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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5년 나해 5월29일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수도회]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제1독서 지혜 3,1-9
† 복음 루카 9,23-26
오늘은 우리나라 124위 순교 복자들의 첫 기념일이다. 이 124위는 바로
지난해 8월 16일 이 땅의 서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의 주례로 열린
시복식을 통해 복자의 반열에 든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이다.
곧, 한국 천주교회의 초기 순교자로, 신해박해(1791년), 신유박해(1801년),
기해박해(1839년), 병인박해(1866년) 때 순교한 분들 가운데 한국 103위
성인에 포함되지 않았지만, 순교 사실이 새롭게 드러나고 각 지역에서
현양되던 분들이다.
한국 천주교회는 주교회의 1997년 추계 정기 총회에서 그동안 각
교구별로 이루어지던 이들의 시복 시성을 통합 추진하기로 하고, 2001년
‘주교회의 시복시성 주교특별위원회’를 구성하면서 더욱 본격적인 준비를
해 왔다.
124위 복자 기념일 5월 29일은 한국 교회의 제안을 사도좌가 허락한
것이다. 기념일은 세상을 떠나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천상 탄일로
지정되나 사목적 이유 등으로 다른 적절한 날로 옮길 수 있다. 대표
순교자인 윤지충의 순교일은 12월 8일이지만, 이날은 한국 교회의 수호자
원죄 없이 잉태되신 동정 마리아 대축일이다. 심사숙고한 끝에, 윤지충은
전주교구 순교자이므로 전주교구의 순교자들이 많이 순교한 5월 29일로
정하였다.
★ 지혜서에서는 의인들이 누리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 말한다. 오랫동안
사람들은 의인이 현세에서 복을 누려야 한다고 믿었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의인이 이 세상에서 고난을 겪고 죽더라도
그들은 하느님의 손안에서 평화를 누린다. 그들은 하느님과 함께 사랑
속에 산다(제1독서).
★ 인간에게 더없이 소중한 것이 목숨이다. 목숨을 잃는다면 온 세상을
얻어도 소용이 없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그
목숨을 구할 것이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서도 핵심 주제는 영원한
생명이다(복음).
◈ 오늘의 묵상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시복 미사를 봉헌한 이후 오늘 첫
번째로 이 복자들의 기념일을 지냅니다. 지난해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올린 시복 미사의 감동이 아직도 우리의 마음과 기억 속에 살아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리고 순교 복자를 조상으로 모신 이들이 참으로 자랑스러워
보였고, 그들이 부럽기까지 하였습니다. 오늘 묵상한 지혜서의 단락을
보면 세상을 떠난 의인들의 영혼도 행복할 것 같습니다. 마찬가지로 루카
복음의 예수님 말씀을 묵상하면, 신앙을 고백하며 목숨을 바친 이들도
참으로 영광스럽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정말로 순교하고 싶으십니까?
누구도 선뜻 대답할 수는 없겠지요! 시복 조사를 할 때, 순교자들은
순교라는 사실 자체가 하나의 기적이기 때문에 제1차 기적 심사에서
관면을 받습니다. 그만큼 순교는 특별한 은총의 도우심으로만 가능한
것입니다. 하지만 순교자들을 복자로 공경하는 것은 그분들의 신앙의
모범을 본받기 위해서입니다. 복자가 되든 성인이 되든, 이미 하늘
나라에서 영원한 행복을 누리고 계신 분들에게는 우리가 그분들을
공경하는 신심 행위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시복 시성은 우리를 위한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그런데 순교자들의
모범을 본받을 마음이 없다면 그 시복 시성이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초세기 그리스도인들은 순교하려는 열망이 더없이 컸습니다. 목숨을
바치는 것이 하느님에 대한 최고의 사랑의 행위라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친구를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고 하셨지요(요한 15,13 참조). 박해가 그친 다음에도
순교하려는 열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으로 모든
것을 포기하고 버리는 삶,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는 삶을 갈망했던
것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그러한 갈망이 있는지요. 적어도 복음에 따라
살기 위하여, 하느님 나라를 추구하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포기할 기회는
많이 주어지겠지요. 오늘 복음에서는 “날마다” 십자가를 져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오늘 함께 생각하고 싶은 내용은, 예수님 말씀대로 나는 나 자신을
버리고 기꺼이 십자가를 지는지 여부가 아니라, 내가 의무로서 계명을
지켜야 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십자가를 지는지, 아니면 하느님에 대한
사랑 때문에 크고 작은 일에서 나를 버리려는 의지가 내 안에 있는지,
그것입니다. 참으로 장한 순교자들의 모범을 뒤따르고 싶으십니까?
