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염려하지 말라 .....
25절에서 산상설교의 새 대목이 시작됩니다.
산상설교는 개인의 사적 생활의 실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이 세속화의 문제는 상존하는 것이며, 항상 우리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전히 세속화의 위험, 현세의 지성과 철학과 생활로 말미암아 패배를 당하는 위험인 것입니다.'
19-24절 우리 주는 주로 땅에 보물을 쌓고 비축하고 저장하며 이 짓을 하기 위해 사는 삶의 위험을 강조하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주께서 땅에 보물을 쌓는 것에 대해서라기보다는 이것들에 대한 우리의 염려와 근심에 대하여 관심을 갖고 계신 것입니다.
본장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주된 위험은 보물을 쌓거나 이모저모로 재물을 숭배하는 위험이 아니라, 이것들 때문에 염려하는 위험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사탄과 죄의 무서운 교활성을 다시 한번 상기하게 됩니다.
사탄이 그의 궁극적 목적에 땅에 보물을 쌓든, 세상일들에 근심을하든, 사탄에게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여러분들의 마음이 하나님께가 아니라 이것들에 있게 해야 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리고 사탄은 사면팔방에서 여러분을 습격하고 공격할 것입니다.
사탄이 여러분에게 이런 것들에 대한 염려와 근심을 일으키고 있음을 발견할 것입니다. 사탄은 이것들을 바라보게 만들 것이며 그렇게 해서 그는 완전히 만족하게 되는것입니다.
사탄은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할 수도 있습니다.
그가 쓰는 방법은 변화무쌍하며 그가 쓰는 수단에는 끝이 없습니다.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우리가 우리의 마음을 하나님께 집중시켜 거기에 붙들어 매두는 대신 우리 마음을 이런 세상 것들에 집중하게 하는 일입니다.
광야에서 마귀의 삼중 시험은 얼마나 간교했습니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어든'이라고 말입니다.
우리도 비슷한 공격을 받고 있습니다.
주는 우리가 얼마나 연약한지 아십니다.
주는 사탄의 세력과 그의 무서운 간교성을 아십니다.
그래서 상세한 점에까지 언급하십니다. 주는 그 이유를 주십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주께서 이 말씀을 반복하신 것을 보십니다. '너희는 먼저 ... 구하라'
이 말씀은 여러분이 성한 눈을 가져야하며, 재물이 아니라 하나님을 섬겨야 한다고 하는 말씀의 또 다른 표현 방법인 것입니다.
주는 이것을 '세 번씩 거듭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31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34절에서 다시 말씀하시기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 염려할 것이요 한 날 괴로움은 그날에 족하니라'라고 하셨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가르침의 큰 기술은 반복하는 기술입니다.
참된 교사는 한번 말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못하여 반복할 필요가 있음을 항상 아십니다. 주는 이것을 세 번이나 말씀하십니다.
그러고 매번 조금씩 다른 형태로 말씀하셨습니다.
주께서 사용하시는 용어, 특히 '염려하지 말라'(Take no thought)
흠정역(AV)에는 너희가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걱정을 하지 말라) 참된 해석은 '염려하지 말라' '근심하지 말라' 또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너희 생에 대하여 걱정하지 말라'는 뜻이어야 합니다.
이것이 이 낱말의 바른 의미입니다.
이 말은 우리의 마음이 나누고, 분리하고 어지럽히는 어떤 것을 가리키기 위하여 사용된 단어 입니다.
이것을 '성한 눈'이 아니다 라고 말하는 것
일종의 이중적 시각,
두 방향에서 하나를 동시에 보는 것, 그러므로 아무것도 보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 용어의 의미를 더 잘 설명하려면 주께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머무신 이야기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눅 10:38-42). 우리 주는 마르다에게 향하여 꾸짖으셨습니다.
'네가 많은 일로 염려하고 근심한다'라고 말입니다.
가련한 마르다는 '마음이 혼란해졌던' 것입니다.
마르다가 자기가 어디에 위치하고 있는지,
자기가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한편 마리아는 단일 목적,단일 목표를 갖고 있었습니다.
