
서귀포 표선면 성읍마을로 이전되면서 '서귀포70리' 개념이 싹텄다.
1653년 제주목사 이원진 발간 탐라지에 의하면,
서귀포는 정의현청에서부터 서쪽70리에 있으며,
원나라에 조공을 바칠때 순풍을 기다리던 후풍처.
'서귀포70리'는 정의현청이 있었던 성읍마을에서
서귀포 포구까지의 거리를 알려주는 개념이었으나,
제주도민 마음 속 이상향 이어도 같은.,서귀포 칠십리.
조선시대 출륙금지령으로 항로가 봉쇄된.,서귀포.
출륙 관문도 '조천진 & 화북포구' 2곳 만으로 제한.
공무에 해당하는 사람 만이 육지를 오고 갈 수 있었고
특히, 제주도민 인구 감소를 막기 위해
여자가 출륙하는 것은 더욱 엄격하게 금지.
특히, 제주 해녀에게는 엄격하게 적용되었다.
조상 대대로 바다에 의존하여 살아왔던
'서귀포 70리' 지역의 해안가 제주도민들은
이때부터 달리 살아 갈 방도를 찾아야 하였다.
서귀포 칠십리 해안가 주민들은 대부분
중산간마을로 삶의 터전을 옮겨야 했다.
삶의 무게가 벅찰때 언제나 안식과 위로,
그리고 꿈과 희망을 안겨주는 이어도 처럼,
'서귀포칠십리'는 정의현 주민 마음 속 이상향.
서귀포 70리.
성산 일출봉은 말을 키우는 국영방목장.
우도는 주로 소를 사육하는.,국영방목장.
이 일대 주민들은 남자는 목부, 여자는 해녀.
두곳 외 서귀포 70리 해안가 주민 대부분
조선시대 '출륙금지령'이 해제되기 전까지는
남제주군 중산간마을로 들어가서 살아야 하였다.
'서귀포 70리'는 이상향을 대변하는 고유명사.
정방폭포 '서불과차' 전설, 성산일출봉 & 우도.
'서귀포70리'유람선에서 바라다보는.,정방폭포.
정방폭포.
이를테면, 서귀포70리 비경 자체가 이상향이 된 것.
서귀포의 뿌리와 정서를 함축한 개념으로 정착되어
잃어버린 고향으로 안식처의 대상이 된.,서귀포70리.
제주도 남서부에 위치한.,대정현( 추사 적거지)
조선시대 제주도 본섬 서쪽의 행정 중심지.,대정현.
조선왕조 500년간 대역죄 유배인 200여명이 거쳐갔다.
하여, 제주도 유배문화를 대표하는.,대정현.
'추사 김정희'의 적거지가 대표적인 문화유산.
그곳 한칸방에서 9년을 머물면서 추사체를 완성.
추사 김정희 - 세한도.
제주도 남동부에 위치한.,정의현(성읍 민속마을)
조선시대 제주도 본섬 동쪽 행정 중심지였던.,정의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남원읍·표선면 옛 고을.
정의현은 본래 탐라국 영역이었는데,
고려시대 14세기 초에 동도현을 두었다.
조선시대 1416년에 제주 안무사 오식의 건의에 의해
한라산 남쪽을 동서로 나눠 동쪽에 정의현을 두고 현감을 파견
1864년(고종 1) 정의군, 1895년 제주부, 1896년에 전라남도에 소속.
1914년 군면 폐합에 따라 제주군에 병합되었으며,
1935년 정의면이 성산면으로, 동중면이 표선면으로,
서중면이 남원면으로, 우면이 서귀면으로 개칭되었다.
1946년에 제주도가 전라남도로부터 분리되어
도로 승격되면서 설치된 남제주군의 일부가 되었고,
2006년 제주특별자치도가 되며 남제주군은 서귀포시로 통합.
오늘날, 남제주를 총칭한.,서귀포시.
서귀포 칠십리 해안은., 남제주 해안가.
'제주도 본섬 절반에 달하는 남제주.,서귀포시.
1467년(세조 12년), '대정현과 정의현'의 중간 지점에
역원(驛院)이 없어 불편함을 해소하기 위해 세운.,영천관.