- 매일 미사 -
◈ [수도회] 기 프란치스코 신부님 - 일상의 순교
2015년 나해 5월29일 금요일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루카 9,23-26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루카 9,24)
일상의 순교
누구나 죽는다. 살아있는 사람은 원치 않아도 예외 없이 죽음을 향해
나아간다. 삶이 십자가이고 쉽지 않다보니 남을 돌아볼 겨를 없이 자기
것만 챙기려 하고 자기 문제에만 골몰한다. 그리고 자신이 지닌 것을
자신의 안전과 미래를 보장받기 위해 내놓고 공유하지 않으며 붙들며
살아간다. 한마디로 살고는 싶으나 죽고 싶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의미 있을까?
구세주이신 예수님을 따라가면, 그분 말씀대로 행하며 영원한 생명에
이를 수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9,23-24) 하고 말씀하신다.
예수님께서는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법을 가르쳐주신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면 먼저 자신을 버려야 한다. 자신을 버린다는 것은 그저 신체적
생명의 포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자기만 아는 자신, 애착과 소유욕으로
가득 찬 자신, 다른 이들의 아픔에 눈길도 주지 않는 냉정한 마음을 지닌
자신, 세례는 받았으나 하느님을 믿고 따르기보다는 그저 종교행위의
대상으로 여기는 자신, 하느님의 주도권을 인정하지 않고 주인행세 하는
자신 그런 자신을 버려야 하는 것이다.
이런 자기 버림이 바로 일상의 순교이다. 자신에 죽어야 그 안에 주님께서
사시는 것이다. 주님께서 내 안에 사셔야 나는 목숨을 구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앙의 역설이다. 이 역설을 사는 것은 유행처럼 일시적인
감정의 표현으로 될 일이 아니다. 세상이 주는 그 어떤 가치에 비할 바
없는 하느님의 존엄함, 그분이야말로 삶의 중심이며 그분 없는 삶은
아무런 의미도 없음을 명확히 인식하고 그렇게 행동할 때 참으로 살 수
있다.
윤지충을 비롯한 124위 순교자들은 오직 하나의 이유 때문에 자신의 목숨
전부를 내놓았다. 그들은 자신의 목숨을 내놓기 위하여 극도의 고통으로
내모는 형벌을 견디어냈고, 죽음마저도 받아들였다. 그들은 그렇게
십자가를 짐으로써 구원에 이르렀다. 우리는 어떻게 순교의 삶을 살아야
할까? 자신을 버리고, 끊임없이(날마다), 다가오는 일상의 고통과 시련을
견디어내고 받아들여야 한다.
나아가 자신의 고통뿐 아니라 순교는 사회적 사랑으로 표현되어야 한다.
순교자들은 자기 개인의 구원만을 위해 순교한 것이 아니다. 그들의
순교는 모두를 살리기 위한 순교였다.모두를 생명과 진리에로 이끌기
위한 디딤돌이었다. 우리도 그런 삶을 살아야겠다. 순교 정신을 ‘함께하는
사랑’으로 표현하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살아내야 할 순교이다.
