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래 글은 소설가이자 평론가인 대표적 보수논객 복거일이 지난 해 펴낸
'굳세어라 금순아를 모른는 이들을 위하여-6·25전쟁의 역사와 교훈’에 대해
소생이 월간 '한국논단'에 게재했고 이곳 카페에도 올렸던 서평의 요약 再錄입니다.
영화 '국제시장'에 묘사된 함흥철수와 관련해서 참고하시라고 우양의 글에 댓글삼아 묵은 글을 다시 올립니다.>
--------------------------------------------------------------------------------
'굳세어라 금순아'를 모른는 이들을 위하여.
‘굳세어라 금순아’라는 제목의 대중가요가 있었다. ‘있었다’라고 쓴 이유는, 노래가 세상에 나온 이후 거의 한 세대 이상의 세월 동안 대중의 애창곡이었고 전쟁을 체험한 세대-특히 실향민에게는 실로 ‘가슴을 저미는’ 노래였는데도 사실상 '잊혀진 노래'나 다름없게 돼버렸기 때문이다. 이제는 노래방의 가요 목록 책자에서나 겨우 찾아볼수 있는 정도인데 그 ‘굳세어라 금순아’를 제목으로 빌린 책이 나왔다. 6·25 64주년을 즈음해서 발행된 ‘굳세어라 금순아를 모르는 이들을 위하여’ (도서출판 ‘기파랑’발행)가 바로 그 책이다.<후략>
'황초령 아래에서 얼어 죽은 소녀를 슬퍼한다'
<전략> 저자 복거일은 자신이 6·25전쟁을 겪은 세대들 가운데 가장 어린 세대에 속한다면서 이렇게 돌이켰다. “지금 내 마음에 남은 심상들 가운데 나이가 들수록 점점 또렷해져서 다른 것들을 압도하는 것은, 패주하는 국군들이나 국제연합군들을 따라나선 피난민들이다.”
저자가 "6·25전쟁의 성격과 의의를 무엇보다도 유창하게 말해준다."고 표현한 그 피난민 행렬 속에는 수많은 고아들이 있었다. 그들의 그 후 인생이 얼마나 신산(辛酸)했을 것인가에 대해 긴 설명이 필요할까. 따라서 저자 나이(1946년생)의 세대야말로 6·25 전쟁에 털끝만치의 책임도 없으면서 가장 혹독한 피해자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살아남았다는 건 그래도 천행이다. 무수한 어린 생명이 희생됐다.
줄곧 감상을 배제한 서술로 이어지던 책이 마지막 장(章)-'황초령 아래 얼어죽은 소녀를 슬퍼하며'에 이르면, 말 그대로 읽는 사람의 누선을 자극할 만한 얘기가 나온다.내용은, 당시 미군 1해병연대 1대대 소속이었던 홉킨스William Hopkins 대위의 회상을 요약한 것이다.
-장진호 전투 후 수많은 피난민이 후퇴하는 미군을 따라나섰지만 미군은 그들을 보살필 수가 없었다. 그 때 홉킨스는 어떤 남매가 손을 잡고 길을 가는 것을 보았다. 단발머리를 한 그 소녀는 그에게 어릴 적의 누이를 떠올리게 했다. 중공군의 공격을 받아 부모와 헤어진 모양이었다. 조금 있다가 소녀 혼자 추위에 떨면서 오빠를 찾아 길을 거슬러 올라왔다. 소녀는 눈 속에 넘어지더니 다시 일어서지 못했다. 그는 그 소녀를 벙커 안으로 데려와 뜨거운 차와 ‘C레이션’을 주어 원기를 차리게 했다. 후위 작전을 맡은 부대 소속이라 그는 그 소녀를 데리고 있을 처지가 못 되었다. 그는 안타까운 마음으로 소녀에게 다시 길을 따라 내려가라고 일렀다. 다음날, 그는 황초령 아래 도로 옆에서 얼어 죽은 그 소녀를 보았다.
