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일보 프라임 독자인 관계로..모처럼 들어가서 구석구석 살펴봤는데
재밌는 게 있더군요..실재로 현직기자들의 삶을 엿볼수 있는 것 같아서
몇개 퍼왔습니다..근데..여기 중앙일보 기자님들이 보시고 뭐라 하시는건 아니겠지요..ㅋ.ㅋ
==================================================================
이 시리즈는 중앙일보의 일선 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경험했던 '최악의 그날'을 솔직하게 털어놓은 것이다. 기자들의 울고 웃기는 실패담을 통해 그네들의 생활을 한번 엿보자 !
1992년 4월 4일 시말서를 썼다. 엄청난 물(?)을 먹어서가 아니다. 사소한 부주의로 큰 실수를 저질러서다. 이날의 일진, 출발은 상종가였다. 몇달만에 따끈한 기사로 사회면 톱기사를 장식한 날이다.
■곪아터진 신도시 부실■, ■분당 임대아파트 1백20가구 피난■, ■난방 안되고 천장서 물새■, ■빈집 이주 보름간 대보수■. 분당신도시 시범단지 임대아파트 328동 1백20가구 6백여명 주민 전체가 입주 5개월도 안돼 전면 하자보수공사를 해 같은 동의 빈집에 임시로 이주하기 시작했다는 고발성 기사였다.
석간 신문이 나온 오후 1시쯤. 주민 제보를 건네주며 취재지시를 내렸던 수도권 팀장 김창욱 차장(현 뉴욕지사 편집국장)으로부터 격려 전화를 받았다. ■수고했어. 전익진이가 이제 슬슬 실력발휘를 하는구만■, ■개발에 땀났어-. 더 열심히 해봐. ■ 걱정스럽기만 하던 팀의 막내가 큰 기사를 쓰자 무척 좋아하셨다.
모처럼 우쭐했다. 이날 따라 봄기운이 그리도 포근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좋은 것도 잠시. 오후 3시쯤 보충 취재를 위해 현장에 있는데 ■삑삑삑-■호출기가 울렸다. 김차장이었다. 즉시 수화기를 들었다.
■야이 ■■놈아. 너 회사 이름 제대로 확인했어. ■-예(?).
■(주)한양이 맞다는데 너는 (주)한양건설이라고 적었잖아 ■새끼야■-한양건설이 맞는데요. --.
■뭐가 맞아,너 이 ■놈아 당장 시말서 써올려. ■-찰칵-.
즉시 다시 확인에 나섰다. (주)한양이 맞았다. 문제가 된 시공업체 이름을 잘못 적는 커다란 우를 범한 것이다. 물론 다음날 회사이름 정정기사를 내보냈다.
자초지정은 이랬다. 현장에서 이른 아침부터 주민들을 만나 취재했다. 하지만 책임있는 답변을 해줄 시공업체의 관계자는 없었다. 회사 관계자와는 전화로 취재키로 했다. 114에 전화를 걸어 주민들이 이야기 해준대로■한양건설■을 일러달라고 했다. 그리고 그 전화번호로 자세한 대책을 듣고 회사관계자의 멘트까지 기사에 실었다.
한양건설이라고 했는데도 114에서는 한양의 전화번호를 가르쳐주었던 것이다. 이름이 틀렸을 것으로는 상상도 못했다. 아무튼 이 일을 계기로 회사 이름■사람 이름■주소■전화번호 등 어느 하나에도 확인에 확인을 거치는 세심함이 몸에 많이 밴 것 같다.
헌데 이 글을 쓰는 이 순간 9년전과 똑같은 일이 믿기지 않게 반복됐다. 어이없는 웃음이 절로 나온다. 오랜 부도상태에 놓였던 한양(지난 1월 파산)의 현상태를 확인하고, 당시 오보로 정신적 고통을 겪었을 한양건설의 과거 심정을 들어보기 위해 두회사의 전화번호를 114에 각각 물어보았다. 놀랍게도 똑같이 한양의 전화번호를 대주었다.
중소 주택■건설업체중 한양건설이라는 이름을 쓰는 곳이 많다보니 한양건설을 물어도 무심결에 유명기업인 한양을 안내해주는 것으로 짐작된다.
당시 참사 이후 또하나의 습관이 생겼다. 아무리 주의를 기울여도 사람 힘으로는 어찌 할 수 없는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다는 생각에서 마음 속으로 ■무사고■를 비는 기도를 늘 한다.
