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기후 위기시대를 맞아 지역의 역할이 새삼 강조되고 있다. 중앙의 강한 정책드라이브가 뒷받침되어야 하겠지만, 기후변화의 최전선이 바로 지역이라는 공간이기 때문이고 동시에 그 기후대응의 모델이 지역이라는 대안이기 때문에 그러하다. 이 지역적 대안의 두 기둥은 식량자급과 에너지자급이다.
지역, 기후변화의 최전선
우선 식량자급을 위한 전략적인 키워드로는 로컬푸드와 먹거리, 농업전환을 들 수 있다. 현재의 화석연료 중심의 국제식량시스템으로는 국제 기아와 도농불균형, 먹거리 안전 문제를 해결할 수 없으며 자연과 기후변화에 악영향을 주기 때문에 이러한 기획들이 각광받고 있는 것이다.
다만 전환과정에 얼마만큼의 시간이 필요하고 어떤 방식을 취해야 하는지는 등 그 전환경로에 대해서는 논쟁적이다. 그럼에도 대부분은 전환의 요소로 재지역화와 탈집중화, 토양 비옥도 개선, 식습관 개선, 농업 시스템과 방식 개선, 종자산업 개혁, 가공과 유통 시스템 개선에 대해서 원론적으로 동의한다.
에너지자급 또한 농업전환의 중요한 요소이자 생활 필수재라는 특성을 갖기 때문에 함께 고려되어야 한다. 농업생산에는 동물 혹은 사람의 힘 그리고 지하에서 나오든 지상에서 나오든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그리고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농촌에서 산다고 전기와 연료를 포기할 수 없는 노릇이다. 이에 대한 전략적 키워드는 재생가능에너지와 에너지 효율이다. 이것은 지역에너지 전환과 자립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한국에서도 지난 30년 동안 농업과 먹거리 자립의 대의에 동조하여 한살림, 두레생협 등 생협 운동이 꾸준히 전개되고 있다. 그 기간 동안 크고 작은 한계와 오류가 있어다 해도, 한국사회에 새로운 지속가능한 모델과 생활변화의 성과를 제공한 점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국가 경계를 뛰어넘어 이러한 실험을 확장하는 기획인 공정무역에 대해서는 다소 논쟁적이다.
이는 현실에서 잘 들어난다. 아름다운가게, YMCA, 두레생협, 여성환경연대 등이 설탕, 초콜릿, 커피, 올리브유, 수공예품을 판매하고 있다. 이들은 공정무역을 생산자와 구매자간의 신뢰와 존중을 바탕으로 하는 직거래를 바탕으로 제3세계의 가난한 생산자들이 친환경 방식으로 생산한 물품을 공정한(?) 가격에 구매하여 시혜적인 원조가 아니라 경제자립을 돕는 운동으로 설명한다.
반면 일부 생협에서는 내부 논쟁을 통해 공정무역이나 윤리적 소비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유보적인 태도를 취한다. 후자의 입장을 극명하게 밝히는 논자는 천규석(『윤리적 소비』)이다. 자칭 ‘비현실적 낭만적 녹색자치주의자’ 천규석의 주장을 접하면서 공정무역을 포함해서 먹거리․농업과 에너지자립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본다.
공정무역에 대한 한국 생협운동의 논쟁
그의 주장을 요약하면 이렇다. 근대의 농업개방과 국제농업분업구조는 반자급․자립적, 반공동체적이면서,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불평등과 폭력을 낳는다. 이를 뒷받침하는 국가․시장체제 및 낭비적인 삶의 양식을 농경적으로 가난하게 바꾸는 진정한 ‘자급자치생활혁명운동’이나 ‘협동적 인간관계 변화운동’으로 ‘자치소농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반국가․시장주의자인 그에게 자급자치가 유일하게 가능한 농업공동체를 통한 불복종으로 자본과 국가를 무력화시키지 않고는 진정한 자유와 해방의 공동체는 불가능하다―국가의 비효율성과 낭비성 비판에서는 차라리 민영화가 낫다는 주장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최선의 윤리적 소비는 자급자족소비’이다.
그의 확고부동한 논거를 분석적으로 읽어 보자. 먼저 직거래나 윤리적 소비라는 유통․소비영역을 국제분업과 자급자족이라는 생산영역으로 연결시킨다는 점에서 식량위기와 생태위기에 대한 구조적 고찰이 돋보인다.
반면 자신이 밝히듯이 근대보다 봉건적 전근대에 대한 회귀적 성향을 드러내면서 탈근대 혹은 낭만적 입장을 취한다. 농사 중심의 전통사회에서는 대다수 사람들이 지금보다 더 자율적이고 인간다운 삶을 살아왔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런데 과연 그것이 모든 (미시)권력으로부터 해방인지 모호하고, 다수가 상놈으로 태어날 세상으로 돌아가자면 그러겠다고 수긍할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지 궁금하다.
