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힐러리와의 만남
2 주일간의 트레킹을 허탕치고 돌아오는 길은 퍽 피곤했었다. 나는 바위에 등을 기대고 비스듬히 누운 자세로 피곤을 달래고 있었다.
"저분이 힐러리 경인데요" 나와 함께 에베레스트 베이스를 다녀오던 셀파 니마가 말했다.
쿰중에 들러 일부러 힐러리 경을 찾았지만 그는 출타 중이었다. 쿰부 지역에서 출타중이라면 1~2주 정도는 만나 보지 못하는 출타이다. 알려진 대로 에드먼드 힐러리 경은 1953년5월 세계의 지붕이라고 부르는 히말라야산맥의 최고봉 에베레스트 봉을 인류 최초로 등정에 성공한 뉴질랜드 사람이다. 이 공로로 영국에서 작위를 받아 힐러리 경이라고 부른다.
1982년 나는 내 인생에서 처음으로 네팔을 찾았던 경험에서 그를 만난 것은 내가 네팔을 지속적으로 찾을 수 있었던 계기가 되기도 했다. 당시 나는 한국 마칼루 학술원정대의 학술요원으로 등반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사회조사를 위해 셀파 니마와 단 둘이서 힐러리 경이 있는 쿰부 지역을 트레킹 했다. 그가 학교와 병원을 세워 둔 쿰중 마을을 찾았지만 출타 중이란 소식을 듣고 헛걸음을 치고 내려오던 길에 팍팅 마을에서 잠시 쉬고 있었던 참이었다. 한 떼의 노인들이 팍팅 마을의 다리를 고치고 있었는데 그 가운데 한 분이 힐러리 경이었다. 나는 그를 만나 힐러리 경을 찾았던 연유와 쿰중 마을에서 지금 되돌아오는 길이란 것을 말하면서 반갑게 대화를 나누었다. 그가 세워둔 쿰중 마을의 병원을 보면서 내가 의사이기 때문에 기회가 된다면 나도 힐러리 경처럼 네팔의 환자를 돌볼 수 있기를 기원했다. 힐러리 경이 세운 병원은 단층 건물로 병원이 없는 오지마을에 큰 보람이었다. 산행을 마치고 귀국 길에 올랐던 많은 의사들이 이곳에 들러 1년이고 2년이고 힘닿는 대로 봉사를 하고 떠난다는 사실을 알고 나도 기회가 닿으면 봉사를 했으면 좋겠다는 염원을 마음 속에 담았다. 이 염원이 이루어진 것은 다음 해부터이다. 그 때부터 그토록 네팔의 히말에 가고싶어 안달을 했건만 이루어지지 못했던 나에게 어렵지 않게 네팔에의 여행이 해마다 쉽게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 인연은 1982년을 기점으로 2002년인 올해까지도 한해를 거르지 않고 이어지는 네팔 행이 되었다.
(2)선생님 도와주세요
네팔에서 편지가 한 장 날라 왔다. “선생님 도와 주세요” 나의 제자인 네팔의사 프리야 라즈반다리 양으로부터 온 편지의 내용이었다. 프리야 양이 어렵게 의학공부를 마치고 고국인 네팔에 돌아가서 느낀 바를 소상히 적은 편지의 결말은 열악한 네팔의 의료를 위해 봉사해 줄 수 없겠는가 하는 요청이었다. 한국에 있을 때 여름이나 겨울 방학이면 으레 봉사하던 농촌의료 봉사를 생각하면서 네팔을 도와줄 수 없을까 하고 물어 온 것이었다. 나는 내가 언젠가는 힐러리 경을 도와 네팔사람들을 의학적으로 봉사할 수 있기를 기원했는데 바로 이 편지가 나의 소망을 이루어 줄 수도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1986년 나는 정신과의 선배인 그리고 연세대의대에 있을 때 같은 정신과 교실에서 함께 봉직했던 박종철 장미회 회장을 만났다. 장미회는 우리나라의 간질환자를 돌보는 사회복지단체인데 우리들이 어려웠을 때 외국의 도움으로 환우들을 돌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자립도가 높고 또 회원들이 내는 회비나 성금 등으로 운영되는데는 어려움이 없는 형편이 되었다. 그래서 회장님을 찾아 이젠 우리들이 해외의 어려운 환우들을 위해 봉사할 때가 되었다고 설득을 했다. 회장님은 장미회의 이사회를 열어 처음으로 해외의 환우들을 돕기로 했는데 그 첫발을 네팔에서 시작하기로 한 것이었다. 한국간질협회가 네팔의 간질환자를 위해 약품을 보내기 시작한 것이다. 1986년의 일이다.
