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 행정구역





중앙 행정
중화인민공화국의 최고행정기관은 국무원으로 즉 중앙인민정부이다. 국무원은 내정, 외교, 재정, 경제, 문화, 교육, 위생, 공공사업 등 행정사무를 조직하고 관리하여 행정결정과 명령을 반포하고, 전국 지방 각급 국가행정기관의 사업을 통일적으로 지도한다. 국무원은 총리, 부총리, 국무위원, 각 위원회 주임, 각부부장, 심계서 계장, 비서장으로 구성된다. 현재 28의 부서로 조직되어 있다.
행정 구역
중화인민공화국의 행정 구역은 22개의 성(省), 5개의 자치구(중국어 간체: 自治区, 정체: 自治區), 4개의 직할시(중국어 간체: 直辖市, 정체: 直轄市), 2개의 특별행정구(중국어 간체: 特别行政区, 정체: 特別行政區)로 구성된다. 이 중에서 홍콩, 마카오를 제외한 지역을 중국 대륙(중국어 간체: 中国大陆, 정체: 中國大陸; 중국 본토)으로 칭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아직까지 사법부의 독립성이 확보되지 않아서, 사법 절차에서 자백을 얻기 위한 고문, 영장 없는 자의적인 체포 등의 인권 유린이 발생하기도 한다. 중화인민공화국의 현대법은 1949년 소련 법률의 영향을 강하게 받아 형성되었고, 1979년 이후 경제 현대화 과정에서 미국과 유럽 등지의 투자에 발맞추기 위해 새로운 법안들이 통과되고 있다.
대외 관계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과 후진타오 중화인민공화국 국가주석
중화인민공화국은 세계 거의 대부분의 국가들과 외교 관계를 맺고 있다. 1950년 5월 9일 스웨덴이 서방 국가로서는 최초로 중화인민공화국과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다. 외교에 있어서 특필해야할 것은 분단국가인 중화민국에 대비하여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스스로를 "중국의 정통한 정부"라고 하고 있는 점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냉전 구조 하에서, 건국 당초에는 완전히 동측 진영에 편입되어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 사후의 중소 대립을 거쳐, 1964년 1월에 프랑스와 수교한 이후, 1979년 1월 1일부터 미국과 수교하는 등 서방 측과의 관계 회복을 이루고, 동시에 중화민국을 대신하여 유엔 안보리의 상임이사국이 되었다. 또한, 냉전 하에 있어서 서방측 여러나라와 소련과의 대립 관계의 미묘한 밸런스의 중간에서 [모호한 표현], "중국을 대표하는 정당한 정부는 중화민국이 아니라 중화인민공화국이다"라는 기정 사실을 서방측의 다수 국가로부터 확인받아 하나의 중국 정책도 성공을 거두었다. 1989년 소련의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함으로써 소련-중국 간의 오랜 원한이 종지부를 찍었다. 1978년부터 시작된 경제개혁 이후부터 경제 면에서의 민주주의인 여러 나라와의 관계도 강화하고, 2001년에는 세계무역기구에도 가맹하였다. 우크라이나는 1992년경에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 한 것으로 보인다.
중화인민공화국은 타이완을 자국 영토로 간주하고 ‘하나의 중국’이라는 사상을 내세워 타이완을 실효적으로 통치하는 중화민국 정부를 절대로 인정하지 않는다. 중화민국을 승인하는 국가와는 외교관계를 수립하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다. UN 회원국 중 22개국(바티칸은 준회원국)은 중화민국을 승인하고 있고, 부탄은 중화인민공화국 및 중화민국 모두와 외교관계가 없다. 폴란드는 1949년 10월 5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하고, 양국은 10월 7일 대사급 외교 관계를 맺었다.
