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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7. 묵상글 ( 사순 제3주간 금요일. -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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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7. 사순 제3주간 금요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기본이 되는 것은 믿는 사람은 하느님의 계명을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계명에 대해서 알아야 하고 그 계명에 근거하여 삶을 살아가고 있는가를 점검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계명? 하면 십계명을 떠올립니다. 좀 더 요약하면, 사랑의 계명으로 말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요한3,34-35). “너희가 나를 사랑하면 내 계명을 지킬 것이다”(요한14,15). 과연 나에게 첫째가는 계명은 사랑인가요? 내가 무엇을 판단하고, 행할 때 하느님의 계명이 기준이 되고 있느냐에 따라 나의 신앙의 현주소가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적대자들에게 지혜롭게 대답하시는 것을 보고 율법학자 한 사람이 와서 예수님께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질문을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마르12,30).는 것과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12,31). 는 이중계명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의도적으로 시험하였던 여러 부류의 종교지도자들과는 다르게 악의가 전혀 없이 열린 마음으로 질문하고 그 계명에 대하여 “훌륭하십니다. 스승님, ‘그분은 한 분뿐이시고 그 밖에 다른 이가 없다.’하시니, 과연 옳은 말씀이십니다. 또 ‘마음을 다하고 생각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그분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보다 낫습니다”(마르12,32-33). 하며 동의를 표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마르12,34). 하고 이르셨습니다. 예수님의 적대자들 중에는 이렇게 마음이 열린 사람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이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고 하였지 아직 들어간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경기에서 골인을 한 것과 골인할 뻔한 것은 분명 다른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자캐오 이야기(루카19,1-10)를 기억하시지요? 예수님께서 “오늘 이 집에 구원이 내렸다.”고 하셨습니다. 율법학자에게 말씀하신 것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요? 율법학자는 학자답게 이론으로 알고 있었고, ‘훌륭하십니다. 과연 옳은 말씀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끝났지만, 자캐오는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반을 가난한 이들에게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다른 사람 것을 횡령하였다면 네 곱절로 갚겠습니다.” 하며 즉시 행동으로 옮겼습니다. 그야말로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야고2,17).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에 충실하여 하느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열매 맺는 삶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머리로 아는 것이 아니라 실천함으로써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은 불가분의 관계입니다. 이 이중계명의 사랑은 모세와 이스라엘 백성에게 주어진 십계명의 핵심정신이고, 동시에 예수님께서 가르쳐 주신 주님의 기도의 핵심 정신이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님의 전 생애는 하느님 아버지와 그분의 뜻을 이루기 위해, 그리고 이웃을 위해 목숨을 바치신 헌신으로 요약됩니다(손희송).
사랑은 사랑을 낳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랑한 그 사랑으로 사랑하여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아진다면, 그리하여 사랑 자체이신 주님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이 열매 맺는 삶입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자녀로 새롭게 태어나는 세례성사에로 인도되어 구원을 선물로 얻는다면 그보다 더 큰 열매가 어디 있겠습니까? 나의 구원이 소중한 만큼 이웃의 구원에도 열려있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바로 그분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그분의 계명은 힘겹지 않습니다”(1요한5,3). 그러므로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많이 사랑합시다. “말과 혀로 사랑하지 말고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1요한 3,18) 합시다. “우리가 서로 사랑하면, 하느님께서 우리 안에 머무르시고 그분 사랑이 우리에게서 완성됩니다”(1요한4,12). 그러므로 실행함으로써 열매 맺는 사랑에 목말라 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머리로 알고 있는 것과 그 ‘앎’이 온몸 세포 하나하나에 배어 있는 것과는 분명, 다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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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7. 사순 제3주간 금요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분심의 사랑
오늘 율법 학자가 주님께 첫째가는 계명에 대해 여쭙니다.
이에 주님께서는“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답합니다.
