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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미국인 선교사 질레트씨에 의해 야구가 한국에 소개된 이후 학교 또는 기독교 단체간의 친목다짐을 위한 놀이에서 점차 사람들에게 전파되어 다른 계층에서도 참여하면서 스포츠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광복이후 각 학교마다 야구를 통한 학원 이미지 제고, 사기진작 및 단합을 도모하게 되었고 고교 및 대학야구를 비롯한 실업야구팀의 활성화로 그 인기가 절정에 달하게 되자 팬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새로운 출구인 프로야구의 창설이 자연스럽게 대두되었다.
1981년 12월 11일, 삼성, 롯데, MBC, OB, 해태, 삼미 등 6개 구단을 회원으로 하는 프로야구 창립총회가 "자라나는 새싹들에게 꿈을 키워주고 야구를 사랑하는 모든 국민에게 밝고 건강한 여가선용을" 기치로 열리면서 첫 발걸음을 내딛게 된다.
1982년 3월 27일은 한국에서 프로야구 경기가 처음 벌어진 뜻 깊은 날로 수도 서울의 동대문 야구장에서 삼성과 MBC의 개막전이 만원 관중과 다양한 식전행사에 이은 당시 전두환 대통령의 시구로 막을 올리게 된다. 삼성의 이만수는 첫 홈런을, 그리고 MBC의 이종도는 연장 10회 삼성의 이선희로부터 끝내기 만루홈런을 날리면서 프로야구의 인기와 흥행을 예고하게 되었다.
팀 마다 선수수가 부족해서 경기도 일주일에 4일밖에 못하고 팀당 80경기, 총 240경기에 불과했지만 풍성한 개인 기록들이 작성되었다. 박철순(OB)은 단일 시즌 22연승을 달성하여 세계 최고기록을, 백인천(MBC)은 타율 .412 를 세워 아직까지도 그 기록이 유지되고 있다.
1983년은 야구장의 시설이 야간경기까지 가능하게 되어 팬들의 즐거움을 더 해 주게 되었으며, 재일동포들과 아마추어 국가대표 선수들이 대거 입단하여 전력이 강화됨에 따라 관중도 첫해의 1백 4십만명에서 2백 25만 명이 입장 하는 등 국민적 스포츠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다.
84년은 원년부터 적용한 전.후기 리그 제도에 따라 전기 1위인 삼성이 후기 1위 팀과 한국시리즈를 할 것에 대비, 비교적 쉬운 상대팀을 선택하기 위해 져주기 경기를 했다는 비난을 받으면서 상대적으로 껄끄러운 OB 대신 롯데 를 택한 결과, 시리즈에서 롯데에게 3승 4패로 무릎을 꿇고 만다.
85년은 시즌 도중 구단이 매각되는 상황이 발생하였으며, 재정이 어려웠던 삼미그룹은 구단을 청보에 70억원에 넘겨 청보구단은 후반기 리그부터 참여 하게 되었다. 한편, 새로운 구단인 빙그레의 창단 가입이 승인되자 빙그레는 가입금 30억원을 지불하는 대신 KBO 건물건립을 하였으며, 현재까지 서울 강남의 7층 야구회관 건물로 야구행정의 중심으로 활용되고 있다.
삼성이 전.후기 리그를 1위로 마감함에 따라 통합 우승을 하면서 한국시리즈가 무산되자 경기제도의 변경이 대두되었다.
86년은 플레이오프제가 도입되어 2,3위간 5차전을 거친 뒤 7차전의 한국시리즈를 하게 되었으며, 해태는 방어율 0.99를 자랑하는 선동열과 가공할 타력을 바탕으로 이때부터 4년 연속 정상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투수 김정수는 이해 신인으로 첫 시리즈 MVP가 되는 영광을 맛보게 된다. 하지만 한국시리즈 3차전 종료후 경기에 패배한 대구관중들이 해태 구단 버스를 전소시켜 사회적 물의를 일으켰다.
OB와 MBC는 잠실구장을 프로 전용구장으로 공동 사용하게 되었으며, 롯데도 구덕에서 3만 입장의 사직구장으로 새로 이전하여 보다 많은 관객들이 야구장을 찾게 되었다.
87년은 초대 커미셔너로 프로야구의 정착에 공헌한 서종철 전 국방장관이 6년간의 재임기간을 끝으로 구단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사임하게 되었으며, 태평양 그룹이 청보 핀토스 구단을 50억원에 인수하여 팀 명칭을 태평양 돌핀스로 새출발을 하였다.
88년은 야구회관이 개관되면서 그동안 임대생활을 해온 KBO가 자립하여 야구행정을 펼치게 되었으며, 빙그레 이글스가 창단 3년 만에 한국시리즈에 진출하는 급성장한 모습을 보여준다.
