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탄생
-서울 풍경 44
최서림
내 아내가 초등 1학년 때 광안리서
톰 소여랑 놀 때
청도서 나는 글자도 몰랐다.
내 아내가 마크 트웨인, 빅터 위고랑 여름을 피할 때
나는 붕어, 피라미, 물새알과 더불어
개천에서 방학을 홀라당 까먹었다.
서울 올라와 내 아내는 밤샘하는 카피라이터가 되고
나 역시 먼 길을 돌고 돌아 밤을 지새우는 시인이 되었다.
나를 시인으로 만든 것은 눈 내리는 겨울밤이 아니다.
아마릴리스 같은 여자와의 달콤하고 부드러운 키스가 아니다.
그녀의 머리칼에 떨어지던 윤중로의 벚꽃도 아니다.
공룡 같은 대학도 고라타분한 시론 강의도 아니다.
국민소득 2만 불도 아니다. OECD도 아니다.
나를 시인으로 키운 건
초등학교도 못 나온 내 아버지와 어머니다.
나를 들판의 망아지처럼 풀어놓은 아버지와 어머니다.
나를 찔레 같은 시인으로 단련시킨 건
유신헌법과 긴급조치, 청춘의 분노와 좌절, 패배주의
긴장되고 졸아있던 방위병 생활, 5.18
서울의 봄, 최루탄, 마르크스, 성경, 촛불
중이염, 페니실린 쇼크, 짝사랑과 반복된 이별
불면증, 노숙, 지하방이다.
나를 무늬만 시인으로 만들지 않는 것은
아내의 끊이지 않는 잔소리와 걱정이다.
이 땅에서 먹고 살아남기의 문제이다.
미친 전세 값, 학원비, 큰 아이 대입, 노후 걱정이다.
- 2014년 <애지> 여름호
** 최서림 시인
1993년 <현대시> 등단
시집<이서국으로 들어가다> <유토피아 없이 사는 법>
<세상의 가시를 더듬다> <구멍> <물금> <버들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