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욥기 32장 1절 – 22절)
32:1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이 말을 그치니 2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 3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 4 엘리후는 그들의 나이가 자기보다 여러 해 위이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5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화를 내니라 6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 7 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노라 8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 9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 10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말하리라… 12 내가 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의 말에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 14 그가 내게 자기 이론을 제기하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당신들의 이론으로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리라 15 그들이 놀라서 다시 대답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음이었더라 16 당신들이 말없이 가만히 서서 다시 대답하지 아니한즉 내가 어찌 더 기다리랴 17 나는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 18 내 속에는 말이 가득하니 내 영이 나를 압박함이니라 19 보라 내 배는 봉한 포도주통 같고 터지게 된 새 가죽 부대 같구나 20 내가 말을 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 21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리니 22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이가 속히 나를 데려가시리로다 (개역개정)
오늘의 성경 본문은, 욥이 당한 고난의 원인을 두고 친구들 간에 벌어진 3차례의 변론(4-31장)이 끝나면서, 그 자리에 참관하여 모든 내용을 듣고 있던 엘리후가 변론에 끼어드는 내용입니다(32-37장). 위문하러 온 친구들 앞에서 욥은 자신이 갑작스럽게 당한 재앙과 고통을 탄식하며 호소한 것(3장)이 발단이 되어서, 친구들 간에 1차 변론(4:1-14:22), 2차 변론(15:1-21:34), 3차 변론(22:1-31:40)이 이어지게 됩니다. 욥은 친구들에게 편하게 자신의 아픔을 호소한 것뿐인데, 친구들이 그 탄식을 불신앙적인 행동으로 규정하면서, 욥을 규탄하고 정죄하는 기나긴 변론으로 이어지게 된 것입니다. 욥의 재앙과 고통을 단지 인과응보 논리인 편협한 신학적 신앙적 시각으로만 친구들이 정죄하는 것에 대해서, 욥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섭리를 주장하며 자신도 그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결코 자신의 죄악 때문에 주어진 재앙이 아니라는 것을 변론합니다. 이러한 결백 주장이 욥으로 자신의 절대적 의를 주장했다고 하는 공격을 세 친구들과 엘리후에게서 받게 됩니다. 그러나 욥은 자신의 절대적 의를 주장한 것이 아니라, 자기를 정죄하는 친구들에게 자신은 그러한 범죄를 행한 적이 없다는 변론이었을 뿐입니다. 엘리후는 욥이 아니라는 데도 인과응보 논리만을 주장하는 세 친구들의 주장을 극복해서, 욥의 입장처럼 하나님의 절대 주권적 섭리에서 네 차례의 변론을 통해 욥의 상황을 재정리하게 됩니다. 끝없이 쳇바퀴만을 도는 논쟁을 지켜보던 엘리후는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32:17)며, 자신의 답답한 마음을 “내가 말을 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32:20)고 표출합니다. 비록 그가 욥과 세 친구들보다 젊기에 듣고만 있었지만, 이제는 자신이 나서서 말하지 않을 수 없는 변론의 근거와 필요성을 언급하며 변론에 끼어듭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재앙을 당하게 된 원인을 욥이 행한 죄악 때문이라는 편협한 주장을 반복했다면, 엘리후는 이와 달리 재앙 후에 욥이 반복하여 자신의 결백을 주장한 것이 죄를 짓고 있기에, 하나님 앞에 그 교만했던 태도를 돌이켜 회개할 것을 요청합니다. 그럼에도 세 친구나 엘리후나 다들 욥이 고통스러워하는 상황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는 점이 같습니다.
1. 욥과 친구들의 변론에 누가 끼어듭니까?