공석중이던 커미셔너에 전 MBC 청룡 구단주와 문공부장관을 역임한 이웅희 가 추대되어 90년대 초까지 프로야구를 무리없이 이끌어나갔다.
93년은 선수들의 전력이 한층 강화된 해였다. 92시즌을 끝으로 장효조, 김재박, 김시진, 김용철, 김종모 등 노장 선수들이 은퇴한 공백을 이종범, 양준혁 등 걸출한 신인들이 입단하여 신선한 세대교체가 이루어지면서 총관중 400만 돌파 및 서울구단(LG) 처음으로 100만 관중을 채우게 된다. 7월 30일 통산관중 3000만명을 달성하게 된다.
94년은 LG구단의 한국시리즈 우승에서 보듯이 투수들의 역할분담과 자율야구를 실천한 미국 유학파인 이광환 감독의 노력이 선수들의 플레이에 자극을 주었던 것이다.
빙그레 이글스는 모그룹 명칭 변경과 함께 팀명칭도 한화로 바꾸면서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였고 특정 팀들간에 선발예고제가 합의로 시행되어 향후전면 실시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한양대 2학년 재학중이던 박찬호는 대학 3학년이 되지 않아 국내 구단들이 지명할 수 없는 상황에서 미국 LA 다저스와 계약금 120만불에 입단함에 따라 큰 파문을 일켰으며, 이후 한국 아마추어 유망주들이 국내구단의 지명을 받고도 해외로 진출하는 사태가 잇따라 한,미간에 선수협정을 두고 계속 마찰이 발생했다.
95년은 국내 프로선수의 해외진출이 시작되었다. 한.일 슈퍼게임을 통해 일본에 잘 알려진 해태의 선동열 투수가 계약금과 연봉을 합해 3억엔에 주니치 드래곤즈에 입단하며, 한국 프로선수들에게 일본 활동의 길을 열어 주었다. 11월 3일 열린 슈퍼게임에서도 한국은 2승 2무 2패로 일본과 대등한 성적을 보여주었다.
관객들의 숫자에서 알 수 있듯이 프로야구 인기가 절정에 달한 한 해였다. 이는 시즌 초반 쌍방울의 돌풍과 시즌이 끝날 때 까지 하위팀들의 최선을 다하는 모범레이스로 페넌트레이스 관객수가 540만명을 넘어서게 되었다.
96년 스위스 로잔에서 프로선수들의 올림픽 출전이 허용되어 프로.아마간 교류에 물꼬를 트게 되었다. 원년부터 활동해온 OB의 박철순 투수가 만 40세의 나이로 은퇴하게 되었다. 통산성적은 76승 53패 20S. 현대의 박재홍은 프로야구 최초로 30-30 클럽에 가입하여 호타 준족을 과시하였다
97년은 이사회에서 외국인선수의 활동을 승인하면서 처음으로 외국인선수 드래프트가 미국 프로리다 세이트 피터스버그에서 실시되어 총 36명의 선수들이 지명되었다.
KBO는 이 선수들의 지명에 앞서 트라이아웃으로 기량을 테스트 하였으며, 계약조건은 입단보너스, 연봉, 부대비용을 포함하여 총 12만불을 초과할 수 없도록 하였다.
해태구단은 프로통산 1000승을 달성하고 한국시리즈도 9번째 차지하는 기쁨을 누렸으며, 소속선수인 이강철은 9년 연속 2자리 승수 및 3자리수 탈삼진을 기록하였다. 쌍방울의 김현욱은 중간계투 요원으로 다승(20승), 방어율(1.88), 승률(0.909) 1위로 3관왕을 차지하였으며, 김기태는 26 연속경기 안타를 때렸다.
98년은 프로야구에 IMF의 한파가 몰려 옴에 따라 재정난에 허덕이던 쌍방울의 외국인선수 지명 포기를 비롯해 각 구단의 조직 및 운영의 축소로 프로야구 전체가 위축되었다. 해태구단도 자금사정이 어려워 이종범을 트레이드머니 4억5천만엔에 주니치로 임대하게 되었다. 한편, 현대는 81승으로 시즌 최다승 타이를 기록하며, 인천연고 팀으로는 처음으로 시즌 1위와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다.
12명의 외국인 선수들이 국내 무대에서 첫 활동을 하며 6명이 재계약을 하였는데 OB의 타이론 우즈는 시즌 최다홈런 신기록(42개)을 수립하며, 선수권대회 MVP로 선정되는 등 우수한 기량을 보여 구단들의 외국인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지면서 상대적으로 위축되는 국내선수들의 불만이 늘어나는 현상이 발생했다.