대한민국과의 관계
중국은 1949년 마오쩌둥이 천안문(天安門 廣場)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을 1949년 10월 1일 건국 및 선포를 하고, 1950년 6.25전쟁(한국전쟁)때, 한국군과 UN군이 10월 1일에 단독으로 38선으로 돌파하여 북진통일을 할 수 있던 순간에 10월 25일, 중국 공산군(중공군)의 60만 대군이 밀고 들어오면서 인해전술과 각가지의 전술로 한국군과 UN군에게 막대한 인명,물자 피해를 남겨주면서 전쟁의 양상이 새로 바뀌어졌다. 대한민국은 6.25전쟁이후, 중국과 국교가 정식으로 단절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덩샤오핑은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도입하고, 개방을 추진하면서, 단절되었던 민주·자본주의 국가들과 다시 수교했다. 대한민국 정부와 중국(중화인민공화국)정부는 1992년 8월 24일자로 국교를 수교하면서 물적 교류가 활발해졌고, 2015년 최근들어 일본의 아베총리를 중심으로 한 일본 우익세력들이 역사교과서를 왜곡과 편찬, 과거사에 대한 부정·왜곡과 영유권 억지 주장으로 인해 중국과 한국이 서로 상호 협력하는 단계로 발전되고 있다.
외교관계 맺기 이전의 관계
북방 정책에 대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련에 비하여 그다지 매력적으로 느끼지 않았다. 소련에 비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은 1980년대에 경제 분야에서 대한민국을 별로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국은 상호 보완적인 경제적 필요성과 지리적 접근성으로 인하여 활발한 교역을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공식적인 관계의 부재는 양국의 교역을 증대시키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공산주의 국가인 중화인민공화국과 공식적 관계를 맺기 이전의 대한민국은 합법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의 한국 사람과 중화인민공화국에 진출한 기업들의 이익을 보호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소련과 비교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정치적으로 더 가까웠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과 대한민국 간의 무역량 증대에도 불구하고 정치관계의 향상은 더디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은 북한과 미국간, 북한과 일본간의 중재, 북한, 대한민국, 미국 3자간의 대화를 시작하도록 노력하였다.
상호방문 허용
1980년대 중공민항기 사건 이후, 대한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간의 민간 계약은 더욱 활발해졌다. 양국은 1980년대 말이 되면 자유롭게 상호 방문을 허락하여 학술, 언론, 특히 이산가족 교류가 가능해졌다. 200만명에 가까운 한민족(조선족)들, 특히 중화인민공화국 지린 성 옌볜 조선족 자치주의 한민족(조선족)들은 대한민국과 활발히 교류하고 있다.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적 소동이 중화인민공화국-대한민국 관계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판단하기는 어렵다. 1989년 톈안먼 사건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예상대로 중화인민공화국의 억압적인 조치를 도왔다. 이와 반대로, 대한민국은 더욱 침묵했으나 1989년 톈안먼 사건을 부추긴 것도 그렇다고 비난한 것도 아니었다. 양국의 교역은 더욱 증가하고 있었다. 서울에는 중국인 (요우커)들이 많이 오는데, 이들이 많이 찾는 곳은 명동, 동대문시장, 남대문시장, 롯데월드 등이다.