욥과 세 친구들 간의 기나긴 다툼의 변론이 멈췄음을, “욥이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므로, 그 세 사람이 말을 그치니”(32:1) 곧 “욥이 끝내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므로, 이 세 사람은 욥을 설득하려고 하던 노력을 그만두었다.”(새번역)라고 증언함으로써, 욥기서의 전개 내용이 새로운 국면의 전환을 맞이했음을 나타냅니다. 사실 욥은 “자신을 의인으로 여기”었던 것이 아니라, 친구들의 일방적인 인과응보 논리에 근거한 정죄에 대해 “자기의 무죄를 주장”(공동번역)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욥의 세 친구들이 자신들 주관적인 생각대로 욥을 판단하고 정죄하던 일을 멈췄다는 것입니다. 세 친구들의 반론이 멈추자, 누가 끼어들었다고 했습니까? “람 종족 부스 사람 바라겔의 아들 엘리후가 화를 내니”(32:2)라고 했습니다. “엘리후”라는 이름은,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다’라는 뜻으로, 하나님을 믿는 신앙인이었음을 나타냅니다. “바라겔”이라는 이름도, ‘하나님께서 축복하신다’는 뜻으로 신앙의 가정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엘리후”를 “부스 사람”이라고 했는데, 당시 족장 시대는 사람 이름이 그 지역 지명으로 쓰였습니다. 창세기에서 “어떤 사람이 아브라함에게 알리어 이르기를, 밀가가 당신의 형제 나홀에게 자녀를 낳았다 하였더라. 그의 맏아들은 우스요, 우스의 형제는 부스”(창22:2-21)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엘리후”는 아브라함의 동생 “나홀”이 낳은 둘째 아들인 “부스”의 자손으로서, 하나님을 성실히 믿는 신앙의 가정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욥기가 “우스 땅에 욥이라 불리는 사람이 있었는데”(1:1)라고 증언하고 있어서, 욥 역시 “우스”의 자손이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며, “엘리후”와 욥은 근처에 살고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욥과 세 친구들의 변론 내용을 듣고 있던 “엘리후는 그들의 나이가 자기보다 여러 해 위이므로, 욥에게 말하기를 참고 있다가, 세 사람의 입에 대답이 없음을 보고 화를 내니라”(32:4-5)고 했습니다. 욥기의 변론 내용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아서, “엘리후”는 단지 이 변론의 참관인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대화 내용을 기록한 서기관의 역할을 했던 것이 아닌가 보입니다.
그렇다면 “엘리후가 화를”(32:2) 내며, 욥과 세 친구들 간의 변론에 끼어든 이유가 무엇이었다고 말합니까? 첫째는, “엘리후”가 욥에 대해서 “그가 욥에게 화를 냄은, 욥이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 함이요”(32:2) 곧 “욥이 이렇게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면서 모든 잘못을 하나님께 돌리므로, 옆에 서서 듣기만 하던 엘리후라는 사람은, 듣다 못하여 분을 더 이상 참지 못하고 화를 냈다.”(새번역)고 했습니다. 그런데 욥은 사실 “하나님보다 자기가 의롭다”고 한 적도, “모든 잘못을 하나님께 돌리”려고 했던 적도 없었습니다. 욥은 하나님을 향해 항변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친구들의 정죄처럼 극심한 고난을 받을만한 죄가 없다는 것을 항변했을 뿐입니다. “엘리후” 역시도 욥이 당하고 있는 현재적 상황에 대한 충분한 이해와 사랑이 없다보니, 자신의 결백을 주장하는 욥의 모습이 하나님을 거스르는 자처럼 보였던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가 낙태 문제와 동성애 문제에 옛날에는 침묵하다가 갑자기 어느 날 지나치게 개입함으로써, 스스로의 권위를 상실한 것과 같습니다. 분명 신앙적 신학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안이면서도, 그들의 아픔과 고통에 대한 연민과 대안도 고민도 없이 교리적 논리로 원론적인 정죄만을 일삼는다는 데에 사람들은 교회를 향해 고개를 젓습니다. 그러면서 교회들에 만연한 죄악에 대해서는 침묵하며 은폐하려고만 들뿐, 어떠한 인정도 회개도 하지 않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에 세상은 코웃음을 칩니다. 욥기에 나오는 세 친구와 “엘리후”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었습니다. 둘째는, “엘리후”가 욥의 세 친구들에 대해서 “또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32:3) 곧 “그 세 친구는 욥을 정죄하려고만 했지, 그 세 친구가 욥이 하는 말에 제대로 대답을 하지 못하였으므로, 결국 하나님께 잘못이 있는 것처럼 되었기 때문이다”(새번역)라고 했습니다. “엘리후”는 아무런 해답도 찾지 못한 채 진전 없이 반복되는 내용의 다툼과 변론에, 욥과 세 친구의 모습을 지켜보기가 너무나 답답하고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결국 참다못한 “엘리후”가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32:17)며, 이들의 변론에 참여하게 됩니다.