정대철 총재가 일신상의 사유로 사임하자 구단주 총회에서 OB 베어스 구단주였던 박용오 두산그룹회장을 제 13대 총재로 추대하게 되고 박총재는 12월 8일 문광부의 승인을 받아 정식으로 총재활동을 시작하였는데 과거 정부의 낙점을 받아 취임하였던 관례를 깬 민선 구단주 출신으로 야구 각 분야의 축하속에 출발하게 되었으며, 경제 마인드를 최대한 활용하여 프로야구의 질적 양적 성장을 가져다 주었다.
99년은 단일리그에서 양대리그로 전환하며, 리그명칭을 팬들의 공모로 선정하여 드림과 매직으로 출발대 하여 2년간 유지하였으나 팀수가 8개 밖에 되지 않고 리그간의 구분이 크게 없어 2001년부터 다시 단일리그로 환원되었다.
2군에 대한 관심이 증가하면서 8구단의 육성 선수들을 대상으로 교육리그가 국내에서 처음으로 약 40일간 마산에서 실시되었으며, 시즌이 종료한 뒤 선수들의 권리를 보장해주는 프리에이전트 제도가 도입되어 10시즌을 활동한 선수는 어느 구단과도 자유로 이 계약을 체결할 수 있도록 하였다.
2000년은 수익사업을 적극 추진하여 처음으로 타이틀 스폰서 계약을 맺고 중계권도 그동안 방송사들의 공동계약에서 독점으로 다년계약을 체결하면서 구단들에게도 그 혜택이 돌아가게 되었다.
야구 저변확대를 위해 최우수선수 출신 선동열을 KBO 홍보위원으로 영입하여 국내 각 지역의 학교를 순회하며 어린이 야구교실의 개설 등 야구 전파에 심혈을 기울였다.
한편, 선수들은 선수단체 결성 및 프로야구 보이콧 등 요구를 하면서 구단과 갈등을 빚고 대립하기 시작하여 양측의 힘겨루기가 계속되면서 사회적 문제로 비화되자 정부가 나서 중재안을 마련하면서 사태는 진정되었다. 그 내용은 시즌 종료후 선수협을 구성토록 하고 집행부는 각 구단의 선수대표로 한다는 것이다.
경기도중 롯데의 임수혁 선수가 2루까지 진루한 뒤 갑자기 쓰러져 인근 병원으로 이송되었으나 현재까지 의식을 회복하지 못한 채 누워 있어 가족과 주변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2001년은 양대리그에서 다시 단일리그로 환원하여 치른 한국시리즈에서 페넌트레이스 1위로 선착한 삼성의 우승을 향한 각고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3위로 2위 현대를 물리치고 올라온 두산에게 패하는 아픔을 겪게 된다. 두산의 타이론 우즈는 외국인 선수 국내활동 이후 최장수를 기록하며, 올스타전, 시리즈, 선수권대회 MVP를 차지하는 유일한 선수가 되었다.
2001년은 한.미, 한.일간 선수협정을 새로이 개정하여 체결하게 된다. 한.미간은 포스팅 시스템을 적용키로 하여 국내선수의 미국 진출시 30구단에 공시토록 하여 최고액 제시구단이 협상할 수 있도록 하였으며, 한.일간에는 선수 스카우트와 관련하여, 자국의 규약 및 규정을 존중한다는 문구를 명문화시켰다.
2002년은 수익사업이 한 층 강화된 해였다. 기존 타이틀 스폰서이던 삼성증권과 3년간 100억원에 프로야구 후원 계약을 체결하였으며, KBO의 수익사업만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주)KBOP가 출범하여 본격적인 프로야구 마케팅을 실시할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삼성은 한국시리즈에서 LG를 4승2패로 물리치고 지난 21년간 한으로 남아있었던 가을잔치의 설움을 떨쳐낼 수 있었다. 특히, 한국시리즈 6차전 9회말에 터진 이승엽과 마해영의 연속타자 홈런은 역대 한국시리즈 사상 최고의 명장면으로 꼽혔으며 2002시즌을 온통 삼성의 잔치마당으로 뒤바꿔 놓았다.
한편, 한화의 송진우는 4월23일 청주 SK전에서 완투승으로 147승째를 올리며 은퇴한 선동렬이 가지고 있었던 한국프로야구 통산 최다승 기록을 경신했으며, 프로-아마 선수들로 구성된 드림팀V는 10월9일 부산 사직구장에서 열린 아시안게임 결승전에서 대만에 4-3으로 역전승을 거둬 1998년 방콕대회에 이어 아시안게임 2연패를 이룩했다.
2003년은 국민타자 이승엽의 아시아 홈런 신기록을 빼놓고는 얘기할 수 없다.
1999년 온 국민의 성원 속에 신기록에 도전했다가 간발의 차이로 주저앉고 말았던 이승엽은 2003년 시즌 마지막 경기인 10월2일 대구 롯데전에서 2회말 선두타자로 나와 시즌 56호 홈런을 터뜨렸다.
