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현민이 어느 방송에서 한 이야기이다. 젊었을 때 제대하고 복학 하기전 빈둥거릴 때 마침 아버지가 실직하고 같이 집에서 빈둥거리고 있었단다. 어머님가 구역예배를 본다고 나가 있으라고 해서 두 남자가 쫒겨나 밖에서 식사를 했는데 그 날이 마침 자기 생일이었단다.
모든 종교는 나름의 형식이나 예식이 있다. 그것들이 어떤 이들에게는 구원과 해방의 경험을 가져다 주기도 하지만 어떤 이들에게는 반대로 굴레가 되는 수도 있다.
가장 쉬운 예를 든다면 방언 같은 경우이고 더 심각하게는 세례 같은 것도 있다. 제가 좋아서 하는 방언을 가지고 옳으니 그르니 하는 부질 없는 논쟁도 끊임이 없고 교회사를 보면 세례의 문제를 가지고 죽고 죽이는 때도 있었다. 기독교 역사 안에서 자기들끼리 치고 박은 기록 중에 가장 많은 순교자가 생긴 것이 재세례파이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모두 신을 인격적인 존재로 상정 할 때 발생할 수 있는 문제이다. 인격적 신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처럼 바라는 바가 있고 바라지 않는 바가 있다. 그래서 그런 신의 존재를 믿는 이들은 신이 바라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 애를 쓰게 되고 그 반대를 피하려고 노력을 하게 된다. 그러나 자식이 부모의 뜻에 대하여 오해를 하거나 엉뚱하게 해석할 수 있듯이 인격신을 믿는 이들도 종종 신의 뜻을 오해할 수도 있다.
인격신은 전지전능하고 인간의 길흉화복을 주관한다. 그러나 신이 절대 인격자가 되고, 종교가 구원의 방주가 될수록 인간은 비참해진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인격신을 거세하여 신에게 자연이라는 제 이름을 돌려주었다. 그러나 근대 세계에 들어와서 어떤 사람은 신을 내동댕이쳤고 어떤 이들은 더욱 집착한다.
그러나 여전히 신을 인격적으로 믿는 이들의 특징은 아우슈비츠와 같은 인류사의 모든 불행과 참극, 쓰나미와 지진 같은 재해에 대해서조차도 억지로라도 신의 뜻을 찾으려 한다.
신에 대한 이런 개념에 대해서 극단적으로 부정적인 접근을 한 것이 바로 니체의 초인 사상이다. 니체에 의하면 기독교는 노예의 종교, 겁쟁이의 종교다. 초인은 이런 노예의 종교, 두려움에 떠는 신앙을 초월하고 타인의 시선을 두려워하는 것 때문에 실천하는 도덕의 수준을 넘어선 존재이다. 처벌이 두려워서, 지옥이 겁나서가 아니라 생의 에너지가 넘쳐흘러 기꺼이 타인에게 선을 행한다.
그런가하면 정반대로 유물론적인 기독교도 있다. 유물론적 신학(Materialist Theology)은 영적인 세상도 물질적인 세상을 통해 느낄 수 있다고 본다. 예를 들어 성스러움을 느끼는 것 즉 ‘거룩’은 그냥 가만히 있는데 저절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고 자연이든, 물건이든, 사람이든 어떤 물질을 보고 느껴지는 것이다. 대부분 제사, 예배, 굿과 같은 집합 의식을 통해서 느끼려고 노력을 한다. 그러므로 성스러움은 바로 우리 스스로가 욕망을 표출하기 위해 기꺼이 참여하고, 만들어 따르는 일종의 이데올로기이다.
대표적인 것이 1927년 만든 ‘신념의 승리’라는 나치의 뉘른베르크 전당대회 홍보영상을 만든 나치의 정치적 선전 선동 수법이었다. 이렇듯 성스러움은 대중의 광범위한 자발적 동의를 통하여 성립될 수 있는데, 그 성립의 과정이 바로 기득권 세력은 집합의식을 도덕적으로 장려함으로써 대중들이 성스러움의 이데올로기에 종속되게끔 만드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질과 현실을 중요시하는 유물론의 관점으로 충분히 성스러움을 포착, 분해, 비판할 수 있다는 것이며, 그리하여 지젝의 이런 종교에 대한 특별한 관점이 "유물론적 신학"이라 이름 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