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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가사항: 제목은 서유럽지역이라고 했지만 이탈리아는 엄밀히 분류하면 '남유럽'에 속하지요.
하지만 서유럽과 남유럽을 따로 구분해서 쓸 필요가 없는것 같애서 일단 남유럽국가들도 '서유럽'에 포함하여 썼습니다.
다음은 제가 쓸 유럽국가들의 구분입니다. 단순하게 구분 했습니다. 지역구분은 이대로 해서 쓸 예정입니다.
정말 오랫만에 유럽 각국의 근현대사 시리즈를 쓰게 되는군요. 이거 한편 쓰고나면 매우 피곤해지기 때문에..
자주 쓸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먼저 국가부터 듣고 가야겠지요? 이탈리아의 국가 'Fratelli d italia(이탈리아의 형제들이여)' 입니다.
남유럽국가들의 국가들은 대개 힘차고 화사한데 이탈리아도 역시 그렇습니다.
국가말고도 글 르네상스 부분에 르네상스와 어울리는 BGM넣었으니 지루해하지 마시라고 넣어봤습니다.
국가를 계속 들으시면서 감상하셔도 좋습니다.
이탈리아의 국기 '삼색기 (Il Tricolore)'와 이탈리아 문장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프랑스 삼색기(La Tricolore)' 에서 따온 국기이다. 초록은 희망을, 하양은 신뢰를, 빨강은 사랑을 의미한다.
아름다운 이탈리아 반도
바로 이땅에서 현 유럽과 미국을 포함한 서구세계의 근본(根本)이 된 '로마제국'이 탄생했다. 이 제국의 언어, 법령체계,
문화유산, 사고방식, 정치체제는 아직도 전 인류의 삶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서양 문명사에 거대한 획을 그은 최초의 대제국이자 사실상의 서양문명의 기원이 되는 로마제국을 '조상'의 역사로 갖고있는
나라. (로마제국을 역사로 갖고있는 나라는 많다. 그렇지만 이탈리아야 말로 로마제국의 진짜 후예라고 할 수 있을것이다.
비록 로마제국의 그 'Power'와 'Pax'는 그들 조상이 발견하고 이름붙인 대륙의 '그분들'天朝國이 가져갔지만...)
그리고 그 이름만 들어도 수많은 사람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낭만적이고 'Romantic'한 大 로마제국의 적통嫡統을
물려받은 나라. 바로 이탈리아다. 지금부터 바로 그 이탈리아의 근현대사를 살펴보도록 한다.
근 현대사 초기初期(1400년경~ 1492, 그리고 르네상스기期)
로마가 멸망한 후 이탈리아 반도내의 게르만출신 부족왕국과 살아남은 원주민들간의 치열한 세력다툼 끝에 1400년경에
이르러서는 사실상 이탈리아는 갈기갈기 찢어진 채 유럽 강국들의 힘겨루기의 장이 되고 만다.
당시 이탈리아 반도내의 독립국가들.
(국가들이라고는 하지만 크게는 왕국부터 작게는 시국,공국과 외세인 합스부르크, 스페인등의 식민지로 분할되있던 상태다.)
1499년경의 이탈리아.
당시 이탈리아 반도내의 주목할 만한 세력으로는
Savoia, Milano,Venezia, Firenze, Siena, 교황령, Genoa, Ferrara, Mantua, Pisa, Verona, Padua, Parma 등의 북부
도시국가들과 스페인의 아라곤 왕국의 지배하에 있던 나폴리/시칠리아/사르데냐 왕국이 큰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가들 말고도 중-북부의 이탈리아내의 각 도시들은 저마다 고유한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도시국가)
1860년 '가르발디'에 의해 통일될 때까지 수백년간 분열된 상태를 유지하게 된다.
다음은 이때 존재했던 도시국가 & 세력들의 판도를 어떤 게임화면으로 본 것이다.
뭔가 낯설지 않다.
그러던 14세기, 북부 이탈리아에선 유럽과 세계의 역사를 바꾼 혁신적인 운동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것은
바로 '르네상스'운동이다. (이탈리아어로는 'Rinascimento')
이 '르네상스'운동의 일어난 시기를 '근대'의 시작으로 볼것인가에 대해선 아직도 많은 논쟁이 되고 있지만, 사실상
서구 역사에서 통칭되고 있는 '근대시기'라는 시대의 흐름 바로 앞에 이 르네상스 운동이 일어난 것이기 때문에 필자는
이 르네상스의 시기를 근대의 초창기라고 본다.
위대한 로마제국의 잔재들이 교회로 들어가 조용히 숨을 고르고 있던 중세가 지나간후, 유럽 각지에서는 한줄기 빛처럼
이 르네상스 운동이 시작되는데, 그 출발점은 바로 이탈리아이기 때문에 이탈리아 근대의 시작이 바로 르네상스의 발원
과 함께 시작되었다고 보는것이다. (그러나 정확히 '이탈리아의 어디서' 시작되었는가 라고 정의할 수는 없다.)