자기 용량을 넘어서서 자부심을 갖는 것은 인간성의 한 측면이지만, 이 자만심이 종종 참사를 부른다. ■나의 최악의 날들■은 주로 자만심 때문에 빚어졌다.
1997년 10월 28일 아침. 새벽까지 마신 술기운에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잠이 들었다 깼다를 되풀이하고 있는데 마루의 텔레비전에서 아침뉴스가 흘러 나오길, ■김대중 국민회의 총재가 어제밤 김종필 자민련 총재의 신당동 자택을 극비리에 방문, 대통령후보 단일화 협상을 매듭지었습니다.
두 김총재의 회동엔 국민회의 한광옥 부총재, 자민련 김용환 부총재가 배석했습니다.■ 처음엔 꿈이려니 했다. ■웃기고 있네. 한광옥과 김용환 사이에 단일화 협상은 사실상 타결됐지만 아직 DJP가 만날 때는 안됐어.■ 배시시 웃음까지 터뜨렸다.
■회동은 오후 8시 30분부터 40여분간 진행됐으며■ 다음달 3일 단일화 서명식을 갖기로 했습니다.■ 꿈이기엔 기자의 리포트가 길고 말소리도 또렷했으며 내용이 구체적이었다. ■어, 어 이것봐라.■순간적으로 벌떡 일어나 텔레비전 앞으로 다가가니 자료화면으로 두 김씨가 악수하는 장면이 반복되고 있었다.
현관에 떨어진 신문들 중에 조선일보가 1면 머릿기사로 ■김대중 총재, 김종필 총재집 극비방문■단일화 내달 3일 서명합의■라는 제목을 시커멓게 올렸다. 한국일보 역시 이 기사를 톱으로 다뤘고 두 신문 모두 한면 전체를 털어 ■청구동 한밤회동 스케치■■DJP 전격회동 의미■등의 박스기사를 요란하게 실었다.
■사실이 아니예요■라는 반응을 기대하며 김용환씨의 집으로 전화를 걸었더니 ■확인해 줄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 이쯤 되면 무슨 뜻인지 알아차렸어야 하는데 ■확인해 줄 수 없다는 말씀엔 사실이 아닐수도 있다는 뜻이 포함됩니까■라고 아예 ■부인해달라■고 애원하듯 매달렸다. 그도 딱했던지 ■다른 (물 먹은)기자들은 벌써 다 다녀갔어요. 나름대로 확인한 것 같더군요■
그날자 중아일보 2면에 내가 쓴 기사는 다음과 같다. ■■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다음달 5일 김대중■김종필 총재의 최종회동을 목표로 협상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미 두 사람은 어제밤 만났는데...
나는 90년 민자당 합당시절부터 김종필■김용환씨를 취재했다. 97년 10■28사태당시 나를 물먹인 기자들은 두 신문사에서 네명이었는데, 이 두 사람에 대해서만 따지면 네명 기자들의 취재경력을 다 합해도 나에게 미치지 못했다.
실제로 1년 가까이 진행된 후보단일화 협상에서 나는 대부분 그들을 리드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리드했다고 생각하는■자만심이 나를 느긋하게 만들었다.
문제의 회동사건이 있기 두시간전 김종필 총재와 김용환 부총재는 자민련 소속 한 의원의 후원회에 참석했다. 그 때 김 부총재는 주변에 조금은 들릴만한 귓속말로 김총재에게 ■오늘 밤이랍니다. 바로 청구동에 가셔야 겠습니다■라고 얘기를 했다고 한다. 한 경쟁지의 후속취재는 그게 실마리가 됐다.
물론 귓속말의 현장엔 경쟁지의 기자가 있었고, 회사에 들어와 있던 나는 후배들과 저녁을 먹고 있었다. 저녁자리는 2차로 이어졌는데 그날따라 나는 JP취재에 얽힌 무용담을 유난히 떠벌렸다.
당시 정치부장이었던 이수근 국장과 국회반장, 국민회의 출입기자와 나, 이렇게 네명이 줄줄이 시말서를 쓰는 정치부 초유의 참상이 벌어진 것으로 기억한다.
마포서에 없던 내가 전화를 받았던 비결은 이렇다. 나는 기자실로 전화를 건 뒤 KGB의 경비전화를 기다렸다. 일반전화가 통화중이면 경비전화로 할 수 밖에 없었기에. 그리고 마침내 전화가 왔을 때(경향신문 친구가)두 전화 수화기의 송신부와 수신부 위치를 거꾸로해서 맞대줬던 것이다.