그래서 내게는 무엇이 첫째가는지 돌아봤는데
어제 미사 드리면서 들었던 느낌이 먼저 떠올랐습니다.
어제 그제 저는 미사를 봉헌하면서 미사의 신비에 깊이 잠길 수 있었고
그만큼 많은 은총을 받았는데 어제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는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기를 바라기보다 내 이름이 빛나기를 바라고,
아버지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으시는 것보다 내가 받길 원한다는 반성을 했습니다.
이것은 요즘 제가 온라인 영성 학교에서 프란치스코의 권고를 강의하는데
그 강의를 준비하면서 권고 내용이 저에게 영향을 미친 덕분입니다.
어쨌거나 어제 아버지보다 제가 사람들의 사랑을 받길 원한다는 성찰에 이어
오늘은 하느님 사랑보다 사람의 사랑을 제가 받길 원한다는 성찰을 했습니다.
물론 이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사랑보다 제가 사람의 사랑을 더 원하지는 않지요.
그런데도 제가 그런 성찰을 한 것을 보면 이유가 있을 텐데
왜 그럴까 생각해보니 사람을 하느님보다 더 사랑한 것은 아니지만
하느님을 사랑한다면서 사람의 사랑도 제가 원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하느님은 한 분이시라는 말씀을 우리는 다각도로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외에 다른 신이 없다는 뜻이 그 첫째 의미이고,
삼위시지만 한 분이시라는 것이 두 번째 의미지만
한 분이시기에 하느님만 사랑하라는 것도 우리가 새겨야 할 의미입니다.
물론 여기서 알아야 할 것이 하느님만 사랑하라는 것은
하느님 사랑으로만 만족하라는 뜻이라는 점입니다.
그러니 어려운 이웃을 사랑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지요.
베푸는 사랑은 하느님보다 이웃에게 더 하고,
받는 사랑은 인간보다 하느님에게 더 하라는 뜻이며
거듭 얘기하지만, 하느님 사랑 외에 다른 사랑으로 만족치 말라는 뜻이지요.
그러므로 ‘마음을 다하여’의 뜻도 이런 것일 겁니다.
마음의 한 부분을 다른 사랑을 위해 남겨두지 말고
온 마음으로 사랑하라는 말씀일 것입니다.
기도할 때 분심分心이 든다고 하지요.
하느님께 향하는 마음과 다른 것으로 향하는 마음으로 마음이 나뉘는 것인데
하느님 사랑도 이렇게 분심이 되어서는 안 되고 온 마음으로 사랑해야겠지요.
그러므로 우리는 인간의 사랑이 하느님 사랑보다 더 만족을 주기에
인간의 사랑을 더 사랑하는 우리가 되지 말아야 함은 물론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정도로도 안 되고 하느님만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분심의 사랑은 애초에 해서는 안 된다는 가르침을 받는 오늘입니다.
그래서 하느님 사랑이 참 어렵고
그래서 우리는 천국 직행이 아니라
사랑의 정화를 위해 연옥을 거쳐야 하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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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7.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마르 12,29)
오늘 <말씀전례>는 우리 신앙의 원천을 밝혀줍니다. 곧 우리 신앙의 근거가 되는 그 바탕이 무엇인가를 말해줍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 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호세 14,10)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화답송>에서는 “내가 주님, 너희 하느님이다.”(시 81,11)라고 노래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율법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 대답하십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시다.”(마르 12,29)
여기에서, 예수님께서는 행동의 원리로서의 계명을 말씀하기 전에, 먼저 ‘존재의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곧 행동규범으로 사랑을 말씀하시기에 앞서, 왜 사랑을 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밝히십니다. 곧 하느님께서 ‘한 분이신 우리 주님’이라는 그분의 존재차원을 밝히십니다. 동시에, 이는 우리의 존재의 차원도 밝혀주십니다. 곧 우리가 ‘그분의 것, 그의 소유’라는 것을 밝혀줍니다.