다음은 대작 영화 '글래디에이터(Gladiator)중 Now We are free'입니다. 다음 이어질 르네상스 내용을 읽어보시면서
들으시면 감동이 배가 됩니다.
르네상스 시기 지어진 이탈리아의 교회
<고대 로마문명의 위대한 유산은 '교회'로 흘러 수세기동안 조용히 보존,다듬어져 왔다.
때문에 중세가 문명의 암흑기라고 누가 할 수 있겠는가?>
당시 로마의 마지막 정통계승국이었던 '동로마제국(비잔틴제국)'이 멸망함으로 인해 로마의 문화를 계승,연구하던
수많은 인문,과학,역사학자 그리고 화가,미술가 등 모든 예술문화 분야의 지식인들이 대거 이탈리아로 쏟아져 들어왔기
때문에 이들은 독립국가로 철저히 독립을 유지하고 있던 각 도시국가로 들어가 자신들의 능력을 도시의 영주들에게 선보이며
사실상 르네상스를 주도하게 되었다.
(도시국가로 분열되어 있던 영주들이 다른 도시로 세력을 확장시키기 위해 과거 로마의 사례를 이용하려고 하여
이들을 중용해 로마가 그랬던 방식으로 세력확장을 꾀해 결국 르네상스가 로마의 유산이 남아있던 이탈리아에서 발생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또한 활발한 상업활동과 정복운동으로 일찌감치 막대한 부를 쌓은 이탈리아내 독립도시국가인 '피렌체'와 '베네치아'같은
독립국가에서 자유를 누리며 고전문화(로마)를 연구할 수 있었던 것도 이탈리아에서 르네상스가 촉발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때의 이탈리아인들은 회화,조각,건축,사상,문학 방면에서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세기의 걸작들을 두루 남겼으며
그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인물들로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 (Leonardo da Vinci, 1452.4.15~1519.5.2)'와 그의 작품 [모나리자],[최후의 만찬],[동굴의 성모]
<다빈치의와 미켈란젤로의 초상화스케치>
등이 있다. 또한 동시대를 살았던 또 한명의 천재이자 위대한 예술가 '미켈란젤로 (Michelangelo Buonarroti
, 1475.3.6~1564.2.18)'등이 있으며 그의 작품으로는 그 유명한 [피에타],[다비드조각상],
[천지창조가 그려져있는 시스티나 대성당의 천장화],[최후의 심판] 등이 있다.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대표작 '모나리자' 이 하나의 그림이 르네상스의 결정체이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 이탈리아 로마 시스티나 대성당 천장(바티칸)에 그러져있다. 보는 이를 압도한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조각상중 하나인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 현재는 프랑스 루브르에 있다>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완성된 작품으로 꼽히는 '피에타(성모와 예수)'조각상.
인간이 돌로 만들어낸 작품들 중 최고의 작품이다.>
이탈리아 로마에 위치한 '판테온(만신전萬神殿)' 원형그대로 현존하는 로마 건축물중 거의 유일하다.
판테온은 르네상스시기 건축물은 아니지만 중세와 르네상스시기 보수를 거쳐 르네상스 시기 양식으로 바뀌어 꾸며졌으며
현재는 위대한 이탈리아의 '장인'들의 무덤을 모시는 장소로 용도가 바뀌었다. (라파엘로 등)
결국 판테온이야 말로 이탈리아인들이새롭게 창조해낸 '르네상스식' 로마문화 유산인 것이다.
현재도 가톨릭교회의 미사가 열린다.
또한 문학에서는 전 인류의 필독서 라고 불리우는 대작 <신곡>을 집필한 '단테(Alighieri Dante 1265~1321)'와
근대의 군주들에게 애독되고 현재까지도 지도자들, 정치학 전공자들에게 필수 서적이 된 <군주론> 을 남긴 불멸의 사상가,
'마키아벨리 (Niccolò Machiavelli 1469.5.3~1527.6.21)'가 대표적인 르네상스의 이탈리아 인이다.
<마키아벨리와 그의 저서 '군주론', 군주론은 현재까지도 제왕학의 일부로써 세계각국의 지도자들의 필독서이다>
그밖에도 아름답기로 이름난 '르네상스 양식'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
(Donato Bramante, 1444~1514.4.11)와
20세기의 위대한 천문학자이자 과학자중 하나로 손꼽히는 갈릴레오 갈릴레이(Galileo Galilei, 1564.2.15~1642.1.8)가 있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
이러한 혁명적인 사고의 전환이 이루어진 르네상스 시기를 통하여 점차 이탈리아내 도시국가들끼리의 유대감이 형성
되기 시작하였으며, 같은 르네상스 문화, 같은 언어가 통한다는 결정적 원인으로 인해 '통일국가 이탈리아','이탈리아인'
이라는 개념이 점차 생겨나기 시작했다. 결국 이때부터 이탈리아 건국은 이미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리가 아닐 것이다.
대항해시대大航海時代 (1492~1600)
이러한 사회의 커다란 변화로 이탈리아에 살고있던 사람들의 근본 의식이 변화하기 시작했다.