2. 엘리후가 왜 변론에 끼어들겠다고 합니까?
“엘리후”가 그동안 욥과 세 친구들 간의 진전 없는 변론에도 불구하고 끼어들지 않았던 이유를, “나는 연소하고 당신들은 연로하므로, 뒷전에서 나의 의견을 감히 내놓지 못하였노라”(32:6) 곧 “어르신네들에 비하면 저는 한낱 풋내기입니다. 제가 무엇을 안다고 아뢰랴 싶어 황송하여 망설였습니다.”(공동번역)라고 밝힙니다. “엘리후”는 연장자를 존중할 줄 아는 예의범절을 가진 겸손하고 신중한 성향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나이가 많은 자가 말할 것이요, 연륜이 많은 자가 지혜를 가르칠 것이라 하였노라”(32:7) 곧 “나는 듣기만 하겠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오래 사신 분들은 살아오신 것만큼 지혜도 쌓으셨으니까, 세 분들께서만 말씀하시도록 하려고 생각하였습니다.”(새번역)라고 고백합니다. “나이가 많은 자”는, 오랜 연륜을 통해 풍부한 경험과 지식을 소유한 노인을 가리키는 상징적 표현입니다. “엘리후”는 경험과 연륜이 많은 분들이 지혜롭다고 알고 있었기에, 변론 중에 욥의 고난에 대한 지혜로운 교훈이 나오리라고 지켜보면서 그 대화에 끼어들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엘리후”가 듣다보니 한계에 갇힌 편협한 신앙 지식만을 고집하는 모습에 대한 실망을, “어른이라고 지혜롭거나, 노인이라고 정의를 깨닫는 것이 아니니라”(32:8) 곧 “사람은 나이가 많아진다고 지혜로워지는 것이 아니며, 나이를 많이 먹는다고 시비를 더 잘 가리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았습니다.”(새번역)라고 표현합니다. 그렇죠. 오래 살았다고, 또 경험이 많고 지위가 높다고 해서, 옳고 그름을 잘 분별할 줄 아는 참된 지혜자인 것은 아닙니다. 따라서 “엘리후”는 참된 지혜는 인생의 연륜과 경험에 앞서 하나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것이라는 것을, “그러나 사람의 속에는 영이 있고 전능자의 숨결이 사람에게 깨달음을 주시나니”(32:8) 곧 “깨닫고 보니, 사람에게 슬기를 주는 것은 사람 안에 있는 영 곧 전능하신 분의 입김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새번역)라고 밝힙니다.
“엘리후”는 자신이 변론에 끼어들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를, 틀에 박힌 편협한 신앙 지식만을 나열하는 욥의 세 친구들과 달리 “한낱 풋내기”(32:6,공동번역)에 불과하지만,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로 변론을 해보겠다며, “그러므로 내가 말하노니, 내 말을 들으라, 나도 내 의견을 말하리라”(32:10) 곧 “그래서 나도, 생각하는 바를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내가 하는 말을 들어 주시기 바랍니다.”(새번역)라고 밝힙니다. 자기주장만을 내세우는 무례한 젊은이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보라, 나는 당신들의 말을 기다렸노라. 당신들의 슬기와 당신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있었노라”(32:11)며, 욥과 세 친구들의 변론 내용이 자기 생각과 다르다고 해서 함부로 간섭하여 들어가지 않고 참고 “기다렸”고, “말에 귀 기울이”며 “자세히 들은즉” 곧 경청할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이제 자신이 개입하고 들어가도 좋다고 생각한 것은, 첫째는 무엇보다 “그 세 사람이 말을 그치니”(32:1)라며, 욥과 세 친구들 간의 변론이 멈춘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둘째는, “내가 자세히 들은즉, 당신들 가운데 욥을 꺾어 그의 말에 대답하는 자가 없도다”(32:12) 곧 “나는 세 분이 하시는 말씀을 주의 깊게 들었습니다. 그런데 세 분께서는 어느 한 분도, 욥 어른의 말을 반증하거나 어른의 말에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셨습니다.”(새번역)라고 한 것처럼, 편협한 논리만을 들이대며 욥을 설득하는데 실패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많은 경우, 의외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자기 생각과 주장에 따르도록 설득하려고만 하지, 같은 마음과 생각을 품고 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이해하고 납득하려는 시도는 하지 않습니다. 욥의 세 친구들은 오직 인과응보와 권선징악이라는 원론적인 율법적 논리만을 앞세웠지, 부조리한 세상의 다양하고 복잡한 현실 상황과 고난 속에 담긴 하나님의 깊은 섭리에는 아무런 고민도 생각도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편협한 신앙 논리로는 더 이상 욥을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닫고 설득을 포기한 것을, “엘리후”는 “당신들이 말하기를, 우리가 진상을 파악했으나, 그를 추궁할 자는 하나님이시오, 사람이 아니라 하지 말지니라”(32:13) 곧 “그러고서도 어떻게 지혜를 발견했다고 주장하실 수 있으십니까? 세 분께서 이 일에 실패하셨으니, 내가 이제 욥 어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대답을 들으시도록 하겠습니다.”(새번역)라며, 이제는 자신이 욥과의 변론에 나서겠다고 밝힙니다.