하지만 극적으로 위기를 넘겼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마포서에 실제로 도착한 뒤 화장실에 들러서 혁대를 끌러 앉는 순간 2차참사가 발생했다. 혁대 오른쪽에 찼던 ■총■이 그만 그 속(?)으로 잠수한 것이다.
이어 몸속의 물질(?)이 그 위를 덥쳤다. 물론 그 총은 건졌지만(방법은 언급하지 않겠음)예상대로 고장이었다. 지금이야 별일 아니지만 당시로서는 삐삐고장났다는 보고를 도저히 할 수 없었다. 고민끝에 벌어진 그 다음의 과정은 이랬다.
■아직 별일 없는데요?■ - 응 그래. 알았어 일 있으면 전화해
■지금도 별일 없는데요?■ - 알았다니깐. 10분마다 이렇게 전화할 필요는 없어.
■이상없는데요■ - 너 내가 아까 뭐라했어? 일 있으면 내가 삐삐칠꺼얌마!.
■찾으셨습니까? - 니같은 쓰x한테 삐삐를 왜 쳐? 너 제발 전화 좀 고마해라■
하지만 난 지금도 이같은 화장실의 참사가 나만의 일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날 저녁 회의에서 나는 도성진■최천식■김동균■김석현■김종혁 선배는 물론 KGB까지 모조리 삐삐를 왼쪽에 찬 장면을 보았기 때문이다.(참고로 당시 삐삐는 왼쪽에 차면 혁대고리 때문에 절대 빠지지 않았다)
= 용어 설명 =
* 마포 라인 : 사회부기자들이 담당하는 구역을 말한다. 마포 구역
* 1진, 2진 : 일종의 사수, 부사수의 개념으로 2진이 담당하는 구역에서 일어난 각종 사건 사고를 1진에게 보고한다.
* 마와리 : 사회부 기자가 자신이 담당하는 구역을 돌며 취재거리를 챙기는 것을 말한다.
아차 실수로 35만부 '망실'
이상국 편집부 기자
1992년 2월14일을 절대 못 잊는다. 당시 나는 제3사회면을 맡고 있었다.- 편집부 기자는 지면에 실릴 기사들에 제목을 달고 독자들이 한눈에 내용을 파악할 수 있도록 배치하는 일을 한다.
보통 수도권에서 한참 수도(修道)를 거친 뒤에야 맡게되는 지면을, 아직 파릇파릇한 경력으로 담당한다는 자부심에 가득 차 있었던 기억이 난다.
그날 톱-헤드라인 기사-은 한자교육에 관한 기사였다. 아이들에게 한자를 가르치는게 옳으냐 순한글만 가르치는 게 옳으냐 하는 해묵은 논쟁이 재연되고 있다는 얘기였다. 나는 ■국민학교 한자교육■이라는 문패제목에 잔뜩 멋을 부렸다.
책을 펼친 모양의 검은색 컷 위에 흰 글자를 넣었다. 요즘은 촌스럽다고 기피하는 컷이지만 당시엔 재치있다고 봐주던 기법이었다. 그 문패 뒤에는 ■또 불붙은 논쟁■이란 주제목을 달았다. 부제는 ■불편한 글자 굳이 왜 쓰나■하는 반대쪽의 얘기와 ■신문 못 읽는 반문맹 키워■라는 찬성쪽의 얘기를 병치했다.
대장 - 신문 발행전에 오탈자를 확인하는 원고 - 을 가져오다가 <찬(贊)>이 <찬(讚)>으로 바뀌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마침 톱이 한자교육에 관한 얘긴데 한자가 틀릴 뻔했으니 !
부랴부랴 다시 올라가서 정판(요즘의 조판)하는 분에게 <찬>자가 잘못 들어갔다고 말한 뒤 다시 물펜(옛날 젖은 대장에 교열용으로 쓰던 일제연필)으로 글씨를 고쳐 데스크 - 총 책임을 맡은 선배 기자 -에게 가져갔다.
비교적 데스킹 - 검토 -이 까다롭던 권모부국장은 그날따라 제목을 휘 훑어보시기만 하더니, 톱 아래에 있는 날씨제목(비맞는 동백꽃망울)을 보면서 운치있다며 슬쩍 웃으시고 오케이사인을 해주신다.