무엇보다도 물신(物神)의 우상들이 판을 치며 인간을 자본의 노예나
도구로 여김으로써 비인간화가 심화되고 있는 이 사회의 고통과 함께
하지 않는 신앙, 그 안에서 희생과 나눔과 고통에 대한 공감이 없는 바로
그곳이 순교를 살아내야 하는 현장이다. 우리 모두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자기를 버리고 이제 이 사회와 이웃의 십자가를 힘모아
지도록 하자! 순교는 지나간 과거에 갇힌 이야기도 아니요, 내 현실과
무관한 먼 미래의 일도 아니다. 고통받고 소외된 이들 안에 계신 예수님의
신음소리가 그치지 않는 한 우리의 목숨은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리라!
- 기경호 프란치스코 작은 형제회 프란치스코회 신부 -
◈ [수도회] 2015.05.29.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루카 9,23)
지난 해 8월 한국 땅을 방문하신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순교자들을 복자품에 올려주셨지요.
그분들의 첫 기념일을 오늘 지냅니다.
성프란치스코는 모로코에서 순교한 6명의 형제 수사들 땜에
기뻐하고 영예롭게 여기는 형제들에게 이런 권고말씀을 남기셨습니다.
"성인들은 자신들의 목숨을 바쳐 주님을 따랐는데
우리는 그저 그분들의 영광을 자랑만 하고 있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오늘 복자들의 첫 축일을 참으로 기뻐함은 우리도 그분들처럼
우리 일상의 십자가를 "무겁다, 힘들다, 내려 놓고싶다" 하기보다는
묵묵히 지고 주님을 따라야겠다고 다짐하는 것이 아닐까요?
오 순교복자들이여, 우리도 우리의 일상의 십자가를
잘 지고 갈 수 있도록 도우소서. 아멘.
[출처] 2015.05.29.|작성자 알타반
- 오상선 바오로 작은 형제회 신부 -
◈ [서울]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2015년 나해 5월29일 복자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3,1-9
복음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3-26
추위를 많이 타는 편이라서 웬만하면 반팔 옷을 입지 않습니다. 하지만 때
이른 더위로 반팔 옷을 입기 시작했습니다. 5월인데 30도가 넘는 날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더운 날씨입니다. 건강 조심하시고, 피할 수 없다면
이른 더위도 즐기면 좋겠습니다.
요즘 들판에는 논에 심어진 여린 벼를 볼 수 있습니다. 가을에 풍성한
열매를 맺기까지 농부는 88번 수고를 해야 한다고 합니다. 저 여린 벼도
많은 어려움을 겪어야 할 것입니다. 농부가 원하지 않지만 가라지도 함께
할 것이고, 병충해도 찾아 올 것이고, 때로 태풍에 다 자란 벼가 쓰러지기도
할 것이고, 심한 가뭄에 농부의 마음이 타들어가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 눈에는 아름답게 보이는 것들도 내면을 들여다보면 참 많은 수고와
땀을 흘려야 했습니다. 여름 한철 잠시 존재감을 드러내는 매미 중에는
7년 동안 땅 속에서 기다려야 하는 것도 있다고 합니다. 하늘을 아름답게
날아다니는 어여쁜 나비도 죽음과 같은 고치의 과정을 거쳐야 했습니다.
노란 병아리도 알이 깨지는 아픔을 겪어야 새로운 하늘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사제가 되기 위해서는 7년 동안 신학교에서 학업을 마쳐야 합니다. 함께
기도하고, 공부하고, 세상을 향해서 나갈 준비를 하게 됩니다. 하느님을
알아 간다는 것이, 신학을 배운 다는 것이, 사제가 된다는 것이 결코
낭만적인 것이 아님을 알게 됩니다. 제도 교회 안에서 존경을 받고, 사제의
직무를 수행하는 것도 의미 있는 일입니다. 하지만 세상 안에서 사제로
살아간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비워내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교회의 울타리 안에 안주하는 바리사이파나, 율법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동창 신부님 중에 스스로 원해서 ‘도시빈민 사목’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벌써 10년이 훌쩍 넘었습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동네에 작은 집을
얻어서 신자 분들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외형적인 모습은 작지만 그
안에는 복음의 기쁨이 가득한 것을 보았습니다. 사제관은 신부님의
숙소도 되고, 미사가 봉헌되는 성당도 되고, 신자들이 함께 친교를 나누는
식당도 된다고 합니다. 신부님은 주일이면 밥을 해 놓고 기다리고, 신자
분들은 반찬을 가져와서 미사 후에는 함께 식사를 한다고 합니다.