조정 또는 전라감영에서 제주로 출장온 관리들의 숙박장소.
영천관에 머물던
관리들을 접대하던
장소가 바로 예기소.
조선 초에는 목마장(牧馬場)을 효율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제주 중산간지역(해발 200~600m)을 10 소장으로 구획할때
서귀포는 '9 소장'의 중심지로서 점마소(點馬所)가 설치된 곳.
목마장 9 소장의 말들을 이곳으로 통과하게 하여
말의 숫자나 관리상태를 점검하던.,점마소(點馬所).
한때 절제사가 국마로 쓸 말들을 점검하러 올 때
‘잘 봐주십사’하고 접대하면서 시중들던 곳이.,예기소.
절벽에 밧줄을 매달고, 기녀(예기)로 하여금 춤추게 한 곳.
학림천.,예기소.
그 위에서 춤추던 기생이 발을 헛디뎌 떨어져 죽은 후,
관리들의 향연은 금지된 이곳을 ‘예기소’라 불렀다 한다.
대정현과 정의현 100리길 중간에 있었던.,영천관 & 예기소.
이곳에 국영목장이 형성된 시기는 세종 때였다.
세종의 총애를 받던 제주 출신 고득종의 건의에 따라
이곳 '십소장'(十所場)과, 제주도 동부 해발 400m 이상
산간지역 '산마장'(山馬場)이 대표적인 국영목장이었다.
정조 16년 '제주 삼읍지'에 사육마수는 1573필.
산마장에는 '갑마장'(甲馬場)을 두어 산마 가운데
골라 낸 품질이 가장 뛰어난 '갑마'를 따로 관리했다.
군두, 목자가 침장에 118명.
녹산장과 상장을 합쳐서 42명.
산마장은 산마감목관 밑에 마감과 군두, 군부, 목자를 배치.
정조 18년에 암말 100필과 수마 15필로 패(牌)를 편성하였다.
매 패에 목자 10명을 배치하여.,산마장에서 사육하는 말을 관리.
조선 최고의 말을 사육했던 갑마장은
표선면 가시리 일대의 번널오름, 따라비오름.
큰사슴이오름 초지대에 1794년부터 100년 동안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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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귀포는 1920년 초만 하여도 단순한 어항이었으나,
1925년 조도와 육지를 연결한 216m의 방파제를 축조.
1962∼1966년 사이에 항내의 준설, 1967∼1976년 사이에
물양장·방파제 공사를 실시하여 현재, 서귀포항에 이르렀다.
1996년 서귀포항 외항방파제 공사에 착공하여 완공하였고,
2001년에는 외항 안벽축조 공사를 시작하여 마무리지었다.
2009년 현재 주요 항만시설로는
안벽 1,410m, 방파제 1,831m, 물양장 817m
선박 접안능력은 11척으로 5천톤급 2척, 3천톤급 7척,
1천톤급 2척이며, 연간 하역능력은 187만 8천톤 규모이다.
조선 숙종 때 제주목사 '이형상'이 관내를 순시하며
제주도에서 거행되는 행사장면을 남긴 화첩.,'탐라순력도'.
이곳에서 배를 띄워 풍류를 즐긴 그림., 정방탐승(正方探勝).
정방폭포는 '영주10경(瀛洲十景)'의 하나인데,
조선 후기 제주도 향토 학자이던 이한우(李漢雨)가
제주도의 10 가지 경승을 선정하여 일컫었던.,영주 10경.
서귀포 정방폭포(명승 제 43호)는 바다로 떨어지며
해안 절벽에'徐市過此(서불과차)' 암각이 새겨져있다.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보냈던 서불이 남긴 흔적.
......................서귀포 유래......................
기원전, 폭군 진시황 곁을 떠나고 싶었던 신하.,서불.
진시황에게 불로초를 구해 오겠다고 아뢰었다고 전한다.
진시황은 불로초를 구해오면 진나라 절반을 주겠다고 약속.
齊人徐市等上書言 "海中有三神山, 名曰蓬萊、
方丈、瀛洲, 僊人居之. 請得齋戒, 與童男女求之."
於是遣徐市發童男女數千人, 入海求僊人.