과거 신 중심의 사회체계에서 점차 '인간위주의' 인문주의적 사상이 사람들의 의식에 뿌리내리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비잔틴 제국이 멸망함으로써, 막대한 부를 이탈리아 각 도시국가들에게 안겨다 주던 '동방 무역(후추,귀금속,보석)'이
축소될 위기에 놓이자, 그러한 시대의 변화를 민감하게 알아차린 이탈리아의 항해자들은 점차 유럽을 벗어나 새로운
유토피아를 꿈꾸며 (또한 새로운 부의 루트를 찾아) 먼 바다로의 항해를 시도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인들에게 세계로의 진출은 그리 호락호락 하지 않았다. '대항해시대'때에는 앞서 쓴 프랑스나 영국, 스페인
같은 나라들 처럼 '강력한 중앙집권국가'가 먼저 세워져 그 국가의 역량이 지속적으로 투입되야 그 사업을 지속할 수 있는
것이었다.
때문에 아직 나라는 커녕 '통일된 국가, 국민으로써의 의식'조차 확립되지 않고 있던 ('이탈리아인'이라는 개념은 있었지만
동족의식이 다른 나라에 비해 매우 희박했다.) 이탈리아인들에게 그것은 너무나 벅찬 일이었다.
이탈리아는 그래서 훗날 통일된 강국들인 영국, 프랑스, 스페인 심지어 포르투갈 조차 해외 식민지를 만들고
국가의 힘을 키워나갈때 그 시도조차 번번이 실패하고 말게 되는 것이다. (콜럼버스와 베스푸치등 극소수를 제외하고)
하지만 이러한 시도들은 스페인,포르투갈등 이베리아의 통일된 왕국들에게 자극을 주어 경험이 풍부하나 그들의 항해를
지속적으로 뒷바침할 통일된 왕국의 존재가 모자랐던 이탈리아의 숙련된 항해자들, 특히 '아메리고 베스푸치 Amerigo
Vespucci' 나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Christopher Columbus' 등을 섭외해 오히려 타국의 발전에만 도움을 주는
상황에 이르게 된다. 이탈리아에선 베네치아 공화국만이 그나마 선전하고 있었다. 덕분에 필자가 하는 대항해시대 온라인
에선 잉글랜드, 프랑스, 네덜란드, 포르투갈, 스페인등 내로라 하는 해양강국들과 나란히 한 Faction으로 등장한다.
(하지만 지독한 아드리아해의 역풍..)
대항해시대 그 후 식민지를 늘린 다른 강력한 유럽열강들에 의해 이탈리아는 전역이 각국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중기中期 (치욕적인 식민지배의 시작과 통일로의 험난한 여정 1600~1860)
유럽의 통일된 강국들 (오스트리아,프랑스,잉글랜드,스페인 등)이 치열한 식민지 쟁탈전을 벌임과 동시에,
유럽 대륙내에서의 확고한 지위를 갖추었을때, 이탈리아는 독일과 함께 아직도 수십개의 도시국가로 조각조각 나뉜 상태였다.
더군다나 이미 스페인과 포르투갈, 잉글랜드, 프랑스가 대항해시대 이후 서쪽으로 향하는 무역루트를 개발하고,
여태까지 이탈리아를 통해서만 할 수 있었던 각종 향신료, 아메리카산 금/은, 동양산 사치품들의 거래가 대서양을 통해서도
들어오게 되자 중세시대 이후 줄곧 지중해세계를 지배해오던 이탈리아의 군소강국, 자치도시들은 결정적으로 몰락하고 만다.
또한 이러한 분열상태는 결국 신흥유럽 열강의 간섭을 끌어들이게 되었고 (베네치아-제노바의 분쟁, 밀라노의 프랑스-합스
부르크가문 영유권 주장) 이는 결과적으로 19세기까지 이탈리아가 프랑스와 오스트리아등 타국의 지배를 받는 상황에 이르게
되는 결정적 이유가 된다.
이제 이탈리아는 이미 과거 유럽을 지배했던 대제국 로마의 흔적은 사라져버린지 오래였고 남부는 이미 수백년전부터
스페인의 식민지나 다름없는 (아라곤 지배하의 나폴리 왕국) 상황에 놓인 상태였다. 또한 비교적 자립을 유지하고 있던
북부의 독립국가들마저 나폴레옹 군대의 대대적 침공에 맥없이 무릎꿇자 결국 이탈리아 거의 전역이 식민지배에 놓이게
되는 이탈리아 역사상 가장 암울한 시대가 열리게 된다.
(1600 열강들의 침입시작부터 - 1700년대 식민지 시기 - 1861년 이탈리아 왕국 통일까지가 해당된다.)
다음은 이때 당시 이탈리아의 주요 공국, 왕국, 도시국가, 공화국들의 해체 및 식민지 전락년도를 보여주는 자료들이다.
