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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경훈목사의 설교 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마경훈목사
예수님의 부활과 나의 부활 고린도전서 15:1-4
(설교자: 마경훈목사, 비전교회)
인류의 가장 오래되고 큰 건축물들이 대개 무덤이라는 글을 읽었습니다. 세상에는 큰 무덤들이 많습니다.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중에 쿠푸의 피라미드는 약 4,500년 전에 만들어졌는데, 평균 25톤이 되는 돌을 230만개 쌓아서 만들었답니다. 놀랍지 않습니까? 중국 시안에 가면 병마용이라고 있습니다. 진시황의 능입니다. 진시황의 능은 너무나 커서 아직도 다 발굴하지 못했습니다. 무덤을 지키는 용도로 사람 크기의 군사를 흙으로 만들었는데 약 7,000개나 됩니다. 수백 개의 마차와 가마도 들어있습니다. 인도의 타지마할은 세계에서 제일 아름다운 무덤으로 불립니다. 무굴제국의 샤한 왕이 죽은 왕비 마할을 기리기 위해 지은 무덤인데, 일꾼 2만 명을 동원하여 22년간 지었답니다. 거기에 비하면 우리 주님의 무덤은 별 볼일 없습니다.
예수님의 무덤으로 추정되는 곳이 두 곳입니다. 하나는 성묘교회라는 곳에 있습니다. 예루살렘의 비아돌로로사라는 곳이 있습니다. '슬픔의 길'이라는 뜻입니다. 그 길은 예수님이 빌라도 법정에서 선고를 받은 이후 십자가에 못 박혀 장사지낸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 놓은 800m 정도 되는 순례 길입니다. 지금은 그 길이 거의 시장입니다. 그 길 마지막에 성묘교회가 있습니다. 그 교회 입구에는 예수님이 누우셨다고 하는 침대처럼 생긴 길고 평평한 돌이 있습니다. 그곳에 방문한 사람들은 대부분 그 돌을 붙잡고 기도합니다. 입구에서 왼쪽으로 돌아가면 돌무덤이 있는데 그 바위는 마치 불에 탄 것처럼 지저분하고 볼품없습니다.
또 하나는 정원무덤입니다. 작은 산 아래 있는 무덤인데 그곳의 정원은 아름답지만 예수님이 묻히실 때의 모습은 아닙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곳이 히브리어로 ‘골고다’라고 합니다. 라틴어로는 ‘갈보리’입니다. 뜻은 ‘해골의 곳’입니다. 정원무덤이 있는 곳 산의 바위가 해골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그 무덤은 바위를 파서 만든 무덤입니다. 들어가서 보니 작은 방만한 비어 있는 무덤입니다.
둘 중에 어느 무덤이 예수님의 진짜 무덤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제가 여기서 강조하고 싶은 것은 주님의 무덤은 크고 웅장하지 않고 화려하지도 않다는 것입니다. 주님의 무덤은 너무나 볼품없고 비어있습니다. 그 이유는 주님에게는 무덤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죽으신지 사흘 만에 부활하셨기 때문에 주님의 무덤은 크고 화려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교회가 주님의 무덤을 그렇게 꾸밀 필요도 없습니다.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오늘 설교는 부활에 관한 말씀입니다.
1. 네 종류의 부활이 있습니다.
성경에는 주님의 부활만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네 종류의 부활이 있습니다.
1)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죽은 자들 가운데 있었던 소수의 부활입니다.
성경에 보면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난 사건들이 몇 번 나옵니다. 우리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리고 우리가 기도하기를 원하시고 우리가 하나님께 기도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에 응답하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자신에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고 고백했습니다.
2)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우리 주님은 금요일에 십자가에서 죽으셨고, 주일 새벽에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신화가 아니라 역사적 사실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합니다. 예수님은 성경대로 죽으셨다가 성경대로 부활하셨습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며 진리의 책인데 성경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②예수님의 빈 무덤이 예수님의 부활의 증거입니다. 세상과 타종교는 무덤의 크기를 자랑으로 여기나 기독교의 자랑은 빈무덤입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셔서 승천하셨기 때문에 무덤이 중요하지 않습니다.
③예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진리만을 말씀하셨는데, 자신의 죽으심과 부활을 25회 이상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하신대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④제자들이 변화되어 새 사람이 된 모습이 부활의 증거입니다. 제자들은 주님께서 잡히시자 대부분 주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다. 그런데 나중에는 그들이 부활을 증거 하다가 목숨까지 버렸습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부활의 주님을 목격했기 때문입니다.