한편, 예수님께서는 슬기롭게 대답하는 율법학자에게 “너는 하느님 나라에 가까이 와 있다”(마르 12,34)고 할뿐 ‘하느님 나라에 들어와 있다’고는 말씀하시지 않으십니다. 그것은 아마도 율법학자에게 있어서 아직 사랑의 실천이 남아있는 까닭일 것입니다. 그러나 더 근본적으로는 아직 더 확장되어야 할 사랑의 계명이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곧 <구약>의 ‘사랑의 계명’은 <신약>의 ‘사랑의 새 계명’으로 완성되어야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구약>에서는 ‘이웃 사랑’을 동포 사랑(레위 19,18)과 함께 사는 이방인들(레위 19,34)에 한정시키고 있다면, <신약>에서는 무제약적, 무차별적인 이웃에 대한 사랑을 말하고 있으며(루가 10,30-37), 나아가서 원수까지도(마태 5,44) 포함하는 ‘완전한 사랑’을 말합니다(마태 5,48). 또 <구약>에서는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레위 19,18)하여 ‘이웃 사랑’의 시금석으로 ‘자신에 대한 사랑’을 제시하고 있는 반면에, <신약>에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요한 13,34;15,12)하여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웃사랑의 시금석으로 제시하고 있습니다. 더 나아가서 근본적으로, 예수님께서는 <신명기>(6,4-5)의 ‘하느님 사랑’과 <레위기>(19,18)의 ‘이웃 사랑’을 한데 묶으시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관점을 요구하십니다. 곧 새로운 변혁, 새로운 틀의 패러다임을 요구하십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는 관점입니다. 아니, 애시 당초 ‘남’이란 없다는 관점입니다. 그것은 오직,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는 ‘한 몸’이 있을 뿐! 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자매가 있을 뿐이라는 관점입니다.
우리가 ‘한 몸’이라는 바로 이러한 관점에서야, 이웃도 내 몸처럼 사랑하게 됩니다. 그래서 이웃 사랑은 흔히 생각하는 남에게 베푸는 시혜나 자선이 아니라, 바로 ‘한 몸’으로서의 자기 자신에 대한 사랑과 같아집니다. 물론, 이 때 ‘한 몸’이란 ‘너의 몸이 나의 몸이고 나의 몸이 너의 몸’이라는 암수동체와 같은 혼합체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요한 바오로 2세 교종께서 [새 천년기](24항)에서 표현한 대로, “나의 일부”인 형제들이란 뜻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곧 ‘한 몸의 지체’로서, 나와 ‘한 몸’을 이루고 있는 나의 일부이기에, 나의 일부인 형제의 아픔이 바로 나 자신의 아픔이 되는 것을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형제가 나의 일부이듯 하느님의 일부가 되고, 형제 사랑이 곧 하느님 사랑이 되고, 하느님 사랑이 곧 형제 사랑이 됩니다.
이처럼 ‘사랑의 이중계명’은 새로운 관점, 새로운 틀을 요구합니다. 곧 ‘남’인 이웃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인 이웃을 사랑하는 것으로의 전환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사랑의 소명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마르 12,31)
주님! 당신 사랑으로 새로 나게 하소서!
내 자신을 통째로 바꾸어 새로워지게 하소서!
이웃을 타인이 아니라, 내 자신으로 사랑하게 하소서.
그의 아픔을 내 아픔으로, 그의 기쁨을 내 기쁨으로 삼게 하소서.
이웃 안에서, 주님이신 당신을 섬기게 하소서.
주님! 이웃을 남으로 보지 않게 하소서!
아버지 안에 있는 한 형제가 되게 하소서.
사랑이 남에게 베푸는 시혜가 아니라
한 몸인 내 자신에 대한 사랑이 되게 하소서.
