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제 역사에서 이름으로 역사를 빛낸 조상들
1. 김자지(金自知, 1367~1435)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1428년(세종 10) 지금의 법무부 장관과 비슷한 형조판서를 역임했다. 일설에 의하면 한문이 뛰어나고 음양·천문·지리·의약 등에 통달했다. 불교를 배척해, 여러 아들들에게 자신의 장례를 '유교식'으로 치러줄 것을 부탁했다. 당시엔 한자 '지(知)'의 발음이 '디'에 가까워 '김자디'라 불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2. 왕자지(王字之, 1066~1122)
고려 중기의 문신. 고려 숙종(1054~1105) 때 내시를 지냈다(당시 내시는 거세를 하지 않았다). 이후 함경남도 함주에서 여진(女眞, 만주족)을 무찌르는 등 활약했다. 추밀원(樞密院)에서 동지사(同知事)를 지냈다. 현재로 따지면 대통령 비서실 수석비서관쯤 된다.
3. 조자지(趙自知, ? ~ ?)
조선시대 문인, 시인, 은일사이며, 청담파 문인이다. 세조 찬위 이후 타락한 사회에 염증을 느껴 관직에 나가지 않고, 시문으로 소일하였다.
성종 초부터 남효온, 홍유손 등과 만나 동지회를 조직하고, 동대문 근처 대밭 속에 자주 모여 죽림칠현(竹林七賢)을 자처하며 시문과 술과 가무로 소일했다.
벼슬과 명리를 멀리하였으므로, 청담파(淸談派)라 부른다. 1498년 무오사화(戊午史禍) 때 유자광(柳子光)의 상소로 체포 국문당했으나, 혐의가 없어 방면되었다.
4. 이시발(李時發, 1569~1626)
조선 중기 문신. 임진왜란(1592~1598) 당시 왜군 적장 고니시(小西行長)를 정탐하는 등 활약했다. 이후 이몽학의 난(1596), 정유재란(1597) 등에서 공을 세워 1604년(선조 37) 형조참판에 임명됐다. 남한산성 건축을 감독했다.
5. 신보지(申寶至, ?~1196)
고려 중기 무신. 고려 명종(1131~1202) 때 장군이 됐고, 1181년(고려 명종 11) 금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돼 같은 해 12월 종4품의 벼슬 어사중승(御史中丞)에 올랐다.
6. 이자위(李子威, ?~?)
고려 중기 문신. 1076년 요(遼)나라 황후가 상을 당하자 사신으로 다녀왔다. 하지만 1093년(고려 선종 10) 송(宋)나라에 보내는 국서에 실수로 '요나라'를 써 파직됐다. 2년 뒤, 반란에 연루돼 남쪽 변방으로 유배됐다.
7. 강간(康侃, ?~?)
조선 중기 과거 합격자, 1733년(영조 9) 급제해 각 도의 역참(중앙과 지방정부 사이의 운수, 연락 등을 뒷받침하기 위한 조선의 교통·통신기관)을 관리하는 찰방(察訪)을 지냈다.
8. 남근(南瑾, 1556~1635)
조선 중기 문신. 1586년(선조 19) 장원(수석)으로 급제했다. 광해군(1575~1641) 원년에는 '선조실록' 편찬에 참여했다. 조선시대 대표 교육기관 '성균관'의 대사성을 지냈다. 대사성은 성균관의 최고 벼슬로, 정3품 당상관직 고위 인사다.
9.박규(朴葵, ?~1437)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1429년(세종 11)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형조참판 등을 역임했다.
1433년(세종 15) 평안도관찰사로 발령 받았으나, 재직 중 도적의 약탈을 막지 못해 유배됐다.
요새 같으면 개명하고 난리 났을 것이다.
양키들을 향해 가운데 손가락을 용감하게 치켜 세우신 박규 조상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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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양에서 지금도 이름을 날리는 국제적 인물님이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