오늘은 작년에 시복식이 있었던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박해의 칼바람을 온 몸으로 받아들였던 복자들을
생각합니다. 이 세상에서 모진 고난을 받았지만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신 분들입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행동으로 실천한 분들입니다. 우리를
위해서 전구하시는 한국의 순교자들에게 오직 감사와 찬미를 드립니다.
‘눈물로 씨 뿌리는 이들이 기쁨으로 곡식을 얻으리라!’
한국의 순교자들이여 저희를 위하여 빌어 주소서!
- 서울 대교구 성소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서울] 큰 소리 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하세요.
2015년 나해 5월29일 복자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3,1-9
복음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3-26
큰 소리 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하세요.
자기 때문에 목숨을 구하려고 애를 쓰면 도리어 목숨을 잃을 것이고
예수님 때문에 목숨을 잃으면 그 사람은 자기 목숨을 구할 거라는 것
이렇게 자신 있고 당당하게 큰 소리 친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 하세요?
이렇게 큰 소리 친 사람 없다면 이 큰 소리 친 사람을 문제 삼아야지요.
큰 소리의 내용에 반박할 자신 없으면 그 소리에 무릎 꿇어야 하고요!
세상 모든 걸 얻어도 자기 자신을 잃으면 소용없다 자나요? 맞거든요?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사람이 온 세상을 얻고도
자기 자신을 잃거나 해치게 되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루카 9,24~25)”
- 서울 대교구 이기정 사도요한 신부 -
◈ [인천] 하늘나라에서의 행복은 영원
2015년 나해 5월29일 복자 윤지충과 동료 순교자들 기념일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3,1-9
복음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3-26
행복의 조건은 무엇일까요? 어느 연구소에서 한국 사람들의 행복의
조건이라는 설문조사를 했습니다. 수많은 답이 있었지만 제일 많은 답은
‘건강’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돈’, 세 번째 순위는 ‘사회적
지위’라고 합니다. 어떠세요? 공감하십니까?
그런데 이것들이 정말로 참 행복의 조건이 될 지는 의문입니다.
건강하지만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상당히 많지요. 반대로 많은
장애로 힘들어하지만 그 안에서 기쁘고 행복하게 사는 사람들도 우리는
많이 목격합니다.
그렇다면 돈은 어떨까요? 부러움을 살 정도로 큰돈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행의 길로 가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거액 복권에 당첨된
사람들을 조사한 연구 결과가 있지요. 글쎄 그중의 90% 이상이 얼마
못가서 불행하게 된다고 합니다. 돈 역시 참 행복의 조건은 아닌 것
같습니다.
마지막으로 ‘사회적 지위’는 어떨까요? 과거 사라센 제국의 가장 큰 영화를
누렸던 시기의 왕인 압둘라만 3세는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우러러 볼
정도의 어마어마한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죽을 때
“내가 행복했던 시간은 고작 14일이었다.”라고 말했다고 하지요. 사회적
지위 역시 참 행복의 조건은 아닌 것입니다.
과거 하느님을 증거하다가 순교하신 분들을 떠올려봅니다. 그들이
순교하는 모습을 보면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저렇게 멀쩡한
사람이 못된 것을 믿어서 죽게 되는구먼.”라고 말하면서 혀를 차며
안타까워했습니다. 그런데 순교자들의 죽음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의구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혹독한 문초를 당해도 자신의
신앙을 버리지 않고, 의연하게 죽음에 맞섰고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입니다.