“사꾸라(프리야)” 내가 2학년의 정신과 강의 시간에 들어갔을 때 출석을 부르면서 이상한 이름을 발견했다. 사꾸라라.... 이는 필시 벚꽃을 뜻하는 일본말일 것이다. “사꾸라가 누구냐?” 한 학생이 초롱초롱한 큰 눈을 나와 마주치면서 손을 들었다. 얼굴이 까무잡잡해서 어디 해수욕이라도 다녀 온 듯한 모습이었다 . “너는 네팔에 다녀왔구나” 나의 마음 속에는 언제나 네팔이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무심코 그런 질문을 던졌다. “선생님 이 학생은 네팔 학생인데요” 친구들이 대답을 했다. 정말..... 나는 강의시간의 첫머리를 네팔 이야기로 시작을 했다. 내가 학생시절에 네팔의 히말라야를 가고싶어서 산악 훈련을 받았던 기억하며 네팔에 가고싶었지만 당시의 국외여행이 어려워 나가지 못했던 아쉬움을 섞어 네팔에 대한 나의 열정을 강의했다. 이런 인연이 그녀가 공부를 마치고 네팔에 돌아가 의료봉사를 시작하면서 첫 번째로 띄워 보낸 편지가 바로 “선생님 도와 주세요” 이었었다. 이 인연은 지금까지 계속 되어오는 인연이기도 하지만 프리야의 아버지인 라즈반다리씨와는 의기가 투합 되어 네팔의료봉사를 심도 있게 전개하기에 이르렀다. 내가 이화대학에 재직하고 있는 동안 네팔-이화의료봉사단을 위해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도와준 분들은 참 많다. 40여 개의 제약회사와 동창들 그리고 팀에 함께 참여해주신 많은 의료인들 학생 그리고 한국일보사의 후원 등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는 분들의 도움으로 네팔 의료 봉사는 당시로선 한국에서 처음으로 시작한 해외봉사로 기록되었다. 지금까지 연인원 300 명이 가깝게 다녀온 이젠 터가 잡힌 의료봉사가 되었다.
(3)네팔-이화의료봉사단
1980년대 중반 한국의 정치사회상은 아주 어둡고 경직되어 있었다. 학교에서는 연일 데모가 일어나고 학생들의 농촌봉사 조차도 억압을 받아 좌절하고 있었던 때였다. 나는 의과대학 학장님(김순회 교수)을 찾아 학생들의 웅지를 해외로 돌려보자고 했다. 자유화의 욕구가 비단 우리나라에만 국한될 것이 아니라 시야를 세계로 넓힌다면 더 큰 웅지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씀 드렸다. 다행히 학장님과 총장님의 승낙이 있어서 1989년 네팔-이화의료봉사단의 첫발을 네팔 땅에 딛게 된 것이다. 첫 봉사지역을 네팔의 돌카라는 마을로 정했다. 이미 1986년부터 네팔 간질환우를 위해 약품을 보내주던 장미회에선 돌카에 병원을 하나 지어 주기로 하고 우리 이화 팀은 매년 이곳에서 의료봉사를 하기로 약속을 했다. 돌카지역은 카트만두에서 170킬로 정도 떨어져 있는 오지로서 힐러리 경이 초기 카라반을 했을 당시 지나쳤던 람상구나 차리코트 그리고 지리 등이 가까운 지역이다. 거리는 170킬로 밖에 안되지만 이 오지를 들어가자면 8시간 정도의 시간이 걸렸었다. 당시엔 도로도 개설 중에 잇었고 또 산길이라 속도를 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렇게 시간이 오래 걸렸다. 이 지역에 겨울 방학을 이용하여 매년 20명 전후의 교수와 학생이 2주간-3주간 정도 머물면서 의료와 사회봉사를 시작했다. 시작을 하고서 안 일이지만 이 돌카는 옛날에 카트만두에서 천연두가 걸린 사람을 강제 이주시켰던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잇었는데 우리들이 봉사하기엔 안성맞춤인 역사를 지니고 있었다. 돌카마을에만 전해 오는 민요가 하나 있었는데 “싯탈라마쥬”란 민요가 있다.
작가 미상인 이 민요를 풀이해 보면 이런 내용을 담고 있다. 싯탈라마쥬란 어떤 뜻이 있는 말이 아니고 좌절에 봉착한 사람이 한숨을 섞어 뿜어내는 한 맺힌 소리쯤으로 이해를 하면 된다.