일이 끝난 뒤 부서로 돌아와 앉아있을 때였다. 혹시나 하고 대장을 살펴보았더니 아까는 제대로 찬성쪽에 있던 의견이 반대쪽에 가있고 반대쪽에 가있던 의견이 찬성쪽에 가있는 게 아닌가. 오자로 따지자면 한글자의 오류가 아니라, 주먹만한 글씨(5.5배) 스무자가 모두 오자인 셈이었다.
정판하시는 분이 <찬>자를 바꾸라는 소리를 <찬>과 <반>을 바꾸라는 얘기로 오해했나 하는 짐작이 얼핏 스쳐갔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그랬다 하더라도 최종대장은 편집기자가 확인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등골이 오싹해지는 순간 시계를 보았다. 이미 신문이 돌고 있을 시간이었다. 용수철처럼 튀어 정판으로 달려갔다.
신문은 늦게 나왔다. 굳이 판을 세울 일이 아닌데 왜 혼자서 그런 결정을 했느냐고 선배들에게 질책을 받았다. 그날 저녁 나는 비감한 기분으로 시말서를 썼다.
시말서 이후의 상황을 알게 된 것은 몇해 지난 어느 날 나눠준 개인고과 내역서에서였다. 거기엔 상벌기록으로 ■오탈자로 신문 35만부 망실■이라고 적혀있었다. 그 끔찍한 내용이 지워진 것은, 그 몇해 뒤에 있었던 개인 징벌기록 대사면 조치에 의해서였다.
지난해 6월 사회부에서 공항을 출입할 때다. 당시 공항에서는 세관 지역을 출입하는 기관원들이 출입증을 이용, 과세물품 빼주기 등 부조리가 끊이지 않아 출입증에 소속 기관을 표시해 교체 발급했다. 그러나 가장 힘센 기관인 국정원■기무사는 다른 이름으로 표기했다.
이 사실을 먼저 알고 ■국정원 요원 출입증 허위기재■라는 제목으로 사회면 톱으로 조졌다. 문제는 기사가 나간 다음주에 발생했다.
당시 국정원 이모 공항실장(2급)이 기자단에게 점심을 제의해 왔다. 그는 유도■헬스로 단련, 나이만 50이지 체격은 30대 유도선수였다.
공항출입만 26년 해온 한국일보 선배가 ■너를 노린 것 같으니 빠지는게 좋겠다■며 충고를 해줬다. 80년대 군사정권 시절 출입기자들이 국정원 사무실에 끌려가 매를 맞기도 하고 툭하면 몸수색을 당했다는 공포스런 이야기도 덧붙였다.
■제가 뭐 틀린 기사 썼나요. 제대로 조졌는데■하면서 자신있게 참석했다.
회식자리에서 공교롭게 그와 마주앉았는데 갑자기 폭탄주가 돌기 시작했다. 고기 몇점도 먹기전에 이실장이 부하 국장■과장을 옆으로 불러 나에게 연달아 폭탄주를 권했다. 웬지 피하면 한발 물러서는 것 같아 40여분만에 8잔을 꽉 채워 마셨다.
취기가 돌자 이실장은 기사 이야기를 꺼냈다. ■같이 지내면서 국정원 사정 안봐주고 그렇게 쓰면 어떻게 하냐■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다른 기자들은 두세잔에 그쳤는데 나 혼자 다 마신 셈이었다. 음식점 문을 나서면서 너무 취해 아무 차나 탔는데 바로 그의 검은색 SM5였다.
기자실로 돌아오는데 오바이트가 나올 것 같아 창문을 조금 열었다. 순간 고기 몇 점과 폭탄주 8잔이 한꺼번에 쏟아져 나왔다.
일부는 운이 좋아 차창밖으로 나갔지만 상당 부문 그것이 시트와 바닥에 흥건히 쌓였다. 악취와 함께 같이 탄 국정원 간부의 당황하는 표정이 오버랩되면서 순간 정신을 잃었다.
이후 퇴근할때까지 계속 게웠다. 나중에는 위액이 넘어오는지 색깔이 파랬다. 어떻게 기자실에 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옆에 있던 한국일보 선배의 말은 또렷이 들렸다. ■국정원 애들이 네 술에다 게우는 약을 탄게 틀림없어■
내 역사상 가장 많이 게운 날이었다. 이후 한달동안 급성위염으로 약 신세를 졌고 다음달 산업부로 발령났다. 이실장은 보름 더 후에 1급으로 승진, 인천총괄 지부장으로 옮겼다.