건강도, 돈도, 사회적 지위도 순교자들에게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는 하느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면서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가장 중요했고 그래서 죽음의 순간에서도 하느님과 함께 할 모습을
떠올리며 행복하셨던 것입니다.
오늘은 우리나라 124위 순교 복자들의 첫 기념일입니다. 작년 8월 16일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주례로 열린 시복식을 통해 복자의 반열에 든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을 기념하는 날이지요. 바로 우리 신앙의
기초를 닦으신 초기 순교자들이십니다. 이 순교자들을 떠올리면서 과연
우리는 무엇을 중요하게 여길 것인지를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봐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세상에서의 행복은 순간이고, 하늘 나라에서의 행복은 영원이기에 당연히
하느님을 첫 번째 자리에 놓고 그분의 뜻에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유혹이 물론 나를 힘들게 하지만, 더욱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될 때 어떠한 유혹도 거뜬하게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복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의 말씀이 기억납니다.
“나는 행복합니다. 여러분도 행복하게 지내십시오. 울지 말고 다 함께
기쁘게 기도합시다.”
선행은 작은 것이라도 결코 헛되지 않다(이솝).
윤지충 바오로와 123위 동료 순교자
모두가 반대해도 내가 원하는 것을 하라.
아프리카 랑바레네에 병원을 개설한 의사이자, 선교사로 인류애를 펼친
사람으로 잘 알려진 알버트 슈바이처 (Albert Schweitzer)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분의 이름이 역사 안에 기록되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하네요. 왜냐하면 그의 가족은 아프리카에 가서 의사로
헌신하겠다는 그의 욕구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를 깨우쳐주려고
많은 노력을 했었기 때문입니다. 또 실제로 이런 노력에 슈바이처 박사도
많이 흔들렸다고 하지요. ‘신세계 교향곡’으로 유명한 안토닌 드보르자크
(Dvořák, Antonín)는 그의 아버지가 가업을 물려받아 정육점 주인이
되라고 설득했습니다. 음악의 어머니라고 불리는 게오르그 프리드리히
헨델(George Fredric Handel)은 그의 아버지의 바람에 따라 한때
변호사가 되려고도 했었습니다. 또 만유인력을 발견한 아이작 뉴턴
(Isaac Newton)의 어머니는 그가 가족 농장을 맡아주기를 원했다고
합니다.
이밖에도 역사의 많은 위인들은 주변의 시선과 강요를 따르지 않았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보다는 자신의 신념을 굳게 믿었고, 옳다고 생각했던
그 신념을 따랐던 것이지요.
주변 사람들이 이렇게 걸림돌이 될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의 시선이
정확하다고 생각될 때도 있지만, 실패를 하더라도 스스로의 선택을 따를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는 삶이 아닐까요?
며칠 전에 있었던 경총상생포럼에서의 제 강의모습입니다.
◈ [청주]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영광|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5년 나해 5월29일 금요일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순교자 기념일
(루카9,23-26)
제1독서
<하느님께서는 번제물처럼 그들을 받아들이셨다.>
◎ 지혜서의 말씀입니다. 3,1-9
복음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23-26
예수님을 믿는 이들의 영광
오늘은 잊었던 감격을 일깨우는 날이 되기를 희망하며 프란치스코
교황님의 강론을 다시 묵상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 124위 시복식미사 강론 전문 (2014,8,16)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로마 8,35). 성 바오로는 이 구절을 통해, 예수님을 믿는 우리 신앙의
영광에 대하여 말합니다. 그 신앙의 영광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시어 하늘에 오르셨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당신과
결합시키시어 당신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승리하셨고, 그분의 승리는 또한 우리의 승리입니다.
