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의 바람, 성령의 불
요한복음 14:25~27
오늘도 금요기도회에 올라온 성도여러분들에게 감사드립니다. 무더운 날씨 속에 하루일과를 마치고 피곤하며 쉬고 싶지만 금요기도회에 함께한 교우들에게 하나님의 큰 은혜가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1. 성령의 불
우리믿음의 선배 목사님 말씀 가운데서 가장 인상 깊게 남은 것은 언제나 “불로, 불로 충만하게 하소서...”였습니다. 추운 겨울 뿐만 아니라 더운 여름에도 언제나 그 뜨거운 ‘불길’을 갈망했습니다. 심지어 교회 중고등부 학생회의 연간 회지 제목마저 <불길>이었고, 월간 소식지 제목은 <불길 Times>였습니다. 표지마저 불을 상징하는 새빨간 색이었습니다. 지금 교회력으로는 성령강림절에 해당하고 그 상징색이 빨간 색 아닙니까? 그에 따라 성경책도 한경같이 붉은 색 계통입니다. 뜨거운 불길 같은 성령의 이미지는 사도행전 2장에 나오는 성령강림절 사건에서 비롯될 것입니다. 불길 같은 성령의 이미지는, 불길이 솟아오르는 것과 같은 혀들이 갈래갈래 갈라지면서 사람들에게 내려오는 순간 성령의 임재를 체험했다고 전하는 데서 비롯됩니다. 은유나 상징은 그 자체가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기에 어쩌면 아무래도 상관이 없습니다. 불길이면 어떻고 물길이면 어떻겠습니까? 어떤 은유든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일 그 은유나 상징이 하나의 의미로 굳어지고, 그 의미가 사람들의 심성과 내면을 획일적으로 규정하고 있다면, 달리 생각해봐야 합니다. 제가 오늘 이 시간, 어쩌면 실없는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는 이야기를 다소 장황하게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오늘 한국교회에서 ‘불길 같은 성령’은 신앙의 독특한 한 경향을 대변하고 있습니다. 뜨거운 불길을 갈망하는 신앙은, 마치 뜨거운 불길 가운데서 자신의 생존만 다급하게 느낄 뿐 여타의 주변 상황이나 사람을 헤아릴 여유를 갖지 못하는 상황으로 사람들을 몰입시킵니다. 타인에 대한 배려의 태도나 뭔가 다른 의견을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여유를 전혀 갖지 못하는 태도를 취하도록 만듭니다. 동시에 자신의 생존을 가능하게 하는 전능한 힘에 대한 의존과 순종만을 미덕으로 간주할 뿐, 사람들과 더불어 운명을 개척해나가는 것을 신실하지 못한 것으로 간주하는 의식을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신앙 풍토 안에서는 절대자에 대한 순종의 신앙만 중요할 뿐 타인에 대한 배려의 윤리가 설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 부흥을 주도한 초기에 평양대부흥운동은 뜨거운 성령의 임재를 갈망하는 가운데 성령운동의 원형으로 여겨지는 사도행전의 성령강림 사건(사도행전 2:1~13)에서 성령은 불길처럼 묘사되기도 하지만, 그보다 근원적으로 세찬 바람으로 묘사됩니다. “그 때에 갑자기 세찬 바람이 부는 듯한 소리가 하늘에서 나더니, 그들이 앉아 있는 온 집안을 가득 채웠다.” 여기서 말하는 성령 임재의 체험에서 가장 중요한 현상은 대화 불가능의 상황이 대화 소통의 상황으로 바뀐 것입니다. 세계 각처에서 온 사람들이 갈릴리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저마다 자기 언어로 알아듣는 사건이 성령 임재 사건이었습니다. 그것은 변방의 언어가 보편적인 언어가 되고 그것으로 모든 사람이 소통하게 된 사건이 사도행전이 전하는 성령 임재 사건의 실체입니다.
성서에서 영은 이처럼 흔히 바람으로 은유되거니와, 성령의 임재는 바람처럼 자유로운 기운이 임하는 것을 말합니다. 요한복음 3:8에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성령으로 태어난 사람은 다 이와 같다”(요한복음 3:8). 성서에서 성령 임재는 기존의 언어적 신분적 계층적 장벽을 허물고 진정한 의사소통과 화해를 이루는 것, 진정으로 새로운 존재로 거듭나는 것으로 체험됩니다.
사도행전에서 성령 임재의 사건을 언급한 후 곧바로 원시 기독교인들의 공동체(사도행전 2:43~47)를 말하고 있는 것은 매우 의미심장합니다. 그 공동체는 재산과 소유물을 공유하고 사랑을 구현한 공동체였습니다. 그것은 명백히 당대 기독교인들이 처해 있던 현실의 질서와는 질적으로 다른 삶이었습니다.
성령의 임재는 새로운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기폭제였습니다. 따라서 그것은 현실의 질서에 대해 순응적이기보다는 전복적이었습니다. 역사적으로 나타난 모든 성령운동은 항상 기존 체제의 정당화나 그 체제에의 순응이 아니라 기존 체제의 재편을 노렸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희망을 고무하였습니다.
2. 성령, 보혜사
오늘 우리가 읽은 요한복음의 말씀은, 예수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제자들에게 선포한 일종의 고별 설교의 한 대목입니다. 보혜사 성령을 약속하신 대목입니다. 보혜사는 곧 ‘변호해 주시는 분’ 또는 ‘도와주시는 분’을 뜻합니다. 예수께서 세상을 뜨신 다음에는 성령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라는 말씀을 하고 계시는 대목입니다.
성령께서 어떻게 우리를 도우실까요?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나는 너희에게 이것들을 말하였다.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쳐 주시고, 또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것이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가르쳐 주시고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을 생각나게 하십니다. 사실 한국교회에서 부흥운동으로 불리는 현상의 원류격에 해당하는 현상을 미국이나 서구에서는 ‘대각성운동’이라 부르고 있는데, 적어도 그 의미상 매우 적절한 표현입니다. 바람처럼 임하는 성령은 우리에게 길을 가르쳐 주시고 우리의 생각을 열어 주십니다. 단순히 뜨거운 감정의 몰입 상태로 만드는 것이 아니라 시원한 바람을 맞을 때 정신이 번쩍 드는 것과 같은 각성을 일깨웁니다.
시원한 바람을 맞이하듯이 맞는 성령 임재의 체험으로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더욱 깊게 해줄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몸소 보여주셨듯이 진정으로 이타적인 배려의 삶으로 우리를 인도해줍니다.
무더운 여름이 시작되는 계절, 서늘한 바람이 그리운 계절입니다. 뜨거운 불길 같은 성령의 임재만을 갈망하는 교회들의 열기 탓에 온 세상이 후끈해지는 것 같습니다. 교회의 현실에서도, 우리 사회의 현실에서도 진정으로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아쉽습니다. 우리들 모두가 바람처럼 임하는 성령 앞에 우리의 몸과 마음을 활짝 펴고 그 성령의 바람을 맞이하기를 바랍니다. 이 교회가 그 성령의 바람으로 숨통 트이는 공간, 숨통 트이는 공동체가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따라 타인을 배려하고 타인을 위하는 삶으로 평화를 이루어나가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