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칼호와 기업가 정주영’
러시아의 바이칼호는 한국인의 조상이 몽골 4촌들과 갈라졌다는 곳이다.
거대한 물줄기가 폭포수처럼 앙가라 강으로 떨어진다.
호수의 출구엔 시베리아의 파리라고 불리는 이르츠크츠 시가 조성되어 있다.
1825년 12월 니콜라이 1세에게 입헌군주제 개혁을 요구하는 혁명을 주도했던
청년 장교 (데카브리스트) 들이 시베리아로 유배형을 받고 와서 건설한 도시다.
그 부인들이 허허벌판의 유형지로 남편을 따라왔던 순애보는
톨스토이의 ‘전쟁과 평화’의 대서사였다.
현대에 들어와 유명한 것은 호수 출구를 가로 막아 건설한 4㎞ 길이의
사력(砂礫)댐이다.
스탈린 시대 10년을 걸려 완공한 거대한 댐이다.
현대건설 회장 정주영은 이 사력댐을 모델로 삼아 소양강 댐을 건설하였다.
본래 한일 국교정상화 후 일본의 경협자금으로 세운 큰 사업은
경부고속도로, 포항제철, 서울 지하철 1호선이다.
여기에 소양강 댐을 추가할 수 있다.
소양강 댐 완성 전에는 장마철마다 한강이 범람하여
서울의 저지대가 물에 잠기는 게 연례 행사였다.
그러한 만성적인 한강 홍수에 마침표를 찍는 토목공사였다.
1973년에 완공한 이 댐은 길이 530m, 높이 123m, 저수량이 29억 톤에 이르는
우리나라 최대의 다목적댐이다.
본래 소양강 댐은 일본 경협 자금을 쓰기 때문에
일본의 도요 엔지니어링에서 맡기로 내정되어 있었다.
그런데 현대건설의 전갑원 과장이 댐 건설 사례들을 조사하다가
바이칼호의 사력댐을 공부하게 되었다.
사력댐이란 흙으로 짓는 것이다.
한가운데 찰흙을 메워 넣어 물이 새지 않도록 하고,
그 양옆으로 돌, 모래와 흙을 쌓아서 댐을 완성하는 것이다.
경부고속도로를 1Km당 1억 원의 저가로 완성하여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얻은
정주영 회장은 전갑원 과장의 의견을 듣고,
바로 박 대통령에게 사력댐으로 건설해야 한다고 건의하였다.
박 대통령은 그렇다면 청와대에서 일본 도요 엔지니어링 측과 현대건설 양자가
논쟁해보라고 자리를 마련하였다.
일본의 도요 엔지니어링 회장은 엔지니어 중역들을 대동하여 참석하였고,
정주영 회장은 전 과장만 데리고 참석하였다.
먼저 일본 측 회장이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정 회장의 학력이 어떤지를 물었다.
정 회장은 고향 통천에서 소학교를 졸업했다고 답하였다.
그랬더니 일본 회장은 여기 참석한 중역들은 모두 도쿄 제국대학 공학박사들로
수풍댐을 설계한 전문가도 있다고 말하고,
세계적인 추세는 수풍댐과 같이 콘크리트 중력식으로 튼튼하게 짓는 것이라며
소양감 댐도 그래야 마땅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대해 정 회장을 수행한 전 과장이 바이칼호 사력댐의 예를 들어
재원이 부족한 한국에서는 국내 자원을 활용해야 한다고 하면서
사력댐이 옳다고 주장 하였다.
그 당시 한국에는 시멘트와 철근도 충분하지 않은 시기였다.
덧붙여서 소양강 댐은 휴전선에 가까운 지역이기 때문에
북한군의 포격으로 콘크리트 댐이 붕괴하면 인근 지역 뿐만 아니라
한강수계의 하류에 있는 서울 전체가 물 바다가 되어서
피해가 막대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사력댐의 경우 포탄을 맞아도 댐 자체가 무너지는 일은 없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포병장교 출신인 박정희 대통령은 무릎을 치면서 사력댐으로 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이러한 경위로 사력댐 건설을 위한 입찰 경쟁이 1967년 소양강 현장에서 시행되었다.
이명박 사장 일행이 입찰금액을 써내는데 매달려 있는 동안,
정주영 회장은 본사 비서실에 전화하였다.
“지금 당장 전 직원을 풀어서 서울시의 상습 침수 지역에 버려진 땅들을 매입하라.”고
지시하였다.
즉각 압구정동, 잠실, 풍납동 지역의 저지대 땅들을 사들였다.
지금도 그 지역에 아산병원을 비롯하여 현대아파트가 많이 들어선 연유다.