3. 엘리후는 어떻게 변론하겠다고 말합니까?
“엘리후”는 이제 욥과의 변론에 나서면서 욥의 세 친구들이 했던 인과응보 논리에 근거한 방식과는 다르게 변론할 것을, “그가 내게 자기 이론을 제기하지 아니하였으니, 나도 당신들의 이론으로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리라”(32:14) 곧 “나는 세 분께서 말씀하신 것과는 다른 방식으로 욥 어른께 대답하겠습니다.”(새번역)라고 밝힙니다. “엘리후”는 욥의 세 친구들처럼 자신의 어떤 주관적인 생각으로 욥을 정죄하지 않겠다는 선언이자, 보다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공정성과 적개심이나 감정 없이 말하겠다고 고백합니다. 따라서 “엘리후”는 “나는 결코 사람의 낯을 보지 아니하며, 사람에게 영광을 돌리지 아니하리니”(32:21) 곧 “이 논쟁에서 어느 누구 편을 들 생각은 없습니다. 또 누구에게 듣기 좋은 말로 아첨할 생각도 없습니다.”(새번역)라고 밝힙니다. 자신이 말하려는 변론 내용의 정당성에 대한 선언으로, 하나님 앞에서 객관성과 타당성을 가진 말만을 하겠으며 공정하지 못한 주장은 하지 않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첫째로, “엘리후”가 자신은 “이는 아첨할 줄을 알지 못함이라.”(32:22)고 밝힙니다. “아첨”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어느 한쪽을 일방적으로 편들어 호감을 사는 행위로, 사람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해서 죄를 범하게 합니다. 둘째로, “엘리후”가 “아첨”하는 발언을 할 수 없는 것은 “만일 그리하면 나를 지으신 이가 속히 나를 데려가시리로다”(32:22) 곧 “나를 지으신 분이 지체하지 않고 나를 데려가실까 두려워서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라고 고백합니다. “엘리후”는 사람들에 대한 “아첨”을, 하나님께서 생명을 빼앗아 갈만큼 큰 죄악이라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모든 아첨하는 입술과 자랑하는 혀를 끊으시리니”(시12:3)라는 경고를 기억한다면, 인간의 모든 행위를 감찰하시는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결코 어떤 “아첨”의 발언도 할 수 없습니다. 사도 바울도 우리에게 “엘리후”처럼,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 또한 우리는 너희에게서든지 다른 이에게서든지 사람에게서는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였노라.”(살전2:4-6)고 고백합니다.
