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자각과 소명
갈라 5,18-25; 루카 11,42-46 / 연중 제28주간 수요일; 2024.10.16.
오늘 미사의 독서와 복음에서 들으신 말씀의 초점 가운데 하나는 자유입니다. 복음에서는하느님께서 인간에게 허락하신 자유를 남용하는 바리사이들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불행하리라고 경고하셨고, 독서에서는 사도 바오로가 자유를 악용하는 죄의 목록과 함께 자유를 선용하여 맺을 수 있는 성령의 열매에 대해 권고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또 다른 바리사이들은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불륜, 더러움, 방탕, 우상 숭배, 마술, 적개심, 분쟁, 시기, 격분, 이기심, 분열, 분파, 질투, 만취, 흥청대는 술판 등 사도 바오로가 활약하던 당시 로마제국 현실에서 발견되었던 죄들은 요즘 우리의 현실에서도 아주 쉽게 확인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아마 부동산 투기, 압수수색 남용, 괴상한 판결 같은 현대판 죄들이 더 추가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그 반면에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의인들에 대한 소식은 좀처럼 듣기 어렵습니다. 이제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작심하신 듯 평소에 바리사이들의 위선적 행태에 대해서 느끼고 계셨던 바를 털어놓으셨습니다. 바리사이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으며, 하늘 나라의 문을 잠가 버리고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음은 물론 들어가려는 이들마저 들어가게 놓아두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과부들의 가산을 등쳐 먹으면서 남에게 보이려고 기도는 길게 하고, 개종자를 얻으려고 애쓰다가 한 사람이 생기면 자신들보다 갑절이나 못된 지옥의 자식으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하느님의 성전을 두고 한 맹세를 헛되이 하면서 성전 제단 위에 놓인 예물을 두고 한 맹세는 지켜야 한다고 하고, 율법의 정신은 소홀히 하면서 소소한 율법 규정에 집착하였습니다. 겉으로 깨끗한 척 하면서 마음속에는 탐욕과 방종으로 가득 차 있으며, 과거의 예언자들을 칭송하면서 현재의 예언자를 박해하였습니다.
루카는 마태오가 자신의 복음서 23장에서 이렇게 여덟 가지나 나열했던 악행과 불행에 대한 선언을 여섯 가지로 줄여서 보도했는데, 오늘 복음에는 그나마 네 가지만 나왔습니다. 그 첫째는 십일조를 낸다는 핑계로 의로움과 하느님 사랑을 아랑곳하지 않는 불경의 죄요, 그 둘째는 겸손하지 못하여 윗자리를 좋아하고 인사하기보다 받기를 좋아하는 교만의 죄요, 그 셋째는 드러나지 않은 무덤처럼 부패한 인간성을 감추고 있는 위선의 죄요, 그 넷째는 지식의 열쇠를 쥐었으면서도 하늘나라의 문을 열어 주기는 커녕 잠가 버리고는 자신들도 들어가지 않으면서 율법을 다 지켜야 한다는 짐을 사람들에게 터무니없이 지워 놓음으로써 천국을 가로막은 구원방해죄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당대의 유다교 지도층으로 자처했던 바리사이들을 위선적이라고 비판하신 만큼 그들도 그분을 율법을 모독한다고 미워했습니다. 그런 사람들 중에 사울도 섞여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울은 예수님을 믿는 이들을 주저없이 박해하려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박해자 사울이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 벼락을 맞아 고꾸라지는 극적인 체험을 하고 나서 모든 것이 달라졌습니다. 고뇌에 고뇌를 거듭하고 사색에 사색을 거듭했던 14 년 동안 그는 자신에게 나타나신 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이셨음을 깨달았을 뿐만 아니라 그제껏 자신의 동지들이었던 바리사이들의 이 같은 죄상에 대해서도 처절하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철저하게 행위로 회심하기로 작정하고 사도로서 새 인생을 출발했으며, 자신의 이 깨달음을 선교사로서 갈라티아 공동체의 교우들에게도 주저없이 권고하였습니다. 사랑과 기쁨, 평화와 인내, 호의와 선의, 성실과 온유 그리고 절제 같은 성령의 열매가 아닌 육의 열매인 것이 자명한 죄의 목록 즉, 불륜과 방탕, 우상숭배와 도박, 분쟁과 시기, 분열과 만취 등을 나열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입니다.
사도로서 바오로는 기성 사도단의 수하들이 제멋대로 갈라티아 지방의 공동체들을 헤집고 다니면서 유다교식 할례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다니는 바람에 생겨난 소동을 수습하느라 편지를 썼지만, 이 참에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그는 성령의 열매와 같은 평소의 가르침을 상기시킴으로써 갈라티아 교우들의 신앙을 한 단계 더 성숙시키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그는 이 편지에서 그리스도인의 자유에 대한 소신을 털어놓았습니다. 자유는 죄로부터 떠나서 성령의 열매를 맺는 은총입니다. 바리사이적 위선이 아니라 십자가로 부활하는 은총을 하느님 앞에서 이행하는 책임입니다. 그래서 그는 비록 갈라티아 교우들이 신참 신앙인들이기는 하지만 율법에 얽힌 고질적인 유다교의 폐습을 아예 가르치지도 않았으며, 기성 사도단의 수하들이 훼방 놓는 수작을 그냥 보고 있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신앙이 주는 성숙한 자유를 가르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여느 편지에서와 달리 자신이 사도가 되기까지 겪었던 고뇌와 사색을 간추려 들려주면서(갈라 1,11-24), 기껏 죄를 저지르지 않도록 제정되었던 율법의 노예가 되지 말고(갈라 4,1-7) 성령을 통하여 믿음으로 의로워져서 사랑으로 행동하는 믿음을 배우기를 간절히 호소하였습니다.(갈라 5,5-6)
그렇게 살면 성령께서 귀하고 좋은 덕행의 열매를 맺어 주실 것이라고 훈계하였습니다.(갈라 5,22-23) 즉, 성령의 열매는 사랑, 기쁨, 평화, 인내, 호의, 선의, 성실, 온유, 절제인데, 율법에서는 권장하지도 않는 이러한 덕행을 막는 법은 세상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향주삼덕(向主三德)에다가 지혜와 용기를 추구하고 절제하며 정의를 구현하는 사추덕(四樞德)을 실천하는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주변 이웃들이 느끼는 그리스도의 향기를 아주 구체적으로 열거해 놓은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이, 특히 지식에 있어 더 혜택을 받은 이들과 재산에 있어 안정을 찾은 이들이 이러한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뿜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그리하여 지식인들의 빛이 되고, 중산층의 모범이 됨으로써 순교자들의 후손답게 우리 나라를 동방의 빛으로 빛나게 하면 좋겠습니다. 지식과 재산은 믿음과 사랑의 도구로 쓰일 때 비로소 우리 자신은 물론 주변 이웃과 사회 전체가 행복을 누릴 수 있게 해 주는 축복이 됩니다. 이것이 참된 자유입니다.
교우 여러분!
자유를 자각하는 힘은 인간이 하느님을 닮아야 하는 존재라는 깨달음에서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자유를 자각하신 분이셨고 우리에게 당신을 본받아 진정한 자유인으로 살아가라는 소명을 주셨습니다. 죄를 짓는 자는 마귀의 종이 됩니다. 악을 피하고 선을 향하여 나아가는 사람만이 자유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