시탈라마쥬,
불쌍한 사람들의 고통을 보살펴 주십시오
우리는 왕명으로 쫓겨났고 울음소리는 이웃에 전해지지도 못했습니다
병사들에 둘러싸여 북소리에 쫓기면서 우리들은 집을 떠났습니다
한 아이는 목마 태우고 다른 아이는 가슴에 또 한 아이는 등에 업은 채
쫓겨났습니다
박타푸르에서 나는 탈레쥬신 당신에게 충성의 맹세를 드렸습니다
바네파에서 나는 전대소리 신에게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파란쵸크에서는 바그머티 신에게 충성의 맹세를 올렸습니다
도랄가트에서는 빔셈 신에게 맹세하고 탄원했습니다
그들이 우리들의 탄원을 들었을까요
나는 다마꼬시 강둑에 있는 돌카에 갔습니다
먹을 것도 안식할 곳도 없는 돌카에 갔습니다
그러나 나는 강을 건너 마하제브 신에게 감사 드렸습니다
이곳으로 나는 포승줄에 묶이지도 않고 수갑도 차지 않은 채 왔지만
병사들의 채찍은 나의 고생길을 이곳에서 끝내도록 해주었습니다
마마를 옮아주는 카찰라마쥬 신, 물의 여신 바찰라마쥬 신
생명을 불어넣어 주시는 시탈라마쥬 신이여
당신에게 애원합니다
나의 고통받는 아이가 살아날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나는 당신에게 나의 살 중의 살도 바치겠습니다
백조의 솜털도 바치겠습니다
은도 바치고 금도 바치겠습니다
아, 죽은 아이, 슬픔 속에 온 세상은 어둡고
심장은 돌처럼 얼어 빠졌습니다
이제부터 백란향도 없이 부드러운 비단도, 향기로운 향료도 없이
아이들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부모들은 죽은 사랑의 열매를 화장해서 다마꼬시강 탁한
물에 띄워 보냅니다
우리 땅의 수호신이신 라나바두르왕이시여
약한 사람들의 고통을 돌보아 주십시오
시탈라마쥬 신이여 당신에게 탄원합니다
당신 자녀들의 답답한 가슴과 꽉멘 영혼을 풀어 주옵소서.
이 돌카에서 네팔-이화의료봉사단은 1994년까지 6년 동안을 봉사했다. 겨울방학마다 찾아가는 우리들을 돌카주민들은 아주 반갑게 그리고 친절하게 맞아 주었다. 그동안 네팔 정부에서도 우리들의 봉사에 관심을 갖고 오지에까지 장관들이 동행을 해 주기도 하고 마을을 위해 길을 닦고 전기가 들어오고 나중에는 전화도 들어오게 되는데 협조를 해 주었다. 1997년은 그동안 짓고 잇던 돌카의 병원이 완공되고 장미회에서 상주 의사를 파견하게 됨으로서 우리 팀은 네팔의 다른 오지를 찾아 이동 의료 봉사에 나서게 된 것이다. 200년을 맞아서는 지금까지의 의료봉사를 보다 심화시켜 네팔의 심장환자나 기형환자 등 고난도의 의술을 요하는 환자를 초청하여 목동병원에서 무료진료를 해 주기도 했다. 그동안 의료봉사로 혜택을 입었던 환자들은 매년 평균 2500명에서 3200명 선으로 지금까지 13년 동안의 네팔-이화의료봉사를 하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처음부터 이런 거창한 결과를 예견하고 한 것은 아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더니 매년 겨울방학을 맞아 찾아다녔던 것이 10년을 넘기고 보니 그런 결과를 얻게 된 것이다.
(4)봉사와 트레킹
네팔의 오지에서 의료봉사를 하자면 어차피 트레킹을 해야 한다. 교통 수단이 변변치 못한 네팔의 오지로 들어가자면 믿는 것은 다릿심만 믿어야 한다. 의료봉사 때는 물론이지만 의료봉사가 끝나면 시간을 아껴 본격적인 트레킹도 했다. 초기에 좀 여정이 넉넉했을 때문 1주일 정도의 트레킹을 했다.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 마차푸차레 베이스캠프 가우리샹카 베이스 캠프 그리고 카린쵸크 봉 등은 우리들이 함께 했던 트레킹 코스다. 거봉을 등정하는 등반은 아니지만 의료봉사를 마치고 네팔의 히말을 가슴으로 느낄 수 잇는 경험으로는 충분했다. 한번은 가우리샹카의 베이스 캠프로 가던 도중 심가운이란 오지 마을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다. 물론 트레킹 도중엔 전원 텐트에서 자면서 트레킹을 하는데 그 날은 눈보라가 치고 기온도 떨어져 초등학교 교실을 하나 빌려 그 안에 텐트를 치고 잠을 청했다.