밀라노 공국 (Ducato di Milano 1395 ~ 1797, 멸망후 프랑스에 의해 '치살피나 공화국'이라는 괴뢰국에 편입)
사보이 공국 {Ducato di Savoia 1035 ~ (1535-1559 잠시 프랑스의 지배) 1860, 통일 이탈리아 왕국 건국 후 편입}
베네치아 공화국 (Repubblica di Venezia 8세기~1797, 나폴레옹의 의해 자치권소멸, 그 후 합스부르크의 오스트리아가 관리)
제노바 공화국 (Repubblica di Genoa 1005 ~ 1815, 나폴레옹의 의해 프랑스령으로, 이때 넘어간 제노바령 코르시카가
현재도 프랑스령이다.)
나폴리 왕국 (Regno di Napoli 1282 ~ 1816, 양시칠리아 왕국으로 통합, 존속하다가 1860년 이탈리아왕국에 병합)
사르데냐 왕국 (Regno di Sardegna 1297 ~ 1860, 1297년 사보이왕령 사르데냐를 아라곤 왕국이 강제적으로
Personal Union으로 만들었으나 나폴레옹 전쟁후 프랑스령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사보이의 피에몬테-사르데냐 왕국에
편입된 후 존속하다가 궁극적으로 이탈리아 왕국에 편입)
시칠리아 왕국 (Regno di Sicily 1130 ~ 1816, 아라곤-사보이-스페인의 지배를 받은 뒤 사르데냐 왕국으로 병합되어 소멸)
피렌체 공화국 (Repubblica di Firenze 피렌체 공화국이 1115~1532까지 지속되다가 토스카나 대공국에 편입, 그 후
토스카나 대공국이 1569년부터 1860년까지 지배)
시에나 공화국 (Repubblica di Siena 1125 ~ 1555, 스페인에 의해 멸망후 스페인의 펠리페2세가 토스카나 대공국에 할양)
교황령 (Stati della Chiesa / Status pontificius 752~1870, 1860년 통일 이탈리아 왕국 건국후 사실상 소멸상태였으나
1929년 라테란 조약으로 로마내의 바티칸 성당,카스테라간돌포 천문대구역등 극히 일부의 영토만 획득한 후 바티칸 시국으로
명명되어 현재에 이름)
등이 있다.
[ 이탈리아의 통일 Risorgimento d'italia ]
발단 發端
이렇듯 수백년동안 수십개의 나라로 쪼개져 있던 이탈리아는 결국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를 구축한 유럽 각국 열강들에
의해 식민통치까지 받게 되는 불운한 시기를 보내게 된다. 그 과정에서 점차 이탈리아 민중들의 독립의식 고양과 조국해방
등을 기지로 이탈리아 전역에서 (교황령 제외) 끊임없는 소요사태와 폭동, 반란이 일어나자 다급해진 프랑스의 나폴레옹,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스페인 등 식민종주국의 대규모 군 파견으로 인해 이탈리아 전역이 혼란에 빠지게된다.
이후 이러한 일련의 소요사태는 잠시 소강상태에 접어들었지만 결국 수백년간 서로 다른 국가의 국민으로 살아오던 이탈리아
반도의 시민들에게 애국심과 민족의식을 고취시키는 효과를 낳게 된다.
결국 1816년, 이탈리아 북서부의 사보이 왕가가 지배하고있던 사르데냐 왕국을 주축으로 하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Regno di Sardegna-Piemonte)이 통일 이탈리아 운동을 주도하게 된다.
<이탈리아 독립운동 시기 이탈리아반도의 세력현황 1815~1860>
전개 展開
'리소르지멘토(이탈리아 통일운동)'는 1794~1798년에 걸친 '프랑스 대혁명'에 영향을 받아 점차 이탈리아도 하나의 통일된
'자유로운 이탈리아인의' 국가를 건설하자는데 그 취지가 있다. 당시 프랑스 대혁명으로 인해 이탈리아에서의 프랑스 영향
(전반적으로 나폴레옹의)
이 점차 감소하고 있었고 그에 따른 승전국들의 '빈체제'로 인해 이탈리아가 열강들에 제멋대로 휘둘리게 되자
반 오스트리아, 반 프랑스 등 외세배척 분위기가 강해져 있었다.
결국 1820년 급진적인 방식으로 통일을 이루자고 주장하는 '카르보나리 Carbonari, 숯 굽는 자)' 라는 단체가 프랑스지배
하에 있던 남 이탈리아에서 활발한 활동을 벌이다 점차 북부 이탈리아까지 세력을 확대하기에 이른다.
그들은 1820년 나폴리 혁명, 1821년 피에몬테 혁명, 1831년의 중부 이탈리아에서의 혁명운동등을 통해 강력한 무력으로
외세를 몰아내려고 했으나 오히려 그 강경한 정책덕에 강력한 프,오스트리아 연합군에 의해 탄압되어 와해되고 만다.