그러면서 “엘리후”는 다시금 자신이 변론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를, 첫째로 “그들이 놀라서 다시 대답하지 못하니 할 말이 없음이었더라”(32:15) 곧 “욥 어른께서는 들으십시오. 세 분 친구가 놀라서 말을 하지 못합니다. 그분들은 어른께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합니다.”(새번역)라고 밝힙니다. 둘째로, “엘리후”가 변론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를 “당신들이 말없이 가만히 서서 다시 대답하지 아니한즉, 내가 어찌 더 기다리랴? 나는 내 본분대로 대답하고,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32:16-17) 곧 “그런데도 내가 그들이 입을 다물 때까지 기다려야 합니까? 이제 그들은 할 말도 없으면서, 그냥 서 있기만 합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이제는 내가 대답하겠습니다. 내가 생각한 바를 말씀드리겠습니다.”(새번역)라고 밝힙니다. 그동안 변론을 듣기만 하며 참고 기다렸던 “엘리후”가, 욥의 세 친구들이 더 이상의 할 말을 잃고 침묵하고 있는 것을 지켜보며, 이제는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며 변론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을 선언합니다. 셋째로, “엘리후”가 변론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이유를 “내 속에는 말이 가득하니, 내 영이 나를 압박함이니라. 보라, 내 배는 봉한 포도주통 같고, 터지게 된 새 가죽 부대 같구나. 내가 말을 하여야 시원할 것이라. 내 입을 열어 대답하리라.”(32:18-20) 곧 “이제는 더 이상 기다릴 수 없고, 말을 참을 수도 없습니다. 말할 기회를 얻지 못하면, 새 술이 가득 담긴 포도주 부대가 터지듯이, 내 가슴이 터져 버릴 것 같습니다. 참을 수 없습니다. 말을 해야 하겠습니다.”(새번역)라고 밝힙니다. 변론에 참여하고 싶은 “엘리후”의 간절한 심정을 “새 술이 가득 담긴 포도주 부대”로 표현합니다. 새 포도주를 낡은 가죽 부대에 넣으면, 발효되는 포도주 가스로 인해 부풀어 올라 결국 터지게 됩니다. 그러나 그 가죽 부대가 새 것이라면, 부풀어 오르는 팽창을 잘 견딜 수 있습니다(마9:17). “엘리후”는 발효된 포도주 가스가 새 가죽 부대도 터트릴 정도로 한껏 팽창되어 있는 상태의 비유를 통해, 세 친구들을 대신하여 자신이 욥과 변론할 수밖에 없는 당위성을 표현합니다.
사랑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욥과 세 친구의 변론을 가만히 듣고만 있던 “엘리후”가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32:17)고 했던 그의 심정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남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고 있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러니 “엘리후”가 변론을 들으면서, 하고 싶은 말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러나 조용히 경청하며 자기 때를 기다렸습니다. “엘리후”는 세 친구들처럼 욥의 고난을 그가 지은 죄 때문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그는 인과응보의 논리를 극복하고, 고난은 때로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로써 고통을 통해 우리를 연단하는 일환일 수 있다고 인정합니다. 최소한 “엘리후”는 “세 친구에게 화를 냄은, 그들이 능히 대답하지 못하면서도 욥을 정죄함이라”(32:3)고 한 것처럼, 변론이 누군가를 “정죄”하는 기회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엘리후”가 “이 논쟁에서 어느 누구 편을 들 생각은 없습니다. 또 누구에게 듣기 좋은 말로 아첨할 생각도 없습니다. 본래 나는 아첨할 줄도 모르지만, 나를 지으신 분이 지체하지 않고 나를 데려가실까 두려워서도, 그럴 수는 없습니다.”(32:21-22,새번역)라고 했던 결단의 고백이, 대화의 공정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참된 신앙인의 자세요, 참된 지혜자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들 교회에 욥의 세 친구들처럼 자신들이 아는 편협한 신앙 지식에 갇힌 율법적 신앙으로, 사람들을 연민을 가지고 사랑하기보다 정죄하기에만 급급해하는 죄악이 만연한 것을 어떻게 생각합니까? “엘리후” 역시도 완전한 신앙적 논리는 아니었습니다. 어느 누가 완벽한 신앙 논리를 내세울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최소한 그가 고백한 “나도 내 의견을 보이리라”(32:17)며, “이 논쟁에서 어느 누구 편을 들 생각은 없습니다. 또 누구에게 듣기 좋은 말로 아첨할 생각도 없습니다.”(32:21,새번역)라고 했던 신앙 자세로 서고자 하는 마음이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여전히 불완전하지만, “엘리후”의 고백처럼 진리만을 말하고자 하는 간절한 열망의 자세로 살아가는 복된 신앙인들이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