자신의 몸인 이웃을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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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7.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LA 신문홍보 마지막 날은 ‘재의 수요일’이었습니다. 프란치스코 한인성당으로 미사를 갔습니다. 프란치스코 성당은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신부님이 사목하는 성당입니다. 미사 전에 신부님은 수녀님과 함께 성무일도를 하였습니다. 교우 분들도 함께 하였습니다. 운율에 맞추어서 성무일도를 하는데 마치 천상의 소리 같았습니다. 신부님과 수녀님이 성무일도를 하는데 교우 분들이 자발적으로 함께 하였다고 합니다. 고급 음식점에서 본 음식을 먹기 전에 전식을 먹듯이 미사 전에 성무일도를 하니 미사의 분위기가 더 그윽하게 느껴졌습니다. 미사 전에 성직자와 수도자 그리고 교우들이 함께 성무일도를 한다면 신앙생활의 멋과 맛이 더욱 깊어질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들은 왜 이 거친 광야로 왔느냐? 화려한 것들은 궁궐에 있지 않느냐?” 세례자 요한은 광야에서 ‘회개’를 촉구하였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거친 광야를 포기하고 화려한 궁궐에 머물 때 찾아오는 것 같습니다. 저는 미사 전에 하는 성무일도에서 ‘광야’를 보았습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호세아 예언자는 “아시리아는 이스라엘 백성을 구원하지 못한다.”고 말을 하였습니다. 아시리아는 무엇을 상징할까요? 그것은 부, 권력, 명예를 상징합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양다리를 걸칠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만 나의 희생과 나의 봉사는 원하지 않는 경우가 있습니다. 우리는 거룩해지기 보다는 행복해지기를 먼저 원하곤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택하여야 하는 것을 명확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 어머니는 아이가 밤새 울어도 짜증을 내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아파서 병원엘 가야 할 때도 불평하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연인을 위해서 먼 길 바래다주면서 기분나빠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몇 시간씩 공항 대합실에서 출장 갔다 오는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는 비행기가 연착되었다고 해서 지루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기다림은 설렘입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 했습니다. ‘사랑은 참고 기다립니다. 사랑은 친절합니다. 사랑은 불의에 기뻐하지 않고 진실을 두고 기뻐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덮어 주고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고 모든 것을 견디어냅니다.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계속됩니다. 이 가 가운데서 으뜸은 사랑입니다. 예전에 즐겨 들었던 노래가 있습니다. 제목은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입니다. 오늘은 그 노래를 함께 묵상하고 싶습니다.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당신의 삶 속에서 그 사랑 받고 있지요./ 태초부터 시작된 하느님의 사랑은/ 우리의 만남을 통해 열매를 맺고/ 당신이 이 세상에 존재함으로 인해/ 우리에게 얼마나 큰 기쁨이 되는지/ 당신은 사랑 받기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지금도 그 사랑 받고 있지요”
우리가 선택해야 할 것은 ‘온 마음과 온 정성과 마음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고 우리의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모든 율법서와 예언서가 전해 주는 가장 큰 가르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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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7.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뉴욕 타임스 베스트셀러 1위에 오른 곤도 마리에의 ‘정리의 힘’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곤도 마리에는 세계 최고의 정리 컨설턴트로 유명한데, 정리하지 못함을 ‘버리기’를 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솔직히 옷장, 책상 서랍, 책꽂이에 있는 것들을 과감하게 버리기란 쉽지 않습니다. ‘살을 조금만 빼면 이 옷을 입을 수 있을 텐데….’라는 마음으로 옷장에 고이 모셔둔 옷 중에는 20년도 더 넘은 것도 있었습니다(다행히 성김대건성당으로 오면서 드디어 버렸습니다). 책도 그렇습니다. ‘언젠가는 읽을 거야.’라는 마음으로 책꽂이 안에서 먼지가 쌓은 채 있기도 하지 않습니까?