⑤초대교회의 설교의 내용이 부활의 증거입니다. 사도행전에는 예수님의 제자 사도들의 여러 편의 설교가 나옵니다. 그런데 그들의 설교는 언제나 죽음을 이기고 다시 살아나신 예수님을 증거 했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목격했기 때문에 그런 설교를 했던 것입니다. 부활을 목격하지 않은 사람들이 그렇게 목숨 걸고 부활을 외칠 수는 없습니다.
⑥이 세상의 역사도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⑦오늘날에도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적이 계속해서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성령으로 우리들과 함께 하시며 지금도 기적을 역사를 일으키고 계십니다.
여러분! 전원일기에서 복길이 역을 맡았던 김지영 배우를 아시죠? 그리스도인입니다. 김지영 자매가 교회 학교 선생님을 한 적이 있었는데, 한 아이가 물었습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신 거 사실이에요? 그걸 어떻게 증명해요?” 김지영 자매는 그 아이에게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지금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 바로 그 증거란다”
김지영 자매는 어려서부터 혈관이 엉겨 붙는, 이름조차도 알 수 없는 아주 희귀한 병을 앓았습니다. 혈관이 한 데 엉켜서 혈액 순환이 제대로 안 되었고, 몸은 늘 퉁퉁 부었습니다. 혈관이 심하게 뭉친 부분은 몸 밖으로 흉측하게 돌출되어 옷으로 항상 가리고 다녀야 했습니다.
지영자매가 17살 되던 해, 의사 선생님은 20살을 넘기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자매는 털썩 주저앉아서 소리 내어 울었습니다. 지영 자매는 그날부터 의사들의 실험대상이 되었습니다. 걸핏하면 수술대에 올라야 했고, 마취 속에서 고통스러운 신음 소리를 내며 깨어났습니다. 새로운 치료 방법이 나올 때마다 의사들은 그에게 시험해보며 그 반응을 살폈고, 그것은 곧바로 의학계에 보고되기도 했습니다.
지영 자매가 참을 수 없었던 것은 자신이 수술을 할 때마다 수술 동의서에 서명을 하는 부모님의 고통이었습니다. 수술 도중 위험이 있을 수 있지만 그래도 하겠노라고 서명을 하는 부모님의 눈은 빨갛게 타들어 갔습니다. 한 번은 미국에서 새로운 치료 방법이 들어왔다고 또 다시 수술을 권유하길래. “싫어, 싫어! 나 그냥 죽게 해줘!”라고 말했습니다. 그냥 그대로 모든 것이 끝나기를 원했습니다. 어서 빨리 하나님께서 자기를 데려가시기를 바랄 뿐이었습니다.
그날 해가 질 무렵 아버지의 발자국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날만큼은 슬픈 아버지의 눈을 보고 싶지 않았습니다. 지영자매는 눈을 감은 채 애써 잠을 자려고 했습니다. “지영아, 지영아 자니?” 지영 자매는 대답을 하지 않고 자는 척 했습니다. 그때 아버지는 “하나님, 우리 지영이 살려 주세요. 지영이 살려 주시면 저 하라는 대로 다 할게요.”라고 기도했습니다. 지영 자매는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아버지는 교회에 다니지 않을 뿐더러, 어머니와 지영자매가 교회를 갈 때마다 노발대발하며 화를 내시던 분이였으니까요. 그런 분이 하나님을 부른 것입니다. 지영자매는 알 수 없는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순간 잃어버렸던 희망이 솟아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가슴이 요동치기 시작했습니다. ‘살고 싶다. 정말 살고 싶다.’
자매에게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버지의 기도에 응답하셨습니다. 의사들이 포기했던 자매입니다. 스무 살까지 밖에 살지 못할 것이라고 했던 자매입니다. 자신도 자신의 삶을 포기했던 자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지영 자매에게 생명을 주셨습니다. 자매는 이렇게 간증합니다. “내가 살아난 것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나에게 베푸신 기적입니다.”
⑧오늘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사실이 부활의 확실한 증거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구약성경대로 토요일을 안식일로 지켰습니다. 그런데 초대교회는 안식 후 첫날인 일요일을 주일로 지켰습니다. 안식일이 주일로 변경된 것은 주님의 부활에 대한 확신에서 시작된 것입니다. 주일은 주님의 부활을 기념하는 것입니다.