그러나 '카르보나리'에 의한 이탈리아 통일 시도는 이탈리아인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기에 충분했으며, 그때까지도
각자의 분리된 독립국가틀에 만족하던 이탈리아인들을 자극하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영향을 결과로 1831년 주세페 마치니(Giuseppe Mazzini)라는 자가 마르세이유에서 '청년이탈리아 당黨'을 결성하여
혁명이나 폭동같은 과격하고 무력의존적인 독립운동이 아닌 민중의 자발적인 참여와 도덕적,정신적 협조를 바탕으로 이탈리아의 독립 운동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노력을 벌인다.
'청년이탈리아당'이 대중의 폭넓은 지지와 지원을 받았지만 강력한 라이벌인 '가리발디'와 노선이 다르고,
마치니가 민중에 의한 봉기를 주장하는 강경책으로 입장을 고수하면서 그의 정책에 비판이 가속화되면서 점차 주도권에서
밀려나게 된다. (그래도 나중에 가르발디를 도와 통일 이탈리아의 건국자로써 활약한다.)
마치니와 카르보나리의 운동이 실패한 이후, 사보이 왕가의 지배층을 중심으로 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을 중심으로 한
통일 운동이 벌어지게 된다.
<최초의 조직적인 이탈리아 독립운동을 주도한 주세페 마치니>
통일 統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통일 운동에는 중요한 3명의 인물이 있는데 그들은 '마치니', '카보우르 재상',
그리고 '가리발디 장군'이 그들이다.
가리발디 장군은 1807년 현 프랑스의 니스에서 태어나 사르데냐 왕국에 해군장교로 복무중이던 1834년 마치니의
'청년 이탈리아당' 에 가입하여 혁명운동에 가담하다 실패해 내란 혐의로 체포될 위기에 처하자 프랑스로 피신하였다.
그는 프랑스에 얼마간 있다가 1840년대 남미의 독립운동이 거세지자 곧바로 남미로 이동. 우루과이와 브라질의 '리오 그란데'
의 독립운동에 가담하여 능력을 인정 받는다. 그 후 1848년, 조국인 이탈리아의 롬바르디아에서 오스트리아에 대한 '해방전쟁'
이 벌어지자 급히 귀국하여 의용대를 조직, 적극적으로 저항 운동에 참가한다.
그뒤 이탈리아 전역에서 일어나는 혁명분위기를 두려워한 교황 비오 9세는 교황청 수상 로시가 암살되자 라치오의 가에타로
피신하고, 무주공산이던 로마에 혁명파에 의해 성립된 로마공화국(Repubblica di Roma)의 일원이 된 가리발디는 로마공화국
을 정벌하러 온 프랑스 군대와 싸웠으나 두달간의 공성전 이후 결국 패하여 로마로부터 떠나게 된다. (1849년)
<통일 이탈리아의 국부國父로 추앙받고있는 주세페 가리발디>
그뒤 선전활동과 뉴욕망명을 거치며 이탈리아내의 외세를 몰아낼 준비를 하고있었던 가리발디에게 기회가 찾아온다.
그 세번째 인물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재상 '카보우르'였다. 카보우르는 그의 왕인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가
통일된 이탈리아의 왕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는데, 바로 그때 그의 눈에 띈 사람이 바로 가리발디였던 것이다.
그는 가리발디와 마치니가 그의 계획을 도와줄 적임자라고 여겼고, 때문에 그들을 사전에 포섭해둔다. 그리고 그는 프랑스와
접선하여 이탈리아를 노리는 또다른 국가인 오스트리아와 전쟁을 부추긴다.
<이탈리아 통일의 또다른 주역,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재상 카밀로 디 카보우르(Camillo di Cavour)>
프랑스의 원조로 중.북부이탈리아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무찌르자 기회를 놓치지 않은 카보우르는 국왕 비토리오를 설득해
'통일 이탈리아의 건국'을 선포한다. 그가 이때 남긴 유명한 한 마디가 있다.
"우리는 드디어 이탈리아를 창조했다. 이제 이탈리아인을 창조할 차례다!"
<통일 이탈리아의 국기와 문장, 중앙의 문장은 사보이 왕가(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문장이다.
1946년 군주제 폐지이후 국기의 문장은 사라졌다.>
한편 뉴욕으로 망명해있던 가리발디가 1854년 귀국하여 사르데냐-피에몬테의 국왕 '비토리오 엠마누엘레 2세'에게 충성
을 맹세하고 공화국이 아닌 '이탈리아 왕국 건국'으로의 입장을 선회하여 사르데냐 국왕을 위해 알프스에서
프랑스,오스트리아군과 맞서 싸우고 1855년에는 유명한 '붉은 셔츠대'를 조직하여 이탈리아 최후의 저항세력인 남 이탈리아
왕국마저 점령하여 나폴리에 입성 한후 사르데냐 국왕에게 바치게 된다. 그러나 후일 로마 병합이 늦어지자 의용병을 조직,
교황이 다스리고 있던 로마 탈취를 시도하지만 실패하여 카프레라 섬으로 연금당하게 된다.
뛰어난 재상, 명망높고 실력있는 장군, 그리고 강력한 카리스마의 군주. 이렇게 국가형성의 기본 3요소가 딱 맞아떨어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결국 1870년, 최후로 남아있던 베네치아와 교황령을 병합한뒤 국왕 비토리오를 중심으로 한
'이탈리아 왕국(Regno d'italia) 를 건국하게 된다.