곤도 마리에는 옷걸이에 걸린 옷, 서랍 안에 들어 있는 것, 신발장에 놓은 신발 등 모든 물건을 꺼내서 바닥에 쏟아버리라고 합니다. 산더미처럼 쌓인 물건을 바라보면 그렇게 귀하게 보이지 않게 되고, 내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내게 필요한 것을 찾으라고 합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옷을 사지 않듯이 사이즈가 맞지 않는 옷 등은 과감하게 선택에서 제외하고, 책 역시 지금 사지 않을 것 같은 책을 선택에서 제외하라는 것입니다.
머리가 복잡할 때가 있습니다. 이것도 해야 하고 저것도 해야 하고…. ‘언젠가는 해야 하는데….’라면서 계속 후회할 일이 늘어날 뿐이었습니다. 생각을 정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때로는 생각을 한군데에 쌓아둘 필요가 있습니다. 차마 버리지 못한 생각, 내가 선택하지 않을 생각을 버려야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가 분명해집니다. 죽어도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되는 문제를 선택하지 않겠지요. 순간의 만족만을 위해 큰 비용을 치러야 하는 것도 선택하지 않을 것입니다. 물질적인 선택보다 영적인 선택의 중요성도 알게 됩니다.
주님께서도 당시 사람들의 이런 복잡한 상태를 잘 아셨던 것 같습니다. 수많은 계명의 홍수 속에서 어떤 것을 우선순위에 두어야 하는지를 몰랐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주 명확하게 그리고 아주 간단하게 정리해주셨습니다. 그것도 딱 두 개로 말입니다. 즉,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사랑을 먼저 생각하면, 지금 무엇을 해야 할지가 분명해집니다. 그리고 사랑의 계명에 충실한 사람만이 “하느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복잡한 마음으로 힘들어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 마음을 주님 앞에 모두 내려놓으십시오. 그리고 그 마음 중에서 사랑의 실천에 해당하는 것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때 마음의 평화와 함께, 하느님 나라를 체험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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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당히 일하고 좀 더 느긋하게 쉬어라. 현명한 사람은 느긋하게 인생을 보냄으로써 진정한 행복을 누리는 것이다(그라시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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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7. 사순 제3주간 금요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회개의 은총, 회개의 축복, 회개의 여정
-경천애인(敬天愛人)-
파스카의 계절, 회개의 계절, 사순시기 봄입니다. 인동초(忍冬草)처럼 겨울 추위를 이겨낸 파스카의 봄꽃들이라 저리도 청초한가 봅니다. 일찍 피는 파스카의 봄꽃들은 유난히도 희망을 상징하는 노란색이 많습니다. 민들레, 꽃다지, 개나리, 수선화, 의사리, 산수유 등 모두가 노란색입니다.
엊그제 맨처음 발견한, 때되어 늘 거기 그 자리에서 피어난 꼭 1년만에 피어난 샛노란 민들레꽃이 참 반가웠습니다. 민들레꽃하면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생각나는 두편의 시입니다. 당시 써놓고 크게 위로를 받았던 민들레꽃에 관한 시입니다.
“민들레꽃
외롭지 않다
아무리
작고 낮아도
샛노란 마음
활짝 열어
온통
하늘을 담고 있다.”-2000.4.24.
흡사 회개의 표징처럼 보이는 하늘을 가득 담고 있는듯한 청초한 샛노란 민들레꽃입니다. 아마 하늘을 가득 담고 있는 회개한 영혼보다 아름다운, 행복한 영혼은 없을 것입니다.
“어!
땅도 하늘이네
구원은 바로 앞에 있네
뒤뜰 마당
가득 떠오른 샛노란 별무리
민들레꽃들!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 수 있겠네”-2001.4.16.
