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회 법정스님과 함께하는 땅끝 해남 행복 에세이 공모전
< 이삿짐 >
"다만, 지금을 살아라." (법정, 『삶과 죽음의 길목에서』)
법정 스님의 이 말이 이젠 머리보다 가슴으로 와닿는다.
지금을 살아내지 못하면, 과거도 미래도 결국 헛되이 지나가는 덧없는 그림자일 뿐이니까.
엄마가 세상을 떠난 후 오래 미루었던 이삿짐을 풀듯 나는 해남 땅끝마을로 향했다.
내내 가슴에 가시처럼 걸렸던 슬픔을 바다의 끝에서 해넘이와 함께 넘길 결심이었다.
지난해 엄마가 세상을 떠났을 때, 나는 그 집을 떠나야 했다.
달력 속 숫자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엄마가 살아서 베란다고 화장실이고 안방 침대에서 불쑥불쑥 나와서 견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젖먹이가 젖을 떼듯, 간병과 상실의 기억을 뿌리 뽑고 싶은 마음이었으리라.
꽃을 좋아하던 엄마.
엄마와 함께 와본 마지막 사찰은 해남 미황사였고, 그때 우리가 본 건 색꽃이 아닌 바람에 피어나는 눈꽃이었다.
오늘도 그날처럼 절 마당에 수북이 쌓인 눈 위로 햇살이 내리쬐었다.
꽃무늬 옷을 즐겨 입던 엄마가 소복을 입고 나타나신 듯, 눈꽃은 마치 살아 움직이는 것처럼 반짝였다.
밤에 나는 땅끝마을 바닷가로 갔다. 파도처럼 넘실대는 무리에 섞여 해넘이를 보았다.
엄마는 작년에 이렇게 말씀하셨었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은 저렇게 예쁘구나...!”
바다와 하늘이 맞닿은 수평선 위로 붉은 해가 천천히 가라앉는 풍경은, 마치 하늘이 이 세상과 작별 인사를 나누는 듯 처연했고, 모자의 질긴 운명은 결심을 했다고 해서 순식간에 사라지지 않는 것이란 깨달음이 일었다.
그리고 다음 날, 난 미황사 대웅전 앞에서 해돋이를 맞았다.
사찰 뒤편 산마루에서 해가 떠오를 때, 어제의 해와 오늘의 해가 전혀 다른 존재임에도 같은 자리에서 다시 피어나는 그 장면이 내게 건네는 위로의 선물처럼 느껴졌다.
“삶은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채워가는 것이다.”(법정, 『홀로 사는 즐거움』)
엄마 없는 나날을 그저 해넘이 하기에 바빴던 나는 법정 스님의 이 말씀을 떠올리고 갑자기 부끄러워졌다.
내가 해야 할 일은 기억을 지우는 것이 아니라, 그 기억을 품은 채 지금 이 순간을 채워나가는 것이라는 것.
엄마의 영정을 모신 미황사의 주지 스님은 내 어깨를 가볍게 짚으며 물었다.
“이 눈꽃은 어디까지 이어질까요?”
나는 눈길을 따라 멀리 펼쳐진 눈꽃길을 바라보았다.
심심상인 (心心相印), 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 길은 누군가의 마음이 수놓인 듯 고요하고 따뜻했다.
스님은 이어서 말했다.
“눈꽃은 언젠가 녹고 사라지지만, 그 자리에 남는 건 결국 사람의 마음이에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토록 나를 위해 살아오셨던 엄마. 엄마는 언제나 나의 봄이자 겨울이셨다.
때로는 햇살이었고, 때로는 눈보라였던 거다.
집으로 돌아와 이제야 장롱 위 이삿짐 속에서 먼지 낀 박스를 꺼내어 냈다.
엄마의 손때 묻은 꽃갈피 노트와, 그 아래엔 충전기 없이 방치됐던 엄마의 휴대폰이 있었다.
전원을 켜자마자 주지 스님에게서 문자가 도착했다.
“눈꽃은 말이야, 불교에선 고요한 깨달음의 순간을 상징하지.”
잠시 뒤, 휴대폰에
‘완성하지 않은 메시지 1개. 계속 진행하시겠습니까?’라는 팝업이 떴다.
떨리는 손으로 눌렀다.
엄마가 마지막으로 나에게 보낸 메시지였다.
“이사 가는 거여. 먼저 극락 가서 우리 아들 잘 보고 있을 테니까, 이승의 짐들을 눈꽃길에 실어 보내. 엄마니까 다 짊어질 수 이…”
문장은 끝내 완성되지 못했다.
엄마는 나에게 이승에서의 짐을 덜고, 오늘의 삶을 계속 채워나가라고 말씀하고 계셨다.
나는 박스를 덮고 다시 세상 속으로 걸어 나왔다.
여전히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도 해는 어김없이 떠올랐고, 눈꽃은 햇살 속에서 조용히 녹아내리고 있었다.
삶은 결국 이별과 이사의 연속일지 모른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스스로를 채워나가고, 누군가의 길을 이어주는 삶이라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롭다는 생각을 한다.
오늘을 살며, 나는 다시 엄마의 삶을 이어 살아간다.
첫댓글 이승에서 저승으로 이사가신다는 어머니의 말씀이 참 지혜롭다는 생각이 듭니다.
삶과 죽음, 특히 부모님과의 이별은 그 어떤 것으로도 메워질 수 없는 커다란 분화구인데
어머님의 말씀으로인해 그 무게가 조금은 줄어들었어요.
담담히 써 내려간 어머니와의 여행이 깊은 울림을 남깁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소소하게 오늘 상을 타서 ㅎㅎ
부분 부분을 읽었지만 메세지를 던져주는 좋은 글 감사합니다.
이제 이 주제 좀 벗어나야할텐데요 ㅎㅎ
자식을 생각하는 어머니의 마음이 느껴지는 '이삿짐' 이네요.
잘 읽었습니다.
어머니는 사랑입니다.~^^
응모하고 잊었던 작품이 오늘 작게 수상해서 올려봤습니다. ㅎㅎ
법정스님 말씀이 들리는듯합니다. 어머니의 사랑에 가슴이 울립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날도 더운데 더 가슴을 훈훈하게 덥 혔네요 ㅎㅎ
어머니와 이별하고 깨달음을 얻는 과정이
시적인 감동을 주는 수필이네요.
해남 땅끝마을이란 장소가 더욱 뜻 깊게 느껴집니다.
어머니의 사랑으로 글도 쓰시고 상복이 끊이지 않고 어디 한군데 모정이 묻지 않은 곳 없으시니 여전히 어머니는 살아계시네요. 땅끝, 미황사, 듣기만해도 가슴 설레는 좋은 곳에 모셨네요. 극락왕생하셨을 텐데 너무 붙잡고 계시지 마셔요. 너무 슬퍼하면 가던 길 모가신다니 가만가만 추억만 살짝쿵 열어보시길 바래요.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