제(齊) 사람 서불 등이 글을 올려 말하기를,
"저 멀리 바다 건너 봉래(蓬萊), 방장(方丈),
영주(瀛洲)의 삼신산(三神山)에 신선이 사는데,
동남동녀를 데리고 가서 모셔오고자 합니다."
이에 서불을 보내 동남동녀 수천을 뽑아
바다로 나가 신선을 찾아오게 하였다.
- 사기(史記) 권6 .,진시황본기 -.
BC219년(진시황28년).,1차 원정 당시 기록.
BC220년(진시황29년)., 2차 원정을 떠난.,서불.
BC220년(진시황29년) 서불은 삼천동자를 거느리고
해금강을 거쳐 제주도 한라산을 유람한 후 일본에 귀화.
기원전 210년 그는 진황도를 떠나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훗날, 진시황에게 잡힐 것이 두려워 남겼다는.,'徐市過此.'
'진시황이 운명하는 순간까지도 돌아오지 않았다.'던.,서불.
그의 묘는 '와까야마'에 있고 구례읍 서시천에도 족적이 있다.
2차 원정 때도 서불은 60척 배와 5,000명 일행,
3천 동남동녀와 각 분야의 장인들이 동반하였고
오곡 종자와 여러 장인들의 만든 것을 가져간.,서불.
그후, 서불은 일본 '와까야마' 섬에 머물면서
왕이 되었고 그곳에서 운명하였다고 전해온다.
서불이 지리산을 오르기 위해 건넜던 개울.
서불(徐市)을 '서시'로 잘못 읽어서.,'서시천'.
여수시 연도와 통영시 소매물도에도 서불이 다녀간 흔적..
제주도, 여수, 구례읍 서시천, 일본 와까야마까지 남긴 족적.
진나라 - 강화 - 제주도 - 해금강 - 구례- 지리산 - 여수 - 일본.
17세기 제주에 표류한 하멜이 조선 억류 후 탈출한 여수 - 일본.
기원 전, 서불의 고대 항로와 하멜이 조선을 탈출한 항로가 같다.
해금강 갈도(葛島)에 새겨진 '徐市過此 암각은
1959년 사라호 태풍때 유실된 것으로 알려졌다.
그후, 갈도(면적 :0.1k㎡)는 약초섬이라 불리운다.
서불 일행은 제주 서귀포에 도착해 한라산에 올랐는데,
그 아름다움에 빠져 불로초를 캐는 것조차 잃어버릴 지경.
그후, 제주도 절경에 반해 섬을 한바튀 돌며 여러 곳을 구경.
서귀포 정방폭포에 이르러서는 한동안 머물렀다고 한다
그후, 일본으로 떠나기 전, 서불이 정방폭포에 남겼던 흔적.
'서불 일행이 이곳을 다녀갔다.'는 암각.,徐市過此(서불과차).
......................................................................................
'서불이 불로초를 구하려 다녀간 곳.'.,서귀포.
그 전설로 인해 유래된 지명이.,서귀포(西歸浦).
서불 일행이 1차 원정 때 '서쪽으로 돌아갔던 포구.
..............정방폭포...............
한라산 남측 사면으로부터 발원하여
남쪽으로 흘러내리는 애이리내 폭포수.
세계적으로 희귀하며 동양 유일 해안폭포.
........................................................
주상절리 해안절벽에 수직으로 떨어지는 20여m 폭포.
제주도 남쪽 바다의 푸르른 해안 절경과 어우러져 장관.
천지연폭포, 천제연폭포 등과 더불어.,제주도의 3대 폭포.
서귀포 지명은 역사적 경관가치가 높는 명승지를 뜻한다.
서불이 제주도에 처음 도착한 곳은.,조천읍 조천포(朝天浦).
당시, 진시황의 '동방개척 정책의 일환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서귀포시.......................
조선시대 초 제주목사 오식의 건의에 따라
1416년 서귀포 지역에 정의현, 대정현을 설치.
서귀읍 지역과 동쪽의 읍면은 정의현,
중문면 지역과 나머지 읍면은 대정현
조선 태종 때에 서귀는 정의현의 우면,
중문은 대정현의 동좌면이라고 불렀다.