시장에 안가는 ‘자치소농공동체’. 그가 바라는 궁극적인 꿈에 가깝게 구체적으로 실현된 사회는 국가 성립 이전의 농촌공동체밖에 없다고 한다. 전통적인 농촌마을공동체와 파리꼬뮌 정도가 그것에 가깝다. 생태근본주의 혹은 낭만주의의 전통에 서있기 때문에 내용 자체가 새롭지는 않더라도, 공정무역을 비롯한 다양한 이슈에 대한 에누리없는 실명비판은 자못 신선하다.
그런데 그의 근본주의적 입장이 모든 사안에 대해 절대적 기준으로 현실적인 의미가 있을까?그리고 “권력투쟁이나 계급투쟁에 대한 미련이 조금이라도 남은 사람들은 이 운동으로부터 일찌감치 떠나야 한다”는 주장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제 본격적으로 공정무역을 키워드로 식량과 에너지 문제를 따져보도록 하자.
첫 질문. 공정무역은 세상을 바꿀 수 있을까? 사람마다 달리 답할 것이다. 잣대가 다르기 때문일텐데, 위에 언급한 공정무역의 의도를 그 잣대로 삼으면 답은 좁혀진다. 통상적인 커피 거래에 따른 이익 배분을 보면, 생산자는 최종 가격 중 1% 이하에서 7%까지를 받는다. 대부분의 이익은 개발도상국의 중개인이나 선진국의 대기업이나 소매업자에게 돌아간다. 공정무역은 이러한 불공평한 무역구조에 조그마한 구멍을 낸다.
생산비용과 생산자의 생활비를 감당할 수 있는 ‘최소한의 가격’과 생산계획을 세울 수 있도록 하는 ‘장기 거래’를 보증하는 것이다. 그 결과 생산자와 그 조합은 17%를 확보할 수 있게 된다. 또한 마스코바도 설탕으로 알려진 ‘네그로스 프로젝트’의 사례처럼 식량자급 전환이 진행되고, 지역공동체 자립․자치를 위한 시도들이 주민참여에 기반하여 가능해진다.
반면 전통적인 변혁논리나 천규석의 자급자치혁명의 관점에서 보면, 대단히 부정적인 답이 나올 것이다. 가능하지도 않고 바람직하지도 않다는 이유로. ‘오염’ ‘위선’ ‘기만’ ‘자기모순’ ‘자기부정’ ‘역겹다’ ‘단체가 재정상의 이유로’ ‘사업 확장의 일환’. 이상의 것들은 천규석이 공정무역을 하는 생협과 단체들에게 퍼붓는 표현들이다.
공정무역은 어설픈 국제주의?
공정무역은 농장주들에게 이익이 돌아가는 ‘어설픈 계급 국제주의’ 혹은 ‘민중연대주의’이며, 생산자들을 국제분업적 시장에 영원히 예속시켜 자급․자치를 막는다고 강변하다. 그러나 네그로스 프로젝트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당사자들에게 ‘타율적인 삶’을 강요하기보다는, 공정무역에 내재한 삶을 개선하는 착한 취지에는 부합하다고 평가하는 게 타당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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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6년 두레생협의 네그로스 프로젝트 현장 (사진=두레생협) |
천규석은 여기서 한발 더나가 공정무역이 자본과 무역의 합리화 혹은 정당화에 기여한다고 판단한다. “다국적기업보다 더 반동적이고 이기적인 태도이다. 다국적기업의 이윤의 극대화에 의한 모순으로 다가온 파국을 공정무역이란 완충물로 오히려 지연시켜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실이 그렇다면 대다수의 운동과 실험 또한 이러한 구조기능적인 이유로 존재의 비극에 처해 있을 것이다. 심지어 천규석이 주창하는 것이 국지적으로 가능하다면 그것 역시 공정무역처럼 정당화의 기제가 아니겠는가? 그리고 도농의 역할분담이라는 측면에서 오히려 현상태가 고착될 수는 가능성도 있지 않는가? 이렇게 천규석 본인의 논리를 따라가다보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하게 되는데, 소농공동체 자체가 불가능하다는 점이다. 자본의 시대에 들어 농촌공동체는 공존할 수 없게 되어 ‘복지국가자본주의’가 그 공동체를 분해하는 것이 제 역할이 되었다고 하는데, 도대체 소농공동체를 유지하는 것 자체가 어떻게 가능하겠는가? 기막힌 세기의 탈주가 아니라면 또 다른 ‘상상의 공동체’가 아닌가?