이는 일본 프로야구 왕정치와 터피로즈, 알렉스 카브레라 등 세명이 갖고 있는 시즌 최다홈런 기록(55개)을 넘어서 아시아의 홈런 지존에 우뚝 서는 의미있는 한방이었다.
이 밖에도 이승엽은 개막전 연타석 홈런을 시작으로 5월에만 15개의 홈런을 쳐내며 월간 최다홈런 기록과 타이를 이루었고 6월에는 세계 최연소 300홈런 기록을 작성하며 자신의 홈런레이스에 온 국민의 이목을 집중 시켰으며, 7월에는 세계 최소경기 40홈런, 9월에는 세계최소경기 50홈런 타이기록 등 홈런부문에서 수많은 기록들을 양산 해내며 2003시즌을 자신의 해로 만들었다.
현대는 2003년 돌풍의 주역인 SK와 7차전까지 가는 접전 끝에 팀 통산 세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컵에 입맞춤 했다. 1996년 팀 창단 이후 네차례의 도전에서 세차례나 우승한 현대는 이로써 신흥 명문구단의 발판을 마련했으며, 이는 김재박 감독의 탁월한 지도력을 비롯해 구단의 꾸준한 2군육성, 발빠른 선수 스카우트, 전력에 보탬이 된 트레이드등이 이루어낸 결실 이었다.
한편, 한국야구위원회(KBO)는 2월18일 야구회관에서 이사회를 열고 4월부터 임기가 적용되는 제14대 총재로 박용오 총재를 만장일치로 재추대 했다. 박총재는 재임기간 중 쌍방울과 해태 문제를 무난히 해결했으며 드림팀이 각종 국제대회에서 좋은 성적으로 국위를 선양하는데 일조했으며 프로야구 최초로 타이틀 스폰서십과 방송 중계권료 다년 계약을 체결 시키기도 하였다.
2004년 현대유니콘스는 한국시리즈에서 9차전까지 가는 대접전 끝에 삼성라이온즈를 4승2패3무로 물리치고 통산 4번째 우승컵을 품에 안았으며 해태에 이어 한국시리즈 2연패를 이룩한 두번째 팀이 되었다. 2004년 포스트시즌은 페넌트레이스 도중 불거진 프로야구 선수 병역비리와 얼어붙은 국내경기로 인해 자칫하면 그들만의 잔치로 전락할 위험도 있었지만 유례없는 명승부전을 펼치며 9차전까지 이어진 한국시리즈 덕분에 30만명에 육박하는 관중이 입장하였으며, 31억여원이라는 포스트시즌 사상 최다 입장수입 기록을 덤으로 안았다.
2004년에는 프로야구 출범이후 처음으로 페넌트레이스 1위팀에게도 시상을 하여 시즌 최종일인 10월5일 1위를 확정지은 현대유니콘스가 페넌트레이스 1위팀 트로피의 첫번째 주인공이 되었으며, 2003년까지 구원승에 세이브 횟수를 합친 세이브포인트를 기준으로 수상하던 최우수 구원투수 부문이 폐지되고 대신 순수 세이브만을 고려하는 최다세이브 투수상이 만들어졌다. 1군 현역선수 등록은 2003년과 마찬가지로 26명으로 이지만 경기 출장은 24명으로 제한하였으며, 경기의 스피드업을 위하여 투수는 15초 이내에 투구를 하게 돼 있던 규칙을 12초로 변경하고, 포수가 투수 마운드에 오르는 횟수를 선수당 3회가 아닌 경기당 3회(연장전 포함)로 제한했다. 또 감독이나 코치가 투수 마운드에 올라가는 횟수는 투수 교체의 경우를 제외하고 2회로 줄였다.
삼성라이온즈 박종호는 2003년 8월29일 수원 두산전부터 2004년 4월21일 수원 현대전까지 39경기 연속안타로 지난 1979년 일본의 다카하시 요시히코가 세웠던 33경기 연속안타를 25년만에 6경기나 경신하며 연속경기 안타 아시아 신기록을 수립했다. 박종호는 39경기 연속안타로 1982년 이종도, 2003년 이승엽에 이어 프로야구 출범이후 2번밖에 수여되지 않았던 한국야구위원회(KBO) 특별상의 3번째 수상자가 되었다.
한편, 38살 동갑내기인 기아타이거즈 이강철과 한화이글스 송진우는 2004년에도 변함없는 모습으로 씩씩하게 마운드를 지키며 선동열이 보유중이던 개인통산 최다탈삼진 1,698개를 나란히 넘어섰으며, SK와이번스 박경완은 개막전부터 4경기 연속홈런을 쳐냈던 기세를 이어가 4월달에만 13개의 홈런을 몰아치며 송지만이 갖고 있던 4월 월간 최다홈런(10개) 기록을 경신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