오늘 우리는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안에서 이루어진 이러한
승리를 경축합니다. 이제 그분들의 이름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의 이름 옆에 나란히 함께 놓이게
되었습니다. 조금 전에 저는 그분들에게 공경을 드렸습니다. 이
순교자들은 모두 그리스도를 위하여 살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죽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그들은 환희와 영광 속에서 그리스도의 다스림에 함께
참여합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 아드님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
무엇보다도 위대한 승리를 우리에게 선사하셨음을, 순교자들은 성
바오로와 함께 증언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8-39).
순교자들의 승리, 곧 하느님 사랑의 힘에 대한 그들의 증언은 오늘날 한국
땅에서, 교회 안에서 계속 열매를 맺습니다. 한국 교회는 순교자들의
희생으로 이처럼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복자 바오로와 그 동료들을 오늘
기념하여 경축하는 것은 한국 교회의 여명기, 바로 그 첫 순간들로
돌아가는 기회를 우리에게 줍니다. 이는 한국의 천주교인 여러분이 모두
하느님께서 이 땅에 이룩하신 위대한 일들을 기억하며, 여러분의
선조들에게서 물려받은 신앙과 애덕의 유산을 보화로 잘 간직하여
지켜나가기를 촉구합니다.
하느님의 신비로운 섭리 안에서, 한국 땅에 닿게 된 그리스도교 신앙은
선교사들을 통해 전해지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민족, 그들의 마음과
정신을 통해 이 땅에 그리스도교 신앙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지적 호기심과 종교적 진리의 탐구를 통해 촉발되었습니다. 복음과
처음으로 만난 한국의 첫 그리스도인들은 예수님께 자신의 마음을 열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고난을 받으시고 돌아가셨으며 죽은 이들 가운데서
부활하신 그리스도에 대해 더욱더 많이 알고자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예수님에 대한 무언가의 깨달음은 곧 주님과의 만남으로 이어져, 첫
세례들과 더불어 충만한 성사 생활과 교회적 신앙생활에 대한 열망,
그리고 선교 활동의 시작으로 계속 이어지게 되었습니다. 더 나아가,
전통적인 사회적 신분의 차별과 상관없이, 믿는 이들이 모두 한마음 한
뜻이 되어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던 초대 교회의 삶(사도 4,32 참조)
에서 영감(靈感)을 받아, 한국의 신자 공동체들 안에서도 많은 열매를
맺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역사는 우리에게 평신도 소명의 중요성, 그 존엄함과 아름다움에
대하여 많은 것을 말해 줍니다. 저는 여기 있는 많은 평신도 여러분에게
인사를 드리며, 특별히 날마다 삶의 모범으로 젊은이들에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그분의 화해시키시는 사랑을 가르치는 그리스도인 가정에
저의 인사를 전합니다. 또한 여기 있는 많은 사제들에게도 특별한 인사를
드립니다. 그들은 헌신적으로 행하는 직무 수행을 통해, 지난 세대의 한국
천주교인들이 일구어 온 풍요로운 신앙의 유산을 지금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아버지께 진리로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기를, 그리고 세상에서
우리를 지켜주시기를 간청합니다. 그 무엇보다도, 예수님께서 아버지께
우리를 거룩하게 해 주시고 지켜 주시기를 간청할 때, 아버지께서 우리를
세상 밖으로 데리고 나가시기를 청하지 않으셨다는 점이 의미심장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당신 제자들을 세상으로 파견하시어 세상 안에서
거룩함과 진리의 누룩, 즉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게 하셨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리고 바로 여기에서 순교자들이 우리에게 가야 할 길을
제시합니다.