다음 질문. 공정무역은 에너지 낭비로 기후변화에 기여하는가? 그의 말대로 공정무역도 원거리 무역이기 때문에 기후변화에 ‘일조’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는 기후모순을 외면하게 만드는 과잉비판이다. 기후변화의 역사적 책임 소재와 빈국과 빈자의 온실가스발전권리를 비롯한 기후정의에 대한 고민은 없다. 기후변화의 완화는 모든 온실가스의 배출을 제로로 만드는 것이 아니다. 1도든 2도든 나름의 국제적 목표가 설정되면 국가별 혹은 분야별로 목표치에 맞게 배출을 허용(혹은 억제)하는 것이다.
즉 필요한 배출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기후변화의 적응을 위한 재정과 기술 지원 역시 국제 운송 자체가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생존성 배출에 속하는 공정무역이 뿜어내는 온실가스가 현재 국제무역에서 0.1%를 차지한다. 같은 온실가스 1ppm이더라도 그 온실가스의 사회적 의미는 다를 수밖에 없다. 물리적 거리만을 따지는 천규석은 의도하지 않게 ‘탄소식민주의’에 빠지는 우를 범하게 된다.
사막에 대규모 태양광 시설을 만들자고...?
더욱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은, 비록 지나가면서 툭 던지는 말이기는 하지만, 사막에 대규모 태양광 발전시설을 건설하여 일자리도 창출하고 재생가능에너지도 생산한다는 그의 견해이다. 그의 공동체 자급․자립에 에너지는 제외되는가 보다. 이는 국가와 에너지기업의 주장과 흡사한데, 단지 화석에너지가 아니라고 해서 대규모 중앙집중형 에너지체계를 통해서 공동체의 에너지 전환과 자립이 가능하겠는가. 오히려 환경단체의 주장보다 후퇴한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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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역정부 주도의 에너지자립의 성공적 모델로 평가받는 오스트리아 귀씽의 학교 에너지 교육관 (사진=에너지정치센터) |
천규석이 무조건적으로 비현실적인 것만은 아니다. 노동연대 혹은 도농연대의 직거래라는 시장 불복종 운동을 적극적으로 제안하고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집단 공동체 귀농도 필요하다고 보는데 이를 통해 잃어버린 공동체 정신도 함께 회복할 것을 기대한다.
여기에 공동체 에너지자립에 대한 보다 선명한 전환을 추구하면, 기후대응에 필요한 먹거리․식량자립과 에너지자립을 동시에 모색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럴 때만이 ‘갈 데까지 가보라고 할 수밖에’라는 허무주의를 극복하고 희망의 공동체를 만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현실에 개입하는 이 지점에서 또 다른 문제가 발생하는데, 비일관성 혹은 근본주의와 현실주의의 사이에서의 방황이다. “무역은 원천적으로 반지속적이고 반생태적이며 따라서 민중적”이라던 그는 예외적으로 쿠바―볼리비아―베네수엘라 삼국의 구상무역 방식의 ‘민중무역협정’을 긍정한다.
나 역시 이러한 노력을 높게 평가하지만, “일관성과 보편성이 없으면 원칙이 아니다”고 공정무역과 국가를 매섭게 비판하던 그에게 도대체 원칙이 무엇인지 궁금하다. 협정에 포함된 석유자원 무역은 ‘자주적으로 살아나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라고 두둔하기도 한다.
천규석의 주장대로라면 베네수엘라는 볼리비아의 농산물 구매보다는 자국의 무너진 농업을 먼저 살려야 자신의 원칙에 부합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쿠바가 에너지․식량위기를 극복한 경험을 칭찬하는 대목에서는 왜 국가의 개입에 대해 침묵하는지 알 길이 없다.
몇 가지 더 열거하자면, 세계식량위기에 대한 근원을 한 곳에서는 농업개방이라고 했다가 다른 곳에서는 고유가와 바이오연료 개발 탓으로 돌린다. 직거래 물류센터를 또 하나의 억압기구로 평가절하하다가도 재산사유상한제, 농산물 직접 직불제라는 현실주의적 제도를 주장한다. 88만원 세대의 세대론적 접근을 비판하다가도 ‘평화의 상징’인 노인이라는 노인세대론을 찬양한다.
다만 “생존에 꼭 필요한 필수품도 아니고 기호식품의 수입을 정당화”한다는 비판에는 수긍이 간다. 대표적으로 커피, 설탕, 초콜릿이 그러하다. 기호품 중독에 근본적으로 비판하거나 철저한 신토불이 측에서야 더욱 자유롭게 주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독이면서도 기호 내지 취향인 것을 강압적으로 통제하지 못할 바에야, 실제로 소비되는 것에 대해 온건하더라도 현실적으로 개입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지 않을까. 공정무역 커피가 안들어온다고 다국적기업 커피가 안들어오지 않고, 파키스탄의 공정무역 축구공이 안들어온다고 축구가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윤리는 책에 있는 것이 아니라 현실에 존재한다. 그리고 우리는 ‘권력없는 삶’이 아니라 ‘권력의 배치와 작동방식을 바꾸는 삶’을 꿈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