88올림픽을 대비하여 한강 변의 잡초 무성한 둔치를 깨끗하게 정리하여
강변 고속도로를 만든 것도 정주영의 아이디어였다.
1970년대 석유파동 이후 한국은 경제 난국을 벗어나야 했다.
정주영은 오일달러를 벌어 들이기 위해 중동 진출에 앞장섰다.
1976년 2월 에는 사우디 주베일 신항만 건설공사를 9억3천만 달러로 낙찰하였다.
20세기 최대의 건설공사로 불렸던 이 사업은
그해 우리 예산의 절반에 해당하는 규모였다.
정주영의 사전에는 불가능이란 없었다.
안 된다고 하는 직원들에게
“이봐 해봤어?”야 말로 도전정신의 압축 표현이다.
정주영 회장의 기업가적 도전정신은 비상하였다.
현대 조선소 건설 일화는 이미 잘 알려져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오원철 경제수석의 분석 보고로 중공업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노동 집약적인 조선산업 추진 필요성을 확인한 다음,
정주영 회장을 불러서 조선업을 시작하도록 요청하였다.
당시 수십만 톤의 대규모 유조선을 짓는 것은
마치 맨 땅에 박치기 하는 것과도 같았다.
무엇이라도 도전하는 천하의 정주영도
경험이나 자금 조달이 막연하여 난색을 표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불같이 화를 내면서 일을 맡지 않으면
감옥 갈 각오하라고 윽박 질렀다.
정 회장이 출구를 못 찾을 정도로 혼비백산하여
청와대를 나와서 다음날 바로 런던으로 출국하였다.
’A&P 애플도어’라는 금융회사의 롱바텀 회장을 만난 자리에서,
정 회장은 500원짜리 지폐에 그려진 거북선을 보여주면서
"우리는 벌써 4백 년 전에 철갑선을 만들어 일본을 혼낸 민족이오."
라고 설득하여 자금 보증을 받아냈다.
그리스 선박 왕 이바노스와 극적으로 판매 계약을 체결하여
드라이 독(dry dock) 건설과 26만 톤 급 유조선 2척의 건조 작업을 동시에 진행하였다.
봉이 김선달이 대동강 물 팔아먹는 것과도 흡사한 사업이었다.
드디어 드라이 독을 완성해서 물을 채우는 동시에
최초의 유조선이 바다로 진수하였다.
한국에서 만든 유조선이 바다에 뜨겠느냐고
견제 하던 일본 쪽의 소리도 쏙 들어갔다.
기업인 정주영은 주도면밀하였다.
수만 명의 용접공을 단시간에 육성 하기 위해
모든 방법을 다 동원하였다.
심지어 1971년 시작한 반포아파트 건설 현장에서도
많은 용접공을 길러냈다.
이 아파트 난방 시스템은 옛날의 스팀 식이 아니고 온수 식이었다.
방열 라디에이터에 온수를 순환시켜서 난방하는 것이다.
틈이 있으면 물이 새기 때문에 완벽한 용접이 중요했다.
용접공 교육장이 되었다.
현대 뿐만 아니라, 대우, 삼성 중공업의 용접공은
이제 기술과 경험이 쌓여 특A급의 완벽한 기능인도 수천 명을 넘는다.
한국인의 손재주가 만개한 것이다.
그 덕분에 한국이 1995년 건설한 방사광 가속기의
700미터 길이의 두꺼운 강철관의 용접도 완벽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
급격한 기압 변화에도 강철관이 터지지 않기 위해서는
고난도 용접 기술이 필요했다.
먼저 시작했던 인도보다도 한국이 앞서 완공한 것이다.
한국 경제가 전 세계 6대 강국으로 진입하는데
초기 경제인들의 이러한 기업가 정신(entrepreneurship)이 결정적으로 중요했다.
물론 전 국민의 피와 땀이 합쳐진 종합적 결과이지만,
정주영, 이병철, 김우중 등의 기업가 정신이야 말로 정말로 값진 것이다.
그들의 기업가 정신이 없었다면
우리는 스페인이나 이탈리아를 능가하지도 못했고,
동남아 국가들 조차도 앞지르지 못했을 것이다.
동남아의 화상(華商)들이 회임 기간이 긴 장치 산업에 투자를 기피하고
주로 서비스 산업에서 부를 축적한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우리의 기업가들이 목숨을 걸듯이 도전하여 성공함으로써
엄청나게 큰 부가가치를 창출한 덕분에 그 혜택을 5천만 한국인이 지금 나누고 있다.
한국인의 소비 수준을 받쳐주는 주요 원천이
기업들이 만들어낸 높은 부가가치에서 나오는 것이다.
원조 받던 나라에서 주는 나라로 변한 것도 그러한 결과였다.
- 이민우 저, “정주영이 누구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