로마의 중심에 있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광장에 있는 그의 기마상과 이탈리아 국기.
<이탈리아 건국의 아버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Vittorio Emanuele II>
통일된 국가, 그러나 파시즘의 검은 그림자
1870년 이탈리아 내 최후의 독립지역으로 남아있던 베네치아 공화국과 라치오를 중심으로 한 교황령을 합병함으로써
(서)로마 제국 멸망후 1000여년 만에 이탈리아에 통일된 국가가 세워지게 된다.
그 중심에는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은 유일한 독립왕국, 사보이공국의 후신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이 있었으며, 그 지배층
이자 통일 이탈리아 건국의 아버지가 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 '주세페 가리발디', '카보우르 재상'이 그 중심에 있었다.
이후 이탈리아의 새로운 지배자를 뽑기위한 선거를 치뤘으나 사실상 이탈리아 왕국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의 왕국에
지나지 않았으며 기존 왕정체제를 고스란히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공화정을 지향한 각 계층 (특히 하급계층)의 불만을
사는 불씨가 되고 만다.
이탈리아는 그러나 어찌됐든 헌법에 입각한 '입헌군주국'이었으며 의회도 성립되어 어느정도 국가로써의 기틀을 확립해
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이같은 평화는 잠시, 이탈리아 선거에서 노동자계급과 무자본계급, 가난한 서민들에게는 투표권한이 주어지지 않았고
이는 결국 이탈리아 왕국, 즉 기존 '사르데냐-피에몬테'의 지배계급에 대한 분노로 이어지게 된다.
더구나 북부인들에 의한 불안정한 통일에 의한 불균형한 지역발전은 이같은 현상을 더욱 촉진하는 휘발유가 되고 있었으며
정부의 관료들은 이미 건국이전부터 심하게 타락한 상황이었다.
건국에서부터 제1차 세계 대전까지 (위키백과 인용)
1861년, 사르데냐 왕국에 의한 이탈리아 통일(리소르지멘토)로 인해 성립되어, 사르데냐의 왕인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초대 국왕이 되었다.
이탈리아 통일 후, 군대가 해체되어 많은 사람들이 실직 상태가 되어 실업난 가중 등으로 인해 국내가 불안정하였다.
그들은 크호코로 대표되는 비적이 되어 왕국에 반기를 들었다. 비적은 1861년의 크로코에 의한 샤르데나 침공에서부터 본격화
되었는데, 주로 지주로부터 재산을 약탈하는 활동을 하여 민중으로부터 환영을 받을 수 있었다. 1862년 걸리버 루디에 의한
아스프로몬테의 변란을 기로 한 계엄령 선포나, 이어서 1863년 제정된 피카법에 의해 비적에 대한 압력이 높아졌다.
민중까지 피해를 입히게 된 비적은 점차 지지를 잃어가다가 1864년에 내통자가 정보를 실토하는 바람에, 단번에 진압되었다.
1865년, 수도를 피렌체에서 로마로 천도하였다. 다음 해 제3차 이탈리아 독립전쟁에서는 프로이센(후에 독일 제국이 됨) 측에
서 참전하였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영토 중 오리엔트와 트리에스테를 제외한 베네치아를 병합하였다.
1870년에 일어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의해 교황령을 수호하던 프랑스군이 철수함과 동시에 교황령을 점령하여,
다음 해 로마로 수도를 천도한다.
교황 보장법을 제정하여, 교황청의 지위를 보장하려고 하였지만 교황청측이 거부하고, 이탈리아인들에게 국정에 참가하지 말 것
을 호소하여 이탈리아 왕국과 로마 교황청의 대립 구도가 형성되었다. 덧붙여 이 대립은 무솔리니 정권 시에 라테란 조약이 체결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을 때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영토 문제로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대립 상태에 놓여 있었기 때문에
삼국 동맹을 맺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1911년 불이협상을 이유로 중립 선언을 하였다.
1915년에 런던 비밀 조약을 맺어, 달마티아의 할양을 조건으로 연합군측에 가담하여 전승국의 지위를 손에 넣었다.
파시즘의 대두 (위키백과 인용)
제1차 세계대전의 전승국이었으면서도, 이탈리아 왕국은 파리 강화 회의에서 영토 확대 요구의 대부분이 거부되었다.
이탈리아 국민들 사이에서는 ‘강화 회의의 패전국’이라는 비난이 높아졌다.
트리에스테, 이스트리아의 병합은 완수했지만, 전후의 민족자결주의의 기세가 높아짐에 따라 달마티아를 단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정부의 저자세에 대한 불만이 확대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이탈리아의 경제에 너무 무거운 부담이 되고 있었다. 전후 생긴 인플레는 빈민층의 불만을 일으켜,
북부의 토리노와 밀라노같은 공업 도시에선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노동자들의 공장 점거 등이 일어났다.