냉전 붕괴 이후
1989년 12월 냉전 종식이 선언되고, 1989년 5월에 소련의 고르바초프가 중화인민공화국을 방문하여 중-소관계가 정상화된 것은 한-중 수교의 중요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아울러 노태우 정부의 한-소 수교의 성공이 중화인민공화국에게도 영향을 미쳐 한중 수교를 앞당겼다고 할 수 있다. 1992년 8월에 대한민국은 중화민국과 단교하고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하였다. 수교와 동시에 많은 문화교류를 통해서 한류 및 중류(中流)가 각국으로 퍼져나갔다. 그러나 2008년 4월 27일 대한민국 서울에서 열린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성화 봉송 행사에서 재한 중국인 및 중국인 유학생들의 폭력 사태로 인해 한국인 및 외국인이 부상을 당한 사건이 발생하였다.(→2008년 중국인 성화봉송 폭력시위 사건) 이 때문에 각국 사이에 반한·반중 감정이 생겨나는 등 위화감이 조성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대(對)중화인민공화국 수출은 1168억3783만USD, 중화인민공화국의 대(對)대한민국 수출은 715억7360만USD(각 2010년)에 달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은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1의 수출, 수입국이다. 한편, 대한민국의 대(對)홍콩 수출은 252억9434만USD, 홍콩의 대(對)대한민국 수출은 19억4593USD(각 2010년)에 달하여, 홍콩은 대한민국에 있어서 제4위의 수출국, 제32위의 수입국이다. 양국 사이에는 대한항공이 중국 내 20개 도시에서 26개 노선을, 아시아나 항공은 22개 도시 30개 노선을 각각 운항 중이다. 2010년 8월, 대한항공은 83%, 아시아나항공은 83.6%의 탑승율을 기록했다. 8월 한달 동안, 각각 35만2천명과 29만4천명의 탑승객을 운송하였다. 대한민국 남자들의 국제결혼을 아내의 출신지 별로 볼 때, 중화인민공화국 국적의 여자가 가장 많다. 2000년 3,566건 (전체 6,945건 중 51%)에서 2008년 13,203건(전체 28,163 건 중 46.8%)으로 증가하였다.
북한 5차 핵실험 이후
2016년 9월 북한이 5차 핵실험을 단행했고, 탄도 미사일 탑재용 소형 핵탄두를 최초로 핵폭발 실험을 하면서, 한반도 사드 배치가 가속화 되었다. 2016년 12월 방한한 천하이 중국 외교부 부국장은 한국 외교부의 연기 요청을 거부하고, 일방적으로 입국한 뒤, "소국이 대국에 대항해서 되겠냐"며 한국의 위상을 폄훼했고, 또 "너희 정부가 사드 배치를 하면 단교 수준으로 엄청난 고통을 주겠다"는 협박성 발언까지 했다. 2017년 1월 9일, 중국 폭격기 등 군용기 10여대가 사전 통보 없이 대한민국 제주도 남방 이어도 인근 동해상에 진입하자 대한민국 공군 전투기가 급출격해 맞불 대응에 나섰다. 중국 군용기들이 대한민국 제주도 남방 이어도 인근의 한국방공식별구역(KADIZ)을 대거 기습 침범하며 동해에 진출한 것에 대해 중국 관영 매체가 중국군이 커져서 활동 영역의 확대가 불가피하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한반도 사드 배치에 강하게 반발하고 있는 중국이 러시아판 사드를 도입했다. 그러면서 중국은 북한 핵도발 대응책인 한국 사드에 보복하고 있다. 러시아가 개발한 사드 S-400은 미국의 사드와 매우 유사한 러시아판 사드이다. 대한민국 전역을 감시할 수 있는 레이더망에 항공기와 탄도미사일은 물론, 스텔스 전투기까지 요격할 수 있다. 중국은 러시아판 사드 2개 포대를 도입해 2017년부터 실전 배치한다. 레이더망 사거리가 400km로 미국판 사드보다 길어서 한반도와 대만 인근에서 작전을 하는 미국 스텔스 전투기를 위협한다. 러시아판 사드가 중국 산둥반도에 배치 된다면 유사시 한반도 지역에서의 한미 군용기 활동에 큰 위협이 될 수 있다. 한반도 사드 배치는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는 중국이 국가의 주권과 안전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러시아판 사드를 실전 배치 한 것이다. 중국은 러시아판 사드 S-400을 1포대를 2017년에 도입할 예정이고 S-400의 중국판인 HQ-19도 자국의 기술로 개발중이다. 중국이 대한민국 전역을 감시할 수 있는 러시아판 사드를 실전 배치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북한 핵도발 대응책인 한반도 사드 배치를 중국이 반대하는 것은 적반하장이라는 의견이 나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