이 땅에 믿음의 첫 씨앗들이 뿌려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순교자들과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예수님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세상을 따를 것인가
중에서 하나를 선택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당신 때문에 세상이 그들을
미워할 것이라는 주님의 경고(요한 17,14 참조)를 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 됨의 대가가 무엇인지를 알았던 것입니다. 많은 사람에게
이것은 박해를 의미했고, 또 나중에는 산속으로 들어가 교우촌을 이루게
됨을 의미했습니다. 그들은 엄청난 희생을 치를 각오가 되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에게서 그들을 멀어지게 할 수 있는 그 어떤 것도, 즉
재산과 땅, 특권과 명예 등 모든 것을 포기하고자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그리스도 한 분만이 그들의 진정한 보화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우리는 매우 자주 우리의 신앙이 세상에 의해 도전받음을
체험합니다. 우리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방식으로, 우리의 신앙을 양보해
타협하고, 복음의 근원적 요구를 희석시키며, 시대정신에 순응하라는
요구를 받게 됩니다. 그러나 순교자들은 그리스도를 모든 것 위에
최우선으로 모시고, 그 다음에 이 세상의 다른 온갖 것은 그리스도와
그분의 영원한 나라와 관련해서 보아야 함을 우리에게 상기시켜 줍니다.
순교자들은 우리 자신이 과연 무엇을 위해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지, 그런
것이 과연 있는지를 생각하도록 우리에게 도전해 옵니다.
또한 순교자들은 그들의 모범으로, 신앙생활에서 애덕의 중요성에 관한
가르침을 우리에게 줍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그들 증언의
순수성이었고, 세례 받은 모든 이가 동등한 존엄성을 지녔음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당대의 엄격한 사회 구조에 맞서는
형제적 삶을 이루도록 그들을 인도하였습니다. 이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이중 계명을 분리하는 데 대한 그들의 거부였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형제들의 필요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던
것입니다. 막대한 부요 곁에서 매우 비참한 가난이 소리 없이 자라나고
가난한 사람들의 울부짖음이 좀처럼 주목받지 못하는 사회들 안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 순교자들의 모범은 많은 것을 일깨워 줍니다. 이러한
속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어려움에 처한 형제자매들에게 뻗치는
도움의 손길로써 당신을 사랑하고 섬기라고 요구하시며, 그렇게 계속
우리를 부르고 계십니다.
우리가 순교자들의 모범을 따르면서 주님의 말씀을 그대로 받아들여
믿는다면, 우리는 순교자들이 죽음에 이르도록 간직했던 그 숭고한
자유와 기쁨이 무엇인지 마침내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아가, 우리는
오늘의 이 경축을 통하여, 이 나라와 온 세계의 헤아릴 수없이 많은무명
순교자들을 마음에 품고 기리고자 합니다. 특별히 지난 마지막 세기에,
그리스도를 위해 목숨을 바쳤거나 그분의 이름 때문에 모진 박해 속에서
고통을 받아야만 했던 이름 없는 순교자들을 기리며 기억합니다.
오늘은 모든 한국인에게 큰 기쁨의 날입니다. 복자 윤지충 바오로와 그
동료 순교자들이 남긴 유산, 곧 진리를 찾는 올곧은 마음, 그들이
신봉하고자 선택한 종교의 고귀한 원칙들에 대한 충실성, 그리고 그들이
증언한 애덕과 모든 이를 향한 연대성, 이 모든 것이 이제 한국인들에게
그 풍요로운 역사의 한 장이 되었습니다. 순교자들의 유산은 선의를 지닌
모든 형제자매들이 더욱 정의롭고 자유로우며 화해를 이루는 사회를 위해
서로 화합하여 일하도록 영감(靈感)을 불어넣을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
나라와 온 세계에서 평화를 위해, 그리고 진정한 인간 가치를 수호하기
위해 이바지하게 될 것입니다.
교회의 어머니이신 성모님의 전구와 더불어 모든 한국 순교자들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가 온갖 좋은 일과 믿음 안에서, 또 한결같이 거룩하고 순수한
마음과 사도적 열정 안에서 항구함의 은총을 받아, 사랑하는 이
나라에서부터 아시아 전역을 거쳐 마침내 땅끝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을
증언하게 되기를 빕니다. 아멘.
- 청주교구 청주 성모 병원 반영억 라파엘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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