남부에서도 농사꾼, 소작인 등의 폭동이 연이어 일어났다. 물론 이러한 계급간의 갈등은 세계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인 러시아
혁명의 영향이기도 했기 때문에, 유산 계급에게는 무산계급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이렇듯 불안한 정세하에서,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당의 전신인 파시스트 전사를 조직했다. 그는 사회 정책의 충실한 이행을 주장
으로 내걸면서 내셔널리즘을 옹호해, 기존 정당을 비판하였다. 그러나, 밀라노에서 선거에 출마하여 완패당해, 무솔리니가 일시
적으로 체포되는 등 그 활동은 당초 한계를 보이고 있었다.
도시와 농촌의 쌍방에서 자본가와 지주, 노동자와 소작인 간의 대립 구도가 지속되었으며, 빈민층을 옹호하는 사회당 정부에
불만을 품은 지주층은 파시스트 세력과 결탁하여 농촌부의 사회당과 노동 조합의 거점 등을 연달아 습격했다.
이것을 징벌원정이라고도 부른다.
당초에는, 농촌 지역의 각지에서 라스로 불리는 지역 지도자가 권력을 잡고 있었지만, 무솔리니가 서서히 지방 세력을 규합하여
중앙집권화를 추진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해서 파시스트 전사는 보수주의권의 지지를 얻어내어, 1921년까지는 당원을 10만 명
정도로까지 확대되어, 동년에 전국 파시스트당으로서 개편했다. 그리고 무솔리니는 파시스트당 당원들과 검은 셔츠 부대를 이끌
고, 로마 진군이라 불리는 쿠데타에 성공한다.
<'검은 셔츠단'과 함께 로마에 입성한 무솔리니>
제2차 세계대전 (위키백과 인용)
1940년의 이탈리아는 나치 독일, 일본 제국과 함께 국제 연맹을 탈퇴했다.
그 뒤 나치 독일, 일본 제국과 삼국 군사 동맹을 맺고 추축국에 가담하게 된다. 추축국은 1942년 전세가 역전되기 전까지
연합국의 영토를 점령했지만 독일군이 스탈린그라드에서 패전하고, 일본 해군 역시 미드웨이 해전에서 미국 해군에게 참패를
당하니 이탈리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1943년 어느 날,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를 체포하게 하였으며 바돌리오 내각을 성립시킨다.
독일군의 도움을 얻고 탈출한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북부에 나라를 세웠으나, 1945년에 애인과 함께 처단되었고,
이와 비슷한 시기에 히틀러도 음독 자살했다.
이탈리아는 독일, 일본, 크로아티아와 함께 제2차 세계 대전의 패전국이 되었다.
<제 2차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와 악수하는 무솔리니>
<2차세계대전 당시 이탈리아가 보유하고 있던 식민지>
군주제 폐지와 현대
2차 세계대전의 패배, 국토의 잿더미를 안겨준 무솔리니가 체포되어 처형되자, 복권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아들인
움베르토 2세에게 권좌를 양위하였다. 그러나 1946년, 입헌 군주제로의 변화를 시도하며 실시한 국민투표에서 46%라는
지지율로 결국 권좌에서 물러나게 된다. (왕정 폐지)
결국 움베르토2세는 이탈리아 역사상 최후의 왕이라는 타이틀을 얻은채 이탈리아에서 쫒겨나고 만다.
그 뒤 새롭게 선포된 '이탈리아 공화국(Repubblica d'italia)'은 새로운 헌법을 발족시키고 완전한 공화제로의 이양을
추구하여 오늘날의 이탈리아에 이르고있다.
2011년 현재의 실권 국가수반은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총리(Silvio Berlusconi, 1937~ )'이다.
명목상 국가원수로 대통령이 있으나 정치적 영향력은 사실상 없다.
조르조 나폴리타노 [Giorgio Napolitano, 1925.6.29~] 가 현 이탈리아의 11대 대통령이다.
마치며..
이탈리아라는 국가는 1870년에 건국되어 비교적 그 역사가 짧지만, 그들의 선조이자 서구 문명의 근본이 되는 '대 로마제국'
의 후예가 수백,수천년동안 굳건히 살아온 강인한 민족이 살고있는 나라다.
또한 이 나라는 높은 교육 수준과 풍부한 노동력을 보유한 세계화된 나라이며, 2009년 국가 브랜드 순위에서 6위를 차지
할 정도로 세계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지니고 있다.
또 이탈리아는 관광 대국인 이미지에 의해 해외에서 4,370만 명이 방문하여 세계에서 5번째로 관광객이 많은 나라이며,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세계에서 가장 많은 데서(44곳) 보여주듯 예술과 과학 분야에서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다.
이탈리아 경제 또한 세계 여러나라 (190여개 국가)들 중 상위 10위에 들어가는 경제 대국이며 강한 경쟁력과 인지도를 가진
세계 최고 품질의 와인부터 첨단을 달리는 밀라노의 패션, 각종 명품 스포츠카와 최첨단 우주 항공 산업, 그리고 시골
곳곳의 지역자체가 브랜드인 최고급 수제가구,수제고급품등 그 역사에서 이어져오는 세계최고의 장인들까지 가히 상상할
수 없는 문화적, 정신적 문화를 유지하고 있는 나라다.