후일 들려온 얘기. 이실장은 기사한테 ■차안에서 구역질나는 냄새가 난다■며 내 욕(?)을 중얼거리고는 한달 이상 분당에서 대중교통으로 출퇴근했다고.
취재 도중 경험했던 최악의 경우를 꼽자니 그 반대는 과연 얼마나 됐었을까 궁금해졌다. 굳이 헤아릴 필요가 없었다. 씁쓸하고 쓰라린 기억들이 좋았던 것보다 훨씬 많이, 그것도 선명하게 떠올랐기 때문이다.
기자생활 대부분을 사회부에서 일해온 입장에선 당연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80, 90년대 경찰과 법조를 출입했던 만 11년여의 사건기자 생활은 대형사건에 몸을 담그고 지옥과 천당을 오가는 것이었다. 낙종은 견딜만 했다. 만회의 기회가 열려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언론의 규범적 기능에 충실하지 못해 선배■동료들과 함께 안타까워하고 좌절했던 일들은 아직도 최악의 기억들로 남아있다.
1985년 봄. 예년과 마찬가지로 대학 캠퍼스마다 진달래와 개나리 등 온갖 꽃들이 만발했지만 정국과 대학가는 그 이전과 영 다르게 열려가고 있었다. 전두환 정권의 권위주의 통치 강도가 점차 강화되는 것과 비례라도 하듯 시민■민주 단체와 노동계, 대학가의 시위도 점차 격렬해지고 있었다.
■독재타도■ ■호헌철폐■로 상징되던 당시의 반정부 집회와 시위는 미문화원 점거농성을 시작으로 대형 시국사건으로 이어졌다. 모였다 하면 수천, 수만명이고 한 사건의 구속자 숫자가 1천명을 넘나들던 혼돈의 시기였다.
그날도 오후 6시쯤 지하철에 몸을 싣고 회사로 향했다. 머리속으로 정보보고 꺼리와 기획아이디어를 챙긴 뒤 회사 3층 회의실로 들어갔다. 분위기가 이상했다.
사회부 경찰팀 회의는 긴장 속에 온갖 지적과 교육이 이뤄지는 것인데 이날은 아니었다. 부처를 출입하는 선배(상원)들이 웃는 얼굴로 후배들을 맞았다. 창립기념일도 아닌데 왠일일까? 2백자 원고지 뒤에 써내는 정보보고나 기획아이디어를 내라는 캡의 닥달도 없었다.
이윽고 데스크가 만면에 미소를 머금은 채 회의실에 등장했다.
■오늘 신문 괜찮았어?■ ■타사 애들 반응은 어때?■
경찰기자들의 반응은 전혀 없었다. 이어지는 데스크 질문에 성질이 급하기로 유명한 한 선배가 ■한번 가지고 됩니까. 계속 이어져야지■■
기자는 그제서야 선배들간의 선(禪)문답 내용을 눈치챘다. 그날 사회면에 1단으로 처리된, 뱀처럼 가늘고 긴 시위기사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국장석에 중정 사람이 지키고 앉는데 3판까지 1단 기사를 지켰다는 자랑이었다. 경쟁지들은 거의 매일 시국관련 시위나 성명서를 1단 정도씩 싣고 있는데 모르는 척 하고 있다가 한차례 기사화 했다고 생색내는 분위기에 가슴이 한없이 답답해졌다.
그날, 경찰기자들은 몇몇 선배들과 어울려 이튿날 새벽까지 남지(남강 지하)를 거쳐 샘터, 그리고 이태원과 신사동에 이르는 술과의 대장정을 벌였다. 밤새 토하고 싸우고, 울고 격려하고 그랬던 것 같다. 기자된 것이 부끄럽고 시위에 참가한 학생만도 못하다는 반성과 자괴심, 분노도 있었다.
16년여가 지난 지금, 당시의 경찰기자들은 그때와 크게 틀리지 않은 고민들을 하면서 대부분 편집국에서 근무를 하고 있다. 도성진, 이덕녕, 이만훈, 최천식, 김두우, 김우석, 민병관.(이재명, 고도원, 길진현 선배는 퇴사)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을 남긴 탈주범 사건 주범 지강헌이 자기 머리에 대고 있던 사진속의 그 총이다.