일제 강점기인 1915년 도사제(島司制)를 실시
서귀는 우면, 중문은 좌면, 1935년 서귀면, 중문면
해방 후인 1946년 제주도에 도제(道制)가 실시되었다.
옛 대정군과 정의군을 관할로 남제주군이 설치되었다.
현재 시가지는 각각 남제주군 서귀면, 중문면이 되었다.
1956년 서귀면이 읍으로 승격되었고,
1981년 7월 1일 서귀읍과 중문면이 통합
남제주군으로부터 분리되어 시로 승격하였다.
2006년 7월 1일 제주특별자치도의 출범과 함께 남제주군과 통합
동시에 자치시와 달리 지방자치단체가 아닌 행정시로 전환되었다.
한라산 경계로 북쪽은 제주시, 한라산 남쪽은 동중국해에 접해 있다.
해안선은 제주시와 마찬가지로 단조롭고 여러 섬들이 있다.
제주시와 마찬가지로 서귀포시도 대부분의 인구가 해안에 집중
오름이라고 불리는 기생 화산이 산간 지역에 널리 분포되어 있다.
제주도는 유네스코 3대 보호 제도
세계에서 유일하게 인증받은 섬이다.
1.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2002년 12월),
2. 세계자연유산(2007년 2월),
3. 세계지질공원(2010년 10월 4일)
세계지질공원의 대표 명소로 인정된 곳은 한라산과
성산일출봉, 만장굴, 천지연폭포, 패류화석 서귀포층,
주상절리대, 산방산, 용머리해안, 수월봉 등 9곳이다.
마라도는 서귀포시 최남단 섬이자
아울러, 대한민국 최남단의 섬이다.
서귀포시는 위도상으로는 온대로 분류
그 중에서도 아열대 기후권에 위치하며,
연평균 기온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지역.
일교차가 육지에 비해 적고 사철 온난
연평균 기온 16.6℃, 연최고기온 20.2℃,
연최저기온 13.5℃로 한국에서 가장 따뜻.
서귀포시 연강수량은 1923㎜.
거제시, 성산읍 다음으로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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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의 남부 절반 가량을 차지하였던.,남제주군.
2006년 7월 1일 제주특별자치도 설치되며.,서귀포시.
기존 남제주군과 서귀포시가 폐지되고 서귀포시로 출범.
한라산 남부 비탈면에 있어 동부·서부는 낮은 지대가 많다.
해안선은 단조롭지만 성산포·모슬포 등 좋은 항구들이 있다.
위도가 낮고 난류의 영향을 받는 곳,
우리 나라에서 가장 따뜻한 고장이다.
난대성 작물.,귤·파일애플 등이 재배된다.
풍부한 수산 자원과
고구마류 농산물 바탕으로
식품 가공업과 양조 공업이 성행.
성산 일출봉.
육계사주(陸繫砂洲)는 육지와 섬, 섬과 다른 섬이나
암초 사이에 모래나 자갈 등이 쌓여 연결된 퇴적 지형.
'육계주에 의해 육지와 연결된 육계도(陸繫島).,성산일출봉.
서귀포칠십리 동쪽 해안이
고향인 타향살이 제주도민에게
성산일출봉은 꿈에 그리는 고향이다.
...........성산 일출봉(城山 日出峰)
서귀포시 성산읍에 있으며 분화구 높이는 182m,
성산 일출봉에서의 일출은 영주십경 중 하나이다.
분화구와 주변 1km 해역은 천연보호구역(천연기념물).
해저 화산쇄설물 퇴적암 용암이 분출하여 만들어졌다.
수중폭발 응회구로 분화구가 크고 쇄설물 입자가 작다.
약 10만년 전에 생겨났을 것으로 예상되고
2만년전에 본섬과 연결되었을듯 여겨진다.
성산 일출봉은 원래는 독립된 화산체로서
사주가 형성되어 본섬과 연결된 육계도이다.
'성산일출봉~ 섭지코지'
해안은 제주도 최대 만입.
'성산일출봉 & 섭지코지' 사이
성산 사빈과 사구를 발달시켰다.
............................................
성산 일출봉.,해녀의 집.
'성산 일출봉' 초관바위(哨官巖),/금마석(禁磨石).