③성령의 증거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확신합니다. 우리가 주님의 부활을 믿을 수 있는 이유는 성령님께서 우리 속에서 증거 해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직접 목격하지 못했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마치 본 것처럼 믿습니다. 그 이유는 성령께서 믿는 자 속에서 증거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확실합니다.
3) 예수님께서 재림하실 때 믿는 자들의 부활입니다.
주님은 구름타고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때 믿는 사람들은 부활하여 공중에서 주님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 때의 광경을 살전 4:16-17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17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 주님이 재림하실 때에 믿음 안에서 죽은 자들이 부활합니다. 그리고 그 때에 살아남은 믿음의 사람들은 부활한 사람들과 함께 공중으로 들림을 받아서 주님을 영접하게 됩니다. 주님은 우리를 부활시키신 후에 이 땅에 지상재림하십니다. 그 때 우리는 흰옷을 입고 흰말을 타고 주님과 함께 이 땅에 내려올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 천년 왕국을 통과하고 흰보좌 심판을 거친 후에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될 것입니다.
4) 최후의 심판 때 불신자들의 부활입니다.
부활의 시기에 관해서는 몇 가지 이론이 있습니다. 저는 천년왕국설에 대해서 역사적전천년설을 받아드리고 있습니다. 역사적전천년설은 천년왕국을 그리스도의 재림 이후에 있을 신자들의 천년왕국으로 봅니다.
부활에 관한 역사적전천년설의 입장은 그리스도의 재림 때에 의인들이 부활하고 천년 왕국 후에 악인들이 부활한다고 봅니다. 이것을 이중부활이라고 하는데 저는 이중 부활을 믿습니다.
고전 15:23-24을 보면 주님의 부활 외에 두 번의 부활 즉 이중 부활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24 그 후에는 마지막이니 그가 모든 통치와 모든 권세와 능력을 멸하시고 나라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칠 때라” 여기서 마지막이 불신자들의 부활입니다. 그들의 최후는 어떻게 될까요? 단 12:2입니다. “땅의 티끌 가운데에서 자는 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깨어나 영생을 받는 자도 있겠고 수치를 당하여서 영원히 부끄러움을 당할 자도 있을 것이며” 불신자들은 부활하여 수치를 당하고 영원한 부끄러움을 당할 것입니다.
계 20:13입니다. “바다가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고 또 사망과 음부도 그 가운데에서 죽은 자들을 내주매 각 사람이 자기의 행위대로 심판을 받고” 여기 보면 천년왕국 이후에 백보좌 심판이 있는데, 그 때에 두 번째 부활 즉 악인들의 부활이 있습니다. 그들은 어떻게 될까요? 악인들은 부활하여 심판을 받고 영원한 지옥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곳은 끝없는 고통의 세계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을 합쳐도 지옥에서 잠간 받는 고통보다 약한 것입니다.
지옥이 존재하기 때문에 우리들은 예수님을 믿는 것입니다. 천국만 있고 지옥이 없다면 믿지 않아도 큰 상관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지옥이 분명히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믿는 것이 복입니다. 지옥을 면할 수 있는 길은 예수님을 믿는 것 외에는 다른 길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옥이 존재하기 때문에 전도해야 합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 나의 가족, 나의 친구, 나의 친척들이 지옥에 떨어지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면 전도해야 합니다. 전도는 최고의 선물입니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좋은 것을 소유했어도 죽으면 내 것이 아닙니다. 죽음 후에 천국과 지옥은 한 번 결정되면 변개할 수 없습니다. 영원한 것입니다. 전도는 지옥을 면하고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비결을 전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전도만큼 큰 선물이 없는 것입니다.
2. 예수님의 부활은 구원 받은 사람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이 구원 받은 사람과 무슨 관련이 있을까요?
1) 사람은 부활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사람은 복음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그런데 부활이 복음의 핵심이기 때문에 부활을 믿어야 구원받는 것입니다. 롬 1:2-4을 보겠습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3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약속입니다. 그 약속은 다윗의 혈통으로 나셨고 죽음 가운데서 부활하실 것에 관한 약속입니다.