저절로 회개의 축복으로 이끄는 회개의 표징같은 파스카의 봄꽃 민들레꽃입니다. 제 주변에는 땅에서도 하늘의 별처럼 살아가는 꽃같이 아름다운 회개한 영혼들이 참 많습니다. 엊그제 받은 감미로운, 강렬한 회개의 표징처럼 느껴지는 카톡 편지에 감동했습니다. 내용이 봄꽃처럼 향기롭고 아름다워 거의 전문을 인용합니다.
“주옥같은 신부님의 말씀으로 하루를 엽니다. 감사합니다. 실시간으로 신부님의 말씀을 받아 읽으니 말씀이 살아계신 듯 하루종일 제 마음속에 살아 움직임을 느낍니다. 맨처음 신부님과 면담 때가 생각나네요. 온몸이 귀가 되신 듯, 저의 말을 경청해주시는 신부님의 모습 그자체로 놀랐고, 저의 힘든 마음에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얼마전 피정갔을 때도 생각이 나네요. 짙은 안개가 낀날 아침, 신문을 가지고 걸어오시며, 노래를 부르시는 신부님 얼굴과 모습에서 풍겨나오는 기쁨이, 마주쳤던 저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어요. 한폭의 그림처럼 기억이 되요. 신부님 감사합니다.”
정말 파스카의 봄꽃처럼 아름답고 감동적인 진솔한 편지입니다. 아름다움이 우리를 감동케하고 회개에로 이끌어 아름다움 자체이신 하느님을 만나게 합니다. 오늘 제1독서 호세아 예언서에 나오는 회개한 영혼과 회개의 축복은 얼마나 아름답고 감동적인지요! 호세아서의 마무리가 해핀엔드로 끝납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오늘 우리의 회개를 촉구하는 주님의 말씀입니다.
“이스라엘아, 주 너희 하느님께 돌아와라. 너희는 죄악으로 비틀거리고 있다. 너희는 말씀을 받아들이고, 주님께 돌아와 아뢰어라. ‘죄악은 모두 없애주시고, 좋은 것만 받아 주십시오. 이제 저희는 황소가 아니라, 저희 입술을 바치렵니다. 아시리라는 저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
회개에 응답해 하느님께 돌아온 영혼들에게 쏟아지는 다음 하느님의 축복이 참 놀랍고 감미롭습니다. 호세아 예언자는 하느님 사랑에 정통한 사랑의 신비가이자 사랑의 시인입니다. 회개한 영혼들이 바로 그러합니다. 말그대로 회개의 축복입니다.
“그들에게 품었던 나의 분노가 풀렸으니, 이제 내가 반역만 꾀하는 그들의 마음을 고쳐 주고, 기꺼이 그들을 사랑해 주리라. 내가 이스라엘에게 이슬이 되어 주리니, 이스라엘은 나리꽃처럼 피어나고, 레바논처럼 뿌리를 뻗으리라. 이스라엘의 싹들이 돋아나, 그 아름다움은 올리브 나무 같고, 그 향기는 레바논의 향기 같으리라.”
바로 회개한 영혼들의 아름다움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예언자의 글이 참 감동적입니다. 그대로 회개한 영혼들에게 쏟아지는 이 거룩한 미사은총을 상징합니다. 참으로 회개한 영혼들에게 선사되는 회개의 축복이 분별의 지혜임을 다음 결론같은 말씀이 알려 줍니다.
“지혜로운 사람은 이를 깨닫고, 분별있는 사람은 이를 알아라. 주님의 길은 올곧아서, 의인들은 그 길을 따라 걸어가고, 죄인들은 그 길에서 비틀거리리라.”