내 머리를 두 차례 겨눴던 그는 결국 경찰특공대가 쏜 세발의 총탄을 맞고 먼저 갔다.
사나운 일진은 요란한 전화벨이 새벽잠을 깨우면서 시작됐다.
일주일간 밤낮없이 탈주범들과 숨바꼭질을 하느라 사건기자들 모두 파김치가 돼 곯아떨어진 시간. ■북가좌동 주택에 탈주범 출현■을 알리는 시경(도성진)의 총집결령이었다.
부리나케 택시로 현장에 도착한 시간이 6시.
조그만 앞마당이 있는 1층 단독주택에서 사건의 종막이 진행되고 있었다.
그집 앞을 지나는 골목 양쪽 어귀는 이미 경찰병력이 겹겹이 막아 출입을 봉쇄한 상태.
궁리끝에 주민들이 대피해 텅텅 빈 이웃집들의 담을 계속 넘어가 그집 앞에 도착했다.
쥐새끼 하나 없는 정적을 열두명중 마지막 남은 네명의 탈주범들이 찢어놓고 있었다.
고래고래 악을 쓰며 유리창인가를 깨는 소리, 인질이 된 여자들의 계속되는 비명소리■.
활극장소인 그집 안방이 바로 내려다보이는 옆집 대문위의 콘크리트 지붕에 기어올라갔다.
안방 창문과의 거리는 4~5미터.
옷이 피로 얼룩진 지강헌이가 뭐라고 씨부리면서 권총을 든 주먹으로 유리창을 짓이기고 있다가 나를 발견했다. ■뭐야-. ■ 그가 다급하게 외치며 갑자기 권총을 겨눴다.
뛰어내릴 수도 숨을 수도 없는 상황에서 엉겹결에 취재수첩을 꺼내보였다. ■중앙일보 기자요. ■
몇초간 훑어보던 그는 ■사진 찍지마■라고 신경질을 내며 총을 거뒀다.(흐유■. )
무엇보다 인질(어머니■두딸■아들)들이 걱정이 됐다.
■인질들 무사한거요?■
■괜찮아-. ■
■인질들은 다치지 않게 합시다. ■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상황은 점점 험해져갔다. 집안의 술을 계속 마셔댄 그들은 점점 포악해졌고 인질들에게 계속 아찔한 짓들을 해댔다.
골목쪽에 있는 수사관들에게 봉고차를 대라느니 노래테이프를 가져오라느니 요구하며 수차례 실갱이가 있었고, 범인중 한명(강영일)이 협상차 인질중 어머니와 아들을 데리고 바깥으로 먼저 나온 뒤 집안의 지강헌이 姜을 향해 총을 쏘는 소동도 벌어졌다.
던지고 깨지는 소리, 자기들끼리 다투는 소리, 인질들의 비명이 계속되기를 몇시간.
정오가 지나 지강헌을 뺀 두명이 뒷방에서 권총을 번갈아 머리에 쏴 동반자살했다.
집안에는 이제 살기탱천한 지강헌과 공포에 질린 두딸 뿐.
이윽고 무장한 경찰특공요원들이 몰래 집안에 침투하기 시작했다. 최후의 순간이 다가온 것이다. 과연 인질 피해 없이 끝장낼 수 있을 것인가. 나도 대문위에서 내려와 담 너머로 뛰어들 채비를 했다.
잠시 의자에 앉아 창틀에 발을 올려놓고 멍하니 있던 지강헌이 깨진 유리조각을 집어들었다. 그리곤 목에 대고 좌우로 주욱 그었다. 시뻘건 피가 주루룩 흘러나왔고 4, 5초뒤 그는 옆으로 털썩 쓰러졌다. 끝났구나.
담장을 넘으려는 바로 그 순간.
지강헌이 용수철처럼 벌떡 일어나더니 내 머리에 다시 총을 겨눴다.
■빵■■빠방-. ■.
동시에 총소리가 났고 그가 꺼꾸러졌다. 뒷문으로 뛰어든 특공대들의 솜씨였다.
상황이 모두 끝난건 오후1시가 넘어서였다. 앞뒤 용변도 꾹꾹 참아가며 물한모금 못마신 채 버틴 7시간. 현장에 흩어져 있던 사건기자들은 급히 회사로 돌아와 시커멓게 호외를 만들었다.