고전 15장에서도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을 설명한 것과 동일한 설명을 합니다. 고전 15:1-2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전한 복음을 너희에게 알게 하노니 이는 너희가 받은 것이요 또 그 가운데 선 것이라 2 너희가 만일 내가 전한 그 말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였으면 그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으리라” 바울은 고린도교인들에게 복음을 전했고 고린도교인들이 복음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않으면 구원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복음이 무엇인지 고전 15:3-4에서 말합니다. “내가 받은 것을 먼저 너희에게 전하였노니 이는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4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복음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죽으시고 성경대로 살아나신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은 부활을 믿어야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2) 사람은 성령님의 능력으로 부활합니다.
사람의 육체는 죽으면 썩어서 흙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그 흙은 한 자리에 머물러 있기도 하지만 사방으로 흩어지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흙이 다시 모여서 부활체를 이루겠습니까? 사람으로는 불가능하지만 하나님에게는 가능합니다.
에스겔 37장에 보면 부활 사건이 나옵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권능으로 에스겔에게 임재하셨습니다. 그리고 성령으로 에스겔을 골짜기 가운데로 인도하셨습니다. 거기에는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습니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물으셨습니다.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 하나님께서 에스겔에게 그 모든 뼈들에게 대언하여 살게 하라고 하셨습니다. 이에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령을 따라 대언하니 뼈들이 움직이며 이 뼈, 저 뼈들이 서로 연결되었습니다. 그리고 뼈에 힘줄이 생기고 살이 오르며 그 위에 가죽이 덮였으나 그 속에 생기는 없었습니다. 마네킹처럼 사람의 모양이었으나 생명은 없었습니다. 에스겔이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 대언하니 생기가 그들에게 들어가 그들이 살아나고 일어나 서는데 극히 큰 군대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마른 뼈들도 극히 큰 군대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가지만 성령님께서 예수님을 부활시키신 것처럼 믿는 우리를 부활시키실 것입니다. 롬 8:11입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사람은 성령의 능력으로 부활합니다.
3) 부활 신앙의 증거는 삶의 변화입니다.
하바드 의대의 정신과 교수로 있는 로버트 콜리스라는 분의 연구결과입니다. 그는 사회에서 불리하게 태어난 사람들이 자기의 처지를 훌륭하게 극복하고 성공한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가졌습니다. 경제적으로나 환경적으로 열등한 상태에 있었지만 좋은 조건과 환경에서 태어난 사람들보다 더 성공한 비결에 대한 연구입니다. 콜리스 교수는 이들이 다른 사람들보다 내적인 힘이 강하다고 합니다. 그는 인터뷰와 조사를 통해 그들의 내적인 강한 힘의 원천이 예수님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남으로 내적으로 강한 사람이 되었고, 그 결과 사회적으로 분리한 환경을 극복했습니다. 그래서 사람은 주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런데 주님과의 만남은 사회적 성공보다 훨씬 큰 축복을 줍니다. 영생의 축복과 천국의 축복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만남은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입니다.
부활신앙을 가지면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믿으면 거듭나게 됩니다. 영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그리고 마음과 생각도 변화됩니다. 마음과 생각이 변화되기 때문에 삶 전체에 변화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본래 기독교 핍박자였습니다. 그런데 그는 다메섹 도상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 후에 그는 변화되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그는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진짜 부활을 믿으면 삶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4) 부활신앙의 증거는 죽음을 대하는 태도에서 나타납니다.
참된 그리스도인은 죽음이 절망이 아니라 소망입니다. 그 이유는 죽음 후의 세계와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행 23:6입니다. “바울이 그 중 일부는 사두개인이요 다른 일부는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이르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내가 심문을 받노라” 사도 바울은 자신이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로 말미암아 심문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부활의 소망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죽음 앞에서도 평안할 수 있는 것입니다.
저는 죽음 직전에 그리스도를 영접한 사람들을 봤습니다. 그들은 믿음을 갖게 되면서 죽음을 평안하게 맞이했습니다. 그분들이 평안할 수 있었던 것은 죽음 후에 들어갈 천국을 믿고 자신이 부활하여 그곳에 들어갈 것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죽음을 많이 봐왔습니다. 우리가 사랑했던 사람들 중에는 믿는 사람들도 있었고 믿지 않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믿는 사람들의 죽음을 과도하게 슬프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천국과 영생의 부활을 믿기 때문입니다.