마리아는 많은 일로 혼란해 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께서는 땅의 일들, 곧 세상의 일들에 대하여 염려하고 노심초사 하며, 또 이런 것들을 너무 바라보는 나머지 하나님을 보지 못함으로써 삶의 주된 목적에서 빗나가는 위험에 대하여 우리에게 경고하고 계십니다.
이중적인 삶, 대하여 경고하고 계신 것입니다.
주님은 공중의 새에 대한 논법을 펴십니다.
새들이 나무 위에나 장대 위에 걸터앉아 음식이 그들에게 자동적으로 가져와지기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하는 말은 사실이 아닙니다.
새들은 음식을 위해 바쁘게 찾아다닙니다.
공중의 새들은 참으로 활동을 합니다.
주님이 이 지점에서 상용하시는 논법은 하나님을 수동적으로 시중들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으로 해석할 가능성을 배제합니다.
우리 주는 농부들이 밭을 갈고 써레질을 하고 씨를 뿌리고 곡식을 거둬 곡간에 들이는 일을 결코 정죄하시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사람이 이렇게 이마에 땀을 흘리며 살라는 것이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들의 백합화의 실례를 포함하여 백합화가 뿌리를 박고 있는 땅에서 자양분을 어떻게 빨아올리는가 보십시오.
사도 바울은 이것을 데살로니가 사람들에게 부친 두 번째 편지에서 뚜렷이 표현했습니다. 거기서 그는 '일하지 아니하는 자는 먹지도 말게 하라'고했습니다.
그때 잘못 지도를 받고 다소 광신적인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주께서 어느 순간에든 돌아오며 시간을 보내어야 한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일을 중단했고, 자기네가 특별히 영적인 사람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에 대한 바울의 간결한 논평을 소개합니다.
'일하지 않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삶을 지배하는 몇 가지 기본 원칙이 있기 마련인데 이 원칙이 그중의 하나입니다.
이 세상에서 근심하며 괴로움을 당하며 염려하는 것보다 인류에게 더 자연스러운 일은 없어 보입니다. 이것들이 우리를 지배하고 조종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평생을 이것들에게 사로잡혀 살아가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관심을 가지시는 것은 이것입니다.
주는 이것에 너무 염려하시는 나머지 이 경고를 세 번이나 되풀이하고 있습니다.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
여기서 주는 진술과 명령으로 시작하십니다.
주는 우리의 목숨, 우리의 생존,
우리가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이 몸속의 우리의 존재를 다루고 계십니다. 우리는 이 생명의 은사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는 삶을 이 세상에서 우리의 실체를 통해 살고 있습니다.
주는 우리의 목숨이나 우리 몸의 의복을 우리가 염려해서는 결코 안 된다고 주장하십니다. 이것을 인식해야 할 것은 중요합니다.
이것은 우리의 삶 전체, 곧 우리의 건강, 우리의 기력, 우리의 성공, 기타 우리에게 일어나려는 것, 어떤 형태 어떤 모양으로든 우리의 삶을 구성하는 것을 모두 포함합니다.
주는 명령을 주시고 이유를 주십니다.
주는 대략적 이유의 말씀으로 시작하십니다.
'목숨이 음식보다 중하지 아니하며 몸이 의복보다 중하지 아니하냐'
이 말씀은 목숨과 몸을 포함합니다.
이 말은?
주는 결국 "너희가 근심하고 염려하는 너희의 생명을 생각해 보라. 너희는 목숨을 어떻게 받았느냐?
그것은 어디서 왔느냐?' 라고 말씀하신 셈입니다.
그 답은, 두말할 것도 없이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사람은 목숨을 창조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자기 몸을 낳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아무도 이 세상에 오기로 결정한 사람은 없습니다.
이 순간 우리가 살아있다는 바로 그 사실은 전적으로 하나님께서 의도하시고 결정하셨기 때문입니다.
목숨 그 자체가 하나의 선물, 곧 하나님께로서 온 선물입니다.
하나 님이 여러분에게 보다 큰 선물인 목숨을 선물로 주셨다면
하나님께서 갑자기 자기와 자기의 방법을 부인하시고 생명을 유지하고 지속시킬 수 있도록 주선하시지 않으리라고 생각하십니까?
하나님은 이렇게 하심에서 하나님 자신의 방법을 따르고 계십니다.