세상을 흔들었던 그 사건에서 우리는 ■숨겨둔 억대보물 찾으러 탈주■, ■탈주범들 낮에는 대학생 행세■, ■탈주범 신고 경찰이 묵살■ 등의 연속 특종으로 경쟁지의 사건데스크를 경질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거 ■Worst■맞어?
1998년 여름이었다. 더웠는지 추웠는지 기억이 안난다. 그저 악몽일 뿐이다.
그 여름이 막 시작될 무렵이었다. 아버지로부터 병원에서 암 진단을 받았다는 전화가 걸려왔다. 아버지는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항암치료를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평소 고혈압이던 어머니가 쓰려졌다. 부모님이 나란히 병원에 입원하게 됐다.
그 당시 나는 경찰기자로 강남경찰서에 출입하고 있었다. 그리고 기억하기도 싫은 그 사건이 터졌다. 바로 ■강남 고액과외 사건■.
당시 강남경찰서 수사과장은 전부터 알고 지내던 사람이었다. 하루는 그가 ■장기자, 문화재를 해외로 빼돌린 사건하고 선생들이 학생들 과외 알선한 사건이 있는데 뭐가 더 큰 거야■라고 물어왔다.
나는 ■문화재가 크다■고 대답한 뒤 ■과외 건은 뭐야■라고 물었다. 그 과장은 사건의 개요를 설명했고, 기사를 써서 회사로 보내며 보고했다. ■단독입니다. ■
그런데 평소 나와 수사과장의 친분을 눈여겨봤던 모신문 수습이 내가 기사를 보내는 낌새가 이상했던지 주변을 탐문해 내용을 알아냈던 모양이었다. 우리 신문 초판에는 그 기사가 빠졌고, 다른 신문에만 나왔다. 초판이 나온 뒤 강남경찰서는 몰려든 기자들로 발칵 뒤집혔다.
경찰은 고액과외 학원에서 압수해온 물건을 즐비하게 늘어놓고 브리핑을 했다. 문제는 나의 잘못된 판단에서 출발했다. 다른 기자들이 내가 취재해놓은 만큼 알아내려면 시간 좀 걸릴거다고 생각하고 그날 밤 브리핑에 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기자들은 브리핑을 취재하는 대신 압수품 가운데 있던 학원장의 수첩의 명단을 베꼈던 것이다. 그 수첩에는 떠올리기도 싫은 서울대 총장의 연락처가 가명으로 적혀 있었다.
사건이 터진 이틀 후였다. 부모님의 병실을 오가야 했기 때문에 별로 술자리 기회가 없었는데 전날 밤 모처럼 모 선배가 한잔을 샀다. 과음으로 경찰서 골방에서 늦잠을 자고 있는 중이었다. 휴대전화가 울렸다. 사회부장이었다. ■아침 신문 봤냐?■
얼떨결에 한 대답이 거짓말이었다. ■예. ■
부장은 다시 한번 물었다. ■뭘 봤냐?■
느낌이 이상했다. 그래도 엎질러진 물이었다. ■다 봤습니다. ■
부장은 ■사표 쓰고 회사 들어오지 마라■는 한마디와 함께 전화를 끊었다. 잽싸게 신문들을 펼쳤고 한 신문에 경악할 제목이 붙어있었다. ■서울대 총장도 고액과외■. 이후 사건이 마무리 될 때까지 같은 서울 하늘아래 살면서도 보름간 부모님 얼굴을 못봤다.
덫에 빠진 후배를 구해주고자 당시 시경캡이었던 이철희 선배는 경찰기자를 모두 강남경찰서로 투입했다. 캡 이하 전원이 강남경찰서 근처의 여관에서 합숙하며 내 낙종을 ■반까이■해주기 위해 노력했다.
특히 박신홍 선배는 ■절대 밝힐 수 없는 모험■을 감행하며, 동기인 이상언(국제부)은 여러 개의 제보를 구해다 주며 나를 도왔다. 보름간 몇 차례 ■반까이■
기사를 쓴 뒤 오랜만에 회사에 들어갔다. 그리고 부장 앞에 가 ■죄송합니다■라고 말했다. 부장은 묵묵부답이었다.
어쩔줄 모르는 나를 회의실로 부른 건 사건 데스크였다.
■임마, 큰 거 배운거야. 다 그렇게 배우면서 크는거야. 애썼어. ■
그 한마디에 눈물이 핑돌았다. 그제서야 부모님이 병원에 입원중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한마디 더. 아버지는 결국 그해 겨울 눈을 감으셨다.