또한 그들은 아직까지도 마스터피스(Masterpiece)로 살아 숨쉬는 경이적인 건축물 (바티칸 성 바오로대성당,
모나지라, 천지창조)들과 서양세계의 궁극적 산물. 르네상스Renaissance를 창조해낸 위대한 민족들이다.
때문에 이탈리아는 그 자체가 바로 '서양 문명의 걸작'이요. '아버지'격인 셈이다. 인류의 역사에서 그들이 이루어낸 자취는
위대한 것만 해도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이다.
그들이 이루어낸 업적중 가장 위대한 바는 역시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 발견일 것이다.
발견도 이탈리아인이 이루어냈고 (실상은 아이슬랜드 바이킹인들이 먼저지만), 이름을 붙인 것도 이탈리아인이었다.
이탈리아는 또한 전세계 인구중 1/6인 11억명이 믿는 '로마 카톨릭'의 총 본산이 위치한 곳이며, 수십세기 동안 서양의
사상적, 문화적, 일상생활 등 모든 분야에 영향을 끼친 카톨릭 교회의 '태동지'라고 할 수 있는 곳이다.
그러나 이탈리아의 도전은 이제부터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높은 산업력으로 인해 이탈리아를 선진국으로 끌어 올린
주인공들인 북부와 가난하고 농업위주로 북부로부터 차별받아온 남부의 심각한 대립이 그것이다.
이들은 로마제국 멸망후 수백년동안 정치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남으로 살아왔고 또 그로인해 아직까지도 지역감정의 골이
유럽 그 어느나라들보다 심각한 편이다. 이는 그들이 앞으로 풀어야 할 가장 큰 숙제일 것이다.
http://blog.naver.com/PostView.nhn?blogId=rozet77&logNo=80013091509 이탈리아의 심각한 지역감정에 관한 글
비록 이탈리아는 수세기 동안 통일되지 못하고 분열되어 왔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각자의 고유하고도 개성넘치는 특성이
로마제국의 위대한 유산을 '재탄생' 시킬 수 있었던것 아닐까. 그것이 바로 필자가 작성중 내내 생각한 결론이다.
<로마가 이탈리아인을 '창조'시켰다면 이탈리아인은 로마를 '재탄생' 시켰다>
-The End-
p.s ㅠㅠ 매우 힘들었네요. 이탈리아는 너무 분열되 있어서 특히... 어쨋든 긴 글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엔 독일편을 써보고자 합니다. (거긴 이탈리아보다 더 심한데 ㅠㅠ) 어쨋든 많은 성원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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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괜찮습니다 먼나라이웃나라 이탈리아편을 보시면 로마멸망후~이탈리아통일운동 까지의 천년의 역사를 생략했으니깐요 ㅋ
그만큼 복잡한 이탈리아역사.ㅇㅇㅇ 이탈리아 학생들은 자기들의 국사를 어떻게 배울지
그냥 르네상스,통일운동,1차대전 간략히,파시즘,그이후로 배울듯,아,먼나라 이웃나라 개정판에서는 르네상스와 그이후의 내용이 아주 약간 추가된걸로 기억하는데요...
개정판엔 나왔나요?..워낙 오래전에 본지라
잘 읽고 갑니다 새로 보이네요 이탈리아 ㅋㅋ
이탈리아... 역사와 문화는 너무나도 매력적이지만 현대와서는 병맛크리...
국가도 듣기 좋네요.
잘봤습니다^^
명저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군요....!
저기 있는 병맛나는 일본사와는 하늘과 땅 차이입니다..;;
베를루스코니...얼마전에 미성년자 성매수 혐의로 고발당했죠.. 앞으로의 행보가 주목됩니다--;;
혹여 시간 되신다면 일본사에 관한 글을 써 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다시 읽어보는데 부족한 점이 매우 많군요;; 그래도 감사합니다. 낭트님의 일본사도 잘 쓰셨는데요 ㅋ
그리고 일단 서+동유럽끝나면 동양근현대사,아메리카근현대사를 써볼 예정입니당~
어휴..부끄럽기 그지 없습니다...;;
개인적으로 중화민국사에 관심이 많은데,기대되는군요!
일본 근현대사 또한 기대하겠습니다!
훌륭한 글입니다!! 다음편 독일편이 기대되네요 ^^ 네덜란드편도 나오나요?
체력과 시간이 되는한 올릴 예정입니다.
ㄷㄷ
늦었지만 지적할 부분이 있네요.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상은 루브르 박물관이 아니라 진본은 피렌체 아카데미아 안에, 가짜는 르네상스에 그랬던 것처럼 시청사 앞에 있습니다.
궁금한게 있는데 초기로마제국 때 이탈리아 반도에서 살던 민족이랑 지금의 민족이 다르다는 얘기가 있던데 이게 사실인가요? 지식인에 물어봐야되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