복거일은 이렇게 썼다. “모든 죽음은 안타깝다. 그러나 열 살이 채 못 된 어린 소녀의 외로운 죽음은 받아들이기 어려울 만큼 애처롭다. 개마고원 매서운 바람 속에 남쪽으로, 남쪽으로 걸어 황초령 넘고서 끝내 기진해서 죽은, 나보다 서너 살 위인 그 소녀는 내게 6·25전쟁을 상징한다.” - 비극이 어찌 죽음 뿐이겠는가. 출판사 편집자의 아이디어로 짐작되지만 책 제목으로 궂이 ‘굳세여라 금순아...’를 차용한 이유를 이해하려면 책의 제 7장 "흥남철수작전'으로 다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50년 12월, 영하 3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을 무릅쓰고 압록강까지 북진하던 국군과 UN군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를 하게 되였을 때에, 흥남부두에는 10만명 가까운 북한주민들이 모여 들었다.남으로 피난하기 위해서였다. 그 때 피난민 1만 4천명을 태우고 거제도까지 무사히 항해한 미국의 메레디스 빅토리호의 ‘기적’은 너무나 유명하다. 그러나 “슬프게도 배들이 부족해서 많은 피난민들이 흥남부두에 그대로 남을 수 밖에 없었다.”- 빅토리호의 기적에도 불구하고 흥남부두는 , 말하자면 거대한 규모로 펼쳐진 '이산(離散)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離散의 현장 흥남부두에 뿌려진 ‘피 눈물’
“그해 겨울은 유난히 추었다. 개마고원에서 불어오는 매서운 바람속에서 여러날을 견디고도 끝내 탈출하지 못한 사람들의 비극은, 뒤에 강사랑이 작사하고 박시춘이 작곡해서 현인의 목소리로 널리 알려진 ‘굳세어라 금순아’에 담겼다."-. 복거일은 책에서 이처럼 대단히 절제된 문장으로 1953년에 나온 가요 ’굳세어라 금순아‘의 사연을 전하지만 그 노래 말은 이산가족들의 '피 눈물’을 함축한다.노래의 1절은 이렇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 찬 흥남부두에/목을 놓아 불러 봤다 찾아를 봤다/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였드냐/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 이후 나홀로 왔다.
흥남 부두에서 가까스로 배에 실려 남으로 온 오빠들은 이제 삶을 끝냈거나 기동조차 극도로 불편한 노년에 이르렀고 북에 남겨진 여동생 금순이는 아직 생사를 알 수가 없다. 6·25의 비극은, 그렇게 우리에게 아직도 아물지 않은 상처로 남아 있다. 6·25 전쟁이 남침인지 북침인지도 모른다는 세대들은 그 상처의 깊이를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는가.
6·25전쟁 64주년이고 휴전의 해로 부터도 이미 갑년(甲年)을 넘겼다. 복거일의 신간 ‘ 굳세어라 금순아를 모른는 이들을 위하여’는 우리에게 '잊혀진 6·25전쟁'의 실상을 '결정적 전투'에 대한 치밀한 서술을 통해 새롭게 일깨운다. 따라서 단순히 재미삼아 읽을 책은 아니지만 6·25의 진실을 어렵지 않게 파악할 수 있다는 점에서 누구보다도 젊은 세대가 읽어야 할 책이다. 그들에게는 노래만 잊혀진게 아니라 6·25 자체가 잊혀지고 있음으로...
<월간 '한국논단' 2014년 8월호- 조규석/언론인>
첫댓글 한국헌병들이 개머리판으로 빅토리호로 올라오는 피난민들을 찍어 바다에 떨어져 죽는 사람도 많았다고 하더라고요. 미군들이 말려서 만명이 넘는 난민들이 승선하여 무사히 거제도 까지 왔었는데 미 10군단 산하 미군 한국군 10만명은 중공군에 포위된 미 해병 1사단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무사히 포위망을 뚫고 흥남으로 후퇴했는데 해병 1사단은 1당 100의 투혼으로 미군 10만명을 섬멸하기로 작정한 중공군의 계략을 분쇄 했답니다. 중공군도 얼마나 당했던지 춘3월 서울 대 공세에 참여 하지 못하고 석달을 꼼짝하지 못하고 웅크리고 있었다는군요. 이것이 저 유명한 장진호의 전투인데 미 해병대의 전투사상 위대한 전투(비록 후퇴하는
잔투이기는 하나)중의 하나라고 하더군요.
'굳세어라 금순아' 빠른가락으로 하여 신바람 나는듯 하지만 너무나 애닯은 노래지요.
흥남부두에서 헤어진 금순이, 그 큰 배를 타고도 찾지 못한 금순이...금순이는 나의 누이고 나의 딸 .... 월남전에 보트 피플이 있었다면 우리에겐 금순이가 있었지요.
그 당시 밤 늦게 부산항에 입항하던 사람들은 부산을 아름다운 고층 빌딩이 가득한 아름다운 항구라고 감탄했답니다. 산꼭대기까지 들어찬 피난민의 움막이 밤바다에서는 아름다운 야경으로 비쳤던게지요.'
언제 어디서나 비참한 이의 눈물과 고통은 부유한 자들의 노리갯 깜.
이제 통일의 순간이 임박해 오면 많은 북한주민이 내려올 것입니다.
이들을 당시 부산시민들이 보여준 자애로운 동포애로 감싸야 할 것입니다.
물론 정부에서도 치밀한 계획을 세워 대비해야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