조선시대 '성산 일출봉' 초관바위는 이 지역을 지키던
수군이 '이 바위를 만지면 진급한다.'는.,'전설의 고향'.
'하루에 천리를 달리며,
활을 쏘지 않고도 요술로
적장의 투구를 벗길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장군바위 전설 -
'성산일출봉' 매표소를 출발하여 처녀바위, 등경돌,
초관바위, 곰바위 등을 차례로 지나면, 일출봉 전망대.
성산일출봉(182m) 정상에서는 한라산을 중심으로 하여
수많은 오름들이 한눈에 들어와 가슴깊이 감동을 선사한다.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성산읍 고성리.,해안
여명의 눈동자, 단적비연수, 거침없이 하이킥, 런닝맨
등 여러 편의 TV 드라마, 영화의 촬영지로 유명한 명승지.
성산일출봉 남서쪽에 있는.,'섭지코지' 봉화대
조선시대, 왜구의 침입을 감시하던.,수군 주둔지.
'TV 드라마 - 올인' 촬영지로 각광 받는.,섭지코지.
섭지 코지.
제주도에서 외국 관광객이 가장 많이 찾는.,섭지 코지.
예전에는 외딴 곳이라 찾는 관광객이 거의 없었던 비경지.
세계적인 관광자원으로 바뀐 곳.
..... ....차민수...................
세계 포커 참피온 2회.,도박사.
"내가 겪은 한.,천재는 밥이다.
평정심과 자존심이 흔들리면
너무 쉽게 무너지기 때문이다.
불가능이란 벽 앞에 약한 바보가.,곧 천재.
포기하지 않는 승부사에게는,.불가능이란 없다.
뛰어넘고 나면, 그것은 마음 속에 있는 장벽이었을뿐.,
그러나, 천재는 부국 차원에서 육성되어야 한다.
천재 하나가 수십만 일자리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
성산일출봉 남서쪽에 위치한.,섭지코지(해발 29m).
섬이었으나, 육계사주로 인해 본토와 연결된 육계도.
제주도 360개 기생화산 중 하나로.,성산일출봉과 비슷.
현무암 화산쇄설물과 화산탄 등이 많이 산재해 있다.
남쪽해안 기암절벽에는 '주상절리, 시스택, 단애' 등 발달.
북서쪽 육계사주는 모래의 퇴적층이 상당히 두꺼우며,
육계사주 좁은 목 일대에 약 0.33㎢ 규모 백사장이 있다.
이곳에 성산해수욕장이라고도 하는 신양해수욕장이 있다.
또한 동쪽 해안 끝에는 등대가 설치되어 있으며,
제주도의 25개 봉수대 중에서 8기 봉수대가 있다.
제주 해안일주도로가 섭지코지 입구까지 연결된다.
.............'섭지코지' 선녀바위............
이곳에 내려와서 목욕하는 선녀에게 반한
용왕의 아들이 선녀를 따라 하늘로 승천하려다
옥황상제의 노여움을 사서 선돌이 되었다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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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수군 주둔지였던.,섭지코지 봉화대.
제주해녀들이 나잠(裸潛)을 하던 곳.,선녀바위.
............성산포(城山浦)..........
성산반도에 위치한 어업의 중심지.
천연적 양항으로서 한때 유명하였다.
제주항이 축항된 후 쇠퇴하였으며
지금은 원양어업 기지로 중요한 곳.
1968년 1월 연안항으로 지정되었다.
제주도 동부의 화물 및 수산물 유통기지.
성산일출봉, 우도 등 관광지.,중심의 항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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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치회.
소라회.
'성산포 ~ 우도'
우도.
...............쇠머리오름.............
제주시 구좌읍 종달리에서 약 2Km
서귀포시 성산항에서 3.8Km.,우도(소섬)는
유인도로 소가 머리를 들고 누워있는 형태이다.
우도 머리에 해당하는 부분 쇠머리오름
우도 원주민들에게는 '섬머리'로 통한다.
성산항에서 우도 동천진항까지 도항선 운행(15분 소요).
오름 남동 사면은 곧바로 높이 100m의 해안단애를 이루며
바다로 내리지르고, 북사면은 용암유출에 의해 파괴된 형태로
완만한 용암대지 우도마을로 이어져 오름이 곧, 섬 그 자체인 셈.