나의 워스트 데이도 역시 경찰기자 때 맞았다. 정확히 말해 악몽같은 나흘이다. 3년간 경찰기자를 하면서 나는 무려 네번이나 시경 옥상에 호출 당했다. 아마 이 기록은 아직도 깨지지 않았을 성 싶다.
첫 호출은 都모 시경 캡 당시. 수습 마친 지 6개월 만에(선배들의 전출로 공백기가 생겨) 강남경찰서 1진을 맡은 나는 우쭐해 있었다.
■오늘도 조용함다. 별일 없슴다■라는 새벽보고를 끝내고 기자실에서 아침 잠을 때리고 있었다. 갑자기 도선배가 전화로 ■연합통신에 나온 건 내용이 뭐지?■라며 물었다.
잠결에 ■별 것 아닙니다■고 대답했다. ■그래? 일가족이 죽었다는데■라는 말에 내가 너무 멀리 나간 게 화근이었다. ■제가 강남 1진입니다. 저의 판단을 믿어 주셔야죠■.
곧바로 수화기를 통해 욕설이 터져나왔다. ■이 ■■ 봐라. 니가 데스크냐. 건방진 ■■■■. 99%의 순도 높은 욕설에 20분간 박살이 났다.
그리고 마지막의 사형 선고. ■너 임마, 지금부터 바로 영등포서 2진이다. 그리고 총알같이 시경 기자실로 튀어 와■.
사흘만에 1진에서 짤리고 시경에 가니 도선배 왈, ■보기도 싫다. 옥상에 올라가 손 들고 있어!■ 그 추운 겨울, 시경 옥상의 찬 바람 속에 나는 5시간이나 방치돼 있었다. 도선배가 기자실 동료들과 나가버려 점심도 쫄쫄 굶었다.
오후 늦게 시경 기자실의 미스 박이 나의 조난 상황을 전한 끝에야 겨우 풀려났다.
두번째, 세번째의 소환 사연은 지면상 생략하겠다. 다만 그때도 여지없이 옥상서 칼바람에 떨어야 했다. 도선배는 왜 그렇게 ■옥상 형벌■을 즐겼을까?
네번째 소환 때의 시경 캡은 崔모 선배. 나는 이미 경력 2년이 넘는 노련한 경찰기자로 자라 있었다. 그날은 숙취로 오전 7시에야 잠에서 깼다. 큰일 났다! 시경에 보고할 시간인데■. 마포의 집에서 강남서까지는 30분은 족히 걸린다. 머리는 혼란했지만 묘수가 번쩍 떠올랐다. 일단 강남서 기자실에 전화를 걸어 기사메모를 4개나 풀(pool)받은 뒤 집 부근의 파출소로 달려가 경찰 전용전화를 잡았다.
최선배도 과음 탓인지 혀가 돌아가 있었다. ■오늘은 사건이 좀 많슴다. 주절주절■■하니 최선배도 흡족해 했다. 경찰 전용전화는 역시 효과 만점이었다. 그런데 막판에 최선배가 ■어라, 그런데 너 지금 어디야?■라고 느닷없이 물었다.
나는 당연히 ■강남서 기자실인데요■라고 했다. 최선배 왈, ■아닌데■ 이거 전화가 고장났나■ 어이, 공보계장!강남 전화라는데 액정표시판에는 마포가 찍혀나와■. 무슨 소리야? 이게? 그날은 경찰이 발신자 전화번호 표시를 시경 기자실에 처음으로 시범 운영하는 날이었다.
최선배가 혀를 바로 펴고 물었다. ■너 진짜■, 진짜 강남 기자실 맞냐?■ 노련한 경찰기자가 유도 심문에 넘어갈 수는 없다. 나는 대들었다. ■최선배, 저를 어떻게 보는 겁니까? 저를 지금 시험하는 겁니까?■
두세번의 공방이 펼쳐진 뒤 드디어 최선배의 확인 사살이 들어왔다. ■너, 지금 전화 끊어. 내가 강남서 기자실로 바로 전화할테니■■ 에고, 이를 어쩌나■. 나는 그 날도 시경 옥상에서 네번째로 찬 바람에 떨어야 했다.
첫댓글 하핫.. 재밌다고 하긴 좀 그렇고... 좀 무섭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