양복임이라는 성도의 간증입니다. 어느 부활절에 친구의 손에 끌리다시피 해서 교회에 가게 되었습니다. 억지로 따라왔지만 자기가 왜 거기에 있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이미 신앙을 버린 지 오래되었습니다. 주님을 믿고 신앙 안에서 만난 남편이 넉 달 전 사고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너무너무 많이 사랑했는데, 그이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부부로 함께 산 세월이 겨우 일 년뿐인데’ 세상에 절망하고 자신에게 절망하고 그래서 삶이 끝나버린 듯 무척 괴로웠습니다. 결국 신앙을 버렸습니다. 만일 하나님이 계신다면 어떻게 이럴 수 있습니까? 친구와 교회에 들어갔을 때 자리는 벌써 꽉 차 있었습니다. 무슨 이유로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교회에 온 것일까? 그런데 그들의 모습은 밝아 보였습니다. 아무도 자기처럼 고통의 짐 같은 건 지고 있지 않는 것 같았습니다. 넓은 교회 안에서 안절부절 하는 건 오로지 자신뿐이었습니다. 찬송이 울려 퍼지자 친구는 양복임 성도의 손을 꽉 잡았습니다. 강단 위에 서신 분이 성경 요 11:25-26을 읽었습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순간 이상한 기류 같은 것이 양복임 성도를 감쌌습니다. 그 넓은 교회 안에 자기 혼자 있는 듯했고 눈앞은 캄캄해졌습니다. 두려워서 허공을 향해 두 팔을 휘저었습니다. 그때 다시 음성이 들렸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아니요, 전 믿을 수가 없습니다. 당신이 그 사람을 데려가지 않았습니까?’, ‘이것을 네가 믿느냐?’, ‘아니요, 그는 이미 죽었고 내 삶은 절망입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아니요.’, ‘이것을 네가 믿느냐?’ 물음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양복임 성도는 계속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런데 어찌된 영문일까요?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흐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겨우 한 마디 내뱉었습니다. “왜... 왜... 저를? 왜요?” 그때 한 빛이 다가와 양복임 성도를 감쌌습니다. 그리고 또 말씀했습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 순간 눈앞이 환해졌습니다. 그제야 알았습니다. 진정한 부활의 의미를! 그리고 눈과 코에서 흘러내린 물로 얼굴은 엉망이 되었습니다. 그때 양복임 성도는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습니다. 가슴속으로부터 솟아나는 큰 울림으로 몸을 주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말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짐이 사라져버렸어. 이제 괜찮아.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아.’ 자매는 주님이 살아계셔서 자기 사람들을 찾으신다는 것, 그렇게 자신을 사랑하신다는 것, 그리고 죽었던 주님이 살아계시니 남편도 죽은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습니다. 양복임 성도는 부활의 신앙을 통하여 남편의 죽음을 극복했습니다.
지용수 목사님께서 한국을 대표하는 유명한 부자를 15분 정도 만나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습니다만 그 분이 일본에 암 수술하러 가기 직전에 만났습니다. 목사님은 그분을 위해서 기도해 드리고 간단히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목사님께서 평소에 늘 묻고 싶었던 질문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질문 했어요. “회장님! 평안하세요?” 목사님은 그분의 대답을 평생 잊어버리지 못한답니다. 회장님이 목사님을 빤히 쳐다보면서 “평안이라뇨? 요즘은 아침에 눈을 뜨면 초조하고 불안하오. 요즘 아침에 눈을 뜨면 아주 초조하고 불안하오”라고 하더랍니다. 그분은 한국을 대표하는 재벌이었습니다. 그분은 여기 모인 우리가 가진 돈을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돈을 가진 분이셨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죽음이 두려웠던 것입니다. 그분은 죽음 앞에서 초조하고 불안했던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그리고 우리 자신의 부활을 믿습니다. 우리는 천국을 믿습니다. 그리고 믿는 자의 영생복락을 믿습니다. 우리는 곧 다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죽는 것이 아니라 자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이 천사장의 나팔 소리와 함께 공중에 강림하실 때에 죽었던 우리의 몸이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어 부활할 것입니다. 그리고 공중으로 들림 받아서 주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영원히 주님과 함께 하게 될 것입니다. 저를 따라합시다. “나는 주님의 부활을 믿습니다. 나는 믿는 자의 생명의 부활을 믿습니다. 나는 나도 생명의 부활을 하게 될 것을 믿습니다. 나는 영생복락을 믿습니다.”