쇠머리오름은 응회환(tuff ring)의 수중 분화구이며
화구 안사면에는 저수지와 함께 병풍처럼 둘러쳐진
화구륜을 확인할 수 있고, 화구중앙에 소위.,'알오름'
화구구(火口丘)인 '망동산'이 솟아있는.,알오름.
이러한 2개의 성인이 다른 기생화산체가
동시에 하나의 화구상에 존재하는 것을
제주화산도의 해안선 주변에서는
종종 볼 수 있으며, 이를 두고
단성(單性)의 이중식화산(二重式火山)
이라고 한다. 즉, 응회환은
해양환경의 얕은 바다속에서
만들어진 수중분화활동의 산물이며,
화구구인 망동산은 육상분화활동의 산물인
송이(scoria)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다.
이 오름의 형성과정은
다음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최초 화구가 천해(淺海) 또는 해안선 주변 조간대에
노출된 환경하에서 물과의 접촉이 원활하여
화산쇄설성퇴적층으로 이루어진 응회환의 분화구를 형성한다.
물-마그마의 접촉에 의한 수증기성 폭발활동은
응회환의 퇴적층속에 혼탁류(surtgeyan flow)와 같은
다양한 퇴적구조를 남긴다. 이러한 퇴적활동에 의해
자체 성장한 화산체는 물과의 접촉이 곤란한 육상 환경으로 바뀌게 되며,
소위 스트롬볼리식 분화(strombolian eruption)인 육상분화로 전이된다.
육상분화 활동에 의한 화구로부터의 용암유출은
북쪽사면을 파괴하면서 흘러 우도의 지표지질을 만들었으며,
뒤이은 화산활동의 여운은 알오름과 같은 화구구를 생성 시킴으로서
우도와 쇠머리오름은 만들어졌다고 해석할 수 있다.
현재의 쇠머리오름의 형태는 분화활동후에
계속된 파도에 의한 물리적인 해안침식의 결과이다.
해안침식지형인 오름의 해안 수직절벽에는
해침에 의해 만들어진 해식동(海蝕洞), 해식애(海蝕崖)가
발달되어 있으며, 오름의 식생은 전체적으로 풀밭오름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고, 산정부에는 일부 소나무와 삼나무로 조림된 숲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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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흑우(黑牛) 국영목장.,우도(牛島).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우도면에 속한.,우도.
'천진리․서광리․오봉리․조일리' 4개 리가 있다..
동경 120°57′, 북위 33°30′에 위치하며,
구좌읍 종달에서 약 2.8㎞ 떨어져 있다.
면적은 6.18㎢이고, 해안선길이는 17.0㎞.
제주도 동쪽 성산포 앞에 위치한 섬으로
제주 근해 부속도서로는 면적이 가장 크다.
누구나 한번 찾고나면, 꿈에도 떠오르는.,섬.
섬의 형상이 '물소가 머리를 내밀고 누워 있다.'
하여, 소섬 또는 이를 한자화한 우도라고 불린다
제4기에 활동한 한라산의 측화산(側火山) 중 하나,
동남쪽, 소머리오름(133m)을 제외하면 섬 전체가 평지.
하천과 용천수(湧泉水)가 없으며., 음료수는 빗물에 의존.
동남쪽 우도봉(牛島峰)을 정점으로
북쪽으로 완만한 경사를 이루며 거의
고도 30m이하의 평탄한 지형을 이룬다.
북동쪽 '사빈해안' 독진포(獨津浦)를 제외하면
암석해안으로, 남쪽에 해식애와 해식동굴이 발달.
해양성기후로 1월 5.5℃, 8월 25.6℃, 연강수량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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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98년(숙종 24) 목마장 설치 후, 관리인들 만.,왕래.
1840년대부터 주민 거주가 허용되기 전까지는.,무인도.
1844년, 조선 후기 헌종때,
진사 김석린이 우도를 개간한다.
그때, 우도에 마을이 처음으로 생겼다.
19세기 후반에는 제주목의 좌면에 속하였고,
1900년대 초에는 ‘연평(演坪)’이라고 칭하였다.
