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끝 (외 3편)
나희덕 산 너머 고운 노을을 보려고 그네를 힘차게 차고 올라 발을 굴렀지 노을은 끝내 어둠에게 잡아먹혔지 나를 태우고 날아가던 그넷줄이 오랫동안 삐걱삐걱 떨고 있었어 어릴 때는 나비를 쫓듯 아름다움에 취해 땅끝을 찾아갔지 그건 아마도 끝이 아니었을지도 몰라 그러나 살면서 몇 번은 땅끝에 서게도 되지 파도가 끊임없이 땅을 먹어들어오는 막바지에서 이렇게 뒷걸음질치면서 말야 살기 위해서는 이제 뒷걸음질만이 허락된 것이라고 파도가 아가리를 쳐들고 달려드는 곳 찾아나선 것도 아니었지만 끝내 발 디디며 서 있는 땅의 끝, 그런데 이상하기도 하지 위태로움 속에 아름다움이 스며 있다는 것이 땅끝은 늘 젖어 있다는 것이 그걸 보려고 또 몇 번은 여기에 이르리라는 것이
사랑
피 흘리지 않았는데 뒤돌아보니 하얀 눈 위로 상처 입은 짐승의 발자욱이 나를 따라온다 저 발자욱 내 속으로 절뚝거리며 들어와 한 마리 짐승을 키우리 눈 녹으면 그제야 몸 눕힐 양지를 찾아 떠나리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간다
우리 집에 놀러와. 목련 그늘이 좋아. 꽃 지기 전에 놀러와. 봄날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화하던 그에게 나는 끝내 놀러가지 못했다
해 저문 겨울날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나 왔어. 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못 들은 척 나오지 않고 이봐. 어서 나와. 목련이 피려면 아직 멀었잖아. 짐짓 큰소리까지 치면서 문을 두드리면 조등弔燈 하나 꽃이 질 듯 꽃이 질 듯 흔들리고, 그 불빛 아래서 너무 늦게 놀러온 이들끼리 술잔을 기울이겠지 밤새 목련 지는 소리 듣고 있겠지
너무 늦게 그에게 놀러 간다, 그가 너무 일찍 피워 올린 목련 그늘 아래로
꽃바구니 자, 받으세요, 꽃바구니를. 이월의 프리지아와 삼월의 수선화와 사월의 라일락과 오월의 장미와 유월의 백합과 칠월의 칼라와 팔월의 해바라기가 한 오아시스에 모여 있는 꽃바구니를. 이 꽃들의 화음을. 너무도 작은 오아시스에 너무도 많은 꽃들이 허리를 꽂은 한 바구니의 신음을. 대지를 잃어버린 꽃들은 이제 같은 시간을 살지요. 서로 뿌리가 다른 같은 시간을. 향기롭게, 때로는 악취를 풍기며 바구니에서 떨어져내리는 꽃들이 있네요. 물에 젖은 오아시스를 거절하고 고요히 시들어가는 꽃들, 그들은 망각의 달콤함을 알고 있지요. 하지만 꽃바구니에는 생기로운 꽃들이 더 많아요. 하루가 한 생애인 듯 이 꽃들 속에 숨어 나도 잠시 피어나고 싶군요. 수줍게 꽃잎을 열듯 다시 웃어보고도 싶군요. 자, 받으세요, 꽃바구니를. 이월의 프리지아와 삼월의 수선화와 사월의 라일락과 오월의 장미와 유월의 백합과 칠월의 칼라와 팔월의 해바라기가 한 오아시스에 모여 있는 꽃바구니를.
—시선집 『그러나 꽃보다도 적게 산 나여』 2024.7 ---------------------- 나희덕 /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뿌리에게』 『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 『그곳이 멀지 않다』 『어두워진다는 것』 『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 『말들이 돌아오는 시간』 『파일명 서정시』 『가능주의자』와 시론집 『보랏빛은 어디에서 오는가』 『한 접시의 시』 『문명의 바깥으로』, 산문집 『반통의 물』 『한 걸음씩 걸어서 거기 도착하려네』 『저 불빛들을 기억해』 『예술의 주름들』 등. 현재 서울과학기술대학교 문예창작학과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