“김일성 장군을 존경하세요?” 네팔의 한 젊은 교사가 나에게 물었다. 이 오지 마을에 와서 김일성을 존경하는가 라는 물음을 듣고 나는 퍽 당혹스러웠다. 당시만 해도 경직된 사회적 분위기라 김일성 운운하는 것조차 불안했었는데 존경하는가를 물으니 여간 당혹스럽지 않았다. 그런데 나는 한가지 의문이 들었다. 이 오지마을에서 젊은 교사가 김일성을 어떻게 알았을까 하는 의문이다. 그가 가지고 온 잡지는 북한에서 발행한 선전지로 김일성에 관한 기사가 많이 실려 있었다. 이 오지마을 까지 그런 선전물이 들어오는 것 자체가 놀랍다.
천루피를 선생님에게 드리면서 학생들에게 공책을 나누어주도록 부탁을 드린 기억이 잇다.
한번은 트레킹 도중에 구루를 만났다. 구루는 힌두교의 스승을 말하는데 그는 요가를 하면서 우리 일행과 함께 트레킹을 했다. 우리는 우모복 까지 끼어 입은 겨울등산복 차람으로 트레킹을 하고 있었는데 그 구루는 맨발로 입은 것이라고는 아주 얇은 천조각 하나 뿐이었다. 저녁 캠프장에 도착하여 우리들은 부지런히 저녁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분은 강속에 잇는 큰 바위 위에 올라앉아 요가의 삼매경에 들었다. 나와 요가에 관심이 있었던 J교수가 그의 곁에 앉아 요가를 하는 자세를 흉내내고 앉아 있었다. 한 30분 정도 앉아 있었을까 굵직한 우박이 섞인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우모복을 입고도 한기를 이기지 못해 얼른 텐트 속으로 뛰어 들어갔다. 추위를 녹이면서 잠이 들었다. 아침이 되어 일어나니 온 천지가 어제 밤에 내린 눈으로 하얗게 덮여 있었다. 구루가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우리와 함께 트레킹 코스가 같았는데 한번도 텐트 속이나 롯지에서 잠자는 것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이 눈보라 속에서 어디에서 지냈을까가 궁금했다. 어제 우리들이 요가를 흉내내던 그 강속의 바위 위에 아직도 장승처럼 앉아 있었다. 머리에는 하얀 눈을 이고 서. J교수와 나는 경악했다.
정신을 집중하는 일이 그런 에너지로도 표현이 되는구나 하는 것을 직접 목격한 셈이다.
또 한가지 잊을 수 없는 것은 의료봉사에 늘 함께 해 주신 네팔의 셀파들이다. 의료봉사를 하자면 뒷바라지를 많이 받아야 한다. 텐트를 치고 잠자리를 편하게 꾸며주고 음식을 만들어 주기도 하며 때로는 통역도 서 주는 셀파들이 잇었다. 의료봉사가 시작되고 지금까지 앙 돌지 셀파가 이끄는 트레킹 요원과 주방요원들이 고락을 함께 했었다. 그들의 헌신적인 도움이 없었던들 네팔-이화의료봉사는 짜임새 있게 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처음 네팔봉사에 참여했던 학생들이 앙 돌지 셀파를 부르기를 “오빠”라고 불렀는데 세월 때문일까 작년에 다녀온 학생들은 한결같이 “돌지 아저씨”란 호칭이다. 사꾸라 양의 아버지나 가족 모두는 우리들의 네팔 봉사에 함께 참여하여 그들의 시간과 정력 그리고 경제적인 것 까지 투자하여 우리를 도운 것은 아주 흐뭇한 일이다. 흔히 봉사라면 봉사를 하는 사람과 봉사를 받는 사람이 확연히 구분되는데 이들 가적은 정말 네팔 사람들을 위해 헌신적인 봉사를 우리들과 함께 했었다. 이들 가족이 아니었었다면 애시당초 네팔 봉사는 이루어지지 못햇을는지 모른다는 생각에서 감사를 표한다.