1914년 제주군 구좌면 연평리.
1946년 북제주군 구좌면 연평리.
1963년 연평출장소가 설치되었다.
1986년 북제주군 우도면으로 승격.
2006년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우도면.
인구는 1,575명(남 756명, 여 819명)
세대수는 731세대이다.(2010년 기준).
취락은 여러 곳에 분산
4개 행정리로 구성된다.
토지이용 현황은 논은 0.01㎢, 밭이 4.09㎢, 임야 0.95㎢ 등.
주민들은 반농반어에 종사하고 농업소득 40%, 어업소득 60%.
마늘․땅콩 등 농산물, 해산물로는 자연산 소라․오분자기․넓미역 등.
소와 돼지의 사육도 활발하다.
연근해에서는 어선으로 문어와 갈치,
낚시로는 방어와 농어 등이 주로 잡힌다.
남쪽의 천진항에서 성산포까지 여객선이 수시 운항.
교육기관으로는 우도초등학교와 우도중학교가 있다.
우도초등학교와 우동중학교는
연평초등학교와 연평중학교에서
2010년 3월에 교명을 변경한 것이다.
1844년(헌종 10) , 우도 개척자
'김석린(金錫麟) 진사'.,우도 생가.
......................김석린(金錫麟).....................
1806년 '제주시 이도동'제주목에서 태어난.,김석린.
본관 경주. 자 공서(公瑞). 아버지 김재온(金栽溫).
1828년(순조 28)에 생원, 진사 시험에 합격하였다.
1842년(헌종 8) 우도 개간 허가가 내려지자
1844년(헌종 10) 우도로 들어가 개척자들을 격려하고
우도에 입도한 입경자(入耕者)들의 자제들을 모아 가르쳤다.
우도에 입주한 후에는 영일동 후편에 거처를 마련.
영일동 주민들이 음료수로 사용하던 물통이 있는데,
이 통을 '진사통'이라 하여 지금까지도 보존하고 있다.
사복시(司僕寺)에서 우도 주민에게 세금을 내게 하려 하자
감면해 주도록 하였고, 관폐(官弊)를 제거시키는데도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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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항.
제주특별자치도 내
해수욕장들 중에서는
바다물이 제일 따듯한 곳.
5월 초에도 해수욕을
즐길 수 있는.,서빈백사.
..................산호사해수욕장.....................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우도면 연평리 2215-5
우도팔경 중 '서빈백사'. (천연기념물 제438호)
도처에 현무암 암반이 노출
해안가의 연속성은 떨어진다.
경사 10° 정도로 비교적 급경사이며,
구성 물질은 2~4㎜ 세력이 탁월하다.
서빈백사는 산호사해수욕장으로 알려져 있으나
해수욕장의 퇴적물은 산호 파편이 아니라., 이 일대
바다 속에서 자라는 홍조단괴가 해안으로 밀려와 쌓인 것
홍조류는 Lithophyllum sp.로 분류된다.
이곳 해역은 수온이 18℃ 정도로 연중 따뜻하고
하천 토사 유입이 없어 바닷물이 맑은 상태로 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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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도팔경 - 동안동굴(검멀레동굴)
입구는 모두 4개가 형성되어 있다.
제 1입구는 우도봉에서 북북동쪽 약 600m 지점
해안단애 동쪽 하단으로 검멀레동굴 서쪽 끝 지점
폭 9m, 높이 3.2m로 개구 방향은 80°,
제 2입구는 폭 2.5m, 높이 1m로 개구 방향은 115°,
제 3입구는 폭 3.2m, 높이 1.7m로 개구 방향은 125°,
제 4입구는 폭 2m, 높이 1.1m로 개구 방향은 110°.
제 1입구 공동(空洞)은 타원형이며 29m 길이
제 2,, 3,4입구와 각각 좁은 공동으로 연결된다.
검멀레동굴은 대향 분기공 형태의 광장으로
동굴이 형성된 후 해파의 영향을 받은 것 같다.
인근 관광지로는 검멀레해수욕장과 우도봉이 있다.
우도.,'쇠머리오름' 우도 등대.
............................우도 등대.................................