지혜로운 사람, 분별있는 사람이 바로 의인입니다. 의인들은 주님의 길, 올곧은 길을 따라 걸어갑니다. 바로 사랑의 길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오늘 복음의 사랑의 이중계명입니다. 참으로 회개한 영혼들에게 뚜렷이 부각되는 사랑의 이중계명, 경천애인의 진리입니다. 주님 친히 말씀하십니다. 첫째가는 계명을 물었는데 하나가 아닌 둘을 제시합니다.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습니다. 정말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 본질적으로 추구할 일은 회개와 더불어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의 실천일 뿐입니다. 회개와 경천애인하기에도 턱없이 짧은 세월인데 우리는 얼마나 많이 헛된 것들에 시간을 탕진하며 삶의 길을 잃고, 삶의 중심을 잃고, 삶의 의미를 잃고, 삶의 목표를 잃고, 삶의 방향을 잃고, 자기를 잃고, 바로 하느님을 잃고 무지와 허무속에 뿌리없이 방황하고 표류하며 살아가는 지요!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닐 것입니다.
정말 불행이자 비극은 하느님과 자기를 잃고 지내는 무지와 허무의 헛된 삶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은회개를 통해 사랑의 하느님을 만나는 길뿐입니다. 하루하루 '참으로 사는 일'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바로 부단한 회개를 통해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아는 겸손과 지혜의 삶이겠습니다. 회개와 더불어 온마음으로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몸처럼 사랑하는 것이겠습니다.
파스카의 봄철, 은총의 사순시기요, 눈만 열리면 곳곳에서 발견되는 회개하여 당신께 돌아오라는 회개의 표징들입니다. 회개의 은총, 회개의 축복, 회개의 여정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경천애인의 실천으로 입증되는 회개의 진정성입니다.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한결같이 회개의 여정, 사랑의 여정에 충실하도록 도와 주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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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0317. 사순 제3주간 금요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모든 사람은 사랑 때문에 살아간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 사랑의 대상이 각기 다르겠지만 사람은 사랑 때문에 살아갑니다.
사랑의 대상은 다양합니다. 가족, 돈, 명예, 권력 등입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 사랑의 대상은 하느님 한 분이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전에 어떤 피정에 참여한 적이 있습니다. 피정 중에 이런 제목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 찾기’
당연히 하느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찾기도 전에 머릿속으로 ‘내가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밖에 없어.’라고 단언했습니다.
그런데 하루를 찾고, 이틀을 찾고, 사흘을 찾아보니 점점 하느님이 아닌 다른 많은 것을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하느님보다 더 사랑하고 있다는 것 또한 느끼게 되었습니다.
말은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하지만 제가 찾은 것들이 제 곁에 없고 하느님만 남는다고 하니 슬픔과 공허함이 밀려왔습니다. 왜냐하면 진짜로 사랑하는 것은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독서는 말합니다.
‘저희 손으로 만든 것을 보고 다시는 하느님이라 하지 않겠습니다.’
독서의 말씀이 맞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우리는 하느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것, 그리고 우리에게 주신 것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그것을 하느님 자리에 올려놓고 경배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혹시 하느님 자리에 다른 것, 즉 다른 사랑하는 것이 하느님 자리를 차지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오늘은 한번 찾아보세요. 대충 머리로 찾지 말고, 깊은 마음속에서 찾아보세요. 내가 진짜 사랑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것이 하느님 자리에 앉아 우리를 지배하고 있지는 않은지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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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 입은 굴이 진주를 만든다.
조개의 몸 속에 이물질이 들어가면 조개는 그것을 녹이려 체액을 분비하는데 이물질에 조개의 분비물이 계속 쌓이면서 진주가 된다고 합니다.
오랜시간, 제 몸 속의 이물질과 싸우면서 고통을 참아낸 조개가 그토록 귀하고 아름다운 진주를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런 말을 자주 합니다.
‘고통 중에 하느님의 은총이 있다.’
고통은 우리를 기도하도록 이끌어줍니다. 고통은 우리의 한계를 보게하고 하느님 앞에 겸손하게 합니다. 고통은 더욱 우리 영혼을 단단하게 만들어 하느님 앞에서 우리를 빛나게 합니다.
조개가 진주를 만들어 내듯이, 우리도 우리의 고통 속에서 하느님 성전에 드릴 보석에 태어나기를 희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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