(5)13년 간의 봉사를 접고
돌지 오빠에서 돌지 아저씨로 변화시킨 세월 탓에 나도 정년퇴임을 2001년에 하게 되었다. 네팔 어린이들은 나에게 아저씨라고 부르던 것을 접고 할아버지로 호칭이 바뀌었다. 즐겁고 친근한 호칭이다. 네팔 사람들은 내가 전생에 아마도 네팔사람이었을거라고 하면서 흐뭇해한다. 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 또한 전생에 네팔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부질없는 생각도 해 본다. 언젠가 광주비엔날레가 열렸을 때 네팔 화가 두분을 초청하여 나와 함께 광주 비엔날레를 구경하러 간 적이 있었다. 광주 역에서 택시를 잡아 탔다. 네팔 화가 두분과 내가 함께 탔었다. “비엔나레 행사장으로 갑시다” 내가 기사 분에게 행선지를 말했더니 기사양반이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국말 잘 하시네요” “?” 무슨 말인가. 내가 한국사람인데 한국말을 잘 한다니. “내 눈은 못 속입니다. 내가 기사한지 올해로 꼭 30년인데 내는 은 못 속입니다” 그의 말로는 내가 네팔 사람인데 한국말을 잘한다는 말이다. 아니라고 해도 그는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할 수 없이 한국에 온지 6,7년 되었다고 항복(?)을 했던 적이 있었다. 네팔사람과 함께 타서 기사가 아마도 그렇게 생각을 했었나 보다. 어쨌든 즐거운 항복이었다. 이런 세월들을 먹고 나는 이화대학을 정년 퇴임했는데 퇴임 후의 아쉬움을 위해 가족아카데미아 네팔캠프 팀을 만들어 두었다. 은퇴 이후에 독자적으로 네팔을 다녀 올 수 잇도록 만든 것이다. 이 가족아카데미아 네팔캠프팀은 일종의 OB팀으로 1999년 첫 네팔 캠프를 열고 지금까지 다섯 번을 다녀왔다. 2월과 10월 두 번으로 나누어 2월은 봉사와 트레킹 10월은 문화교류를 위한 문화탐방 계획으로 이원화 해 두었다. 네팔을 다니면서 나는 두 가지 점을 강조한다. 하나는 네팔이 후진국이란 말을 써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고 다른 하나는 티끌 모아 태산 봉사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여러분들의 의료적 취약함을 돕기 위해서 얼마 되지 않는 의약품을 들고 방문합니다. 한국속담에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약을 되로 주고 그보다 훨씬 많은 되돌림을 말로 받아 갖고 갑니다. 그 되돌림은 다름이 아닌 여러분들의 마음과 지혜입니다. 부처님이 탄생하신 땅에서 마음의 성숙함을 배워 갑니다.” 나는 잊지 않고 그들에게 들려주는 말이다. 경제적인 후진국일망정 절대로 문화적인 후진국은 아니다. 부처님이 탄생하신 문화적 선진국이다. 헛말이 아니라 적어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나는 13년 간의 네팔-이화의료봉사단의 봉사는 앞으로도 계속 뜻 있는 교수와 학생들이 이어갈 것으로 믿으면서 지속적이고 전문화된 보다 질 높은 봉사로 이어지기를 진심으로 기원한다. 나는 새롭게 시작한 가족아카데미아의 네팔캠프를 즐거운 마음으로 또 다른 봉사로 이어가고 있다. 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뜻을 함께 하는 것도 즐겁다. 이젠 네팔도 1982년도의 네팔이 아니다. 격변하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들도 우리들이 근대화 과정에서 겪었던 명암을 체험하면서 마음 아파 할 것이다. 하지만 지금 까지 그들이 풍요롭게 간직했던 히말라야의 넉넉한 마음과 지혜를 잃지 말았으면 하는 염원을 가진다. 네팔의 오지가 세계 속의 영적인 중심으로 오래 오래 남아 있기를 기원해 본다. 그래야 피곤한 심신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네팔의 히말을 자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네팔의 오지는 우리들의 마음 속에서 영원히 갈피를 잡아주는 마음의 안식처로 남아 있을 것이다.
첫댓글네!~~~~~ 한번 다녀온 네팔이지만, 내내 ~ 마음 속에서 영원히 갈피를 잡아주는 마음의 안식처였었습니다. 돌아와서도 히말의 파란하늘을 떠올리며 저의 꺼풀을 하나 하나 걷어내게 해주는 ... 그리고 그 어떤 영양제보다 강력한 힘을 스스로 돌아 볼 수 있는. 안내를 주신 이박사님 두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첫댓글 네!~~~~~ 한번 다녀온 네팔이지만, 내내 ~ 마음 속에서 영원히 갈피를 잡아주는 마음의 안식처였었습니다. 돌아와서도 히말의 파란하늘을 떠올리며 저의 꺼풀을 하나 하나 걷어내게 해주는 ... 그리고 그 어떤 영양제보다 강력한 힘을 스스로 돌아 볼 수 있는. 안내를 주신 이박사님 두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