'우도면 조일리' 제주도 최동단에 위치한., 우도(유인) 등대.
1905년 10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조선의 관세권을 장악.
우리나라 전 연안에 등대 증설에 착수했고
우도 등대는 1906년 3월 제주도 동쪽 연안 수역을
항행하는 선박의 지표로 하기 위한 제주도 최초 무인 등대.
연료는 아세틸렌가스를 사용.
1959년 9월 유인 등대로 기능을 증강시켰으며
1960년 3월 광파 표지 개량 및 음파 표지를 설치.
2003년 11월 기존 등명기 DCB24R에서 IT기술을 접목.
대형 회전식 등명기인 KRB 375로 교체하여 광력을 증강.
2003년 12월 등탑을 신축했으며
이때 우도 등대공원도 조성하였다.
2005년 7월 항로표지 체험관을 설치.
우도 등대는 우도면 조일리 소머리오름 정상에 위치
등탑 높이는 16m이며 몸체는 붉은색으로 칠해져있다.
등명기의 불빛은 20초에 한 번씩 반짝이며 광달거리는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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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머리오름.
우도.,광대코지.
산호사 해수욕장.,해녀상.
우도.,'모실래기' 해녀의 집.
우도.,'물꼬' 해녀의 집 - 문어라면.
우도.,'비양도' 해녀의 집.
우도.,해녀.
해안동굴 등 우도 절경 이면에는
해녀들의 '숨비소리'가 녹아있다.
우도해녀항일운동기념비.
우도 해녀들의 억척스러운 삶과
드높았던 항일정신을 보여주는 상징.
당시 해녀들은 해산물 채취대금의 80%를 착취 당했다.
그 시정을 위하여 제주해녀들이 자발적으로 일어섰던 것.
제주해녀들의 항일투쟁은 국내 최대 여성 항일운동
우도 해녀들은 가장 앞장서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제주해녀들의 삶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우도해녀들은 여전히 살기 위해
지친 몸을 이끌고 바다로 나간다.
그 '숨비소리'가 더 깊게 느껴진다.
이어도 사나.
제주바당에 배를 띠왕
노를 젓엉 혼저나가게
보름아 보름아 불지말어랑.
좀수허래 가는배 떠나감쪄
물질하러 바다에 들어서
태왁 하나에 목숨을 맡겨
가엾은 아가 두고 바다에 드니
살고자 살고자 하며 전복을 따네.
어~~어허어~
어~~어허어~
이승질 저승질 갓닥 오랏닥.
숨 그차지는 숨비소리.
좀녀 눈물이 바다물 되언
우리 어멍도 바다물 먹언
나도 낳곡 성(형)도 나신가.
아방에 아방에 아방덜.
어멍에 어멍에 어멍덜
이어도 가젠 살고나 지고
제주 사름덜 살멍(살며) 죽엉
가고자 하느게 이어도 우다.
이어도 사나~ 이도도 사나~
이어도사나 ~ 이어도사나~.
- 제주민요.-
제주바다에 배를 띄워
노를 저어서 어서야 가자
바람아 바람아 불지 말아라
잠수하러 가는 배 떠나 간다
물질하러 바다에 들어서
테왁 하나에 목숨을 맡겨
가엾은 아가 두고 바다에 드니
살고자 살고자 하며 전복을 따네
어~~어허어~~어~~어허어~~
이승길 저승길
갔다 왔다하며
숨 끊어지는 숨비소리
해녀 눈물이 바닷물 되어
우리 어머님도 바닷물 먹고
나도 낳으시고 형님도 낳았는가
아버지의아버지의아버지들
어머님의어머님의어머님들
이어도 가려고 살고자 하네
제주 사람들 살아서 죽어서
가고자 하는 곳이 이어도라네.
이어도사나~이어도사나~
이어도사나~이어도사나
첫댓글 제주도에서의 축제는 다양하군요..
언제 한번 가봐야 될듯...
좋은 글 감사합니다...
.
제주도에서는
방어축제가 No 1.
모슬포 한번 갈까요?
4인1조
번개 미팅
모집 한번
하시지요.
값싸고 푸짐하고 맛있어요.
회 먹고나서 샤브샤브도 일품.
정말 좋아요. 덕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