물론 나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리고, 추수하여 곡간에 들여야 하게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서 사람과 그 목숨을 위해 정해 놓으신 일들을 나는 해야 하게 되어 있습니다.
나는 일을 해서 돈을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주께서 하시는 말씀은, 갑자기 내 생명을 유지하기에 충분하지 못하기라도 한양 염려하고 근심할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 일이 결코 내게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이 내게 생명을 선물로 주셨다면 내 생명이 계속 되도록 주선해 주실 것입니다. 주는 그저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성경에서 얼마나 번번이 사용되었는지를
로마서 8장 32절 '자기 아들을 아낌없이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그분이 어찌 그와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혜로 주시지 않겠느냐?"
이것은 성경에서 매우 흔한 논증입니다.
생명을 은사로 주신 이가 이 생명의 유지와 지탱을 위해 음식을 공급하실 것입니다.
이 논증을 공중의 새로부터 하나님께서 새들에게 하시는 일이 이와 같습니다. 새들은 먹이를 찾아야 합니다.
그러나 새들을 위해 음식을 공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은 새들을 위해 먹이가 그곳에 있도록 마련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확히 몸에도 적용되는 것은 물론입니다.
몸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선물입니다.
여기서 주의 큰 원칙에, 곧 성경의중심 원칙의 하나에 오게 됩니다.
이 생에서 누리는 것들이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이 사활로 중요한 원칙을 망각하는 일입니다.
예를 들어 생명의 선물에 대해서 우리는 하나님께 얼마나 자주 감사합니까?
하나님께서 생명의 수여자이십니다.
우리 주는 특히 우리들 개인의 경우와 상태에 관심을 가지시며, 주께서 여기서 가르치시는 것은 생명과 존재와 생존을 선물로 주신 이는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엄청나게 큰 개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에 관심을 가지십니다.
하나님께서 의도하시지 않았다면 우리는 이 세상에 결코 들어오지 못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이 큰 원칙을 굳게 파악해야 합니다.
생명과 음식과 생존을 선물로 주시고 그가 우리에게 주신 몸의 신비와 경이를 하나님께 감사하지 못하는 날이 하루라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것들은 오직, 그리고 전적으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것을 인식하는데 이 큰 원칙을 깊이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주는 그의 중심되는 가르침을 이 말씀으로 요약하셨습니다.
'믿음이 적은 자들아,' 주는 성서적 인간관과 생활관에 대한 이해가 부족함을 의중에 두고 계신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에게 문제 되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생명과 몸을 주시는 이는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시작하신 일은 어떤 일이든 결코 미완성 상태로 남겨두시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시작하신 것,
하나님께서 목적하신 것을 하나님은 확실히 성취하실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의중에는 모든 생명을 위한 계획이 있다라고 말입니다.
이 세상의 우리의 삶을 결코 우연한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을 위한 계획과 목적이 있으심과,
그 목적이 수행될 것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숨과 그 유지와 수행될 것을 확실히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목숨과 그 유지와 지탱에 대해 결단코 염려해서는 안 됩니다.
폭풍의 한 가운데 잇든, 비행기를 타든 결코 염려해서는 안 됩니다.
혹은 기차를 탔을 때, 전주에 그 선로에서 사고가 있었음을 갑자기 기억할 때도 있습니다.
이 선물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며 그에게 받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어떤 과정을 그와 같이 시작하시어 어떤 모양으로든 그와 같이 계속하시면 그것을 계속 유지하십니다.
만사를 태초에 작정하신 하나님께서 이것들을 이루어 나가십니다.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과 개개인을 위한 하나님의 목적은 확정되어 있는 것이며 확실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주의 통치자시오,
우리는 하나님께 한 사람 한 사람씩 알려지신 바 되고
하나님과 개인적 관계에 있다는 것에 기초를 둔 위대한 논증입니다.
이것이 히브리서 11장에 서술된 위대한 모든 신앙의 영웅들의 신앙이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하나님이 아시며 하나님이 떠맡으신다'라고 했습니다. 그들을 넣으시고 그들을 위해 큰 뜻을 가지시는 하나님께서 그들을 떠나시거나 버리시지 아니하리라는 이 최종적 확신을 그들은 갖고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서 그들의 목적이 완성되기까지 하나님께서 확실히 그들의 모든 여행을 뒷받침하며 인도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